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지명들 / 김형술

자크라캉 2009. 2. 10. 10:20

                          사진<하늘 속에 사람들 P.B.H>님의 블로그에서

 

 

명들 / 김형술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공간, 어떤 지역, 어떤 지명에 관한 크고 작은 기억들을 갖고 있다. 어떤 지명이 가진 그 공간만의 특성으로 인해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된 기억 혹은 추억들. 그것들은 한사람의생애가 가져온 시간 속에 키 큰 나무의 뿌리처럼 크고 작은 영향들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내가 태어나 자란 곳, 잊히지 않는 청춘의 한때가 영근 곳 또는 한 사람의 삶에 결정적인 정서를 부여한 곳이 되기도 하는 지역과 지명들은 한 사람의 삶에 여러 겹의 무늬를 새긴다. 하물며 늘 두 눈 부릅뜨고 제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시인들에게야 두말 할 나위가 있으랴. 그것들은 시인의 시세계와 그 근간을 이루는 바탕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시인의 시적 성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모티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시에 등장하는 여러 지명들은 그 자체로 간과할 수 없는 의의를 지니거나 부여받게 된다.

또 어쩌면 시인들의 시에 등장하는 지명들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익숙한 지명이거나 전혀 낯설고 생소한 지명이거나 상관없이-- 독자들 개개인이 가진 제 나름의 지역적, 지명적 인상이나 기억에 의지해 어렵지 않게 한 편의 시 속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된다.

하나의 지명이 잊고 살았던 어떤 기억 하나를 불러 낼 때 하나의 지명을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잊고 살았던 다른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소리내어 불러줄 때, 그것들 속엔 전혀 다른 얼굴과 의미들이 숨어있음을 알겠다.

 

외발 리어카에 어둠을 담고 골목을 오른다

골목이 내 모습처럼 흔들린다

이 어둠을 밀어내고

늦도록 돌아가는 아내의 미싱소리

아내는 끊어지는 윗실을 바늘귀에 끼우며

띄엄한 삶을 깁고 있을 것이다

북집에서 밑실 한 가닥 뽑아 꿈을 기웠던 친구들도

되돌림질에 헐어 이제는 이 골목을 오르지 않는다

흔들거리는 골목을 혼자 오르며

조임새를 맞추고

삐걱이는 꿈을 다독여 눕힌다

피댓줄을 끼우고 헛도는 북집에 기름도 친다

아내도 가끔

드르륵거리는 미싱 소리처럼 끓어오른 가래침을

하청받은 삶 위에 카악,

뱉어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무좀 걸린 아내의 미싱 소리 소복한 오르막 끝 집

골목을 꼭 잡는다

실눈 뜬 아내 서녘 끝 초승달에 生 한 가닥 끼우고 있다.

 

-유행두, 「內동 629번지」(『서정과 현실』2007년 상반기) 전문

 

[유행두]

2007년 한국일보(동화), 경남신문(시) 신춘문예로 등단, 2004년 [신라문학대상]당선

 

때로 어떤 기억들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기억 이전에 먼저 존재한다. 어쩌면 아름다운 기억들은 꽃과 같은 것이어서 쉽게 낙화하여 흙 속에 파묻혀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절망과 고통에 관한 인상과 기억들은 강철 같은 것이어서 표면은 붉게 녹슬어 있을망정 그 속은 여전히 쉽사리 부러지지 않는 강철 본연의 단단함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內동 629번지」는 서울이나 목포 혹은 창원이나 마산 어디가 되었던 여전히 우리가 사는 지상의 어딘가에 존재해 왔거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공간, 그 공간을 부르는 지명일 것이다. 시인이 혹은 우리가 설사 그 공간을 이미 떠나왔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의 귓가에 여전히 남아있는 “늦도록 돌아가는” “드르륵거리는 미싱 소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흔들리는 골목”과 “외발 리어카”에 담긴 어둠과 자꾸만 “끊어지는 윗실”은 우리의 내부에서 여전히 움직인다. 이 가난하고 쓸쓸한 골목의 풍경은 굳이 ‘內동 629번지’ 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삐걱이는 꿈을 다독여 눕”히는 중이며 “피댓줄을 끼우고 헛도는 북집에 기름”을 치는 중이며 “미싱 소리처럼 끓어오르는 가래침을/ 하청받은 삶 위에 카악,/ 뱉어버리고 싶”은 일상을 묵묵히 견디며 건너는 중이다. 유행두의 ‘內동 629번지’ 역시 하나의 지명을 개별적 공간에서 벗어나 시인의 내면, 우리들의 내부 속으로 현실의 구체적인 형상을 가진 공감각적 지명으로 되돌려 준다.

근대화의 물결을 이미 건너와 첨단 산업화의 한복판에 놓여있다고 믿거나 믿고 싶은 우리들의 마음 기저엔 미처 지우지 못한, 아니 결코 지워지지 않거나 지울 수도 없는 기억들이 여전히 도사려 있다. 그럴 때 시인의 기억 속에 각인된 하나의 지명은 그저 기억일 뿐인 추상적인 관념에 생생하고 구체적인 얼굴을 되돌려주는 계기와 기폭제가 된다. 그런 숨겨진 얼굴들을 여기 이곳에 다시 불러내는 일은 결코 서너푼짜리 감상적인 향수이거나 과거에로의 무기력한 퇴행이 아니다. 문명의 이기와 물질자본의 편리에 길들여져가는 우리의 자화상을 재확인하는 길이며 현재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날카로운 잣대가 될 수 있다. “미싱 소리 소복한 오르막 끝 집”에서 우리는 얼마만큼의 거리에 와 서 있는가에 대한 쓸쓸하고 날카로운 잣대.

 

 

-김형술

경남진해출생. 199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의자와 이야기는 남자』『의자, 벌레, 달』『나비의 침대』와 산문집으로 『향수 혹은 독』『영화, 시를 만나다』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