파블로 네루다

파블로 네루다 연보 - 시, 사랑, 혁명

자크라캉 2006. 3. 22. 23:11
파블로 네루다 연보 - 시, 사랑, 혁명

권 미 선



파블로 네루다1904년 7월 12일 칠레의 파랄(Parral)에서 출생.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 성명은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 모랄레스(José del Carmen Reyes Morales). 어머니 성명은 로사 네프탈리 바소알토(Rosa Neftalí Basoalto). 네루다의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Neftalí Ricardo Reyes Basoalto). 8월 어머니 사망.

1906년 아버지는 테무코(Temuco. 칠레 남부의 작은 도시)로 이사. 재혼. 몇 년 후 네루다를 데려감. 네루다는 1921년까지 테무코에서 생활.

1910년 테무코 남학교(Liceo de Hombres) 입학. 1920년 중등과정 수료. 조숙한 네루다는 10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함.

1917년 7월 일간지 《아침》(La Mañana)에 「열중과 끈기」(Entusiasmo y perseverancia) 를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 첫 발을 내디딤.

1918년 테무코의 잡지에도 시를 발표.

1919년 잡지 《질주와 비상》(Corre-Vuela)에 시 13편을 발표. 아버지는 시인이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므로 여러 가지 가명을 사용함. 마울레(Maule) 백일장에서 3등으로 입상.



1920년 당시 테무코 여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던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 중남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여류 시인)을 알게 됨. 가브리엘라는 외롭고 수줍음 많은 청년 네루다에게 시인의 길을 가도록 북돋아 주었음. 당시 미스트랄은 31살이고 네루다는 16살이었으나 두 사람은 시에 대한 열정으로 지속적인 우정을 나눔. 10월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로 결정함. 19세기 체코 시인 얀 네루다(Jan Neruda)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이런 필명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음. 테무코 백일장에서 1등으로 입상.

1921년 불어 선생님이 되려고 수도 산티아고로 유학. 사법학교에 입학. 외롭고 배고픈 학생시절을 겪으면서 보헤미안적인 삶을 영위. 10월 시 「축제의 노래」(La canción de la fiesta)로 칠레 학생연맹 콩쿠르에서 1등상 수상.

1922년 문학단체 브레미야(Vremia)에서 처음으로 자작시를 낭송.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발간되는 잡지 《시대》(Los Tiempos)에 시가 게재됨.

1923년 8월 첫 시집 『황혼』(Crepusculario) 출판. 사츠카(Sachka)라는 필명으로 학생연맹 기관지 《클라리닷》(Claridad)에 문학평론 등을 기고.

1924년 6월 자신의 연애 경험을 살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ón desesperada)출판. 섬세한 감성, 독창적인 이미지와 은유가 돋보이는 이 시집으로 네루다는 문명(文名)과 대중의 사랑을 한꺼번에 얻음. 지금도 가장 널리 읽히는 시집. 사범학교를 중퇴하고 시 창작에 전념. 시집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계가 어려워 아나톨 프랑스 시선집을 번역하는 등 여기저기에 글을 기고. 산티아고 일간지에 『스무 편의 사랑의 시...』 창작과정을 기술한 글을 발표. 네루다는 1974년 사후 출판된 『회고록』(Confieso que he vivido)에서 “청년 시절의 불타는 정열을 담고 있으며 [...] 흥건한 애상마져도 삶의 기쁨 속에 녹아있으므로 애착이 가는 시집이다”고 함.

1925년 문학지 《카바요 데 바스토스》(Caballo de Bastos)를 주관. 시집 『무한한 인간의 시도』(Tentativa del hombre infinito) 발표. 이 시집의 인쇄일은 1925년이고 출판일은 1926년.

1926년 토마스 라고(Tomás Lago)와 공저한 산문집 『반지』(Anillos) 출판. 단편소설 형식의 문집, 『삶과 희망』(El habitante y su esperanza) 출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불어판에서 중역.

1927년 여전히 수입은 적고 생계는 어려움. 6월 14일 미얀마 양군 주재 명예 영사로 임명.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스본, 마드리드, 파리, 마르세이유를 경유하여 랑군에 도착. 월급이 없는 명예직이었으므로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림. 조시에 블리스(Josie Bliss)를 만나 동거함.

1928년 스리랑카 콜롬보 주재 영사. 조시에가 찾아왔으나 영원히 헤어짐. 이 시기 네루다는 빈곤, 식민잔재, 정치적 탄압으로 질곡받는 동남아 민중들의 고난한 삶이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삶과 같아서 동질감을 느낌. 네루다의 유명한 여성 편력이 고독과 가난의 산물이라면 반독재, 반제국주의 등 좌파적 성향은 이러한 현실 세계의 체험에서 유래함.

1929년 인도 캘커타에서 개최된 범힌두교 회의에 참석. 네루와 면담.



1930년 자카르타(당시 네델란드령 서인도제도의 수도)주재 영사. 이곳에서 마리아 안토니에타(María Antonieta Hagenaar Vogelzanz)와 사랑에 빠져 12월 결혼. 이 여자는 네델란드 출신으로 스페인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음.

1931년 싱가포르 주재 영사.

1932년 두 달간의 여행 끝에 귀국.

1933년 그동안 발표했던 시를 모아 1월에는 『열심히 돌을 던지는 사람』(El hondero entusiasta)을 출판하고 4월에는 또 하나의 명시집 『지상의 거처 (1925~1931)』(Residencia en la tierra)를 발간. 초현실주의의 영향은 받은 이 시집은 전통적인 리듬과 시형식을 거부하고 문장 구조마져 파괴한 실험적인 작품. 네루다는 이러한 형식을 통해 무질서, 부패, 소외, 불안을 표현하려고 함. 8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영사로 부임. 그 때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던 스페인 시인이자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와 친분을 맺음. 이후 가르시아 로르카는 네루다의 시를 소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1934년 5월 스페인 바르셀로나 영사로 임명. 10월 마드리드에서 딸 말바 마리나(Malva Marina) 출생. 12월 6일 가르시아 로르카의 주선으로 마드리드 대학에서 시 낭송회개최.

1935년 2월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부임. 라파엘 알베르티(Rafael Alberti),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ández) 같은 스페인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공산당에 가입. 4월 『스페인 시인들이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치는 시집』이 출판됨. 네루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스페인 바로크 시인 케베도(Quvedo)의 시집 『죽음의 소네트』(Sonetos de la muerte)와 비야메디아나(Villamediana) 백작의 시집이 호화 양장판으로 출판됨. 9월 『지상의 거처』(1925-1935)를 두 권으로 발간.

1936년 7월 18일 스페인 내전 발발. 네루다는 공개적으로 공화파를 지지함. 수많은 시인, 작가, 문인들 또한 공화파를 위해 투쟁. 8월 프랑코(Franco) 장군 지지파는 그라나다에서 가르시아 로르카를 암살함. 폭격으로 마드리드 영사관 폐쇄. 네루다는 파리로 건너가서 낸시 큐나드(Nancy Cunard)와 함께 잡지 《세계의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을 지지한다》(Los poetas del mundo defienden al pueblo español) 발간. 마리아 안토니에타와 결별. 아르헨티나 출신의 델리아 델 카릴(Delia del Carril)을 만나 결혼.

1937년 4월 세사르 바예호(César Vallejo)와 함께 〈대스페인 원조 중남미 단체〉(Grupo Hispanoamericano a Ayuda a España) 설립. 10월 칠레로 귀국하여 〈문화 창달을 위한 칠레 지식인동맹〉창설. 11월 시집 『가슴 속의 스페인』(España en el corazón) 발표.

1938년 〈스페인 공화국 지지 작가회의〉가 스페인 현지에서 개최됨. 아버지와 양어머니 별세. 8월 잡지 《칠레의 여명》(Aurora de Chile) 주간. 10월 칠레 인민전선(Frente Popular) 후보 페드로 아기레 세르다(Pedro Aguirre Cerda)가 대통령에 피선되자 모임을 개최하고 행사시를 낭송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지원. 바르셀로나 전선에서 마누에르 알톨라기레(Manuer Altolaguirre)가 『가슴 속의 스페인』을 발간. 공화파 군인들은 이 시집을 읽고 가슴이 에이고 목이 메었다고 함.

1939년 파리에 본부를 둔 스페인 망명단체 특별 영사로 임명. 연말에는 스페인 망명자들과 함께 위니펙(Winnipeg) 호에 승선, 칠레를 향해 출발.



1940년 1월 2일 칠레 도착. 스페인 비평가 아마도 알론소(Amado Alonso)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파블로 네루다의 시와 문체』(Poesía y estilo de Pablo Neruda) 출판. 이 에세이는 파블로 네루다 연구의 고전. 8월 16일 멕시코 시티 주재 총영사로 부임. 환영 리셉션장에서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의 하얀 와이셔츠 깃을 붙들고 토를 달았던 일화는 유명함. 네루다는 이즈음 다음 세대를 이끌 시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중남미 대륙에 촉망받는 시인이 한 사람 있는데 안타깝게도 옥타비오 파스”라고 대답. 파스의 재능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지만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게 유감이라는 뜻이다.

1941년 멕시코 국립대학(UNAM)에서 『시몬 볼리바르에게 바치는 헌시』(Un canto para Bolíbar) 출판. 이 작품은 훗날 『지상의 거처 3권』에 수록됨. 과테말라를 여행하면서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를 사귐. 10월 멕시코 시티 근처의 쿠에르나바카에서 나치 추종자들에게 피습.

1942년 4월 쿠바 여행. 시 「스탈린그라드 찬가」(Canto de amor a Stalingrado)를 포스터로 제작하여 멕시코 전역에 부착. 네델란드에 살던 딸 말바 마리나 사망.

1943년 『칠레 총가요집』(Canto general de Chile)을 비매품으로 출판. 콜롬비아, 페루, 칠레에서 시선집이 출판. 2월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집단 시 낭송회 아메리카의 목소리(La voz de las Américas)에 참석. 멕시코, 파나마, 콜롬비아, 페루를 거쳐 칠레로 귀국. 가는 곳마다 정부와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 페루의 쿠스코에 들러 마추피추(Macchu-Picchu) 유적을 둘러보고 깊이 감동함.

1944년 산티아고 시문학상 수상. 뉴욕에서 비매품으로 시선집 발간.

1945년 타라파카(Tarapacá) 지역구 공화당 상원에 당선. 칠레 국가문학상 수상. 7월 8일 공산당 가입. 사웅파울루, 부에노스아이레스, 몬테비데오에서 시 낭송회와 강연회 개최. 9월 『마추피추 산정』(Alturas de Macchu-Picchu) 집필. 나중에 『총가요집』에 수록됨.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노벨문학상 수상.

1946년 1월 18일 멕시코 정부는 훈장(Orden Aguila Azteca)을 수여함. 칠레 대통령 선거전에서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Gabriel González Videla) 후보진영의 홍보책임자로 임명됨. 체코슬로바키아, 네델란드, 미국, 브라질에서 시집이 번역, 출판됨. 12월 28일 법원은 파블로 네루다로 개명을 선고함.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로사다 출판사에서 『지상의 거처 3권』(Tercera residencia) 출판(이후 로사다 출판사는 네루다 시집을 도맡아 발간). 이 시집은 『분노와 아픔』Las furias y las penas, 『가슴 속의 스페인』를 비롯하여 여러 작품을 수록. 네루다의 정치적 성향이 잘 드러난 시집. 10월 4일부터 검열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발간되는 일간지 《엘나시오날》(El Nacional) 에 ‘만인에게 보내는 호소문’(Carta íntima para millones de hombres)을 게재. 이 글에서 네루다는 좌파와 협약을 준수하지 않는 비델라 대통령을 비난함으로써 정치적 시련을 겪게됨.

1948년 1월 6일 상원 연설. 이 연설문을 『나는 고발한다』(Yo acuso)라는 제목으로 출판. 2월 3일 대법원은 상원의원직 박탈. 2월 5일 체포영장 발급. 국내에 은신하면서 『총가요집』을 저술하고 대정부투쟁을 함. 런던에서 발행되는 잡지 《아담》(Adam)은 네루다 특집호를 발행.

1949년 2월 24일 한밤중에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탈출. 배낭 속에는 『총가요집』 원고가 들어 있었음. 4월 25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1차 세계 평화 당원 대회에 참석. 6월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푸쉬킨 탄생 15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 7월 폴란드와 헝가리 방문. 8월 폴 엘뤼아르와 함께 멕시코를 방문했다가 병석에 누워 1연말까지 체류. 마틸데 우루티아(Matilde Urrutia)와 재회. 독일, 중국, 체코, 덴마크, 미국, 소련, 쿠바, 과테말라, 멕시코, 콜롬비아, 아르헨티나에서 시집 출판.



네루다와 아옌데1950년 멕시코에서 『우리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 출판. 라틴아메리카의 자연과 역사, 스페인 식민지배로부터 해방과 자유와 사회정의를 위한 민중의 투쟁을 그린 대 서사시로 네루다의 대표작. 멕시코 벽화가 다비드 시케이로스와 디에고 리베라가 삽화를 그림. 칠레에서도 지하 출판됨. 과테말라를 방문, 정부와 의회의 지원 아래 시낭송회와 강연회를 개최. 이어 프라하와 파리 방문. 10월 파리에서 프랑스 판 『총가요집』 출판을 승인. 로마를 거쳐 뉴델리를 방문하여 네루를 만남. 힌두어와 뱅갈어 등으로 시집 출판. 11월 마틸데 우루티아와 함께 바르사바에서 개최된 제2차 세계 평화 동지대회에 참석. 11월 22일 「깨어나라 나뭇꾼아」(Que despierte el leñador)로 국제평화상 수상. 이 때 피카소도 이 상을 수상했음. 멕시코에서 『총가요집』 보급판 출판. 미국, 소련, 중국, 시리아, 팔레스타인,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인도, 스웨덴에서 시집 출판.

1951년 이탈리아 전역을 순회하면서 로마, 밀라노, 제노바 등지에서 낭송회와 강연회 개최. 살바토레 콰지모도(Salvattore Quasimodo) 등을 주축으로 네루다 시세계에 대한 좌담회가 열림. 5월 모스크바 방문.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몽골을 거쳐 북경에 도착. 불가리아, 헝가리, 아일랜드, 베트남. 터키, 일본, 한국에서 시집 출판. 이디쉬어, 히브리어, 아랍어, 우즈베크어, 우크라이나어, 아르메니아어 등으로도 출판.

1952년 이탈리아에 거주. 『포도와 바람』(Las uvas y el viento) 집필 시작. 『대장의 노래』(Los versos del Capitán)를 익명, 비매품으로 출판. 이 시집은 마틸데 우루티아에게 바침. 8월 체포영장이 취소됨. 8월 13일 귀국. 국민들은 대대적인 환영행사로 대시인을 맞이함. 부와 명예를 얻은 네루다는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 영화 《일포스티노》의 원작 소설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의 무대)에 별장을 건축. 12월 국제평화상 심사위원 자격으로 모스크바 방문.

1953년 소련에서 귀국한 후 4월에는 산티아고에서 라틴아메리카 대륙 문화회의(Congreso Continental de la Cultura)를 개최. 디에고 리베라, 니콜라스 기옌, 조르쥬 아마두 등 쟁쟁한 인사들이 참석함. 산티아고에서 시선집 『모든 사랑』(Todo el amor)와 『정치시』(Poesía Política) 출판.

1954년 1월 칠레 대학교에서 5회에 걸친 강연회 개최. 7월 『일상적인 송가』(Odas elementales)와 『포도와 바람』 출판. 7월 12일 탄생 50주년 기념행사가 대규모로 열리고 전세계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축하함. 칠레대학교에 장서를 기증. 칠레대학교는 네루다 재단을 후원하기로 약속함. 페르낭 레게의 삽화가 든 프랑스판 『총가요집』 출판.

1955년 델리아 델 카릴(Delia del Carril)과 이혼. 마틸데 우루티아를 데리고 산띠아고에 새로 성주한 집(저택명 La Chascona)으로 이사. 년 3회 발행되는《칠레 소식》지 창간. 강연문등을 수록한 산문집 『여행』(Viajes) 출판.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 여행. 이탈리아, 프랑스, 브라질, 우루과이를 거쳐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지방에서 잠시 체류.

1956년 1월 『신 일상적인 송가』(Nuevas odas elementales) 출판. 2월 귀국. 9월 『인쇄술에 바치는 송가』(Oda a la tipografía) 출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위대한 대양』(El gran océano) 출판.

1957년 1월 『전집』 발간. 4월 1일 아르헨티나로 여행. 4월 11일 아르헨티나 당국은 시인을 체포하여 하루 반나절 동안 감금. 칠레 영사의 항의로 석방. 네루다는 시낭송회를 포기하고 아르헨티나를 출국. 랑군 등 동양을 방문. 칠레 작가협회 회장에 피선. 12월 『송가 3집』(Tercer libro de las odas) 출판.

1958년 칠레 대통령 선거전에 참여. 8월 『에스트라바가리오』(Estravagario) 출판. 이 책에서 전 해 동양을 방문했던 인상이 투영됨.

1959년 5개월에 걸쳐 베네수엘라 여행. 카라카스 주재 쿠바 대사관에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만남. 11월 송가집 『항해 그리고 귀환』(Navegaciones y regresos) 출판. 12월 마틸데에게 바치는 시집 『사랑의 소네트 100편』(Cien sonetos de amor)를 비매품으로 출판.



1960년 4월 12일 유럽으로 향하는 선상에서 『무훈 찬가』(Canción de gesta) 탈고. 소련과 동구권을 거쳐 파리에서 한동안 체류. 피카소는 프랑스어판 시집에 동판화를 그려줌. 이탈리아에서 쿠바행 배에 승선. 아바나에서 쿠바 혁명을 축하하는 시집 『무훈 찬가』 1만 2천부 인쇄.

1961년 2월 귀국. 7월 『칠레의 돌』(Las piedras de Chile) 출판. 10월 『행사시』(Cantos ceremoniales) 출판. 예일대학교 로망스어 연구소 비상근 회원으로 임명됨. 『스무 편의 사랑의 노래...』 백만부 재판. 미국에서 『네루다 시선집』(Selected Poems of Pablo Neruda) 출판.

1962년 3월 칠레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로 임명. 니카노르 파라가 환영 연설을 함. 이 연설은 『네루다와 파라의 연설문』(Discursos de Pablo Neruda y Nicanor Parra)으로 출판됨. 4월 출국하여 소련, 불가리아, 이탈리아, 프랑스를 여행. 9월 『충만한 힘』(Plenos poderes) 출판. 여행에서 돌아온 네루다는 발파라이소(Valparaíso) 소재의 저택으로 직행.

1963년 이탈리아에서 『요약』(Sumario) 출판. 이 책은 나중에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에 포함됨. 스웨덴 한림원 회원 룬트크비스트(Arthur Lundkvist) 는 「네루다」라는 긴 논문을 발표. 노벨문학상이 가까워졌음을 예고.

1964년 칠레 국립도서관 주최로 탄생 60주년 기념행사가 열림. 7월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Memorial de Isla Negra) 5권 발간. 9월 세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번역 출판. 네루다는 칠레 전역을 다니며 대통령 선거전에 열중함.

1965년 2월 유럽 여행. 6월 옥스포드대학교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 파리를 거쳐 헝가리로 여행. 헝가리에서 아스투리아스(Miguel Angel Asturias)와 공동으로 『헝가리에서 식사하며』(Comiendo en Hungría) 집필. 유고슬라비아 블레드에서 열린 펜클럽 회의에 참석. 레닌상 심사위원 자격으로 소련방문, 스페인 시인 라파엘 알베르티(Rafael Alberti) 수상. 12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귀국.

1966년 6월 펜클럽 특별 초청인사 자격으로 미국 방문. 뉴욕, 워싱턴, 버클리에서 시낭송회 개최. 멕시코와 페루에서도 시낭송회 개최. 페루 문인협회의 추천을 받은 페루 정부는 훈장(Sol del Perú)을 수여. 10월 외국에서 식을 올린 마틸데 우루티아와 결혼이 합법화됨.

1967년 유럽 여행. 이탈리아에서 비아레죠(Viareggio) 국제문학상 수상. 극형식의 칸타타 『호아킨 무리에타의 치열한 생애』(Fulgor y muerte de Joaquin Murieta) 출판. 이 작품은 이 해 산티아고에서 초연됨.

1968년 『한낮의 손』(Las manos del día)출판. 2월 우루과이 방문 강연회 개최. 4월 프랑스 정부는 퀴리(Joliot-Curie) 훈장 수여. 미국 문학예술 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임명됨.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대학에서 낭송회 개최. 귀국. 잡지 《에르시야》(Ercilla)에 칼럼 기고.

1969년 부다페스트와 바르셀로나에서 『헝가리에서 식사하며』 동시 출판. 5개국어로 번역됨. 『세상의 끝』(Fin de mundo) 출판. 5월 칠레 어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임명. 킬레 카톨릭대학은 명예박사학위 수여. 칠레 상원은 훈장(은메달) 수여. 7월 3일 칠레 공산당 대통령 예비후보로 지명됨.


노벨 문학상


▶ 그림 설명: 네루다가 수상한 노벨 문학상 상장


1970년 민중연합 단일 후보로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박사를 추천하고 대통령 후보 사퇴. 유럽 여행. 소르본느 대학에서 강연회 개최. 『불타는 칼』(La espada encendida)과 『해양 지진』(Maremoto) 그리고 『하늘의 돌』(Las piedras del cielo) 출판.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아예데 대통령은 파리 주재 칠레 대사로 임명. 아옌데 정권은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산 정부.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성인들은 1960년 쿠바 혁명과 더불어 아옌데 정권의 등장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라틴아메리카가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함. 한편, 남미의 도미노 현상을 우려한 미국은 경제봉쇄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아옌데 정권의 붕괴를 시도함.

1971년 1월 7일 파스쿠아 섬(Isla de Pascua) 여행. 칠레 텔레비젼방송국은 도큐멘터리로 촬영. 1월 21일 칠레 상원 프랑스 대사직 승인. 3월 파리로 부임. 10월 21일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12월 13일 노벨문학상 수상. 네루다는 수상 연설에서 1949년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탈출할 때 도와주었던 사람들을 추억하고 기림. 그러나 스톡홀름에서 병이 깊어져 침대에 누운채 귀국.

1972년 소련 방문. 『무익한 지도』(Geografía infructuosa) 출판. 10월 유네스코 집행위원으로 선임. 암으로 투병하던 네루다는 두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고 귀국. 국립경기장에서 대규모 환영행사가 열림.

1973년 네루다는 이슬라 네그라에서 투병생활. 아예데 대통령이 이슬라 네그라를 방문하려고 준비하던 2월 5일 파리 대사직 사임. 2월 『닉슨 암살 선동과 칠레 혁명 만세』(Incitación al nixonicidio y alabanza de la revolución chilena) 출판. 9월 11일 피노체트 장군은 미국을 등에 업고 군부 쿠데타를 일으킴. 대통령 관저(일명 모네다 궁)에서 저항하던 아옌데 대통령은 치열한 공방전 끝에 피살됨. 이날 산티아고는 맑은 날이었으나 어느 라디오 방송은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멘트로 쿠데타 사실을 간접적으로 타전했다고 함. 네루다, 9월 23일 산타 마리아 병원에서 영면.

1974년 『회고록』(Confieso que he vivido)이 사후 출판됨. 『노란 심장』(Corazón amarrillo), 『질문』(Libros de las preguntas), 『비가』(Eglogas), 『간추린 결점』(Defectos escogidas) 출판. 『스무 편의 사랑의 시...』의 모델이 되었던 알베르티나 로사 아소카르(Abertina Rosa Azócar)와 네루다 사이에 오간 편지가 『파블로 네루다의 연애편지』(Cartas de amor de Pablo Neruda)라는 제목으로 출판.

'파블로 네루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마음을 위해서라면  (0) 2006.03.24
동양의 장례  (0) 2006.03.24
마음 아픈 낮 / 파블로 네루다  (0) 2006.03.24
스무 편의 사랑의 노래. 14  (0) 2006.03.22
절망의 노래  (0) 2006.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