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작시

회전목마 - 심은섭

자크라캉 2021. 6. 2. 22:42

 

 

   회전목마

 

 

   심은섭

 

 

 

   허공이 나의 출생지이다 그러므로 네온사인이 발광하는 지상에 발을 내디뎌서는 안 된다 나의 운명은 자본에 조련된 동전을 등에 업고 결정된 생의 궤적을 그려내는 일이다. 이것이 신이 내린 첫 계명이다

 

   오래도록 변두리를 배회하며 사는 동안 두 눈은 퇴화 되었으나 무딘 감각으로 겨우 허공에 길을 낸다 그런 까닭에 운명의 축을 이탈할 수도 없었거니와 갈기를 날리며 광란하는 질주의 본능을 잊어버렸다

 

   밤꽃이 발정하는 유월, 변압기가 구워낸 찌릿한 전류 한 덩어리로 식사를 한다 그것마저 배식이 중단된 날엔 공중에 정박해야 한다 오늘도 고독의 깃발을 나부끼게 만든 개똥벌레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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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1년 6월호 작품상 후보작]

 

 

   가문비나무엔 허파가 없다

 

 

   심은섭

 

 

   이동의 욕망이 화산처럼 솟구칠 때마다 신은 나의 허파를 떼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친정집 마당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습니다

 

   까마귀가 스무 가지의 감각을 주고 갔지만 눈과 귀를 닫고 삽니다 오랜 시간은 이동의 습성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그 죄로 직립의 자세로 저녁마다 굵고 긴 반성문을 씁니다 수은주의 붉은 혓바닥이 빙점 아래로 통과할 때 벌목공의 톱날에 온몸이 잘려 나가도 이젠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둣빛살점이 뜯겨나가도 피죽바람을 불러와 생손을 앓습니다 나는 어떤 계절에도 한 장의 잎만으로도 천공을 뚫고 부활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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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현대시』 6월호 -심은섭

 

 

시의 본질

 

   시는 허기진 표정의 얼굴에서 온다. 동학의 함성에서 나오고, 아픔보다 더 큰 깊은 상처 속에서 오고, 기쁨이 아닌 슬픔에서 오고, 시작보다 종착역에서 더 강열하게 온다. 정상인의 정신에서는 기필코 오지 않는다. 무녀의 은방울소리로만 온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물동이를 입에 물고 작두를 탈 때 가까스로 온다. 규정의 테두리를 벗어난 방임에서 오고, 낮은 자세로 변두리에서 소식도 없이 슬쩍 온다. 결코 교만하게 오지 않는다. 충분한 교양의 모자를 쓰고 나타난다. 일침의 어휘 구사와 일면식이 없는 낯선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여름밤의 반딧불로부터는 더디게 오지만 겨울 화롯불에서는 황급히 달려오고, 전쟁의 포성 속에서는 뼈저린 반성으로 찾아온다.

   고속도로로 달리는 것을 거부하지만 오솔길로 걷는 것을 더 좋아 한다. 시는 상현달로 떠 있기보다 하현달로 떠 있기를 좋아 한다. 아니, 죽음의 냄새가 나는 그믐달에서 초승달로 태어난다. 귀에 익거나 눈에 익은 것을 멀리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시는 매우 까칠하다. 틀에 박힌 제복을 입은 제도를 부수고 상상의 날개로 핍진성을 향해 날아간다. 아버지의 취기가 아니라 어머니의 화병에서 더 부지런히 온다. 머리를 풀어 하늘로 오르는 연기처럼 인기척도 없이 온다. 장폴 사르트르의 실천적 타성태의 모순에서 푸르게 자라고,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문 속에 미륵불처럼 웅크리고 앉았다. 태풍이 지나갈 때마다 더 둥글어지는 능금의 의식으로 온다. 즐겨 다듬은 언어를 밟고 온다.

 

 

  -출처 : 2021년  「현대시」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