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중앙일보 창립 43주년 중앙신인문학상 평론부문 당선작]한강론 / 이학영

자크라캉 2009. 1. 12. 15:39

[중일일보 창사 43주년 중앙신인문학상 평론부문 당선작]

 

의 에피파니 혹은 심연의 자화상 - 한강론 / 이학영

 

1. 심연에 드러난 이방인의 초상

초상화나 자화상 가운데에는 외관의 충실한 모사(模寫)와는 거리가 먼 작품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마치 녹아내리는 고무 가면처럼 보이는 달리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손가락이 일곱 개이거나 팔이 두 쌍인 인물이 등장하는 샤갈과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적인 초상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소여를 그로테스크하게 왜곡하고 있다. 이목구비가 괴기하게 함몰되고 뒤틀린 베이컨의 얼굴이나 나목(裸木)처럼 깡마르고 앙상한 실레의 체구와 손가락들, 그리고 흰자위마저 검게 채색된 모딜리아니의 두 눈도 인체의 비례와 균형, 색채 등의 해부학적인 조건들을 훌쩍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이상화된 형태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와 같은 일련의 ‘일그러진’ 초상들을 보고 있자면 화가가 애초에 포착하려 의도한 것, 그리고 그 그림에서 우리의 주목을 잡아끈 것은 육체적인 외관의 유사성이 아니라 그것을 교란하고 균열시키면서 은밀하게 드러나는 ‘내면의 얼굴’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마치 거울처럼 외양만을 충실하게 옮겨내려는 초상화가들의 화폭(畵幅)을 수면(水面)에 비유할 수 있다면 외관으로 환원되지 않는 낯선 ‘나’가 음음하게 얼굴을 내미는 것은 심연의 화폭을 통해서이다. 어두운 밀실에 베일로 가려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이러한 은밀한 화폭의 대표적인 예이다. 도리언이 잔인하고 악덕한 행위들을 일삼을수록 차츰 추악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그의 초상화는 젊고 아름다운 외양 아래에서 꿈틀대는 악마적인 충동과 죄의식, 공포로 얼룩진 내면을 비추는 심연 그 자체이다. 그런데 심연의 화폭에 비밀스럽게 노출되는 이러한 정체성은 어떤 의미에서 화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때론 그것을 감추려는 의지를 배반하면서 그림 속으로 냄새처럼 배어든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품의 모든 차원에 드리워진 작가적인 주관성의 그림자로서, 화가가 자신의 그림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자신의’ 앎, ‘자신의’ 의지, ‘자신의’ 기도”, 즉 “자기 자신”(J.P. Sartre, 정명환 역,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8, p. 62)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델의 외관과 닮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심연의 화폭에 떠오른 형상들은 어느 정도 자화상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강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예술가들의 삶과 그 작품의 창작과정이 서사의 주된 줄기를 이루는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초기작인 「저녁 빛」과 『검은 사슴』에서부터 「아기 부처」, 『그대의 차가운 손』, 「노랑무늬영원」, 『채식주의자』연작, 그리고 최근작인 「파란 돌」과 『바람이 분다, 가라』(연재 중)에 이르기까지 화가, 사진작가, 조각가, 일러스트레이터, 비디오아티스트 등의 예술가-인물들은 그들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미지들로부터 예술적인 영감을 얻고 있으며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다. 이 예술가-인물들뿐만 아니라 한강의 다른 인물들도 꿈과 몽상, 관조와 명상의 형식으로 펼치는 환상의 화폭 속에서 ‘내면의 얼굴’과 직면한다. 요컨대 이미지를 포착하는 한강의 몽상적인 자아는 물가에서 특히 ‘나’의 낯선 얼굴이 일렁이는 심연에서 그 상상적인 활동을 개시한다.

실제로 『그대의 차가운 손』에 등장하는 조각가 장운형은 자신이 만든 손 조형물에 배어있는 ‘나’, 즉 애써 숨겼음에도 드러나는 자신의 “감정, 노력”, “개인사”를 발견하고 “그것은 마치 내 발치에 누운 내 시체를 똑똑히 내려다보는 악몽과도 같았다”(『그대의 차가운 손』, 문학과지성사, 2002, p. 89)고 술회한다. 「파란 돌」에서 미술가인 ‘당신’은 화자인 ‘나’의 나무 그림이 ‘나’와 어딘가 닮아있다는 것을 알아본다.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파란 돌」, 《현대문학》, 2006.7, p. 79)라는 그의 말은 한강의 소설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예술 작품과 이미지에 대한 나르시스적인 관점을 요약하여 대변해준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나’의 나무 그림이나 ‘당신’이 물과 먹을 이용해 한지 위에 만든, 폭발하는 별과 같은 형상들이 모두 일종의 ‘얼굴 없는 자화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냇물과 강, 바다, 혹은 동굴의 약수와 피 웅덩이에서 눈뜨는 한강의 인물들이 발견하는 자신의 물그림자는 나르시스의 그것처럼 매혹적인 수면의 이미지가 아니라 괴기스럽고 낯설어서 일상의 ‘나’와 쉽게 통합할 수 없는 심연의 이미지이다. 「아기 부처」의 선희는 꿈속의 약수 뜨는 동굴 안에서 자신의 기묘한 분신과 조우한다. 그것은 진흙바닥에 드러난 얼굴 형상으로서, ‘아기 부처’라고 불리지만 “눈꼬리가 위로 찢어진데다 음흉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린 그 얼굴”(「아기 부처」, 『내 여자의 열매』, 창작과비평사, 2000, p. 67)은 평온한 부처의 얼굴과는 거리가 멀다. 반복되는 이 꿈에서 그녀는 진흙 얼굴을 주물러 다시 빚거나 그 위에 흙을 덮고 신발로 짓이기지만 그럴수록 “일그러진 이마”와 “치켜올라간 눈, 빈정대는 입매”, “탐욕과 증오에 찬 표정”은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질 뿐이다. 그녀의 일부인 듯 차지게 달라붙는 이 흉한 진흙 얼굴, 스스로 지우고 부정하려 하지만 생시에도 일상의 한 귀퉁이를 찢고 출몰하는 이 혐오스러운 얼굴은 무의미하고 오랜 인내의 이면에 쌓아온 남편에 대한 경멸과 원망,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자책이 만들어낸 분신이다.

이러한 섬뜩한 느낌을 주는 ‘나’와의 대면은 자아정체성의 일관된 서사를 교란하기 때문에 존재론적인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통합된 자아를 위협하는 실존적인 문제들을 적절하게 차단하거나 회피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강의 인물들은 심연에서 자신의 끔찍한 분신을 만나는 것이다. 『채식주의자』연작에서는 이 분신의 파괴적인 위력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꿈에서 영혜는 어둡고 추운 숲속의 낡은 헛간,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는 그곳의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에서 끔찍한 얼굴, 맹수처럼 번쩍이는 눈과 마주친다.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이탤릭체는 작품의 표기를 따름](『채식주의자』, 창비, 2007, p. 19)

이 잔혹한 꿈이 영혜를 덮친 순간은, “식탁”, “남편”, “부엌의 가구들”로 촘촘하게 짜여진 일상의 피륙이 더 이상 피 묻은 날고기를 씹어 먹는 맹수의 얼굴이 넘실대는 피 웅덩이, 즉 심연을 효과적으로 가릴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실존적인 의문들을 차단해주던 일상적인 관행이 힘을 잃었으므로 그녀는 낯선 땅에 들어선 이방인이 된다. 무자비한 살해와 살육이 끊임없이 자행되는 현장인 그곳에서 그녀는 살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살자가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 그녀를 물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흰둥이의 ‘핏물 고인 눈’을 비롯한 폭력과 죽음의 영상들은 그녀 앞에 핏물의 유유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영혜가 살해의 악몽과 함께 살면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보여주는 불면과 채식주의, 노출과 향일성(向日性), 생물학적인 죽음도 불사하는 ‘나무되기’의 시도는 이 맹수의 얼굴과의 동일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어느 순간 한강의 인물들을 압도적으로 덮치는 끔찍한 자화상은 ‘약수’와 ‘피 웅덩이’ 같은 심연의 지류에서 만나게 되는 도리언 그레이적인 초상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미정형의 유동체에 서식하는 분신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생시에도 출몰하는 그 분신의 변형된 이미지들은 심연이 ‘나’에게 보내오는 일종의 존재론적인 화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강 작품의 주요한 이미지들에는 모두 이 심연의 흔적, 즉 마르지 않은 물기가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와 텍스트를 가로질러 다시 태어나는 그녀의 이미지들은 밑그림을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수채화요, 물가에서 끊임없이 번식하는 수초(水草)들이다. 그동안 한강 소설의 중심 이미지로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던 나무와 그 새로 돋은 연두색 잎사귀들이야말로 수액으로 그려낸 자연의 수채화가 아니던가.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한 것은 강물의 신인 그녀의 아버지 페네이오스 덕분이었다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한강은 작가의 몽상적 자아가 심연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첫 소설집의 후기에 간접적으로 고백해놓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다리를 허위적거리는 것처럼 썼고, 거품을 뿜으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보았다, 일렁이는 하늘, 우짖는 새, 멀리 기차 바퀴 소리, 정수리 위로 춤추는 젖은 수초들을.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어머니인 이 세상에게 갚기 힘든 빚이 있다. (「작가의 말」,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p. 322)

여기에서 일상적인 자아가 죽고 몽상적인 자아가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 바로 물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몽상적 자아와 함께 그녀를 둘러싸고 일렁이는 풍경, 즉 하늘과 새, 기차 바퀴 소리와 수초들이 문학적 수채화의 대상으로서 함께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심연은 ‘나’의 파괴가 일어나는 무덤인 동시에 새로운 자아와 문학적 이미지가 태어나는 모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강의 문학 텍스트들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과 그 길을 따라 거듭되는 죽음과 생, 이방인의 얼굴을 비롯한 이미지들의 식물적인 생장을 주목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자아의 보호고치로 삼투하는 어둠강 혹은 액화된 몸

심연에서 깨어난 한강의 몽상적인 자아는 이방인의 초상에 문학적인 육체를 부여함으로써 그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즉 어두운 물그림자들에 살과 피를,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운명을 불어넣어 그들을 심연의 거주자로서 실체화한다.

한강의 첫 소설집인 『여수의 사랑』에 실린 작품들과 장편소설 『검은 사슴』에는 음산하고 무거운 검은 물이 주조음처럼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 심연의 거주자들이 초기작들의 중심인물 중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극단적인 고통과 불행의 와중에 절망하고 삶에 지독한 환멸을 느끼며 타인과의 진지한 교류를 차단한 채 이방인의 운명을 살아간다. 어둠의 유동적인 덩어리들은 마치 집처럼, 혹은 옷처럼 그들을 휘감았다가 마침내 그들의 몸속으로 침투하여 그 입자들로 내장과 혈관을 가득 채우게 된다. 결국 검은 액체는 이 인물들의 살과 피와 뼈의 실체를 이루는 양수이다. 초기작의 어느 작품에서나 그들이 먹처럼 농밀하게 액화된 어둠에 침윤되는 과정이나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음습한 밤안개처럼” 암흑의 거리를 배회하거나(「붉은 닻」의 동영), 정원수들을 뿌리째 뽑아 태워서 어둠이 고이는 검은 구덩이를 만들거나(「진달래 능선」의 황씨), 남해의 갯바닥을 뒹굴어 상처와 혈관 속으로 검은 개펄이 스며들기를 바라거나(「여수의 사랑」의 자흔), 현실의 모든 관계를 파기하고 동해로 흐르는 ‘강’인 야간열차에 오르는 꿈을 꾸다가(「야간 열차」의 동걸), 급기야 배를 타고 해 지는 서해로 나가서 익사하거나(「저녁 빛」의 재헌), 고층 아파트에서 망망대해 같은 밤하늘로 투신한다(「어둠의 사육제」의 명환).

이들을 두텁고 견고하게 포박하고 있는 어둠이 침윤되는 과정은 불가항력적이고 운명적인 것으로 부조된다. 왜냐하면 밤마다 거리를 떠돌고, 정원의 나무를 태우고, 이미 죽은 이를 기다리고, 애써 그린 그림을 불태우고, 자신의 전 재산인 아파트를 생면부지의 남에게 넘기려는 그들의 행위는 부조리하고, 광적이고, 자멸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집요하게 달라붙는 어둠의 기원을 설명해주는 근원적인 사건들이 제시되고 있다. 어려서 부모가 죽거나 반대로 어린 자식, 임신한 아내, 쌍둥이 동생 등의 가족이 병이나 사고로 죽는다는 상실의 경험이 그것이다. 그러나 심연의 주민들이 저마다 간직한 가족사의 비극이나 신산한 삶의 이력은 그 자체로 본질적인 무게감을 지닌다기보다는 압도적인 검은 물의 이미지를 합리화하는 역할에 만족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둠강의 이미지가 이방인의 서사를 만들어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심연의 초상이 육화된 존재가 이 이방인들이라면 그 살아 있는 물그림자를 자화상인양 들여다보며 전율하는 인물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은 자기 파괴로 치닫는 존재의 곁에 있으면서도 그 자멸을 제지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자이며, 그 존재가 자신의 등 뒤에 일렁이는 어둠강을 가시화하는 까닭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와 절연(絶緣)하려는 인물이며, 그러나 결국은 스스로 그를 만나기 위해 심연 앞에 서는 인물이다. 말하자면 그는 방죽 위의 거주자이다. 『여수의 사랑』 전편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짝패 관계에 대하여 김병익은 인간의 근원적인 우수와 비애를 공동으로 나누어가진 ‘일란성 쌍둥이’로 비유한 바 있다.(김병익, 「희망 없는 세상을, 고아처럼」, 한강,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pp. 310-312) 실제로 한강 초기작의 세계에서 심연의 거주자들과 함께 중심인물의 또 다른 한축을 이루고 있는 방죽의 거주자들은 그 분신적인 짝패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 자신의 내면에 오랫동안 드리운 어두운 그늘을 발견하고, 그 원천을 향해 더욱 깊이 침잠함으로써 외상적인 기억의 실체와 마주한다. 요컨대 그 세계에서 ‘너’는 심연 속의 ‘나’이다. 그래서 ‘너’와의 대면은 ‘나’의 존재를 둘러싼 장막을 해체하여 그것이 가리고 있었던 심연을 드러내 보여준다. 한강의 인물들을 어두운 심연으로 인도하는 이 짝패와의 만남과 거부, 그리고 추적의 과정이 그녀의 초기작들의 한 중심적인 서사를 이룬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방죽 아래의 물은 왜 그렇게 쉽게 암전(暗轉)된 액체로 변하는 것일까? 또 그 어두워진 물에 다가가는 일이 왜 한강의 인물들에게 그토록 위협적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강의 상상 세계에서 물은 ‘죽음’을 수용하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상상력은 끊임없이 물에 삼투되어 물은 죽음의 실체적인 물질이 된다. 실제로 한강 소설에 나타난 모든 죽음에는 물이 관여되어 있다. 즉 그녀의 인물들에게 죽음은 곧 ‘익사(溺死)’이다. 「여수의 사랑」에서 정선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여수 앞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으며, 「붉은 닻」에서 동식의 아버지는 폭우로 불어난 계곡에 휩쓸려 실종되었고, 「저녁 빛」의 재헌은 스스로 배를 몰아 바다에 몸을 던졌으며, 『검은 사슴』의 민영은 제주도 근처의 바다에서 친구들과 밤낚시를 하다가 배가 전복되어 익사했다. 이와 같은 실제적인 익사가 아니더라도 죽음이 물 이미지와 결합되는 경우가 있다. 「어둠의 사육제」에서 명환은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자살하지만, 그가 몸을 던진 서울의 밤하늘은 “집어등을 밝힌 오징어잡이 어선들”같은 불빛이 드문드문 켜진 밤바다로 묘사되기에 그의 죽음 역시 어두운 물에 흡수된다. 「철길을 흐르는 강」에서 ‘나’의 어머니는 철길에 머리를 던져 죽었지만, 그 사실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의해서 곧 익사로 탈바꿈된다. “그곳이 무슨 강이라고, 물에 뛰어드는 사람처럼 철길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벗어둔 어머니의 흰 구두.”(「철길을 흐르는 강」, 『내 여자의 열매』, p. 308) 이와 같이 사랑하는 이들을 삼킨 물, 다시는 영원히 건너올 수 없는 삼도천(三途川)은 점차 어두워지고 농밀해지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기억하는 이 물은 포우(E.A.Poe)적인 물이다. 포우의 물은 그림자를 물질적으로 빨아들여 날마다 더 검고 무거워지는 물이자, “우리들 안에서 죽어가는 모든 것에, 나날의 무덤을 제공하는” 물로서 죽음의 물질적인 지주(支柱)이기 때문이다.(Gaston Bachelard, 이가림 역, 『물과 꿈-물질적 상상력에 관한 시론』, 문예출판사, 1980, pp. 81-86)

그래서 방죽 위의 인물들에게 검은 물, 그리고 심연 자화상과 대면하는 일은 자아를 해체시키고 ‘보호고치’를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보호고치란 존재론적인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심연으로부터 이 자아를 격리시키는 일종의 방파제라고 할 수 있다. 앤소니 기든스(Anthony Giddens)에 의하면 ‘보호고치’란 실존적인 문제들에 대한 ‘괄호치기’를 통해 일상사를 관행적으로 처리하고 자기 전기(傳記)의 연속성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방어 기제를 의미한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전통과 의례가 점차 힘을 잃게 되자 현대인들은 자아의 성찰적인 기획이라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누구나 일관된 자아정체성의 서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매순간 제기되는 실존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생긴다. ‘습관’이나 ‘관행’의 수준에서 실존적인 문제들을 적절히 괄호쳐내지 못한다면 ‘불안’과 ‘수치’를 초래하게 되고, 이것은 정신적인 안녕은 물론이고 존재론적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Anthony Giddens, 권기돈 역, 『현대성과 자아정체성-후기 현대의 자아와 사회』, 새물결, 1997, pp. 38-49) 따라서 일상의 무사감(無事感)이나 ‘정상성’은 실존적인 파도와 도덕적인 심연을 가려주는 장막으로서의 보호고치가 제대로 기능해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자아를 심각하게 교란하는 파동인 물 이미지가 미만한 한강의 소설들은 이러한 존재론적인 무사감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취약한 기반 위에 조성된 것인지를 증언하고 있다. 방죽 위의 인물들은 덮쳐오는 물과 심연의 자화상에서 눈을 돌리는 한에 있어서만 ‘나’의 안정된 자아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검은 유동체가 주는 불안을 막고 존재론적인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방죽 위의 인물들은 땅에 뿌리를 박고 정착하기를, 분신적인 짝패와 절연하여 죽음의 기억이 영원히 봉해지기를 희망한다. 이 정착과 절연의 기도는 나중에 물을 가리는 환상의 베일과 ‘가면’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붉은 닻」의 동식은 계곡에서 실종된 아버지의 혼령이 출몰하는 집, 즉 “바위에 찍혀 망가진 그의 살집이, 옷에 엉킨 뼈와 혈관들, 더러운 외투와 속옷과 흙탕물로 얼룩진 찢긴 바지가 흉몽 중에 격렬한 물살이 되어 출렁거”(「붉은 닻」, 『여수의 사랑』, p. 299)리는 자신의 후락한 집과 늘 어둠에 잠겨 있는 그 황량한 동네를 떠나 ‘월급봉투’, ‘아내와 자식들’, ‘아파트 청약금’으로 상징되는 안온한 소시민의 삶에 영원히 정박(碇泊)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정착과 안주의 꿈이다. 그러나 동생인 동영은 밤안개처럼 어둠속을 유랑하며 끊임없이 아버지를 환기시킴으로써 그의 이러한 희망을 배반한다. 「여수의 사랑」에서는 이 분신적인 짝패가 불러일으키는 검은 물에 대한 환기력과 절연의 시도가 더욱 극적으로 나타난다. 정선과 자흔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정선에게 자흔은, 술에 취한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이 익사한 여수 바다 그 자체와 동일시된다. 즉 정선은 그녀에게서 “여수 앞바다의 짠물 냄새”와 “선착장에 버려진 상한 생선들의 냄새”를 맡기에 이르는 것이다. 정선의 결벽증과 구토, 자흔에게 보이는 거부의 몸짓 등은 바로 여수의 검푸른 바다에 대한 무의식적인 부정 혹은 두려움에 찬 회피임을 알 수 있다. 자흔을 만나기 전까지 정선의 의식 속에서 여수의 바다는 견고한 차단막으로 비교적 잘 격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아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정착과 절연의 시도는 끝내 실패하고, 방죽 위의 인물들은 분신적 짝패인 심연의 인물들이 열어 보여주는 외상들을 응시함으로써 자아의 ‘죽음’을 체험한다. 자아의 이러한 붕괴 과정은 이슬에 젖어드는 옷, 허물어지거나 산산이 흩어지는 살과 뼈, 액화되는 몸의 이미지들로 나타난다.

우선 어둠강의 희생자들이 보내오는 검은 파문을 응시하는 강둑의 주민이 있다. 「어둠의 사육제」에서는 밤하늘이 액체적인 유동성을 지닌 어둠의 대양으로 묘사되며 액화된 어둠은 다시 유영하는 거대한 우주적인 포식자로 제시된다. 도시의 밤은, 이모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기식(寄食)하는 영진을 포위하는 검은 바다이다. 빛의 천적인 포식자-어둠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침투하여 술렁대며 또아리를 틀고, “검푸른 혓바닥을 낼름거리”(「어둠의 사육제」, 『여수의 사랑』, p. 269)며 흥건한 타액을 흘리면서 불빛의 입자들을 덮쳐서 “도시를 한 입씩 집어삼키”(p. 248)고 있다. 이처럼 암전된 물 혹은 액화된 어둠의 이미지가 이 작품에서 특히 공격적이고 난폭한 내면성을 지니는 것은 그것에 도시 군상들의 우울한 죽음과 불행의 그림자가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명환은 교통사고로 임신한 아내를 잃고 자신은 다리가 잘렸는데, 가해자로부터 받은 배상금으로 그 가족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에 집을 얻어 그들을 괴롭히다가 그 일가가 견디다 못해 이사하자 삶의 모든 의욕을 잃고 생면부지의 남인 영진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넘기려한다. 한편 인숙은 이른 나이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봉제공장을 다니며 고달픈 생활을 이어가다가 간암을 선고받자 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영진 몰래 전세금을 빼내 달아난다. 명환의 보복과 광기어린 호의, 그 젊은 아내의 무고한 죽음, 인숙의 독기 서린 배신과 비관은 서로 조응하며 사나운 검은 물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명환의 방에서부터 헤엄쳐”와 영진의 베란다 문을 두들겨대는 어둠의 파도는 “항암제 부작용으로 뽑혀나간 인숙언니의 치렁치렁한 머리채 같았으며, 뱃속에 명환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는 얼굴 모를 여인의 하혈 같았”(p. 259)던 것이다. 여인의 늘어진 ‘머리채’나 ‘하혈’은 어둠강의 제유적 이미지로서 위협적인 ‘밤바다’를 환기한다. 영진은 이 어두운 물의 난폭성에 전율하면서 그 희생자들이 보내오는 고통의 파문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파문들은 서늘한 빗물이 되어 심연 앞에 선 인물의 몸을 적시다가 종내에는 그 살과 뼈와 내장을 해체시킨다. 「저녁빛」에서는 이러한 붕괴가 살이 뭉개어지고, 뼈들이 “일제히 우둑우둑 소리를 내며 주저앉”고, “모든 근육과 내장들이 성내며 사방으로 튕겨져나”(「저녁빛」, 『여수의 사랑』, p. 181)가는 환영으로 나타난다. 이 붕괴를 거쳐 자아의 죽음을 나타내는 궁극적인 단계가 바로 융해되는 신체, 액화하는 몸의 이미지이다.

내 눈에서 격렬한 눈물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얼굴이 오래된 귤 껍질같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기도(氣道)와 폐가 바싹 구운 싸구려 밀과자처럼 꼬였다. 눈물은 눈에서뿐 아니라 온 몸뚱이의 살에서 뻘뻘 흘러나왔다. 끈적끈적한 사지가 방파제의 콘크리트 바닥으로 녹아내렸다.

마침내 들쥐 새끼만한 크기로 쪼그라든 나는 은박지처럼 구겨진 가슴을 움켜쥐며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다. 길과 방파제가 만나는 모서리에는 얄따란 홈이 패어 있었는데, 내 눈물은 이미 그 홈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되어 있었다. 한때 내 살과 뼈였던 것들이 박명에 음음히 번쩍이며 물살쳐갔다. (중략)

커다란 손 하나가 내 몸뚱이를 집어올린 것은 그때였다.

반항하는 내 뒤틀린 몸을 손은 차근차근 분해하기 시작했다. 물컹한 살갗을 비집고 흰 척추와 갈비뼈를 추려내는 손놀림은 사뭇 자연스러웠다. 눈도 귀도 코도 녹아버린 나에게 손의 주인의 얼굴이 또렷이 보인다는 것이 이상했다.(『검은 사슴』, 문학동네, 1998, pp. 11-12)

『검은 사슴』의 허두에 제시된 인영의 악몽은 바로 이 융해된 몸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여기에는 자아의 죽음을 나타내는 신체의 완전한 액화와 그에 이은 어두운 바다와의 혼류, 그리고 분신적 짝패의 분해적인 역할 등이 종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한강의 작품들을 유유히 흐르고 있는 어둠강은 ‘나’의 통합된 자아라는 환상을 교란하고 자아의 견고한 보호고치로 삼투하여 그 상상적인 의복을 내부로부터 파괴한다. 결국 방죽의 거주자들이 스스로 ‘나’라고 생각해서 애착을 가졌던 모든 것들은 어둠강에 의해서 최후를 맞고 물로 환원된다.

3. 파라핀의 늪(‘沼’)과 갈수(渴水)의 이미지

어둠강의 거주자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한강의 문학적 노력은 점차 심화된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된다. 하나는 자아의 죽음 이후의 삶을 사는 이방인들에 대한 탐구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의 영속성을 믿는, 일종의 도피자들의 초상을 추적하는 것이다. 전자가 심연의 거주자들에 대한 탐구의 일환이라면 후자는 방죽의 거주자들에 대한 탐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먼저 도피자들의 초상을 살펴보면, 그것이 물의 증발이나 응고 혹은 경화(硬化) 등의 갈수(渴水)적인 이미지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딱딱한 탈을 만들어 쓰고 그것이 영속하는 자아의 본체인 양 믿음으로써 심연으로부터 눈을 돌리고자 한다. 한강은 심연의 초상을 은폐하는 가면에 의존하여 벌이는 도피자들의 필사적인 곡예를 꾸준히 서사화하고 있다.

우선 얼굴에 단단한 껍질이 서서히 응고되는 상상적인 과정이 제시된다. 「질주」에서 진규는 동생 인규를 죽인 동네 아이들에게 복수를 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그들과 독액을 나누어 마시는 상상을 한다.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진규는 복수심에 불타던 자신의 유년기를 돌아볼 때마다, 독에 대한 내성을 키우기 위해서 자신이 언제나 소량의 독액을 복용해온 것처럼 여긴다. 그리고 “그가 마신 독이 그의 얼굴에 냉정한 껍질을 응고시”(「질주」, 『여수의 사랑』, p. 75)켜 버렸으며 그 껍질을 부수지 못하는 자신은 비정한 인간이라고 느낀다. 심연은 복수심이라는 독액에 의해서 응고되고 마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애착과 강력한 보호고치에 대한 열망 때문에 실존적인 의문들이 일렁이던 심연 위로 응고와 갈수의 이미지들이 두터운 층을 이루며 겹쳐진다. 이제 심연은 “뻘의 단단한 피부를 뚫고 나온 상흔”(「붉은 닻」)처럼 이 응고된 피막을 찢고서야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삶의 생기를 잊은 ‘자동인형들’은 “반인반수”(「어느 날 그는」)처럼 오토바이와 일체가 되어, 도심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빛나는 강물을 아무런 감흥 없이 질주해 지나친다. “진흙으로 빚은 가면”(「저녁 빛」)이나 “포커페이스”(「아기 부처」), “메마른 얼굴”(「여수의 사랑」), “납덩이처럼 차갑고 딱딱한 얼굴”(「해질녘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등이 심연의 응고나 경화의 양상을 보여주는 기호들이다. 이 가면과 껍질의 층위는 불안을 봉쇄함으로써 존재론적인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보호고치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하여 가면에 집착하는 ‘나’는 ‘너’와의 진정한 만남과 대화적인 관계를 부정하고 ‘나-너’의 관계를 ‘나-그것’의 관계로 변질시켜버린다. 생의 본질적인 변화나 실존적인 전환의 가능성을 묻어두려는 이러한 태도가 심화되면 마치 “이미 죽은 뒤의 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것”과 같은 표정을 낳기 때문에 한강 소설의 모든 가면과 껍질들은 ‘데드마스크’로 수렴된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도피자들에게 조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데드마스크’를 쓴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여 회피하려는 것은 역설적으로 영속성의 부정으로서의 ‘죽음’인 것이다.

한강은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사회 속의 자아가 겪는 모험을, 심연을 덮고 있는 얇은 막 위에서 가면을 쓴 채 곡예를 벌이는 상황으로 투시해낸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그대의 차가운 손』, p. 313)가는 것이다. 여러 가면의 기원과 일생을 추적하고 있는 장편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은 인간관계 속에 드러나는 가면들의 곡예, 즉 가장무도회를 그려내는 동시에 껍질처럼 되어버린 가면을 벗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자문하고 있다.

액자구조로 되어 있는 이 소설에서 액자 내부의 주인공인 장운형은 조각가로서 모델의 손과 몸, 그리고 얼굴의 형상을 석고로 떠내는 작업을 한다. 이때 손과 몸은 정체성을 누설하며 동시에 교묘하게 숨기는 독립적인 얼굴이기에 그가 떠낸 껍데기들은 말 그대로 가면이자 보호고치이다. 살아있는 몸의 형상 그대로이되 딱딱하고 속이 빈 형태인 이 탈들은 응고된 외피의 가장 완벽한 구현물이다. 외관과 내면의 괴리에 관한 인식, 그리고 그 미지의 은폐물들을 꿰뚫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장운형의 예술적인 동기가 된다. 그는 웃는 얼굴의 이면을 투시하려는 욕망을 예술적인 열정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시선 앞에서 타인의 가면들은 보호고치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장운형의 모델인 L과 E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출과 가혹한 통제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L은 어릴 때 양부의 성폭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살을 찌워 ‘괴물’ 같은 거구가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나자 이제 거식과 폭식을 오가며 생명을 건 다이어트에 몰두한다. ‘거울’과 ‘저울’로 상징되는 타인들의 시선에 주권을 넘겨준 자아는 사회적인 모델이 제시하는 ‘날씬함’이라는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신체의 무자비한 통제를 단행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나타나는 거식증과 폭식증 등의 식이장애는 이러한 자아의 기획이 자기보호본능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준다. E역시 과거의 ‘나’와 철저하게 절연하고 타인의 거울에 둘러싸여 모방적으로 살아간다. 그녀는 ‘육손이’로서 살았던 과거를 폐기하기 위해서 손가락을 절단하고 과거의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떠난다. 도시의 익명성 속에서 실존적인 문제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과 조건으로 치환된다. 즉 그녀는 “예절과 호의, 외모와 지위, 흔히 인간성이나 마음씀씀이라고 부르는 것”(p. 301)의 영역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이처럼 인위적인 통제와 연출의 영역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러움’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그녀는 심지어 성적 흥분을 가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가혹한 자기 통제와 치밀한 자기 연출에 의해 허위적인 ‘자아’가 탄생하며 그 고유의 생을 살게 된다.

실존적인 문제들이 격리되고 가면이 중시되는 문화에서 타인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는 심연이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제 자신만을 되돌려주는 거울이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로 작용하기 때문에, 모두 완벽한 연출을 통해서 타인에게서 제 자신의 고정된 상을 얻으려고 한다. 심연의 초상을 거부하는 이 도피자들에 의해 심연은 응고된 물, 혹은 파라핀의 늪이 되고 만다. 『그대의 차가운 손』의 E가 디자인한 카페 ‘沼’의 실내공간은 이 응고된 심연의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세하게 묘사된다. 층계와 내부 공간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원주형 유리그릇, 그리고 소파와 소파 사이로 놓인 유리 칸막이에는 “마치 물처럼 보이는 투명한 파라핀”(p. 199)이 채워져 있다. 응고된 물인 파라핀의 늪은 더 이상 심연의 초상을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 어둠강이 심연의 거주자들을 탄생시킨 양수라면 물처럼 보이기 위해서 인공적으로 연출된 물질인 파라핀은 도피자들의 모방적인 가면을 만들어내는 가짜 심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허위적인 ‘자아’를 둘러싼 파라핀의 막과 가면은 ‘과거’의 틈입으로 때때로 균열이 생긴다. E에게는 때때로, 잘라내기 전의 여섯째 손가락의 이미지가 불현듯 닥쳐서 정체성의 일관된 서사를 끊고 불연속점을 만들어낸다. 그 불연속점은 ‘진짜’ 심연으로 통하는 통로의 입구이기도 하다. 이러한 파열의 틈은 정운형과 E가 차례로 전신에 석고를 발라 굳힌 후 떼어내는 ‘껍질 벗기’ 행위를 통해 극단적으로 넓혀진다. ‘껍질 벗기’는 그동안 걸치고 있던 ‘나’라는 가면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일종의 제의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강 소설에서 응고되고 경화된 보호고치가 붕괴되는 한 가지 방식으로서 영속성의 상실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삶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의 순간을 극적으로 그려낸 장면이다.

4. 심연의 진화론과 부조리한 생의 원형적 이미지

심연의 거주자들은 이제 연속되는 ‘껍질 벗기’, 매순간의 죽음을 통해서 더욱 더 깊고 어두운 수중으로 침잠한다. 매순간 죽음으로써 새로 태어나는 이들은 인간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생명 이전의 물질로 회귀하면서 마치 누적된 죽음에 의해서 계통발생적인 진화를 역으로 거스르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들은 하나의 환상인 자아라는 ‘외투’를 벗고, 물의 의지, 즉 생의 의지로서의 물에 자신을 맡기는 인물인 것이다. 그것은 자기보존의 본능을 넘어서는 부조리한 추구이다. 심연의 거주자들은 이러한 부조리한 추구에 의해 꽃이 되고, 빛이 된다.

『검은 사슴』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정상성의 궤도에서 이탈한 듯이 보이는 의선의 불가해한 행위들은 바로 한 존재를 보호해주는 실존적인 '외투'가 완전히 결핍되어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시의 대로를 나신(裸身)으로 뛰어다닌 그녀의 광태는, 자아를 끊임없이 분열시키는 외상적인 기억의 출몰에 대응하거나 그것을 적당히 괄호쳐줄 실존적인 ‘외투’가 결여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왜 의선에게는 보호고치가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녀는 어린 나이에 유기된 존재, 사회의 일원으로 초대받지 못한 이방인이었다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인에 의해 산 채로 버려진 늙은 개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그녀는 정신병을 앓아 집을 나간 어머니에 의해서, 또 그 어머니를 찾아 나선 아버지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버림받았으며, 출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아서 초등학교 입학통지서로 상징되는 사회 체계에도 초대받지 못한다. 의선 자신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돌아올지도 모를 고향에 정신지체자인 오빠만을 남겨 두고 도시로 떠남으로써 누군가에 의해 버림받고 또 누군가를 버리는 상처와 죄의식이 뒤범벅된 악순환에 빠진다. 그녀에게는 해일처럼 덮쳐오는 실존적인 의문들에 대한 적당한 답변이 가족이나 사회, 그 어느 편에 의해서도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실존적인 ‘외투’의 상실과 결핍은 융해된 몸의 이미지를 낳는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즉 인영은 "의선의 쇠약한 나신이 햇볕에 뻘뻘 흘러내리는 것을, 살색의 끈끈한 액체가 보도 블록에 고이는 것을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며, 의선이 알몸으로 서있던 그 자리에 “아열대 식물의 수액 같은 연홍색 액체가 웅덩이를 이루고 있을 것만 같”(『검은 사슴』, p. 254)다고 여기는 것이다.

의선의 불가해한 행보는 자기보호본능을 넘어선 부조리한 추구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즉 빛에 대한 갈구와 나체 활보, 외상적 기억에 대한 한 반응으로서의 귀향과 유랑은 실존적인 문제들을 괄호치는 ‘가면’이나 ‘외투’를 뚫고 나오는 생의 근원적인 힘을 암시한다. 이 부조리한 힘은 원초적이며 원형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래서 의선은 어둠 속에서 검푸른 허공을 향해 “아무도 감히 멈추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묵묵한 걸음걸이”(p. 437)로 나아가는 ‘상처 입은 초식동물’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이 소설에 소개된 전설 속의 ‘검은 사슴’과 동일시된다. 지하의 암반 사이에 살면서 지질시대 식물의 변형물인 광석을 씹어 먹는 ‘검은 사슴’은 초식 동물의 원형이다. 이 동물은 하늘을 보기 위해서라면 목숨과도 같은 번쩍이는 뿔이나 이빨을 기꺼이 내놓는데 그로 인해 결국은 눈물과 피를 흘리며 죽거나, 간혹 하늘을 보는데 성공하더라도 햇빛을 받자마자 끈적끈적한 진홍색 웅덩이로 변해버린다. 결국 ‘검은 사슴’은 지하에 편재하며 자아를 해체시키는 힘으로서 보전이 아니라 소멸을, 안전이 아니라 수난을 택하는 부조리한 생의 원형적인 상징이며, 의선은 그 세속적인 현실화라고 말할 수 있다.

한층 더 깊은 침잠, 한층 더 많은 죽음에 의해 심연의 인물들은 식물-되기를 추구한다. 그들은 수액(樹液)의 심연에 몸을 담그고 있는 인물이다. 『채식주의자』연작에서 영혜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푸른빛의 몽고반점은 그녀가 수액에 젖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무 불꽃」에서 그녀는 식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물이 되어 땅속으로 스며들기를 바란다. 이처럼 한강의 작품 어디에서나 심연의 물은 죽음을 흡수하는 원소인 동시에 새로운 생의 원형질이 되고 있다. 영혜가 깊은 심연 속에서 식물-되기라는 부조리한 추구를 감행한다면, 동생과 남편의 자멸적인 행위들을 곁에서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인혜는 거기에 구현된 서늘하고 무자비한 물의 의지, 즉 생명의 원리를 직관하고 전율한다. 그녀에 의해 나무와 숲은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들로 현상된다. 한강 소설에서 나무는, 그리하여 심연의 존재들은 매순간 죽음으로써 밝게 빛나는 불꽃과 같은 운명을 지닌 것이다.

심연에 거주하는 존재들의 계통발생적인 역행을 통해서 한강은 모든 생명들이 물로 만들어진 불꽃이라는 직관에 도달한다. 그녀는 이러한 직관을 밀어붙여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 사회》에 연재 중)에서는 우주와 물질의 생성 과정을 물이 핏줄처럼 흘러가고, 식물처럼 자라서 제 스스로 그린 그림이라는 한 폭의 이미지에 담아내고 있다.

물이 그린 거지. 난 잘 흘러가게 터주고 막아주고 한 것밖에 없어. 식물 키우는 거랑 비슷한 거야.

갓 태어난 별의 불꽃이 하얗게 타오르는 그의 그림을 향해 나는 다가갔다.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에는 모세혈관들 같은 무수한 섬유질의 길들이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 길들을 따라 퍼져가는 먹의 모양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잡아주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가끔은 그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와 종이의 핏줄들을 타고 흐르는 것같이 느껴진다고도 했다.(「바람이 분다, 가라(연재2회)」, 《문학과 사회》80, 문학과지성사, 2007년 겨울, p. 189)

먹과 한지와 물을 이용한 이 그림은 죽음이면서 시작인, 폭발하는 별과 형태상 닮아 있다. 한강은 가장 오래된 죽음이자 시작인 이 우주적인 탄생의 순간을 바로 심연의 식물적인 성장이라는 이미지로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5. 투명성, ‘나’ 없는 아름다움

한강의 소설은 존재론적인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보호고치의 작용과 양상을 예리하게 파헤쳐 보여주는 동시에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생의 부조리한 추구를 원형적인 이미지와 상징적인 기호들을 사용하여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그녀 소설의 결말은 자아의 죽음과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지는 마술적이고, 섬광과도 같은 순간들을 시적으로 부조해놓은 경우가 많다. 결국 그 이미지들은 한강 소설의 기저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작가적인 관심사, 즉 ‘무엇이 인간의 생을 가능하게 하고, 사랑을 가능하게 하고, 그리하여 아름다움에 눈 뜰 수 있게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문학적인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상승하는 물과 수액(樹液), 투명한 ‘빛방울’, 새와 모래 등이 이 답변과 직결되어 있는 이미지이다.

자아의 죽음과 신생(新生)이라는 차원에서는 무엇보다도 상승하는 물의 이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슐라르의 말대로 모든 살아 있는 물은 죽어가는 물이지만(Gaston Bachelard, 이가림 역, 『물과 꿈』, 문예출판사, 1998, p. 72) 수액과 같이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물은 가볍고, 밝고, 맑은 물, 중력을 거슬러 역류하는 물이다. 맑고 투명한 생명의 물인 수액은 깊고 어두운 땅속에서부터 길어 올려지는 대지의 즙이다. “캄캄한 흙 속을 비집고 내려간 흰 뿌리”는 “어둠과 빛의 한 몸뚱이를 잎사귀까지 길어올”(『여수의 사랑』, 작가후기)리는 것이다. 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은 한강의 인물들에게 역설적으로 가장 밝은 빛, 즉 “열두 덩이의 태양이 폭 넓은 강의 물살을 에워싸며 떠오르는 꿈을”(「흰 꽃」) 선사한다. 「어느 날 그는」의 결말에서 태식은 굵은 전선에 “매달려 있던 검고 섬세한 빗방울들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흘러내리다가 이내 떨어지곤” 하는 모습을 보고 ‘자동인형’과 같았던 과거의 ‘나’가 죽었으며 새로운 생의 순간을 맞게 되었음을 느낀다. 이 성스러운 환희의 순간을 한강은 차오르는 수액의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 “크고 작은 그의 혈관들이 소리내어 흐르기 시작했다. 맑은 수액 같은 빗물이 수없는 실핏줄들을 타고 일제히 차올라왔다.”(「어느 날 그는」, 『내 여자의 열매』, p. 64)

이 수액의 상상력은 생의 비약과 새로운 약동을 촉발하는 고요하지만 강력한 맑은 물을 작품 속으로 끊임없이 유입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아기 부처」의 아내는 “갈참나무들은 아직 헐벗은 나뭇가지들을 허공으로 뻗어 올린 채 침묵에 잠겼지만, 저 검은 나무껍질 속에도 봄 대지의 즙이 흘러올라와 있을 것”(「이기 부처」, 『내 여자의 열매』, p. 125)임을 알게 되며, 「흰 꽃」의 ‘나’는 “햇빛이 내 머릿속과 내장, 무수한 혈관들과 딱딱한 뼈의 속까지 그득그득 채워,” 자신이 “마치 한덩이의 뭉쳐진 빛이 되어”(「흰 꽃」, 『내 여자의 열매』, p. 266) 있는 상태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 수액과 맑은 물의 이미지가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난 작품이 바로 「노랑무늬영원」이다. 이 작품은 35개의 작은 장들이 중첩되어, 2년 전 교통사고로 한 손을 전혀 쓸 수 없게 된 화가 현영의 절망과 그녀에게 조용히 흘러드는 생의 의지를 그려내고 있다. 절망의 심연, 사랑이 메마른 사막과 같은 삶 속으로 소리 없이 흘러드는 빛과 물. 노란 빛점들로 이루어진 일본의 노화가 Q의 그림, 최인성과의 추억과 그의 죽음에 대한 연민, 친구 소진과 그 아이들의 환대, 도마뱀 '노랑무늬영원'의 새로 돋아난 투명한 앞발, 사진관 주인과 소진의 정성어린 수공작업, 무엇보다도 수시로 찾아드는 잔멸치떼의 환영. 이러한 투명함, 밝음, 고요함, 재생과 관련된 이미지와 일화들이 투명하게 중첩됨으로써, 즉 각각의 일화가 자신을 통해 다른 일화를 볼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여러 층의 삽화들이 하나의 깊이 있는 의미의 우물을 형성하고 있다.

세면대의 뜨거운 물 속에 손을 담그고 있는 현영의 상상이 이 어둠 속으로 흘러드는 맑은 물과 밝은 빛 이미지의 심리학을 정확하게 밝혀준다. 현영은 “붉은 혈관을 눈앞에 그린다. 빛 속에 손을 담그고 있다고 상상한다. 불길 같은 빛이 콸콸 흘러들어와 혈관을 채우는 것을, 무수한 붉은 피톨들이 끓어오르는 것을, 그 힘으로 손의 손상된 관절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그린다. 간절히 집중한다.”(「노랑무늬영원」, 《문학동네》34, 2003년 봄, pp. 189-190) 한강이 전선에 맺힌 빗방울의 그림자, 싱그러운 연푸른 잎들에 차있는 맑은 수액, 투명한 빛 덩어리 같은 몸을 물살에 부딪치며 나아가는 싱싱한 잔멸치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 생명의 ‘빛방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의 죽음은 융해나 액화의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자신의 형상이 ‘새떼’나 ‘모래’로 변하는 환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철길을 흐르는 강」에서는 물살이 새떼로 변하더니 자신의 몸 안에서도 새떼들을 뛰쳐나가는 환상이 나타난다. 「아기 부처」의 선희는 흉악한 모습으로 일그러진 부처상을 만나는 꿈을 꾼 다음에 자신의 모습이 부슬부슬 모래알로 허물어지는 꿈을 꾼다. ‘새떼’나 ‘모래’는 단단하게 굳어 있던 보호고치의 붕괴와 그에 따른 자아의 죽음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자아의 죽음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아름다움의 발견이라는 길을 열어준다. 한강의 소설에서 물과 투명성은 삶의 과정에서 자아를 끊임없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두려움 없이 보호고치를 허무는 것과 같다. 두려움은 흔히 자아를 죽음과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사람은 살기 위해 매순간 죽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녹음해 놓은 것처럼 그저 똑같은 삶을 되풀이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애착이 미적 대상을 파괴하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죽음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리하여 무심한 마음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J. Krishnamurti, 정순희 역, 『삶과 죽음에 대하여』, 고요아침, 2005. pp.182-202) 한강이 끊임없이 자아의 죽음과 재생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녀는 물 이미지를 통해 삶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죽음을 포착하려 애써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의 시선으로, 즉 ‘처음인 듯, 마지막인 듯’ 빛과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평론 당선소감 - 이학영
"마지막 획 그을 때까지 바람을 피하지 않겠다”


화필을 쥐고 캔버스 앞에 홀로 서 있는 비쩍 마른 여인, 릴리 브리스코우. 그녀가 한순간 명확하게 보았던 형체들은 붓을 들어 첫 획을 그으려는 순간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화폭에는 아무렇게나 긁적거려놓은 듯한 자국만이 남는다. 그럴 때마다 모든 의구심의 질타가 바람처럼 귓전을 때린다. ‘여자는 그림을 그릴 수 없어, 창조할 수 없어.’ 그러나 그 이미지는 그녀에게 오래전, 접힌 채 전달된 서신, 풀지 못한 매듭이 된다. 10년 뒤 릴리는 다시 이젤 앞에 서면서 필사적으로 되뇐다. ‘그것을 잡아서 다시 시작하라.’

정확하게 언제부터 『등대로』의 릴리에게서 평론가의 초상을 보아왔는지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소설이 그 누구도 완전히 펼쳐보일 수 없는 편지라면 내가 펼쳐 읽은 부분을, 그리고 그것이 남긴 생생한 파문을 하나의 캔버스에 고정시켜보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겹겹의 메시지와 이미지들은 본래의 생동감을 잃고 보잘것없는 흔적으로 귀결되기 일쑤였다. 완성하지 못할 일이라면 이쯤에서 포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무렵에 뜻밖에도 당선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우선 미숙한 글에서 어떤 시도를 읽어주시고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오랫동안 노트북 바탕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한강’ 폴더에 ‘당선 소감’을 저장하는 감격을 누렸지만 여전히 풀지 못한 매듭들을 위해서 다시 그것을 열어야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첫 획을 그을 수 있도록 나를 일으켜 세워주신 분들이 너무도 많다. 오랜 시간 자식의 ‘고집’을 참고 지켜봐주신 부모님께는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 상이 가족들에게 작은 보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릎이 꺾이려 할 때 ‘극기(克己)’할 수 있는 힘과 가르침을 주신 조남현 선생님과 서울대 국문학과 여러 교수님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좁고 험한 길에서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도반이 되어 준 동학들께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내 글에서 장점을 찾으려 애쓰고 응원해준 아내이자 문우(文友)인 지혜에게도 애정을 담은 감사를 보낸다.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마지막 획을 그을 때까지 바람 앞에 서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1976년 인천 출생 ▶서울대 산업공학과 졸업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평론 심사평
교양 감각·정독 돋보여 … 신인다운 패기는 아쉬워


본심에 올라온 평론은 한결같이 2000년대 이후의 새로운 문학, 그것도 한 작가나 시인을 대상으로 한 작가론·시인론이나 작품론이 대세를 이뤘다. 신인다운 패기로 새로운 문학적 담론의 지평을 연 글에 대한 기대는 아쉽게도 유보해야 했다. 두 작가의 세계를 통합적으로 다룬 두 편의 글(강용훈·성가인)은 작품 해석 감각과 시도는 좋았으나 유기적 구성이 취약하고 글의 완성도가 떨어져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강영준씨의 ‘김이듬론’은 『오딧세이아』에서 세이렌의 경계적 존재론의 감각을 빌려 시인으로서 김이듬의 존재론을 해명하고자 했다. 발상이나 문장 감각이 돋보였다. 그러나 일부 해석에 무리가 따르고, 시 인용 방식이 서툴렀다. 소수의 시편들만을 대상으로 글을 엮어 김이듬의 세계가 다소 재단된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황유정씨의 평문은 김훈의 소설을 대상으로 미시적 분석을 정치하게 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분석에 치우쳐 자신의 비평적 논리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데 취약함을 보였다. 이학영씨의 ‘물의 에피파니 혹은 심연의 자화상-한강론’은 한강 소설의 심층을 물의 수사학으로 포착하여 그 문학 세계의 핵심을 드러내려 한 평문이다. 나름의 교양 감각과 정독의 열의가 돋보였고, 억지 주장과는 거리를 두면서 비평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해석의 맥락을 위해 동원한 논거들 사이의 유기성이 다소 떨어지고, 최근의 심화된 이론들에 대한 이해를 함께 보여주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작가가 동시대의 현실과 대결하면서 형상화한 문제의식을 해석할 적절한 문제틀을 구성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것이지만, 비평가가 도전해야 할 핵심 지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는 점을 상기하게 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안정감과 잠재력을 보인 이학영씨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우찬제·류보선 ◆예심위원=권혁웅·김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