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세(Hermann Hesse)는 자아의 모든 위기적 요인과 세계대전에서 체험한 인간의 잔인성, 쾌락추구, 질서혼란 등의 모든 외적인 것들을 자아내면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이 길을 가게된 것을 그의 생의 제 2차적인 변화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제 1차적 큰 변화는, 그가 13세 때 작가의 부름을 받고 작가의 길을 가게 된 것이라고 헷세는 말하고 있다. "나는 내 마음을 깊이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내 고뇌의 원인이 자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미친 짓이나 야만인의 행동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고 비난할 권리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 권리는 신조차도갖고 있지 않은데 하물며 내게 속했을 리도 더더욱 만무하지 않은가. 무질서는 바로 나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헷세는 말하고 있다. 이같은 자아내면으로 가는 첫 시도로써 그는 『데미안 Demian』을 내놓았다. 헤세는 이 작품 발표로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어 많은 새로운 독자층을 얻게 되었다. 새로운 독자층, 즉 패전주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이 작품은 젊은이들에게 계속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데미안』은 발표된 이후 많은 세월 지난 지금에도 헤세의 그 어느 작품보다도많은 관심의 대상인 화제작이다. 『데미안 Demian』이 작자 미상으로 세상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저자가 누구인가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켰고 토마스 만(Thomas Mann)은 출판사에 이 훌륭한 작품의 익명 저자로 되어 잇는 에밀 싱클레어 (Emil Sinclair)가 누구인가르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이 외에 여러 사람들이 은밀하게 『데미안』의 작가를 알아보려고 노력을 했었다. 헤세는 당시의 지식층들에게 감동적인 충격을 주었다. 미국에서 토마스 만(Thomas Mann)은 1947년에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곧 이어 신비스러운 싱클레어의 『데미안』이 발산한 충격적인 내용은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시대의 핵심을 꿰뚫었으며 …… 모든 젊은이들을 정말로 매혹시킨 작품이다.
세계대전 후 모든 것이 파괴되고 황폐한 땅에서 아무 것도 제시해 주지 않은 상태에서 저자는 젊은이들에게 데미안을 통해 전쟁으로부터 주어진 외부 세계의 비정상적성과 야만성 그리고 모든 무질서를 작가의 내면으로 받아들여서,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책임을 진 한 사람으로서 그의 자가 내면의 길을 보여주고 잇다. 이 자아의 길은 자아를 스스로 존립케 하는 것이며, 자기 고유의 길을 인식케 하는 것이고, 마치 숙명처럼 긍정해야만 하는 길이며, 외부 세계의 무질서한 오류를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찾겠다는 길이다. 헤세 스스로가 이 길을 꿋꿋하게 걸었다는 점에서 작품을 통한 그의 교육적인 면을 볼 수 있다. 『데미안』의 머리말에서 익명의 저자로서 그는 이 길을 걷고 있는 "한 시도자였고 지금도 그렇다"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저가인 그가 안내하고 있는 길은 헤세가 초지일관으로 그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인간됨의 길이다. 이 인간됨의 길은 헤세의 모든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관제로서 자문하고 또 제시한 인간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헤세에 의하면 인간은 조화를 이루어 완성된 하나로 단순히 파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의문시되어 왔던 문명세계의 현실은 그 본모습을 드러내었는데, 이 현실의 본모습은 그에게 난폭적인 것으로 비춰졌다. 이 난폭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오랫동안 지켜왔던 규정들과 이상들은 거짓된 것으로 보였으며, 지금까지 표면적으로 질서 정연했던 것들이 무질서화되었고 생의 현실은 절망적인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혼돈된 상황에서 헤세는 자아 밖에서의 무질서의 원인에 대한비평이나 대책을 내세우지 않고 아주 격렬하게 자아 내면으로 심취하면서 전쟁 때문에 흐트러진 인간세상에 놓인 인간문제 내지 자아를 근본적으로 재검을 하게 된다. 이 재검의 길은 곧 그의 자아내면의 인간됨의 길이라 하겠다. 인간의 본질은 조화를 이룬 완성된 하나가 아니라 정신적 세계과 감각 본능의 세계와 두 대립 속에서 엮어지고 있는 논쟁물로 보게 된다. 인간은 단순한 조화 완성된 하나가 아닌 이 하나에로 향해 내던져진 대자연의 초안이라는 그의 주장은 『데미안』의 익명 저자의 말이기도 하다. 헤세는 『데미안』이 나오던 해인 1919년에 이미 베른(Bern)을 떠나 있었다. 실은 1918년 12월에 벌써 그의 집안은 깨어져 있었다. 그의 아내는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요양소에 입원해 있었으며, 회복된 후에도 그와의 생활은 불가능했으며, 자녀들은 기숙사나 친지들에게 맡겨졌다. 이즈음 헤세는 1918년에 발표된 「가을밤 (Herbstabend)」이라는 시에서 그 당시의 쓸쓸했던 그의 모습을 잘 알려주고 있다. 1919년 5월에 몬타뇰라(Montagnola) 왼쪽 편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한 아름다운 집을 발견했다. 이곳은 오랫동안 고독했던 그의 도피처로서 그는 또다시 은둔자가 되어 그의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내면적인 세계로의 도피 속에서도 헤세는 자아 밖의 세계에 완전히 등을 돌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아 밖 세상의 모든 무질서와 혼란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 밖의 물질문명 세계인 감각적 본능의 세계와 이와 반대되는 세계, 즉 정신 세계라는 두 대립된 세계를 받아들인 그의 자아는 자연적으로 내면적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들 두 대립 세계로 인해 주어지는 자아 내면의 갈등은 부정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긍정적인 면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때문에 헤세 자아의 내면적 갈등은 긍정적 조화 완성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며 이 내면적인 갈등은 곧 자아 인간됨의 길이다. 도덕적인 대립의 두 세계인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에 던져지는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Sinclair)가 가고 있는 길은 다름 아닌 조화 완성된 하나에로의 길이다. 이 길에서 성공하기 위한 전제는 자아 내면에 있는 두 상반세계의 대립관계가 없어져야 하는 것이며 이
들 두 상반세계가 조하를 이루기 이해서는 이들 두 세계가 동시에 긍정되어야 한다. 이같은 동시동등 인정을 위해서 이들 두 대립세계를 포괄하는 힘이 존해해야 하는데, 이 힘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상반된 이들 두 세계 위에 군림한다. 이 동시동등이라는 자아 내면적 긍정의 길은 동양 음양학적인 측면에서 음양 두 극의 동시동등으 길이 되는 것이다. 악의 세계와 선의 세계에 던져진『데미안』의 싱클레어는 그의 자아 내면에서 이들 두 상반된 세계의 조화완성, 즉 인간 자아 완성이라는 과제를 더맡게 된다. 두 대립세계의 문제 해결을 위해 싱클레어에게 던져지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현실세계로부터 갖게 되는 자아의식이다. 이 자아의식은 그의 자아 밖에 존재하는 도덕적 가치의 두 대립세계, 즉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하는 양자 택일의 의식이다. 이같은 자아의식은 선과 악의 세계를 동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자아의식은 선도 좋고 악도 좋다는 판단의식이 결여된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악은 악으로써 선은 선ㅇ로써 판단되고 평가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립된 두 세계가 동시동등적으로 수용되지 않는 입장에서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작품 처음부터 자아의 궁극적인 조화, 즉 이들 두 세계를 같은 정도로 수용하려는 어려움을 가진다. 싱클레어가 이들 대립된 상반세계를 대면하게 되는 경로는, 머저 그는선의 세계를 그의 가족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10세의 라틴 학생이던 그는 도덕적 가치 척도에서 이 선의 세계가 정신적으로 밝고 선량하며 모든 것이 분명하고 정결함을 보게 된다. 다음으로 그는 악의 세계를 그의 주위에서 알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불결하고 선량하지 못하며, 이성적으로도 불손한 패들로 형성된 세계이다. 이 악의 세계로 어린 소년인 그는거짓으로 구며낸 도둑질 이야기 때문에 매이게 딘다. 즉 그는 어느 날 주위 불량배 어린이들에게 영웅심에서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는 이들 불량배 어리아이들에게 그가 이웃집 사과밭에 몰래 침입해서 사과를 따서 한 자루 가득 훔쳐 가지고 나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특히 자기보다 두 살 위이고 가정적으로 불우하고 불순한 소년인 프란츠 크롬머(F. Krommer)에게 자신이 말한 것은 진실이라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그는 신의 이름을 걸고 이에 대해 맹세까지 한다. 크롬머는 이 맹세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음모를 꾸며서는 그에게 말하기를 과수원 주인이 사과 도둑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만약 싱클레어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주인에게 고발하여 경찰에 넘기겠다고 위협한다. 그리고는 자기 아버지의 취직문제 알선, 싱클레어의 누나와의 데이트, 그리고 무리한 금전요구로 어린 그를 괴롭힌다. 이렇게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이 거짓으로 꾸민 이야기로 말미암아 더욱 악의 세계로 빠져들면서 이 궁지로부터 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이 외적인 줄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주어진 싱클레어의 마음에서 일게 되는 내적인 자아변화이다. 그는 거짓으로 꾸며낸 자신의 이야기로 인해 악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자아 밖에서 주어진 어떤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존재는 하고 있었지만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인 상태에서 자아내면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아내면 속에 있던 이 악의 일면에 충동이 가해짐으로써 극 거짓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내면에 숨어 있던 악의 면이 오직 가족적 환경을 지배하고 있었던 선의 세계에 억눌려 표면화되지 않았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으로써 그는 악의 세계에 빠져들기 전에 언제나 이 악의 세계를비밀히 동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와 같이 그가 악의 세계를 그의 자아 내면에서 부정하지 않고 선의 세계와 함께 받아들이고 긍정함으로써 그는 이들 두 상반세계를 동시에 긍정하고 받아들이느 길에 서게 된다. 이 동시동등의 길, 곧 그를 자아 갈등의 기로 가게 하는 조력자로서 싱클레어의 연장자 친구인 데미안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데미안은 그에게 그노스틱(Gnostik)의 생각, 즉 신을 직관적인 체험의 세계에서 철학적인 인식의 사고로써 인식케 하려고 하고 이로 인해 자기 자신의 자아 본체를 형성하려는 생각을 주입시킴으로써 싱클레어 자아 내면에 있는 두 대립세계를 동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두 상반세계를 동시동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음양요가법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이 동시동등에로의 길을 인도하는 희랍명의 신 아브라삭스를그에게 제시하고 있다. 아브라삭스는 그노스틱(Gnostik)파의 신의 이름으로 일종의 주문으로 사용되며 싱클레어에게 이 신은 상징적인 임무를 갖고 있다. 전혀 상반된 두 세계, 즉 신적인 선의 세계와 악마적 악의 세계를 다같이 동등하게 인정하며 일치시킨다. 이때 어느 한편의 세계에 자의적으로 일방적인 우위가 주어지지 않고, 이들 두 상반되는 대립세계가 동시동등으로 긍정된다. 이것은 곧, 신 아브라삭스의 임무이다. 싱클레어에게 가르친다. 마침내 데미안은 그의 어머니인 에베(Eva) 부인을 싱클에레어와 대면시킨다. 에바부인은 싱클레어가 내면으로 추구하는 자아의 두 대립세계를 조화 완성에로 통하게 하는 사랑의 길로 그를 인도하게 된다. 싱클레어가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큰 새의 모습으로 그에게 이 조화 완성의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랑은 두 면이다. 아니 단순한 양자결합 이상이다. 그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사랑은 천사이자 그림이고 또 악마이다. 남자와 여자를 한 몸에 담고 있으며, 사람이면서 짐승이고 가장 최상의 것은 선이고, 가장 최하의 것은 악이다. 이것을 체험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고, 이것을 맛보는 것이 또한 나의 운명이다." 라는 소리가 싱클레어의 내면을 향해 외쳐진다. 이처럼『데미안』의 싱클레어에게 주어진 상징적인 조화 완성의 길은 후기 헤세 작품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면적인 자아발전의 준비과
정으로서 의의를 갖고 있다. 이 자아내면의 길은 결코 추상적인 잠꼬대 같은 길이 아니고 참된 자아인식의 길이며 현실을 살아가는 개개인의 자아내면 발전의 길이다.
헤세가 제 1차 세계대전 후 내적·외적인 요인에 의해서 그의 작품 『데미안』 이후 가고 있는 자아내면의 길은 보르토(O. F. Bollnow)가 그의 저서 『불안과 은둔 Unruhe und Geborbenheit』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헤세 중니공들이 자아완성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내면의 길'은 또한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도 표현되기도 한다. 이 내면의 길은 독일 정신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내면의 길'에 관해서는 독일 신비주의의 초기부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마이스터 엑하르트(Meister Eckhart)에 의해 이것이 깊이 연구되고 있는데 이는무언의 형태로서 경건주의 (Pietismus)와 함께 독일의 정신 속에 흐르고 있다. 경건주의는 신의 체험을 신을 간절히 찾는 인간의 가슴 속에서 찾아서 종교적인 감정 유동의 개별화를 유도한다. 이 '내면의 길'은 독일 낭만주의로 다시 이러진다. 낭만주의 시대의 노발리스(Novalis)에 의해서 가장 우아하고도 수결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노발리스는 그의 미완성 작품에서 "비밀에 가득한 길은 내면으로 향하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헤세 또한 그의 작품에서 노발리스의 이 말을 마치 입력된 프로그램처럼 반복하고 있다. 노발리스는 그의 미완성 작품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 Heinrich von Ofterdingen」에서 "우리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중의적으로 "언제나 집으로"라고 대답하고 있다. 노발리스의 이 말은 대단히 의식적으로 『데미안』에서 언급된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그를 상징적인 사랑의 길로 인도하는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베 부인에게 "얼마나 나는 기쁜가! …… 나는 지금까지 떠돌아다녔는데, 이제 집에 왔으니 ……"라고 말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싱클레어는 에베부인을 통하여 자아 내면의 조화에로 인도됨을 암시하고 있다. 후에 헤세는 이 자아 내면의 길을 1931년에 『내면에로의 길 Weg nach Innen』이라는 작품의 이름으로 표면화시키면서 그의 진로를 명확히 하고 있다. 작품 『내면에로의 길』은 4편의 이야기를 헤세가 모아서 출판한 것으로 이 책에는 『데미안』 이후 쓰여진 『싣타르타 Siddhartha, 1922』, 『어린 아이들의 마음 Kinderseele』, 『클라인과 바그너 Klein und Wagner』와 『클링소의 마지막 여름 Klingsors letzter Sommer 』이 실려 있다. 『싣타르타』 이외에 세 단편들은 『클링소의 마지막 여름』 이라는 책명으로 이미 출판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헤세가 가고 있는 '내면으로의 길'은 자아 밖의 시끄러운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고유한 심저로 되돌아가서 고요한 안전으로 향하는 걸인 동시에 외부세계의 불안 때문에 잃은 세상 깊은 곳과의 연관성을 스스로 찾아가는 길이다. 또한 이 길은 인간의 본질, 곧 인간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는 길이며, 지금은 떠나 있어도 오직 이곳에서만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인간 본향에로의 길이다. '내면에로의 길'에는 여러 차례의 전기가 있는데, 우리들 모두의 근본적인 자아의 길인 '내면에로의 길'이 헤세에게 있어서는 그가 처한 시대 사조와의 대결로 나타나 여러 단계로 나누어지고 있다. 『헤르만 라우쉬』, 『페터 카멘친트』, 『수레바퀴 아래서』와 『크눌프』까지를 헤세 젊은 청년시절의 발전과정으로 보고 있으며, 『데미안』, 『클링소의 마지막 여름』,『싣타르타』, 『요양객』, 『짧게 요약한 이력서』, 『슈테펜볼프』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제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성숙단계를 보여주고있다. 여기서 자아 밖 현실세계와 대립하던 방황이 해결되는 과정이 보임으로써 이어지는 중간 단계를 거치게 된다. 결국에는 자아 밖과 자아 내면의 공통으로 추구하는 해결점을 발견하였음을 헤세는 그의 후기
작품 『동방에로의 편력』과 『유리알 유희』로 나타내 주고 있다. '내면에로의 길'이 두 상반세계의 테두리에서 주어진 것은 『데미안』에서부터이다. 특히 동양 음양으로서의 이 내면적인 길 추구가 가능하게 된 것은 이 작품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데미안』을 기점으로 『클링소의 마지막 여름』과 『싣타르타』에서 음양의 두 극, 동시동등의 길이 갈구되고 있다. 이어서 작품 『요양객』부터는 현실세계와 작품 주인공들의 자아 두 상반세계를 동시동등의 긍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데 이 방황의 내면적 갈등이 『슈테펜볼프』를 거쳐 『나르치스와 골트문트』에 이르기까지는 고조되다가, 조화 융합의 안정된 길은 후기 두 작품들, 『동방에로의 편력 Die Morgenlandfahrt』과 『유리알 유희』에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작품 『데미안』을 분석해 보면 『데미안』은 헤세가 ㅐ내면의 길로 들어섬을 보여주는 첫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헤세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시민사회의 질서의 무너짐과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의 붕괴를 보게 된다. 그는 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해 시대와 대결하였는데, 고뇌와 절망의 원인을 외부세계에서가 아니고 자기 내부에서 찾을려고 했다. 그 과제는 이 소설 서두에서 "어떤 인간의 삶도 결국은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길을 위한 것이며, 그 길의 시험이다."라고 한 소설을 기점으로 초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명랑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싱클레어가 친구 데미안과 이상적인 여성으로서 존경하는 데미안의 어머니의 인도를 받아 괴로움 많은 청년시절을 극복하고 점차 자기의 사명에 눈떠 가는 과정이 대체적인 줄거리이다. 이 자아 '내면에로의 길'에 있게 된 헤세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베른을 떠나 스위스 남쪽 외딴 곳에 거처를 정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한 사람의 화가로서 생활한다. 『클링소의 마지막 여름』이 집필될 때는 헤세가 테신에서 새로운 고향을 찾은 1919년 무더운 여름으로, 그에게 새로운 인간 지표가 주어진 무렵이었다. 그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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