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他者를 향한 시, 自己를 향한 시 - 이동호 /시인

자크라캉 2008. 12. 5. 22:45

者를 향한 시, 自己를 향한 시

 

-김영승의 『화창』-고경숙의 『달의 뒤편』

 

이 동 호(시인)

 

1.

 

  오늘은 모처럼 ‘화창’(김영승) 한 가을이고 즐거운 토요일이다. 나는 ‘꽃기름 주유소’(고경숙)에서 자가용의 기름통을 가득 채우고 가족들과 단란하게 야외로 나갔다.

 

2.

 

  하루 종일 『화창』을 싸돌아다녔다. 단풍과 은행잎과 이 가을의 울긋불긋한 뉘앙스와 위트가 좋고, 점점홍 붉어가는 사실과 풍자諷刺들이 너무 기뻤다. 왜 진즉 이런 좋은 것을 모르고 살았나. ‘아이들이 아악, 아악, 아아아악 / 웃는다 아, 하하하하하’ 웃는다. 오랜만의 외출에 ‘좋아 죽’나 보다. 그래, 이 얼마만의 즐거움인가 말이다. (김영승,「저녁」부분)

  단풍이 곱게 익은 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앉아 집에서 싸온 김밥을 먹고, 아이들과 함께 가을을 돌아다니는 동안 원금의 반도 남지 않은 주식도 잊고,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노선도 잊고, 이념도 잊고, 쓰다만 시도 잊었다.

  그저 이 가을이 너무 뜨거웠다. 단풍이 내 마음에 단풍 질렀다. 풀 죽은 정치政治의 찬 가슴과 축 늘어진 경제經濟의 저린 어깨에 이 뜨거운 빨강이 옮겨 붙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화창』이 화창을 가장하거나 ‘화창’을 완전히 잃고 사는 그런 것들에 잘 옮겨 붙을지 걱정이다. 가을이 가고나면, 곧 겨울이 올 것이다. 그런 그들에겐 어쩌면 이 ‘화창’이 곤욕이거나 ‘죽음이리라’. 그들에게 ‘疊疊 열두 폭 치마 찢어질 듯 짓푸른 / 얼음 같은 깊은 하늘과 / 1:1로 同等하고 / 자체로 沈黙’일 리 없을 것이다.(김영승,「화창」부분)

  김영승처럼 나도 그들에겐 암시를 풀고 좀 지시적이거나 직설적이어도 된다. 그러니 이 사람들아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다. ‘후회하는 놈들 틈에서 / 이쁜 말 구사’해봤자 이미 지난 일이다. ‘후회할 일을 / 내일로 미루지 말’란 말이다.(김영승,「후회」부분), ‘생각 없이 살지 말’잔 말이다.

  나도 오늘 가족과 나들이 나오지 않으면, 영영 ‘후회할 일’이 생길 것 같아 만산홍엽滿山紅葉 속으로 차를 몰고 왔다. 오로지 가을만 생각하고 차에 몸을 실었는데, 한 권의 시집이 내 마음에 실렸다. 시집이 나를 몰래 잡아 탄 것이다.

아이들이 내가 있는 그늘 밖에서 안전하게 노는 동안 나는 그늘 속에서 혹은 시집 속에서 혼자 놀았다.

  시집 밖은 ‘화창’한데, 시집 속은 ‘화창’하지가 않다. 무척 어둡다. 시집의 표지와 내용의 관계가 도시와 자연이 다른, 정치가와 서민이 다른,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다른, 단풍잎과 은행잎의 빛깔이 다른, 이 가을의 못난 이미지 같다. 참 반어적이다. 그러니까 상황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김영승은 이 ‘화창’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화창’과 ‘죽음’을 반의어가 아닌 유의어로 인식한다. 김영승은 자신에게 있어 ‘화창’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신은 오로지 흐리거나 어두운 곳에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화창’을, 이 화창한 날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부처가 되기 위해 마음속의 부처를 죽여야 한다는 종교적 역설 같다. 늘 죽음의 곁에 머무르는 구도자의 숙연함이거나 고행 같다.

 

폭우 쏟아진 뒤

이 화창

 

그게 죽음이리라

 

나의 죽음이리라

 

고추잠자리는

 

疊疊 열두 폭 치마 찢어질 듯 짓푸른

얼음 같은 깊은 하늘과

1:1로 同等하고

자체로 沈黙이다

 

-赤卒아, 너 산타클로스냐?

나한테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구나

 

神의 음성이다.

 

-「화창」전문

 

  이 시에서 김영승은 ‘고추잠자리’를 신으로 승격시킨다. 다시 말하자면, 신을 고추잠자리로 추락시킨다. 종교를 믿는 자들에게 어쩌면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반대로 종교를 갖지 않는 자들에겐 통쾌할 수도 있겠다. 신을 말하지만, 赤卒로 인해 신은 이미 신성성을 잃어버렸으니, 다분히 풍자적이다. 그러나 이걸 알아야 한다. 이 시속에는 풍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내재해 있다. 이것은 이경호가 그에 대해 말한 ‘직관적 언어능력’일 수도 있고, 그가 이룩한 삶의 철학일 수도 있고, 그 스스로가 교주가 된 1인 종교의 사상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고추잠자리’가 ‘하늘’과 同等하다는 것은 그 또한 ‘하늘’과 동등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고추잠자리’에게 읊조리는 말도 ‘신의 음성’일 수 있다.

  어쩌면 이 「화창」이라는 시는 그가 추구하는 모든 시의 오메가 일수도 있겠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행위나 고뇌는 이 시에 닿기 위한 과정이다. 그가 편한 길을 마다하고 애써 불편한 길을 걸어온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이러한 느낌은 다음 네 편의 시에도 총알처럼 고스란히 관통한다.

 

(1) 인간이 만든 관념과 관념어를 / 돌려준다 살구는 성실하다 / 살구에게서 추상하여 표상한 관념은 / 살구에게 // 살구에게는 사악하다거나 / 야비하다거나 하는 / 관념은 추상되지 않는다 / 살구는 성실하다 // 살구는 성실하고 근면하고 // 비 온 뒤 적당히 갠 아침 / 살구나무는 가령 / 剛毅木訥이라는 말을 / 주렁주렁 달고 있었는데 // 그런 생각조차도 살구에겐 / 따면, 아니 털면 / 한 가마는 나올 듯한 / 우렁찬 파도소리 같은 살구나무 // 일단 늘어진 가지에서 / 네 개를 따 주머니에 넣고 / 나는 또 하염없이 살구가 없는 길을 / 돌아서 왔다.

 

-「살구는 성실하다」전문

 

(2) 휘호도 쓰고, 설거지, 벌리기 등등등등을 하던 // 내 손을 / 나는 내 손으로 수갑을 채운다 // “손목을 잘라 버리리라······” // 참수보다 무서운 증오가, 저주가 / 꽃을 피웠나 // 이 겨울, // 마주 잡은 내 두 손이 / 참 따뜻하다.

 

-「손」전문

 

(3) 구두는 / 冠이다 // 구두는 가령 / 구두 티켓 상품권 같은 것으로 사기도 하지만 // 구두는 이미 내 가죽

 

-「구두」전문

 

(4) 그것이 自招한 고독이건 / 不遇의 고독이건 / 一生 고독했다는 것은 참 / 壯한 일이다 // 더욱 고독해야 하는데 이 비 오는 날 // 주전자 물이 끓는다.

 

-「고독」부분

 

  김영승은 위의 시에서 살구는 ‘剛毅木訥’의 기개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강의목눌剛毅木訥’이란 ‘의지가 굳고 기력이 있어서 무슨 일에도 굴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래서 살구는 성실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구’와 친구해도 될 일이다. 친하게 지내고 볼 일이다. 그러나 그는 천성이 그러지 못하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화창’한 길을 두고서도 (1)에서처럼 극구 ‘하염없이 살구가 없는 길을 / 돌아서 왔’기 때문이다.

  또한 (2)에서 그는 자신의 ‘손’으로 비주체적인 삶을 살아왔던 자기 ‘손’에 ‘수갑을 채운다’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는 암묵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극한 상황으로 자신을 내몬다. 주체적인 삶이 불가능할 바에는 차라리 “손목을 잘라 버리”겠다는 것이다. ‘두 손’이 ‘수갑’에 묶이고서야 비로소 ‘마주 잡은 두 손이 참 따뜻하다’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3)에서는 ‘구두’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그의 삶의 일부로서 동등하거나 떠받들어진다. 이 구두와 함께 세상을 얼마나 돌아다녀야 ‘구두’가 머리에 올려지는 ‘冠’도 되고, 자신의 ‘살가죽’이 되는 걸까? 마치 좁고 긴 길을 돌아 왔던 부처나 예수의 고행 같고, 공자의 철환 같지 않은가 말이다.

  (4)에서 그는 一生 고독했다는 것’이 ‘참 壯한 일이’라고까지 한다. 이것이 그가 구사하는 역설의 세계이다. 더 이상 무슨 시를 그 증거로 더 첨부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일련의 자기 절제와 인고의 과정이 없었으면, 그는 결코 ‘화창’이라는 시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김영승의 이러한 인식은 지금까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삶’에 있어서 그는 결코 농담을 즐기지 않는다. 어쩌다 그가 하는 농담 속에도 뼈가 있다. 농담처럼 가볍게 툭툭 던져지는 문구들을 접하면서도 독자들은 웃을 수가 없다. 격언을 들은 것처럼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김영승은 편한 길을 놔두고 극구 불편한 길을 고집해온 자이기 때문이다. 이른 바 「화창」에 닿기 위한 과정을 충실히 밟아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사물에 내재된 신성神性을 발견해낸 그의 구도자적 자세인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김영승의 시편들은 언제나 이렇듯 치열하고 강건하다.

  산문집을 포함하여 그가 펴낸 여덟 권의 책들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시집 『화창』만 보더라고 그렇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의 시는 다분히 풍자적이다. 뭔가가 어긋나 있다, 비틀려 있다. 이제 문학에서 풍자는 익숙하다. 그래서 그의 풍자 또한 식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시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종교적 역설’ 이외에도 기존의 풍자시와 다른 독특한 미학이 존재한다.

  대상을 억지로 비틀어 놓지 않으면서도 그의 풍자는 가능하다. 시상의 흐름 또한 억지로 바꿔놓지 않는다. 사람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시가 시를 쓰는 것 같다.

  같은 것을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오랜 세월의 힘이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어내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그의 시에는 독특한 결이 있다. 그 결은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무늬 진 것들이다. 그가 ‘자서’에서 밝힌 것처럼 그의 시가 모두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영승의 시들은 자신에 대한 기록 같지만, 김영승에게 ‘자아’란 거울과 다름 아니다. 그 거울도 볼록 거울이다. 볼록 거울에 세상을 비춰보면, 보이는 그대로의 반듯한 세상이 나타나는 법이 없다. 뭔가가 이지러져도 이지러져 있다. 김영승은 그게 정상이라는 듯,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그의 시들이 자기의 사생활을 향한 듯하지만, 그의 성향이 원천적으로 풍자적이어서 그의 시편들은 근본적으로 타자지향형의 시들이다. 대부분의 풍자가 타자에 대한 반동反動에서 시작하지만, 풍자를 하고 있는 그 스스로가 다른 풍자 대상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타자他者’는 김영승이라는 거울을 통과하면서 김영승답게 이지러진다. 김영승의 시를 읽다보면, 무엇이 김영승이고 타자他者인지, 뭐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그만큼 그의 시는 부자연스러움을 말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비정非情을 말하는 것도 정겹다. 능청도 이런 능청이 있을까. 그리하여 그가 걸으면 무엇이든 길이 된다. 그러므로 독설도 시가 된다. 외설도 예술 같다. 비속어도 그가 쓰니 비속어 같지가 않다. 무슨 경문經文 같다. 자연스럽게 필기도구를 들고 받아 적고 싶어진다.

그러고 보면, 김영승은 마치 득도한 파계승 같기도 하다. 술과 담배와 여자는 스님이나 도인들에겐 금기다. 정신과 영혼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김영승은 이런 것들을 통해 ‘도’에 이르는 모든 길이 한 길이라는 것을 대승론적으로 깨달아 펼치는 듯하다. 그의 시에 의하면 삶을 사는 것이 곧 도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아래의 시들은 그것을 증거하는 시편들이다.

 

“어떻게 반찬이 바퀴벌레 일색이야. 씨······” / 하며 투정하는 여자(39세, 홀랑 벗고 있음)에게 / “밥 다 먹으면 이따가 精液 한 바가지 멕여줄게······” / 하며 살살 달래 // 겨우, 한소끔 부르르 끓게 만들어놓은 뒤 / 비오는 창밖을 보니 // 78년에 매립을 시작, 15년동안 1억 2,000만 ton의 쓰레기를 집중 투하, 쓰레기로 쓰레기를 ‘증거인멸’한(?) 쓰레기의 巍然한 산, 난지도엔

 

-「過分한 사랑」부분

 

어디로 없어질까 // 천국이니 지옥이니 / 무인도니 // 관념의 공간들은 이미 가득 차 // 갈 곳도 없구나 // 고향도 자궁도 / 유년시절도 // 사이버 공간은 태초부터 가득 찬 것 // 태초가 이미 / 사이버 공간 내 집 마련처럼 / 꿈의 여자도 / 소록도도 / 아우슈비츠도 / 새벽엔 외양간 소 / 키 가득 갓 푼 오곡밥 / 뜨끈뜨끈한 나물 / 제일 먼저 잔뜩 멕이고 // 나는 아직도 / 아프로디테의 엉덩이 같은 보름달 밑에서 // 컹컹 // 보름달은 // 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렷다 / 力盡必起라는 말이렷다.

 

-「병술 대보름」부분

 

가을인데 아직 해당화 / 한 송이 피어 있고 // 버스 정류장 옆 / 작은 은행나무 그늘도 충분하지만 // 하늘이 그늘이다 / 푸른 하늘의 뭉게구름은 청천벽력 // 暴炎인데도 // 그늘은 사물 곁에 / 가서 늘어진 것 // 그늘을 가두어둔 건물은 / 벌 받으리

 

-「그늘」부분

 

총이 있으면 쏘고 싶어진다 / 자지가 있으면 // 그러니까 없애야 한다. // 자지를 가지고 장난질한 세월이 / 벌써 몇 년이냐 / 질리지도 않냐

 

-「‘동전’으로 가지 말자」부분

 

  집중해서 시집을 여러 번 읽고 나니 벌써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이제 서쪽하늘도 가을이다. 빨갛게 단풍들었다. 빈 도시락 통을 챙기고, 아이들도 챙기고, 꽉찬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차에 시동을 건다.

  아이들이 노는 동안 그늘 속에서 『화창』을 읽으면서 김영승에 대해 구구절절 말과 생각이 많았던 것은 그에게 반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시를 읽고 난 후의 최종 서평이다. 나는 특징 있는 시가 좋은 시라고 평소 생각해 왔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좋은 시들이다. 내가 충분히 반할만 하다.

  아직 김영승의『화창』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한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그의 시들을 읽다보면 가슴 밑바닥까지 서늘해져서 어느 순간 당신도 가을처럼 단풍들 것이다. 어쩌면 그를, 김영승 시인을 교주로 영접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3.

 

  가을을 빠져나오고 김영승의 시집도 빠져나와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이들이 지쳐 뒷좌석에 몸을 묻고 잠들었다. 도시 가까이로 차가 진입하자 길이 막히고, 나는 라디오의 뉴스를 듣고 있었다.

  시국時局이 너무 어두웠다. 흡사 이 세상이 『달의 뒤편』같았다. 그래서 세상은 참 ‘불온한 풍경’들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알겠다. ‘불우했던 저녁은 / 하늘에 핏빛 노을을 불 지르고 달아났다’ ‘어둠을 옹호하는 것들’이 ‘풍경의 외곽을 좁혀왔다’(고경숙,「불온한 풍경」부분), 도시의 초입에는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 어쩐지 가슴이 답답하다.

  차가 앞차들을 따라 고가도로를 서서히 진행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면, 가진 자들이나 못 가진 자들이나, 행복한 자들이나 불행한 자들이나 모두 불빛들이다. 불빛마다 사람들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둠 속에 들어앉아 심해어처럼 발광하는 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와 어둠 속에서 나도 나를 밝힌다. 나도 불빛이 되어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다시 재우고하는 일련의 삶을 복기하고 난 후에야 여유를 가진다. 소파에 앉아 며칠 전 읽다만 시집 한 권을 다시 집어 든다.

  고경숙의 『달의 뒤편』에도 어두운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다양한 불빛들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한권의 시집이 아름다운 야경夜景 같다.

  어쩌면 이것은 ‘달의 뒤편’에도 완전한 암흑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희망찬 전언이다. 단지 ‘달빛’에 그 존재가 희미하게 묻혀 있을 뿐, 서산으로 달이 완전히 지고나면, 그들도 서서히 밝은 모습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젖은 빨래를 탁탁 털어널고 들어간 아내에게

방망이로 흠뻑 두들겨 맞은 날은

일수도장을 찍은 것처럼 후련하다

빨랫대가 그나마 중심을 잡아주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접어진 허리며 정강이가

부러질 뻔 했다 용케도 죽지 않고

정신을 차려 세상을 보면 불똥처럼

외곽순환도로 위 차들이 거꾸로 붙어간다

그맘때쯤

겨울별도 내 늘어진 팔뚝에서 목 솔기에서

오색영롱한 빛으로 뜬다

늘어진 전선들이 달 한가운데를 지나는

기타 구멍처럼 후미진 이곳에선

일 다녀온 아내들에게 매일 밤 얻어맞는

일 없는 남자들이 나처럼 빨래줄에 얹혀져

궁시렁 궁시렁 달을 한 잔씩 비운다

옥탑방까지 무단으로 올라온

빈 은행나무 가지들이

바람부는 대로 달의 표면을 쓸고 있다

쓸어갈 것도 쓸려가는 것도 모두 초라한

달의 뒤편에 기울었던 해는 뜰까

새벽밥 지으러 아내 쪽문 열고 나올 때까지

양 팔뚝에 고드름 차고 뜬 눈으로 밤을 샌다

쥐새끼 한 마리 못 지나가도록 말이다.

 

-「달의 뒤편」전문

 

  ‘달의 뒤편’에는 ‘젖은 빨래를 탁탁 털어 널고 들어간 아내’같은 여자들이 살고, 그런 아내에게 ‘일수도장’을 찍은 것처럼 ‘흠뻑 두들겨 맞’아야 마음이 편한 남자들이 산다. ‘달의 뒤편’은 ‘용케도 죽지 않고 / 정신을 차려 세상을 보면 / 불똥처럼 / 외곽순환도로 위 차들이 거꾸로 붙어’가고, ‘겨울별도’ ‘늘어진 팔뚝에서 목솔기에서 / 오색영롱한 빛으로 ’뜨기도 하며 ‘옥탑방까지 올라온 / 빈 은행나무 가지들이 / 바람 부는 대로 달의 표면을 쓰고 있’는 세상에서 ‘빨랫줄에 얹혀 궁시렁 궁시렁 달을 한 잔씩 비’우며, ‘쥐새끼 한 마리 못 지나가도록’ ‘양 팔뚝에 고드름 차고 뜬 눈으로 밤을’ 지키는 사람들이 조금 특이하게 사는 이야기이다. 내가 ‘특이하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달의 앞면’에 있기 때문에 느끼는 이질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달의 앞면에 있는 사람들은 달의 환한 빛 때문에 그들이 존재하는 자체를 망각하고 살아간다. 그런 그들에게 고경숙은 ‘달의 뒤편’에서 없는 듯 존재하는 뭇 존재들을 현실로 부각시킨다.

  고경숙이 ‘달의 뒤편’에 있는 그들을 불빛처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고경숙 스스로가 그들과 같은 희미한 불빛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이 비록 ‘달의 뒤편’에서 희미하게 없는 듯 존재할지라도 고경숙이 그들의 존재를 선명하게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고경숙 자신이 그들과 같은 동류同類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경숙은 때로는 ‘같은 족속’인 그들을 그리워하며 늘 그들을 찾아 ‘시간 속을 날기 일쑤’였던 것이다. ‘억겁을 날아 차가운 얼음별에 당도하’여 겨우 찾은 그들이 정작 ‘나’의 모습이라는 고경숙의 생각은 자신의 ‘자아’에 대한 재발견이라기보다는 그들과 내가 하나라는 동류의식, 이른바 시인 자신과 그들이 오래 전부터 같은 ‘유전자’를 배열해 온 사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내 족속이 그리운 날은

무제한으로 고도를 높이고 바람을 탔다

내 몸을 힘차게 때리며 퍼덕일 때마다

수평이동은 곧 수직으로 바뀌어

가쁘게 숨을 내쉬다 보면

어느 새

시간 속을 날기 일쑤였다

 

억겁을 날아 차가운 얼음별에 당도하면

진화 중인 내가 거기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막막했다 사방은

매끈한 깃털 하나 뽑아

운석위에 이름 석 자를 적기로 했다

텅 빈 뼈마디가 공명했다

비로소 내 목소리가 주어졌지만

울음소리는 작고 짧아서

나를 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오래 지체할 수는 없었다

강력한 기류에 몸이 얹혀져

고도를 바꾸며 날 때마다 허공에 길이 생겼다

내 몸이 음표처럼 악보를 그렸다

그건 운명과는 또 다르게 나를 자극했다

 

멀리 인간의 마을이 보였다

인기척 없는 공간 속 행보를 들키기 싫었다

물가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기다렸다

피돌기를 잠시 멈추고

유전자를 재배열했다

 

-「새」전문

 

 

 

  앞서 고경숙은 그들을 불빛으로 인식한다고 했으나, 그렇다고 그들이 늘 불빛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찾는 고경숙 또한 고경숙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때로는 ‘새’나 ‘밴댕이’나 ‘오징어’나 ‘쥐치’나 ‘장님모기’나 ‘연어’ 등이 되어, 때로는 ‘수동타자기’나 ‘팥빙수’나 ‘능소화’나 ‘모란’이나 ‘석류’나 ‘마트로시카’ 등이 되어 세상 곳곳에 존재한다.

  ‘고경숙’은 그들을 찾아 세상 곳곳을 누빈다. ‘달의 뒤편’에 있는 ‘봉인된 입’과 ‘산사’와 ‘불온한 풍경’과 ‘바람 빠지는 세상’과 ‘꽃기름 주유소’와 ‘스무살의 겨울’과 ‘벙커1번지’와 ‘전등사 불두화’와 ‘탈모의 시대’와 ‘미나리꽝’과 ‘붉은 억새밭’과 ‘목계리 근처’나 ‘열섬 등을 돌아다닌다.

  고경숙은 ‘새’를 만나면, ‘새’가 되고, ‘밴댕이’를 만나면, ‘밴댕이’가 되고, ‘쥐치’를 만나면 ‘쥐치’가 되고, 심지어는 ‘수동타자기’나 ‘팥빙수’나 ‘능소화’나 ‘타워크레인’ 등이 되어 자신과 그들이 같은 ‘족속’임을 확인한다.

  이들은 모두 ‘달의 뒤편’에 존재하는 것들이며, 고경숙이 애타게 찾고 있는 불빛들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결국 고경숙은 그 희미하고 약한 빛들을 ‘달의 뒤편’에서 달의 전면前面으로 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굳이 그들을 애타게 찾았던 이유는 그들을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음별’에서 처음 그들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이름 석 자를’ ‘운석’에 ‘적’을 수 있었고, ‘울음소리는 작고 짧아서’, 비록 ‘나를 알리기에는 역부족이었’을지라도 그들을 만난 후에야 ‘목소리’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이제 그들에게 자신을 직접 알릴 수 있는 수단을 찾은 셈이다. 이제 목전에 그들의 ‘마을’이 있다. 이제 그들에게 다가가 말 걸기를 하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 되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그들을 찾는 긴 ‘여행’이 ‘유쾌한 여행은 아니었다.’ ‘중심에서 한 발짝씩 멀어지는 / 생성도 재생도 아닌 소멸로 가는 길’이기도 했으므로 때로는 그것이 힘들어 ‘의도적으로 / . 를 , 로 읽’기도 했다고 한다. ‘만약 그도 저도 허락되지 않는다면 / 차라리 말줄임표(․․․․․․)로 남겨주든가 / 응어리진 마침표는 세상 마감하는 날 오직 한번 모질게 찍고 싶다’고 그 심점을 밝히기도 한다. ‘말줄임표’나 ‘마침표’로 찍히고 싶다는 것은 ‘나’만이 그들을 찾아야 하는 종속된 관계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열거되고 싶다’는 ‘소박한 욕망’에서 오는 의도된 반항이었던 셈이다.(고경숙,「문장부호에 관한 짧은 미망록」부분)

  그러나 그들의 ‘마을’에서 그들의 각박한 삶을 직접 확인하고서야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반항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달의 뒤편』에는 ‘만두’를 빚고 있는 ‘과부’들이 산다. 오래 전에 과부가 된 시어머니도 과부고, 이제 갓 과부가 된 며느리도 과부다. 세상은 ‘오백 원 동전만’ 하다. 그리움이란 만두피 같은 것이다. ‘반 딱 접어 더는 돌아보지 않기로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양 끝에 숨구멍은 남겨둬야’ 또 외로움을 사는데 힘이 된다.(고경숙,「과부」부분)

  『달의 뒤편』에는 ‘9월 초입’의 ‘비에 젖’고 ‘잎맥만 남긴 채 해충에 모두 뜯’겨 버린 나뭇잎 같은 사람도 산다. ‘아이들은’ ‘아비 심장에 옹이가 박히는 줄도 모르고’, ‘철없이 잘 자라 주었’지만, ‘부채를 이유로’ 강제 이주 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손가락이 닳도록 일을 해도 어림 없’다. 아마도 철모르는 ‘아이들’에게도 ‘아비’의 현실이 이식移植될 듯하다. 실로 아무리 일을 해도 빚진 인생들이다.(고경숙,「나무의 지문」부분)

  『달의 뒤편』에는 사랑하고자 하지만, 사랑조차 허락되지 않는 운명의 ‘능소화’도 살고(고경숙,「능소화」부분), ‘오전을 손톱정리에 매달’리고, ‘행인들 손가락질도 이제 예사’이며, ‘지나다니는 치마폭 감아쥐고 호객하다가 / 땅거미에 하나 둘 집어등 불 밝히면 / 미끄러지며 시선 던지는, ‘이혼녀’인 ‘오!징한 여자’도 산다(고경숙,「오징어」부분).

  그들뿐만이 아니다. ‘쌀쌀해지면 붉어지는 얼굴 땜에’ 회사에서 늘 놀림을 받는 ‘안토시안 김양’도,(고경숙,「안토시안 김양」부분)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고 ‘담배를 빨 때만 빠끔히 / 얼굴이 보’이는 ‘제리’도(고경숙,「톰과 제리」부분), ‘거리가 찍어놓은 도장처럼 노을 속에 선명’한 ‘도장포 안의 굽은 아저씨’도(고경숙,「도장」부분), ‘미사시간에 늦은 것도 모르고’, ‘아가 입에 젖병을 물리며 잠재울 때도’ ‘멍하니’ 죽은 ‘안젤라’만 생각하는 ‘바울’도(고경숙,「안제라 남편」부분) 참 각박한 인생들이다.

  그들이 사는 ‘달의 뒤편’은 참 ‘미나리꽝’ 같다. 그러나 이 ‘더러운’ 세상에도 ‘울컥’ ‘꽃대궁’이 ‘올라’온다. ‘허옇게 꽃물 익어갈 서러운 내일’이지만, 그들은 ‘꽝꽝 무너지고 희미하게 일어나리’라(고경숙,「미나리꽝」부분).

  그들을 바라보는 고경숙의 시선이 ‘영화처럼 슬’퍼지는 순간이다.(고경숙,「길, 낭만에 대하여」부분) 누군가 그들의 삶을 ‘달의 뒤편’으로 강제로 구겨넣은 것만 같다.

  고경숙의 시선이 ‘달의 뒤편’을 주시할 때는 눈에 눈물이라도 머금은 것처럼 연민과 온정이 가득하지만, 시선이 그 반대편의 밝은 면을 주시할 때에는 차가워진다, 살벌해 진다.

  천고마비의 계절이요,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 전쟁 중인 듯 살벌하게 표현되는가 하면, ‘벙커 깊숙이 몸을 숨기고 있’는 그‘놈’들을 직접 ‘체포’하려 나서기도 한다(고경숙,「벙커1번지」부분). 그놈들은 불쌍한 ‘개’를 ‘배척’한 ‘주인’이기도 하며(고경숙, 「연緣」부분), ‘타워크레인’을 부하로 거느리고 있는 횡포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달의 뒤편’이든 ‘달의 앞면’이든 그 양쪽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고경숙의 시선이 제 3의 입장으로 타자지향인 듯 보이지만, 그것조차 결국은 국체적인 자기화의 한 방법이나 의도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고 보니 고경숙은 리얼리스트는 아니다. ‘달의 뒤편’의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듯하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은 ‘달의 뒤편’에 존재하는 것들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다. 이미 주관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고경숙은 휴머니스트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고경숙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그래서 대상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심사숙고하고, 대상의 아픔까지도 자신의 아픔처럼 받아들인다.

  시집을 덮고, 아파트 14층 거실에서 창밖 불빛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시인은 전적으로 순수하거나 따뜻한 마음을 소유하여야 한다. 시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뭇별이거나 군영群英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경숙이 그려가는 세상이 비록 암울할 지라도, 그가 보여주는 삶들이 누추할지라도 그 중심에 늘 ‘불빛’이 있는 것은 고경숙의 천성이 따뜻하며,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이 참 마음에 든다.

고  경숙의 시집을 읽으면, 그가 그리는 삶에 대한 ‘공감’이나 ‘감동’을 넘어 현실적인 것들조차 긍정적으로 보게 된다. 가령, 주식의 폭락 속에서도 반전이 보이기 때문이다. 물가의 폭등 속에서도, 시끄러운 정치나 우리의 암울한 경제상황 속에서도 희망이 보이기 때문이다.

 

4.

 

  개인적 이유가 있어 아이들과 함께 하며, 어렵게 어렵게 며칠에 걸쳐 두 권의 시집을 여러 번 숙독했다. 두 권의 시집에는 모두 특징이 있는 시편들이 수록되었다.

  요약하자면, 사물을 대하는 방법에 있어서 고경숙은 김영승과는 사뭇 다른 성향을 취한다.

  김영승이 사물을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자신과 동질화시키거나 이질화시키는데 반해 고경숙은 대상에게 다가가서 대상  이 내는 목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심지어는 대상이 되어, 대상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김영승의 시에서는 시적 대상이 김영승의 마음을 통과하면서 김영승이 되는데 반해, 고경숙은 대상과 함께 하면 자신을 잊고 쉽게 그 대상이 되어버린다는 데 특징이 있다.

  김영승이 대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데 비해 고경숙은 대상을 상대적으로 수용한다고 해야 할까?

  두 시인의 시가 주체적이건 상대적이건 자기지향적이건 타자지향적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두 시인은 한국문단의 다양한 모습을 대별한다고 봐야한다.

  서로 다양한 성향들이 어우러져 한국문단은 더욱 단단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국문단의 발전을 저해하는 문단의 ‘편 가르기’나 ‘편견’은 지극히 거북하고 위험한 것이다. ‘화창’한 날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빛나는 달의 앞면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이동호 : 경북 김천 출생, 2004년 대구매일신문춘예에 시로, 2008년 부산일보신춘문예에 동시로 등단, 시집 <<조용한 가족>>, 제7회 <부산작가상>, 2008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ychang23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