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시가 비평에게, 비평이 시에게 / 조연정

자크라캉 2010. 3. 5. 13:20

시가 비평에게, 비평이 시에게

 

조연정

 

 

 

내 손이 어색하게 움직여도

너라면 충분히

너의 이야기를 쓸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신해욱, 「보고 싶은 친구에게」

 

 

1.

 

옥타비오 파스(O. Paz)는 모든 시편(poem)은 가능성일 뿐이라고, 그것은 독자나 청자를 만날 때에만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적인 것은 시편이라는 형식을 통해 서서히 일어설 수 있으며, 결국은 독자와 더불어 완성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한 편의 시 작품은 최소한 자신이 품고 있는 시적인 것을 모조리 방출하기를 원할 텐데, 그것은 독자 없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시적인 것을 완성하려면 시와 독자는 사랑과 믿음으로 서로에게 기대는 사이좋은 연인이 될 필요가 있다. 온몸을 내던져 서로에게 구애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비평가는 무엇을 하는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비평가는 시와 독자의 열정적 만남을 위해 시를 독자에게, 또 독자를 시에게 이끌어주는 역할을 주로 한다. 보통의 독자보다는 스스로가 시와 좀 더 친밀하다는 전제를 믿으며 말이다.

그런데 2000년대 우리 시단을 생각해보면, 이 같은 일반론이 적용되기 힘들다는 생각도 든다. 간단히 말해, 시는 난해해졌고 독자는 줄었기 때문이다. 독자를 잃게 된 시도, 독자 앞에서나 시 앞에서나 자신감을 잃게 된 비평도 모두 난감한 지경에 처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제 시는 비평가를 자신의 마지막 독자로 여겨야 할지 모르며, 비평가는 즐거운 중개인으로서보다 무력감과 외로움에 직면한 유일한 독자로서의 역할에 집중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시대, 시와 비평은 타인의 인증을 받지 못하는 비밀 연애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듯도 하다.

바디우(A. Badiou)가 라캉(J. Lacan)을 참조하여 예술과 철학의 관계를 히스테리자(l'Hystérique)’와 ‘주인(le Maître)’의 그것으로 이해했던 것을 시와 비평에 적용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주) 히스테리자가 “진리는 여기 있으니, 내가 누구인지 말해 봐요”라고 요구할 때, 주인은 골머리를 앓을 뿐 결국 알맞은 대답을 찾아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시(예술)가 진리에 관한 반짝이는 질문을 던질 때, 비평(철학)은 언제나 그 질문에 한참 모자라는 대답으로 시(예술)를 실망시킨다. 이때 비평(철학)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굳이 바디우의 설명을 따르지 않더라도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비평(철학)이 선택한 두 가지 길을 떠올릴 수 있다. 무조건 숭배하거나, 아니면 배척하거나. 두 가지 길 모두, 진리를 향한 시(예술)의 작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진리와 예술의 관계를 (대놓고 혹은 은연중) 인정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역사적으로 시와 비평이 평화로운 연인이었던 적은 별로 없다. 비평은 주로 ‘사랑의 매’인양 쓴 소리를 내뱉으며 자신의 권위를 챙기려했고, 시는 그런 비평에 콧방귀를 뀌어 왔다. 혹은 비평이 열렬한 찬사를 보낼 때에도, 시는 역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요즘처럼 시와 비평이 오로지 상대에게만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적대와 불화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비밀 연애를 하는 연인들의 불타는 사랑이 서로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실망으로 맥없이 식어버리게 되듯 말이다. 진공의 상태 속에 놓인 연인들은 사랑과 믿음보다 오히려 증오와 불신을 키워가게 된다. 아무도 그들의 사랑을 지지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아픈 말을 내뱉게 되고 그러다가 서로 지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비밀 연애의 최후가 아닐까. 최근 비평을 비평하는 시 몇 편을 보면서, 시종일관 비평에 무심하던 시가 급기야 비평에게 쓴 소리를 건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위기를 감지하게 된다. 시와 비평의 관계가 비평의 노력 없이 어쩌면 파국에 이를 수도 있다는 불안이 느껴지는 것이다. 파국은 다름 아닌 ‘시적인 것’의 파국일 것이기에 문제는 심각하다.

 

 

2.

 

- 이 손가락은 문제가 많아요. 나의 간편한 혀로 비난하거나 공격할 수 있어요. 군중의 물결 위를 누비는 부드러운 서핑 보드처럼요.

- 무엇이 문젠가요?

- 허공에서 내려올 줄을 몰라요. 가리키는 것이 눈에 띄지 않고 뜯어볼 수가 없어요. 결정적으로 용도가 없어요.

- 최소한 날림치는 아니니까요. 바람 불면 손가락 방향이 흔들리도록 제작된 거예요. 용도는 무수한 통로 안에 있으므로 하나의 열쇠로 집약되지 않아요. 빛과 합창으로 세공된 당신의 취향은 어눌한 나의 혀보다 짧군요.

 (이민하, 「문제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이제 내가 말해주지

지나가는 고장의 이름들에 타라, 그 이름은 촌충같이 길 수도 있고 칡처럼 향긋할 수도 있지. 너의 얇은 바짓가랑이 사이를 휙 지나가는 그것을 느낄 것. 모르는 사이 어둠은 문어발처럼 숨 들이마시는 폐 속으로 뻗쳐온다. 빛의 국숫가락이 씹히지도 않은 채 넘어간다.

(진은영, 「비평가에게」, 『우리는 매일매일』)

 

결정적인 두 편만 인용했다. 이민하의 「문제작」과 진은영의 「비평가에게」이다. 이민하가 비평가(혹은 독자)의 태도를 혐오하며 비난할 때, 진은영은 부드럽게 충고한다. 모두 새겨들을 만하다. 이민하의 말처럼 간편하게 비난하거나 공격하며 권위를 내세우려는 비평도, 시가 ‘암시’하는 것을 천천히 느끼려하기보다 ‘지시’하는 것만을 성급히 읽어내려는 비평도, 박식한 이론과 세련된 취향을 뽐내기 위해 시를 해체·조립하는 비평도 우리는 숱하게 본다. 그런데 시가 보기에 꼴불견인 이 같은 비평적 태도들은 아마도 ‘히스테리자’를 대하는 ‘주인’의 곤궁에서 비롯된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숭배’하거나 ‘배척’하거나 두 가지 길 위에서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비평이, 이즈음 유독 “문제가 많아요”라며 ‘배척’의 길로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최근의 시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해졌다는 이유 때문이 아닐까. 솔직하지도 못한 비평이 안쓰러워 진은영이 다정하게 일러주는 것은 “그것을 느낄 것”이라는 원칙에 관한 것이다.

시에 대해 매번 혼잣말을 내뱉고 말았던 비평은 이 같은 시의 쓴 소리가 조금은 반갑다. 비난보다 더 끔찍한 것이 무관심이 아니던가. 내내 무심하던 시가 비평에게 응대를 해준 것 같아 고맙기까지 한 것이다. 비평을 비평하는 시는 비평의 반성을 촉구하지만 더불어 시의 고독을 증명하고 있는 듯도 한다. 시는 외로운가보다. 왜 그럴까. 다시 한 번 옥타비오 파스를 빌리자면, 시인이 고독하다는 것은 그 사회가 하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인의 창조적 불꽃은 언제나 일정한 높이에서 역사적 수준의 하강을 고발하며, 난해한 시인들이 더욱 높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파스는 말한다. 사실, 바디우의 말마따나 명명 불가능한 ‘사유’와 ‘현전’으로서 ‘작동’하는 시는 언제나 난해한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을 텐데, 오늘날의 시가 유독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 결과적으로 시가 극심한 고독을 토로하게 되는 것은, 어떠한 진정한 사유도 불가능한 우리 시대의 불행한 조건을 증명하는 현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고독한 시의 (어쩌면) 유일한 파트너로 남은 비평은 더욱 솔직해지고 더욱 열렬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시대의 가까스로 가능한 사유를 위해서, 그리고 ‘시적인 것’의 파국을 막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3.

 

아주 평범하게 말하면 시를 읽는 일이 그저 좋아서, 마음에 남아 있는 어떤 구절들 때문에, 그 구절들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욕망이 커져서, 무언가 쓰고자 했던 게 비평이 되었던 것이겠다. 적어도 누군가의 소박한 시작은 그렇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마냥 좋기만 할 수가 있겠는가. 온몸을 감도는 ‘시적인’ 경험에 대해 적확한 말을 찾지 못해 당황스러웠던 기억도,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을 삼켜버려야 했던 안타까운 기억도, 정답이 있을 리 없는데도 마치 오답을 제출한 학생마냥 식은땀이 흐르던 부끄러운 기억도 물론 모든 비평에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한 이 당황스러움과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은 계속될 것이다. 처음 시작의 어쩔 수 없음은 난감한 상황들이 점점 늘어난다고 해서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 고통스러운 글쓰기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시와의 연애 속에서 느끼는 한 순간의 내밀한 충만함은 내내 겪는 고통을 무릅쓰게 하는 강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평은 언제나 자신에게 무심하고 때로는 불쾌감을 드러내기까지 하는 시의 곁을 영원히 떠날 수가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연모의 대상으로부터 쓴 소리를 돌려받은 비평이 할 수 있는 변명도 이것이다. 바르트는 “사랑에 대해 쓰고자 하는 것은 언어의 진창과 대결하고자 함”(『사랑의 단상』)이라고 말했다. 언제나 지나치게 많은 언어와 지나치게 적은 언어가 있는 것이다. 언어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는 비평의 시 사랑은 그래서 더욱 열렬한 준비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시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진심을 다해 어루만져야 할 것이다. 시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충심과 열정을 담아 뜨겁게 마주 보고 온몸을 던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비평이 시라는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윤리적 사랑이다. 비평이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텍스트를 전혀 장악하지 못했다는 열패감이 아니라 텍스트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자신감이다. 아마도 시가 꺼리는 것도 비평의 이 같은 성급한 자신감이 아닐까. 시가 바라는 것은 천천히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비평이지 겉에서 이말 저말로 참견하는 비평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언어로 애태우는 미개한 종족인 시와 비평이 동고동락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시인의 언어는 제대로 ‘작동’되지 못한 채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우리 시대는 ‘시적인 것’도 진정한 ‘사유’도 더 빠르게 잃게 될지도 모르겠다.  

글쓰기는 당황스럽고, 안타깝고, 부끄러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즐거운 놀이가 넘쳐나는 화려한 시대에 그 괴로운 일을 왜 계속 할까. 바깥에서의 괴로움은 안쪽에서의 유일무이한 희열로 인해 충분히 보상받기 때문일 것이다. 비평에게 충고하는 시에게, 이제 비평이 답한다. 멈추지 않고 너를 쓰다듬을게. 그런 애무가 될게. 물론, “내 손이 어색하게 움직여도/너라면 충분히/너의 이야기를 쓸 수 있으리라 믿는다.”(신해욱, 「보고싶은 친구에게」) 시와 비평의 비밀 연애는 더욱 뜨거워져야 하리라.  

 

주) 알랭 바디우, 『비미학』, 장태순 옮김, 이학사, 2010, p.10. 이하 한 단락의 내용은 이 책의 첫 장 「예술과 철학」을 참고하여 서술하였음을 밝혀둔다.

 

출처 : 2010. 《문장웹진 3월호》

2010-03-02 10:12:04 ⓒ 2010년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