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2007년 중앙신인문학상 평론부문 가작]유희주의 '너와 나 사이에 난 여러

자크라캉 2009. 1. 12. 16:42

 

[2007년 중앙신인문학상 평론부분 가작]

 

'너와 나 사이에 난 여러 갈래의 길' / 유희주

 

          -거울 속 라깡이 건넨 붉은 포도주


언어가 갖는 빛깔의 다름과 숨 쉬는 기관이 틀린 시인들을 만나 그들의 시에서 색다른 감동의 파장을 느껴

보고 싶은 것은 시를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욕심이다. 이즈음 나는 획일화 되어 가고 있는 시

경향에 몹시 권태롭다. 시인은 달라도 같은 종류의 시들이 넘쳐난다. 시집을 이것저것 골라 읽던 시기가

아주 오래전으로 기억된다.


가슴 줄기에서 뽑아낸 칼을 붉은 숫돌에 갈고 있는 시인도 있었고 단단하고 투박한 언어로 여린 속살을 드

러내는 시인도 있었고 어둠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어둠과 맞서다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간 시인도 있었

고 시어를 최대한 줄여 시어보다는 여백속의 느낌을 중요시 하던 시인도 있었던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는 텃밭을 가꾸는 듯한 요즈음의 시인들과는 달리 각기 다른 무기로 언어평와 이미지를 사냥하는 역동적인

시세계를 보여 주었었다.


여러 각도에서 움직이지 않고 텃밭만 가꾸는 요즈음의 시 경향에 대한 반성이 있었지만 거반 20년간 점차

적으로 획일화 된 시 경향은 고쳐질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현재 시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경향성이 어떤 경로를 거쳐 한 가지 경향에만 치우치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모든 것이 시 역사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시경향성은 있었으니 말이다. 다

만 이제는 지루해진 시에서 권태로움을 느끼니 시인들에게는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형

식면에서는 자유시를 표방하고 있으나 시조와 버금가는 운율을 갖고 있는 현대시 여기에서 말한 운율이란

것을 다시 설명해 보자면 시조가 형식적인 면에서 운율을 갖고 있다면 현대시에서는 좋은 시의 형태가 교

과서처럼 만들어져서 시인들 스스로 거기에 맞추다 보니 습관화 된 호흡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다. 


또한 시의 재료로 자신을 제물화 시키는 시인의 모습은 없고 이미지를 갈고 닦아 만들어 내는 텃밭 시인은

너무도 많다. 이미지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함께 감상적인 효용성까지 곁들여 현재의 충돌적인

자신은 감추어 두고 과거와 늙어 버린 순응형 내일만 있는 현재의 시들에게서는 뜨거운 피를 느낄 수 없

다. 


이미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지에 가려져 버린 시인들 내부의 불안과 욕망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내가 사랑했던 다양한 시인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하는 아쉬운 마음을 한쪽에 접어

두고 요즈음 시경향의 대표 적인 시인이랄 수 있는 나희덕 시인의 시집을 다른 각도에서 평하기로 한다.


시인은 대상을 바라 볼 때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킨다. 객관적인 관찰자적 시각은 시인에게 있어선 존재하

지 않는다고 본다. 사물을 묘사할 때 사물 자체로만 표현을 하여도 그 누구나 그 대상으로 가는 길을 통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언어적 표현은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이 은유와 환유를 통해 나오는 것이

다. 우리는 시를 읽으며 시인을 읽고 그리고 시인과 동질한 자신의 세계를 읽어 낼 뿐이다.


나희덕 시인의 시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해 보려는 내 의도는 처음부터 나희덕 시인을 통해 나를 바라보

자는 것이다. 라깡은 "독자들은 텍스트를 해석/지배하기보다는 텍스트에 의해 해석/지배당한다."

 [(skura1992)라깡의 재탄생 617]고 했다.


나는 나희덕 시인의 시를 읽고 비평을 준비하면서 나의 무의식를 읽어 내고 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것

또한 비평의 유용함 일 것이어서 나는 내 잣대를 나희덕 시인의 시에 대어본다. 시인의 시집 중 '어두워진

다는 것'을 처음 만났다. 이후로 초기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와 최근 시집 '사라진 손바닥'을 만났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집을 읽었을 때의 첫 번째 느낌은 단정하다는 것이었다. 단정하다는 것은 스스로 규격

화 시킨 정신세계가 있다는 것이고 그 틀이 시인에게 독이 되었는지 약이 되었는지를 가름하기 이전에 시

에서 독자(나)에게 전이된 감동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슬픔이었다.


시인은 생활과 또 다른 세계의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그 견딤의 방법을 언어로 나타내는 사람들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심장을 그대로 내어 주는 시인도 있고 불어오지도 않은 바람을 마시는 시인도 종종 보게

된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정면으로 바라보다가 바람마저도 조율을 한 뒤 바람의 색깔을 잡아내는 시

인도 있다.


나희덕은 견고한 힘으로 흔들리지 않고 자기 성찰을 해 내는 도덕적 시인이라는 느낌이 강한 시인이다. 세

번째 유형의 시인이랄 수 있겠다.


감정 과잉으로 인한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 나희덕은 그것이 곧 단점으로 작용하여 모든 시가 너무도 모범

적이다 라는 평가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점을 잡아내기 힘들만큼 시를 참 잘 쓰는 나희덕은 현재 시

경향의 형태와 접근방법에 너무도 모범적으로 충실하여 시집 전체에서 균등한 수준을 갖고 있다.


나희덕이 갖고 있는 시적인 안정감은 너무도 도덕적이어서 정신의 자유로운 해방감을 독자에게 주지 못하

고 독자마저도 자기 성찰적 도덕심에 갇히게 한다. 타자와 접신을 하여 이곳 아닌 저곳을 기웃거리며 다른

세상을 엿보다가 스스로 그것이 되게 하는 전율을 불러오는 사람들이 시인이라는 기존의 생각에 여지없이

딱딱한 껍질을 씌워 놓는 현대 시 경향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었다.


'어두워진다는 것'에서 시를 너무도 잘 쓰는 나희덕은 자신의 단정함 때문에 스스로도 답답해하고 있다는

것을 간혹 보여 주기는 했지만 그것이 길을 터 새로운 경향을 갖게 될 것이란 기대감을 주기에는 역부족이

었다. 그것은 나희덕이 일궈놓은 나름대로의 방법에서 일탈하는 것을 독자가 혹은 시라고 규정지어진 현재

시경향의 모범답안이 허용하지 않을 지도 모르고 나희덕 시인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미 터득한 현재의 방법을 유지 할 지도 모른다.


세계를 섬세함으로 재조명하여 일탈이 아닌 앉음에 대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가 본 것들 중

더 깊이 보아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가르쳐 주는 것에서 앉아버린다 해도 나희덕 시인의 시는 충분

한 가치가 있다. 모성적인 시인이라는 평가가 주는 도덕적 규정이 나희덕 시인을 더욱 모성적이게 하여 자

유로움을 규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인의 시 세계를 받쳐주고 있는 구축력은 흘려보낼 만큼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나희덕 시인이 만들어 놓은 아름답다 못해 비수 같은 이미지들은 배재하기로 하고 나희덕

시인의 시 곳곳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시인다운 불안과 욕망에 초점을 맞춘다. 나희덕 시인이 이미지를 이

끌어 내는 감성에 용기를 불어 넣어 아직 표출되지 않고 일렁이기만 하고 있는 뿌리 밑의 불구덩이에서 수

액을 끌어 올리는 작업을 한다면 어떨까. 생각만으로도 전율이다. 그러나 그게 가능한가. 시집 세권을 차

례로 읽으면서 시인의 내면이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었고 그 변화가 이 시인을 살게 할 수도 죽게 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 변화란 그가 엿보던 불안과 욕망을 서서히 풀어내 줄 준비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나 근원적으로 그것

을 풀어내 줄 수 없는 통제력이 함께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희덕의 불구

덩이 같은 내면이 어떻게 주춤거리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통제력 또한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살

피기로 한다.



1. 이분법 흰 건반과 검은 건반


시인이라면 어린 시절 어둠에 잠식되는 미래를 한번쯤은 상상해 보았을 것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시의 형

태를 빌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 보려는 습작생들의 시는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어둠을 표현하는데서 시작

한다. 시가 어둠을 먹고 자라는 것은 욕망과 불안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근원적인 힘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희덕 시인의 내면에 유기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불안과 욕망이 요구하는 자아와 그것들을 잠재우려고 하

는 두 가지의 자아가 상호 어떻게 존재하면서 욕망과 불안을 이끌어 가는지를 다음의 시에서 볼 수 있다.



〈다시 십년 후의 나에게>


십년 후의 나에게 라고 시작하는

편지는 그보다 조금 일찍 내게 닿았다


책갈피 같은 나날 속에서 떠올라

오늘이라는 해변에 다다른 유리병 편지

오래도록 잊고 있었지만

줄곧 이곳을 향해 온 편지


다행이도 유리병은 깨어지지 않았고

그 속에 스물다섯의 내가 밀봉되어 있었다

스물다섯살의 여자가

서른다섯살의 여자에게 건네는 말

그때의 나는 첫아이를 가진 두려움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한 마리 짐승이 된 것 같아요. 라고

또 하나의 목숨을 제 몸에 기를 때만이

비로소 짐승이 될 수 있는 여자들의 행복과 불행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 자란 만큼 내 속의 여자들도 자라나

나는 오늘 또 한통의 긴 편지를 쓴다

다시 십년 후의 나에게

내 몸에 깃들여 사는 소녀와 처녀와 아줌마와 노파에게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는 그 늑대여인들에게

두려움이라는 말 대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책갈피 같은 나날 속으로

다시 심연 속으로 던져지는 유리병 편지

누구에게 가 닿을지 알 수 없지만

줄곧 어딘가를 향해 있는 이 길고 긴 편지


이 시에서 시인은 일상적인 생활과 내면이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창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두 가지

의 삶이 서로의 밖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본다. 창밖의 자신은 아이를 가진 임산부가 되어 행복과 불행을

느끼고 있다. 창 안의 나는 어떠한가 밖의 자신을 바라보면서 길들여 지지 않는 늑대여인들과 교류하려는

편지를 보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인은 길들여 지지 않은 자신의 내면속 여인들에게 깊은 사랑을 담

아 그녀들에게 족쇄를 채운 세월을 위로하고 있다.


시인의 내면이 함께 늙지 못하고 나이별로 밀봉되어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가 닿는 이 길고 긴 편지

로 인하여 시인의 삶이 엇박자로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줄곧 어딘가를 향해 있는 이 길고 긴 편지"가 나희덕 시인의 시편들이 되었을 것이다. 일치되지 않는 불

완전함이 시를 쓰게 하는 모태가 되고 있음이다. 그럼 밀봉되어 있는 시인의 뜨거운 욕망과 밀봉하고자 하

는 시인의 무의식은 어디에서부터 시작 되었을까.


시인의 어린 시절을 보면 이분법적 자아 생성 과정과 두 가지의 얼굴을 갖고 있는 자아가 은밀하게 소통의

길을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음계와 계단>


예배당 뒷문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제단 구석 검고 슬픈 짐승처럼 놓여 있던

피아노 한 대


피아노에 비친 아이는

피아노를 열고 조심스럽게 연주를 시작했다

얼었던 건반을 손가락의 체온으로 다 녹이기에

이이의 손은 너무도 작고 여렸지만

예배당의 냉기 속으로 울려 퍼지던 음들은

열 살의 아이가 가까스로 피워 올린 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뒷문이 열리고

사찰 집사가 노모를 모시고 나타나면

이이는 피아노를 닫고 계단을 내려와야 했다

제단에는 두 개의 낡은 방석이 놓여지고

무릎 꿇고 앉은 노파와 그의 아들은

알 수 없는 방언으로 또 하나의 제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은밀한 제사를 뒷문 계단에서 훔쳐보며

아이는 광기의 황홀함을 배우기 시작하고

냉기를 향해 피워 올렸던 음들은

다시 건반과 함께 얼어가기 시작했다

피아노의 검은빛은

모자의 제사를 그 길들여진 도취와 반복의 몸짓을

오래오래 말없이 비추어 주고 있었다


피아노가 음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검은 빛으로 빨아들인 몇 개의 풍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반을 다시 울리기 위해

아이가 뒷문 계단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밖은 반음씩 어두워져 갔다


피아노는 아이에게 있어 희망의 상징이었을 것이지만 그것을 갖기에는 아이의 손은 너무도 작고 여리다.

아이에게 할애된 희망의 상징인 피아노 또한 처음부터 제단의 구석에서 슬픈 짐승처럼 앉아 있었다. 겨우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향을 피워 올리듯 음을 만들어 가던 아이는 은밀한 방언으로 이루어진 광기어린

황홀을 배운다.


아이가 피워 올린 음들은 다시건반과 함께 얼어붙었고 피아노는 길들여진 도취와 반복의 몸짓을 오래오래

말없이 비추어 주고 있다. 향불과도 같은 피아노 음과 은밀한 방언으로 이루어진 광기어린 황홀은 여전히

시인을 지배한다. 피아노가 슬픈 짐승처럼 앉아 있었다는 것에서 시인의 유년은 햇빛 든 마당이 아니라 저

녁 빛을 가진 풍경에 놓여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이 어둠을 건너 피워 올린 향불은 은밀한 방언으로 이루어진 광기어린 황홀에 가려져 버린다. 여기에

서 어느 부분이 시인이 시를 쓰게 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향을 피워 올린 피아노의 음일까 은밀한 방언으

로 이루어진 광기어린 황홀일까. 그 답은 시의 마지막 연에 표현되어 있다.


"피아노가 음계를 가질 수 있은 것은/ 검은 빛으로 빨아들인 몇 개의 풍경이 있기 때문" 이 시는 어둠의

힘과 어둠을 뚫고 나오려는 힘의 팽팽한 대결 구도로 보이기 쉬우나 위의 마지막 행으로 볼 때 시인에게

있어 두 가지의 힘은 근원적으로 동질 한 것이다.


피아노 음계가 내면속의 자아라면 모자의 제사는 나에게 다가오는 타자들이 될 것이다. 시인은 자신만의

음계를 선택하여 다가오는 타자를 검은빛으로 빨아들였지만 앞으로 어느 쪽에 시인의 중심이 실릴 것인가

하는 기대를 갖게 하는 마지막 행에서 나희덕 시인의 고질적인 심리가 나타나 있다.


"아이가 뒷문 계단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밖은 반음씩 어두워져 갔다"


자신의 심리적 변화를 시간에 세월에 맡겨 버린 듯한 이 시의 결구가 어쩌면 나희덕 시인이 극복해야 할

한계 일 런지도 모른다. 자신의 음계로 연주해야 할 모자의 제사를 의지적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반음씩

어두워지는 세월에 던져 넣었다. 자칫 아름답게만 보여 지는 마지막 연에서 반음씩 어두워지는 밖에서 기

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정면으로 모자의 제사를 배우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회한이 묻어나고 있음이 읽혀

진다.



2. 욕망 네 이름을 불러 세운다


시인의 욕망은 어떠한 것인가. 라깡은 욕망은 자신의 근원을 계속 상실된 상태에 두고자 하는 다시 말해

근원적 결핍을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상태로 유지하려는 "탁월한 형태의 나르씨시즘이다"라고 했다.-라깡의

재탄생 343면-


근원적 결핍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계속 응시하는 과정 속에서 시는 태어난다. 시인이 안정된 정서에 놓이

게 되면 시인은 저쪽에서 불안이 밀려오도록 은밀히 물꼬를 튼다. 시인에게는 자신의 의식에게 언어를 빌

려 주는 행위를 주저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나희덕 시인의 시 전반은 무의식적 욕망에게 언어를 내어 주지 않고 욕망을 잠재우려는 의식에게 언어를

내어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알 수 없는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앞으로 걷고 있는 이 자세가 시인이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나르씨시즘이라면 그 기간을 의식적으로

단축시켜야 함은 시인의 이성적 몫이라 할 것이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그러한 자세로는 오래 걸을 수 없고 잠재워버린 자아의 생명은 짧을 뿐만 아니라 뒤처

져서 따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 꽃과 분홍 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하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고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데 참 왜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시인의 내면에는 여러 겹의 마음이 담긴 복숭아나무가 있다. 흰 꽃과 분 홍꽃 사이에 있는 수천의 빛깔이

그것이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아직도 너무 많아 외로운 줄도 모르는 복숭아나무가 나희덕 시인이다. 시인

이 잡고 있는 의식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왠지 복숭아나무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에

멀리에서 지나쳤을 뿐입니다. 허나 그 나무는 눈이 부십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는 참 오래 걸

렸습니다.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던 내면의 자아를 읽어 낸 시인은 이제 복숭아나무 그늘에 앉았으나 여기

에서도 세월에 욕망을 다 빼앗긴 뒤가 되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복숭아나무가 시인 자신이고 보면 시인은 자신에게 참으로 모질게 대했음이 분명하다. 독자의 욕망은 여려

겹의 꽃잎이 만들어 내고 있는 수천의 빛깔을 멀리서 보고 싶은 것이 아니고 가까이에서 읽고 싶었을 테지

만 시인의 욕망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다.


나와 나 사이에 경계를 두고 나를 그리고 또 다른 나를 노래하는 나희덕은 골방에 가두어 놓은 내면속의

자신이 사라질까 혹은 기운이 승할까를 염려하여 어느 한 쪽도 그 끝의 분명함을 알지 못한다.


'거미에 씌다'에서는 나와 나 사이의 심리적 고통을 이렇게 말한다.



〈거미에 씌다>


가만히 좀 있어봐 하면서

그는 내 얼굴에서 거미줄을 떼어낸다

저녁에 옷을 갈아입다 보면

윗도리에도 거미줄이 한 움큼 뭉쳐져 있다


낮은 허공에 걸려 있던 거미줄이

얼굴을 확 덮치던 그날부터

내 울음은 허공에 닿아 거미줄이 되었다

버둥거리며 거미줄을 떼어냈지만

내 얼굴에선 한없이 거미줄이 뽑혀나왔다

울음으로 질겨진 거미줄 위에서

때로는 흰 꽃잎을

때로는 부서진 나비 날개나 모기 다리를

건져 올리며 까맣게 늙어가는 동안

울음도 함께 늙어 말수가 줄어드는 것일까

나는 내 울음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둘러앉아 사람들은 말한다

가만히 좀 있어봐 거미줄이 묻었어

조금은 거미인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하는 것이다



나희덕은 거미가 아닌 조금만 거미인 시인이다. 왜 나희덕은 차라리 거미가 되지 못하고 나와 나의 경계를

좁히려고 하지 않는지(못하는지)는 나희덕 시인의 견고한 도덕성 때문일 것이다. 낮은 허공에 걸려 있던

거미줄이 시인을 덮친 후 시인의 울음이 거미줄이 되고 떼어내도 한없이 뽑혀 나오는 얼굴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울음이 잦아들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울음을 갖고 있게 된 시인에게 사람들은 거미줄이 그저 묻었다고

만 말한다. 시인에게 거미줄이 묻었다고만 말할 때 시인은 참으로 참담하다. 허나 거미가 되지 못한 것은

시인이 선택한 감정의 경계이다. 스스로 거미가 될 방법이 시인에게 전혀 없다고 봐야 하는가.


시인은 스스로를 일찍 늙게 하여 젊은 시절 건너야 하는 어둠의 강가에 몸을 남겨 두고 영혼은 숲에 가 있

는 혹은 몸은 숲에 가 있고 영혼은 강가를 서성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연민을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스스

로 단죄했을지도 모를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위로는 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

이 없는 나희덕 시인은 강을 우회하며 길 곳곳에서 묵묵히 대상과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아파하는 시인이

다. 


이것이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 끝내 모성적 시인이라는 틀을 갖게 하였다. 어머니가 되어본 여성이 그 이외

의 다른 여성상을 만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모성이 인간의 마지막 보루인 까닭이다.


나희덕 시인은 아직 어머니가 되기에는 이르다. 그 뜨거운 욕망과 불안을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나희덕 시

인이 진정한 어머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희덕 시인이 자기 연민을 버릴 수 없는 것은 성급하게 단정

한 미혼모의 길로 들어선 때문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즈음 젊은 시절에 건넜어야할 강을 어떻게든 건너야 한다. 우회하여 건너든 머리 풀고 맨발로 강

속에 빠져들든…건너야 함에도 몇 권의 시집 전반은 우회도로에서 서성거리고만 있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나의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나희덕 시인이 자신의 욕망을 불러내는 시를 보고 싶다. 복숭아나무가 발하는

수천의 빛깔을 만나고 싶고 조금만 거미가 아닌 완전한 거미가 되어 울고 있는 시인의 울음소리도 듣고 싶

다. 시인이 늘 시 곳곳에서 자신의 욕망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만큼 독자들도 자신의 욕망을

시인을 통해 불러내 보고 싶은 것이다.



3. 석류빛 불안이여 어서 오시라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불안 심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내 아버지가 나의 영혼에 채워 넣었던 불안을 아버지 자신의 무서운 우울을 그리고 운명을 나는 여기에

적을 수도 없다. (…)그런데도 그 불안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시인은 영혼 속에 줄을 하나 매달고 산다. 그 줄 위에 올라가 줄의 팽팽함에 기대어 줄을 건너 저쪽의 욕

망과 흔들리는 줄이 주는 불안을 느낄 때 시인은 발바닥이 느끼는 언어를 말하게 된다. 이러한 시를 읽어

본지 아주 오래 되었지만 나희덕 시인은 적어도 외줄을 언제든지 매달 수 있도록 줄을 들고 다니고 있음을

본다.


시인이 불안의 유혹에 넘어가기를 바란다면 나는 위험한 독자임에 분명하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142면)에서 "젊을 때 읽어야만 하는 다른 작가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늙어서 머리도 희고 만년이 되었

을 때 그 작가들을 대하면 그러한 작가들을 읽는 것이 결코 즐거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들레르나 포를

즐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욕일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나중에는 즐기기가 어

렵습니다. 그들의 책을 읽으려면 너무 많은 것들을 참아야만 하고 그들의 경력을 생각해야만 하고 등등 때

문에 말이죠."


이 말은 읽는 이 뿐만 아니라 쓰는 이들에게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다. 나희덕 시인이 자신의

강을 건너려고 할 때 시인은 그 강을 건너기에는 시인의 언어가 몹시 힘들 것이라는 염려를 하게 된다. 나

희덕 시인에게 배회하지 말고 어둠과의 정면 대결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시인은 이미 스스로에게 주술을 걸

고 있다.



〈석류>



석류 몇알을 두고 열 엄두를 못 내었다


뒤늦게 석류를 쪼갠다

도무지 열리지 않는 문처럼

앙다문 이빨로 꽉 찬.

핏빛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네 마음과도 같은

석류를


그 구은 껍질을 벗기며

나는 보이지 않는 너를 향해 중얼거린다


입을 열어봐

내 입속의 말을 줄게

새의 혀처럼 보이지 않는 말을

그러니 입을 열어봐

조금은 쓰기도 하고 붉기도 한 너의 울음이

내 혀를 적시도록

뒤늦게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게


자신을 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을 벗기며 보이지 않은 내면을 향해 주술을 건다. "입을 열어봐/ 내 입속의

말을 줄게.....조금은 쓰기도 하고 붉기도 한 너의 울음이/ 내 혀를 적시도록/ 뒤늦게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게" 시인은 그동안 자신이 가두어 두었던 자아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만일 시인이 너무 늦게 내면의 자아를 돌아  본다면 그의 언어는 상당부분 내면의 자아와 어울리지 않는

언어로 채워져 있을 것임을 시인 자신도 알고 있으니 너무 늦지 않게라고 스스로 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다. '어두워진다는 것'이 그러한 준비를 하는 시집이 되었다면 그 다음 시집 '사라진 손바닥'에서는 조금

씩 그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을 만나게 된다.


4. 사라진 손바닥 또는 사라진 언어들이여


시집 '사라진 손바닥'의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이렇게 외친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 이제 나를 놓아다오."


'사라진 손바닥'의 시의 전반은 '어두워진다는 것'의 시보다 이미지와 시적인 감동의 폭은 다소 떨어진다.

나는 그것을 시인이 이미지와 시적 완성도에 집착하지 하지 않고 자신과 대상의 사이에 거리감을 둔 것이

라 여겨진다.


1부 2부에서는 그 준비 과정이 있었고 3부 4부에서는 나름대로 방법을 찾은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마른 물고기처럼. 시인이 그동안 잠재웠던 자아에 대한 미련과 사랑을 시로 뱉어낸 시인은 현실 속에서 만

난 자아를 이 시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빛나던 눈도 비늘도 시들

어버렸다./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말을 잃은 자아와 어떻게 화해 할 것인가. 시인은 이제는 네가 나와도 좋다는 허락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있으나 야생의 힘을 상실한 젊은 욕망은 시인이 쳐 놓은 울타리 안에서 늙어버린 것이다. 시

인이 스스로와 화해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길은 말없는 황어가 된 자신에 대한 연민을 이끌고 강으로 되돌

아가 강을 건너보려는 시도 보다는 현재의 자신과 함께 늙은 버린 내면을 인정하는 것이다.


불완전한 여자를 지나 어머니가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머니로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한 회한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만들어져 가는 동안 다시 돌아가 강을 건너기에는 역부족인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과정에는 잠시 자기 의지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불안을 풀어 놓으려고 한

흔적을 볼 수 있으니 시인에게 길은 여러 갈래에서 손짓을 하였던 듯싶다.



〈풍장의 습관>



(중략)

바람이 잘 드는 양지 볕에

향기로운 육신을 거꾸로 매달아

피와 살을 증발시키지 않고는 안심 할 수 없던

또는 고통의 설탕에 절인 과육을

불 위에 올려놓고 나무 주걱으로 휘휘

저으며 달아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나는

건조 증에라도 걸린 것일까

누군가 내게 꽃을 잘 말린다고 말했지만 그건

유목의 피를 잠재우는 일일 뿐이라고

오늘 아침 방에 들어서는 순간

후욱 끼치던 마른 꽃 냄새 그 겹겹의 입술들이

한 번도 젖은 허벅지를 더듬어 본 적 없는 입술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나비처럼 가벼워진 꽃들 속에서



나희덕 시인은 스스로 자신을 건조시키다가 다 말라서야 마음속에 유목의 피를 돌게 할 수 있는 여유로움

이 생겼다. 한 번도 젖은 허벅지를 더듬어 본 적 없는 언어의 입술로 일제히 스스로를 향해 외치도록 우리

를 열어 놓았음이다. 또한 나희덕 시인이 세월에 자신을 던져 넣는 수동적인 문체가 자기 의지적으로 바뀌

어 감을 볼 수 있다.


"인간을 소외시키는 타자의 요구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고유한 욕망과 충동의 만족을 발견할 때에만 인간

은 진정한 인간적 주체가 될 수 있다"-자끄라깡프로이트로의 복귀 중 77면-고 한다. 나희덕 시인은 진정한

주체가 되어 자신의 고유한 욕망과 충동을 만족 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누가 우는가>


(중략)

나뭇잎을 잃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부딪치는 나뭇가지들의 것

뿌리 뽑히지 않으려고 끝내 초월하지 않으려고

제 몸을 부싯돌처럼 켜대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창 밖에 있다

내 안의 나무 한 그루 검게 일어선다



"나뭇잎을 잃지 않으려고... 뿌리 뽑히지 않으려고 끝내 초월하지 않으려고" 이것은 시인이 자기 자신을

이겨내려고 했던 일련의 사고들이 시인으로서의 감성을 떨어뜨리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내면을 향해 부싯돌처럼 불을 켜대던 시인의 자아가 검게 일어서고 있음에 힘을 실어 주었다.


초월한다는 것은 시인에게 있어서 치명적으로 시적 창의력에 손상을 준다. 초월이란 종교적으로 접근되어

야 가능하다. 결론이 있는 상태를 과정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시란 끊임없는 생각의 발현들이고 그것이 세

상으로 나왔을 때의 충돌을 시가 그리고 시인이 그리고 독자가 느낀다.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과

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인이다. 시인은 종교적인 도덕심에서 적당히 발을 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인이 나무를 대하는 방식의 변화이다. 시인이 어둠을 직접 대면 할 수 있는 힘을

키우지 못했다면 또 다시 나무 한그루를 반음씩 어두워지는 세월 속에 세워두는 것으로 종결 했을 것이다.

자기 의지적으로 일어서 보려는 시도가 깃든 시를 많이 찾을 수 없었던 까닭은 시인이 새로운 고뇌와 마주

섰기 때문이다.


풀어놔 주기만 하면 술술 풀려 나올 줄 알았던 자신의 욕망이 길들여지다 못해 내부에서 유실 됐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다시 소극적으로 몸을 움츠리게 된다.



〈그림자는 어디로 갔을까>


(중략)

그를 두고 나오는 날이 계속되고

거리에서 나는 활짝 웃는다



(중략)

내 등 뒤에 그림자가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중략)

어느 저녁 집에 돌아와 보니

그림자가 없다


(중략)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그림자를 기다린다

그가 나를 오래 기다렸던 것처럼



만나기를 원해도 이제는 만나지지 않는 유실된 자아에 대한 이러한 감상은 사실 이십대에 끝냈어야 하는

것이다. 나희덕 시인이 다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이러한 감상적인 작업을 하는 것은 건너뛴 세월을 다시

걸어 보겠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나희덕 시인이 어긋난 만남을 스스로 주선하고 있

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한다. 그동안 그토록 만나기를 두려워했던 자아를 그리 쉽게 만날 수 있

겠는가.


이 의심에서 풀려나려면 그림자를 찾아나서든가 그림자가 무엇 때문에 울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밝혀야 할

것이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를 설명할 때 "한 여성이 병든 아버지를 간호 하느라고 시집도 못가고 히스테

리가 심한 여성으로 발전한다고 인식하는 것은 '직선적 인과론'에 근거한 단순한 사고방식이라고 했다. 아

버지 병간호를 했기 때문에 히스테리자가 된 것이 아니라 히스테리자이기 때문에 병간호를 한다고 설명했

다."-라깡의 재탄생 20면-


시인이 내면 속 자아 유실의 결과를 맞게 된 것은 시인이 갖고 있는 기본 성향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언어도 나이에 맞게 변해 간다. 염려 되는 것은 나희덕 시인이 서성대고만 있는 강물의 깊이에 어울리는

언어가 조만간 소실되고 새로운 언어가 영역을 넓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는 서성대는 것을 접어야 하는데 이 강을 정면으로 건너지 못하면 서성대는 고질적 질병을 고칠 수가

없다는데 있다. 나희덕 시인도 그것을 알고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에게 나를 놓아 달라고 애

원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강을 무사히 건너야 나희덕 시인은 타자를 통한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타자를 위

하여 시인의 몸과 언어를 내어주는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라진 손바닥'의 3부 4부에서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것들과 정면으로 맞서는 시편들을 기대했으나 시인

은 잠재웠던 내면이 유실된 것을 인정하고 자신에 대한 연민을 거두어들이는 길을 선택했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시인이 더욱 견고한 어머니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던 과정은 이러하다.



〈사라진 손바닥>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이 처연한 한편의 시에서 시인이 지나온 세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 꽃은 자신의 모습이 몇 천의 모습으로 그대로 다 드러나 또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그러한 흰 꽃이었을

것이지만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수많은 창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거대한 폐선처

럼 가라앉고 있네"라고 했다.


이 슬프고 쓰린 시 속에서도 시인은 시에 대한 혹은 자유로운 욕망의 분출에 대한 집착을 이렇게 나타냈

다. "발밑에 떨어진 잡알들 주워서/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무언가를 심고 있으니 오랜

세월 지나면 꽃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게 하는 것이다.


아직도 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 이 시집의 끝머리에서 시인은 "땅

속의 꽃"이란 시를 썼다. 이것은 심리적인 갈등이 있었던 과정에 대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땅 속의 꽃>


땅 속에서만 꽃을 피우는 난초가 있다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본 사람이 드물다 한다

가을비에 흙이 갈라진 틈으로 향기를 맡고 찾아온

흰개미들만이 그 꽃에 들 수 있다

빛에 드러나는 순간 말라버리는 난초와

빛을 피해 흑을 파고드는 흰 개미

어두운 결사에도 불구하고 두 몸은 희디희다

현상되지 않은 필름처럼 끝내 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온몸이 뿌리로만 이루어진

꽃조차 숨은 뿌리인



시집의 첫 번째 시인 "사라진 손바닥"에서 세월이 흐르면 흰 꽃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감을 거부하는 몸짓

으로 시집을 마무리 하였다.


시인에게 있어 자신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을 벗어 던지는 일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일

이었음이다.


시인은 도저히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내면에 대한 위로를 '땅 속의 꽃'에서 꽃조차 숨은 뿌리라고 말하

여 준다. 이 시에서 시인은 땅속의 꽃에 당위성을 주려고 한다.


자신에게 들 수 있는 흰개미 같은 언어와 함께 현상되지 않는 내면의 필름을 그냥 뿌리로 살게 내버려 두

려고 하는 것이다.


시인은 시 곳곳에서 이 길을 계속 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하지도 지난 여름날/뙤약볕 아래 드문드문 피어 있는/버려지지 않고는 피어날 수 없는 꽃을" (담배꽃을

본 것은) "제 목숨보다도 단단한 돌을 품기 시작한 /그의 옆구리를 보려고/ (중략) 불멸과 소멸의 자웅동

체가/ 제 몸에 자라고 있는 줄도 모르고" (소나무의 옆구리) "깜박거리는 불빛이 새삼 서러운 것은/누추한

지붕 때문이 아니다/그 불빛 아래 내가 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너무 멀리 떠돌다 여기에 이른 까닭이다"

(낯선 고향)



시인은 4부에서 정서가 안정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 허나 나의 염려는 시인의 욕망과 불안이 안정을 유

지하며 뿌리로만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뿌리의 역할은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고 꽃을 피우지 못하는

줄기라도 승하게 하는 것임을 시인이 모를 리가 없다.


나는 시인이 언어에 대한 힘과 시인을 통제했었던 힘이 욕망과 불안을 정면으로 맞설 때 도움을 줄 수 있

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길이 오히려 쉽기도 하고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의

조용한 시도에 눈을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였다.


"감정의 조절 능력을 갖는 것이 매우 바람직 할 수도 있으나 다른 관점에서는 그것이 과연 좋은 성과를 올

릴지 의심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양하고 여러 빛깔의 인정어린 사회적 교제를 박탈

하기 때문이다." (칼 구스타브 융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21면) 시인은 진정으로 그 길을 갈 수 없었는가!


지금까지의 시편들이 욕망과 불안을 도덕적인 통제력으로 견제하면서 느껴지는 심리적 분열 상태였다면 앞

으로는 완전히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갈등하는 과정이 될 것이지만 결론은 이미 갖고

있는 듯하다. 계속적인 희생과 내려놓음이 시인이 갈 길임을 다음의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어떤 출사>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 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를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 두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한 움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나는 시인의 아름다운 시편들보다 스스로를 우리에서 못나오는 짐승쯤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시인의 무의식

적 모습이 눈에 먼저 들어 왔었다. 자아를 견제하는 힘이 강한 시인은 더욱 낮은 저음으로 자신을 희생과

성찰의 길에 내려놓는다. 한 움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가 될 양으로 걸어오던 길을 계속 걷고자 하는 것이

다.


폭포같이 쏟아져 내려 버리는 무수한 감정 중 어느 하나에라도 생을 던져 넣어 본 적이 있었다면 나희덕

시인의 시는 칼 융의 말처럼 여러 각도로 자유스러웠을 것이지만 그것이 나희덕 시인에게는 이제는 도전할

수 없는 강이 된 듯하다. 나는 이즈음에서 이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성향의 문제임을 인정하게 되

었다. 


강을 건너려 하는 자아를 스스로 잠재우던 시편에서 강을 건널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편을 지나 지금은

유실된 자아를 인정하는 시편으로 건너오는 동안 많이 달라진 듯싶지만 사실은 한 가지 성향으로 걸어 온

것이다. 시인은 지금도 사투 중에 있을 것이다.


시인의 사투로 인해 조만간 강을 메워 버려 그 강에 대한 흔적을 볼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 나희덕 시인

은 많은 언어를 갖고 있다. 어둠에 천착했던 한 시인이 중년을 넘어가며 어둠의 언어도 소실되고 새로운

언어도 찾지 못해 그대로 어둠도 아닌 어둠을 읊조리는 앵무새가 되었다는 회한의 시를 읽은 적이 있다.


나희덕 시인에게는 강을 건너지 않더라도 유실된 자아를 인정하더라도 걸어가던 그 길에서 둥근 사리가 되

어 남아 있을 수 있음을 믿게 하는 여린 듯 여리지 않은 뚝심을 갖고 있다.


강이 메워지지 않는다면 간혹 시인은 그 강가로 되돌아가고 싶은 자신을 발견 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도 괜

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시인이 가고자 하는 길의 과정에서 잠시 꿈을 꾸듯 머물 것이고 더 이상

갈등과 방황의 연속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자유로운 시인도 필요하지만 도덕적인 성찰의 힘이 강한 시인 또한 필요하다.


처음에는 미혼모처럼 모성으로 가는 길에 접어들었었지만 시인은 어느새 진정한 어머니가 되기 위해 자기

연민을 벗어나 희생과 내려놓음의 길에 들어섰다. 그것은 돌아가 강을 건너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길이 될

것임을 안다. 아주 오랜 세월 그렇게 걸어 왔고 아주 오랜 세월 그렇게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시인에게 있

어 욕망의 자유함은 미망에 그칠 것이다.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한 시인으로부터 희생당한 시인의 욕망에게 위로의 붉은 포도주 한잔을 건넨다. 그리

고 시인이 선택한 길에 부합하는 형태로 다시 살아나 줄 것을 속삭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