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정철훈 시인의 "개같은 신념"

자크라캉 2008. 9. 9. 14:21

철훈 시인의 "개같은 신념"

정철훈 시인은 1997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백야>,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살고 싶은 아침』『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하며 개성적인 목소리를 시단에 던져온 시인은 세 번째 시집 『개 같은 신념』을 펴냈다. 그 동안 남다른 가족사와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북방’에 얽힌 민족사를 시 안에 적극 끌어들이는 한편 광주로 상징되는 한국 근대성의 파산 과정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며 역사와 현실을 노래했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여전히 현실 문제에 깊이 천착하면서도 자신의 실존적 고민을 절절하게 토로한다. ‘생활인으로서의 시인’의 고뇌와 그 ‘견딜수 없는 나날들’에 대한 실존적 성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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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 같은 신념』

 

 총 3부로 이루어진 이 시집은 거대담론의 시대에서 미시담론의 시대로 접어든 현재에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시인은 목소리를 낸다. 이 시집에 대해 시인 강희안은, 느낌으로만 감지되는 얼굴 없는 적과 파편화된 후기 산업사회의 인간 의식을 다루기 때문에 '해체적 리얼리즘'의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1부에서-

 

 실존적 서사를 가득 담은 비애의 표정을 띠며, 아내와 애인 사이에서 방황하듯 생활과 꿈 사이의 괴리에서 어쩌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서성거리는 ‘생활인으로서의 시인’의 고뇌와 ‘견딜 수 없는 나날들’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상실감이 때로는 위악으로 때로는 탄식으로의 성찰로 드러낸다.

 

  아내가 장기라도 팔아야겠다고 말했을 때
  내 몸은 수만 볼트 전기에 감전된 듯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게 농담 비슷한 것인 줄 알면서도
  내게는 농담이 아니었다

  농담이 먹히지 않았다
  하긴 쓰린 속을 움켜쥔 지하철 변소간에서
  장기 고가구입이라고 쓴 낙서를 읽기도 했었다
  인생이 낙서라면 좋았을 것이다
  대체 누가 장기를 사고파는지 궁금했는데
  파리 한 마리 때려잡지 못하는 아내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근 사백을 다달이 입금시키고 있는 나는

  건실한 샐러리맨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도

  그 동안 내가 세상에 판 것은 내 시들어가는 몸이었고

  때로 굳게 맹세한 영혼까지도 저당잡혀왔는데

  내게 더 팔 것이 있다면 그건 좆일 것이다 하지만

  삐죽삐죽 흰 털이 나기 시작한 사십 중반의 힘없는 물건을

  대체 누가 살까

  내가 이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 팔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봐도 팔 만한 것은 역시 장기밖에 없었다

  아내의 말이 옳았다

  천천히 더듬어보면 아직 팔 만한 장기가 남아 있을 것이다

  아내는 더 살아보자고 나를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집 문서를 은행에 넣고 현금카드빚을 저금리로 돌리고 난 후

  내가 생활난을 걱정하고 있을 때

  아내는 생존을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이빨로 우적우적 씹어댔다

  엄지와 검지의 살점이 떼어지고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아무 감각도 없었다

  언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내게 남은 것은 좆껍데기도 아니었다

 

                                           - 「생활의 배반」-

 

 

 주변을 비판하지 않고 자신의 어려움을 드러내는데 아내는 애정의 동반자이가 적대자로 보여진다. 시인은 다른 작품들에서 줄곧 ‘아내’에 대한 의식을 풀어헤쳐 보여주는데, 이때 아내는 시인의 신념과 생활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자로 나타나고 있다.
 거르지 않는 날언어로 자기를 폭로하면서 꾸미지 않은 진솔한 언어가 김수영의 시를 보는 듯 하다. 생활고의 절실함을 담담하게 표현하는 소박한 언어로 표현했다.  튀지 않으면서도 주술적인 마력이 깃든 듯한 언어의 유연함이 행간에 깊고 푸른 물이 있어 푹 잠기는 듯 하다.

 

  내 애인은 시인이다
  요즘 들어 아내는 부쩍
  나를 의심하는 눈치다
  뻑하면 집에 들어오지 않거나
  밤샘 폭음의 아스라한 흔적 뒤에는
  늘 애인이 있기 마련이라며 입에 거품을 문다
  애인을 버리지 않으면 갈라설 수밖에 없다
  마지막 경고다
  아내가 내 목에 비수를 들이밀 때
  나는 애인을 부정한다
  그런 게 어디 있겠느냐
  내 주제에 애인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애인을 모른다고 잡아떼고
  그러면 아내는 내 등을 토닥이며 위로한다

  애인 따위는 잊으라

  난 평범한 남편을 원할 뿐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지만

  내가 애인을 사랑하기에

  원고지 칸칸을 메우듯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아내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단 하나

  애인을 사랑할수록

  아내를 철저히 속여야 한다

  내가 애인을 사랑할수록

  내게 애인은 없다

  어젯밤도 애인의 귓볼을 물고 뜯으며

  길고도 깊은 사랑을 나누었지만

  아내와는 갈라설 수 없다

  요즘 들어 부쩍 생각건대

  내가 살 길은 시를 죽이는 쪽이다

  나를 죽이는 쪽이다

                                       -「 시인 죽이기 」-

 

 아내의 말은 틀리지 않는다. 자본주의 시대에 시는 전혀 도움되지 않는 인식의 아내다.
 시가 곧 애인이 되는 시인은 죽도록 시를 쓰지만 시는 시인에게 생존할 수 있는 사소한 도구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나 아내는 시인에게 생활인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하며 비수같은 경고를 한다.

 일본의 어느 영화 감독은 ' 가족은 누가 보지 않으면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했다.

 시인은 가족을 버리기보다 자신을 죽이는 쪽으로 다짐한다.
 ‘시적인 것’과 ‘생활적인 것’이 이율배반으로 분할되어 시인의 영혼을 규정하고 억압한다. 그래서 시집 속에 흩뿌려져 있는 ‘나’는 ‘아내’가 있는 집으로 귀가하지 않는다. 

  

   밖에는 비가 오고 아내는 지금 샤워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이 젖어드는 칠월 장마철
   비애의 강이 안팎으로 흘러가는데도
   나는 내가 젖지 않는 이유를 모른다
            

   빗줄기와 샤워 물줄기 사이에 서 있으면서도

   물 한 방울 묻지 않는 내가 죽이고 싶도록 밉다 하지만

   아내는 죽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어젯밤 아내는 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나를 기다리다

   화장실 문고리에 넥타이를 걸어놓고 목매는 시늉을 했더랬다

   

   그러니까 아내는 자살 미수 후 긴 잠에서 깨어나

   비 오는 아침에 뜨거운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인데 아내는

   내가 늦바람이 나서 뻔뻔하게도 어떤 낯선 분냄새를

   버젓이 묻혀왔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아내여, 죽음은 리허설이 없다

   딸년도 아들놈도 조금은 슬프게 웃지 않았던가

   혼절한 듯 쓰러진 엄마를 일으키던 아이들이

   우리가 벌이는 애정행각에 시큰둥하지 않았던가

   녀석들은 아마도 유행가로 배웠을 테지만

   사랑이야말로 쓰라린 배반임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비와 샤워는 의심의 음악인 셈이지만

   나는 그 의심에 젖지 않기로 한 것이다

   한번 삿갓을 눌러쓰면 하늘이 보이지 않듯

   아무리 비가 와도 나는 젖지 않는다

 

   그래도 어젯밤은 너무 아슬아슬해

   하마터면 모든 걸 실토할 뻔했다

   아내의 신파적 자살 시늉이 두려운 게 아니라

   내가 비애의 강에 풍덩 빠져버렸을 때

   나 역시 자살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이 두려웠다

 

   아내여, 내가 젖는다고 세상이 바뀔까

   사랑도 죽음만큼이나 간단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미수 사건 후 집에서 키우는 요크셔테리어 두 마리가

   아내의 품속을 번갈아 들락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는다

   내가 불러도 녀석들은 오지 않는다

 

   개들이 진실의 냄새에 더 민감한 것이다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코와 입에서

   연기를 내뿜던 나를 녀석들은 차갑게 외면했다

   그건 개들의 신념이다 본능이다

 

   사랑의 기압골이 맞부딪쳐 오늘은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아내는 지금 뜨거운 샤워를 하고 있다
   아내여, 지금 맞고 있는 물줄기가 사랑임을 왜 모르는가
   물 위에 쓰는 것이 사랑인 것을
   내가 젖지 않는 이유는 이미 내가 젖어 있기 때문임을

  

   개들의 신념보다 나의 신념이 때로는 진보일 수 있는 게다
   그러므로 나는 뉘우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실토하지 않을 참이다
   아이들도 못난 아버지를 이해할 날이 오겠지
   사랑도 죽음과 같아서 리허설이 없다는 것을

 

   빗줄기가 아무리 거세게 나를 의심한다 해도

   나는 참말 고백할 게 없다

   아내여, 물기가 마르거든 말을 붙여다오

   고백하지 않는 당신의 신념이 뭐냐고

   물 위에 쓰는 사랑이 대체 뭐냐고

 

                                          -「개 같은 신념」-

 

  예술가로서의 자아와 생활인으로서의 자아가 분열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이다.
자살 시늉하는 아내의 신파적 절규에 자신이 오히려 자살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자본주의 관념에 노예가 되라고 하는 아내에게 아내보다 시를 더 사랑한다고 하는 고백을 할 뻔한 시인.

 초기 시집에서 역사를 끌어안았고 두 번째 시집에서 북방 유이민의 삶을 끌어안은 시인이  가족을 껴안는 것에 힘겨움을 느낀다면 시인의 의식이 협소해진 것일까.

 그렇게 단순히 이해하기보다는 근대성의 파산이가져온 결여 형식을 비판하면서 그 비판의 칼날을 자신의 내면을 향해 겨누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된다고 본다. 
  시인은 거대담론의 시대에서 미시담론의 시대의 이행을 보여주면서 자본주의 시대의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해 ‘죽을 때까지 실토하지 않을 참이다’ 라고 현실에 굽히지 않는 그의 신념을 보여준다.

 

- 2부와 3부에서 -

 

   자신의 삶과 타자의 삶을 유추하고 등가화하는 시인의 사랑은 그의 시의 중요한 속성이다. 1부가 자신의 실존적 서사를 가득 담은 비애의 표정을 띠고 있다면, 2부 부터는 그의 시가 그와는 다른 풍부한 표정과 무늬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정철훈의 시가 타자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아침상에 동그마니 놓인

   콩자반 종지   

   물끄러미 바라보다

   숟가락을 슬며시 내려놓는다

 

   간장에 달달 볶아

   반질반질 윤기 나는

   까만 눈동자들

   한 콩 한 콩이

   내 식솔들의 눈동자였다

  

   콩아, 너 살았니

   콩은 나를 빤히 쳐다보고

   나는 말똥말똥 까만 눈빛을

   슬그머니 피한다

 

   콩깍지를 쓰고

   눈먼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이 엊그젠데

   아이들은 벌써 상사춘의 나이

   눈 맑은 청년이 돼라

 

   한 콩 한 콩이

   내가 먹은 나이였다

 

                                     -「콩자반」-

 

 윤기나는 콩자반이 식솔들의 눈동자로 보인다. 가족은 모순되게도 사랑과 배반이 한 몸인 존재들이다. 가족의 생활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의 무게는 비단 시인 개인의 처지이기보다 가족을 가지면서도 가족에 속해있는 우리 모두의 경우인 것 같아 아릿한 슬픔이 배어나는 느낌이다.
 시인은 「아버지의 등」에서 아버지와 나와 그리고 자식에게 이어지는 사랑과 버거운 힘겨움이 공존하는 삶을 통해 긍정적으로 선회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입 안의 밥알을 세어보았다

   늦은 저녁상 앞에서

   첫 숟갈을 떠넣다 말고

   혀로 밥알을 돌돌 굴리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가 내렸다
   자카르타 빈민촌
   아르헨티나 집시 마을 어디쯤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네 식구
                          

   물살을 가르는 자동차를 향해

   소년이 조막손을 내밀 때

   다리를 절며 건너편 차도를 걸어가던 사내

   틀림없는 나였다

  

   찬비를 맞으며

   머리에 훈김이 피어오르도록

   도시 뒷골목을 헤매던 절름발이


     달팽이 한 마리가

   빗물 흥건한 브라운관에 붙어

   까만 촉수를 연신 흔들었다

   소년아, 너와 함께 철이 든다

 

   손에 잡힐 듯 아스라한 양철지붕 아래

   소년의 눈망울이 반짝이고

   나는 슬며시 밥상을 밀었다

 

   

                              -「밥상을 밀다」-
 

  티브이를 보다가 시인은 나에게서 가족 그리고 이국의 빈민아이로 시야가 확장되면서, 도시를 헤매는 비루한 자신이 빈민촌의 아이로 투사되면서 먹던 밥상을 밀어 넣는다. 머나먼 이국의 가난과 좌절이 시인은 자신의 과거이고 아픔인냥 먹던 밥알도 넘기기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노동판이니까
   육십 넘은 노인을
   형이라 부른다
   그 방법밖에 없다
   우리는 쬐그만 존재니까
   처음에는 살아보자던 가락이 있었지만
   노동판에 우리를 내놓은 우리는
   그 가락을 모른다
   형과, 육십칠 세 먹은 형과
   사십오 세 내가 그래서 형제가 된다

   형, 일당이 얼마요?

   다 내 잘못이다 처음에

   내가 잘했어야 하는 건데

   형, 우리가 일당과 동격이었구려

   어차피 통짜로 짜는거야. 통을 짜서

   윈도우를 짜서 통으로 짜악

   벽에 붙이는 거야

   우리는 결국 노동판의 효과를 노린다

   그려, 맞는 야그여

   천장에서 떨어져나온

   형과 나의 존재

   노동판이니까

   비가 와서 노동은 스멀스멀

   형과 나를 웃긴다

   그날 비가 와서 노동의 반응을

   우리는 잘 모르지만

   우리는 배꼽을 잡고 그날을 웃는다

   노동판이니까

   우리는 쬐그만 존재니까


                                   -「목수를 엿듣다」-
  
 객지 벗은 10년도 맘 먹는다라는 속된 말이 있지만 막노동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30년 차이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편안하게 생각한다. 조직이 권위적이고 경직된 곳일수록 서열차가 분명한데 쬐끄만 존재들, 비천하고 비루하고 저차원적인 세계일수록 질서에 둔감한 것을 표현하면서 타자에 대한 관심의 확산을 끊임없이 기도하고 실현하고 있다. 
   

   가끔 회오리바람이 모래그물을 펼쳐

   물고기떼를 하늘로 뿜어올리곤 했지만 아무도

   사막에 물고기가 헤엄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뜨거운 어장에서는 붉은 뱀이

   두 갈래 혀를 날름거릴 뿐이었다

 

   나는 귀머거리새와 더불어

   바람이 물고기떼를 풀어놓기를 기다렸다

   멀리서 모래폭풍이 몰려오자

   새는 스스로 귀를 잘라 바람 속에 던졌다

   소리마저 뜨거운 모래알갱이로 변하고 있었으니까

   

   모래탑 위로 별이 뜨고 또 졌다

   인류의 꿈이 묻혔으되

   그것을 증명할 언어마저 말라버린 곳

   하지만 상처 속에서

  (물론 처음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몰랐지만)

   세상은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모든 것들이 갈기갈기 찢기우고 분골되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서랍 안에 들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죽은 다음에야 인류가 一族이라는 연설을

   서랍의 작은 입을 통해 듣고 있었다

   유족들이 돌아가자 그들은 서로 귓불을 깨물며 놀다

   시든 꽃다발을 한데 모아놓고

   불을 질러 뼈의 축제를 벌였다

 

   그 나라는 입구의 풍경만으로도 백악기처럼

   지층의 한 겹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은 불완전한 집이었지만

   육체와 영혼이 함께 양육되고 있었으며

   덩굴의 갈라진 손들이 그 집에 붙어 새끼를 쳤다

   모든 것이 모래알갱이로 흩어졌지만

   지구는 그 명멸을 안고 자전하고 있었다

   태양의 손이 내가 본 모든 것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무엇을 보는가」-
 
  해체되어가는 생활사의 리얼리즘적인 성격의 시집에서 이 시를 말미로 마무리 한 것은 시인의 시야가 범세계적으로 우주적으로 확대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서랍안에 들어 있었고 그들이 죽은 다음에야 일류가 일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부분은 이 시집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함축성을 띠고 있는 응집된 표현이다. '육체와 영혼이 함게 양육되고 ...'있다는 부분은 시인이 상정한 유토피아적인 시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귀가하지 못하고 길에서 망설이는 자아가 일류라는 일족을 발견하고 모성과 부성적 인식으로 광할한, 웅장한 상상력으로 인류와 우주의 대서사를 그리고 있다.
 시인의 다음 시세계가 세계와의 화해 가능성을 개진시켜주는 가능성을 열은 시라고 볼 수 있다. 
 

                 3

 

  참고로 정철훈의 두 번째 시집인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의 시 세계는 북방의 무채색 빛깔과 서늘한 바람결이 묻어난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이색적인 낯선 풍광과 정서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낯설음은 점차 반가움과 애잔함으로 아득히 번져 흐른다. 우리에게 북방은 이렇게 무연한 듯한 낯섦과 동시에 먹먹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킨다.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가 중국 대륙에 거점을 두었다는 사실 이외에도 북방은 우리민족의 형성기부터 외부 세계와 만나는 관문으로서 모든 문화, 정치. 외교, 경제 의식 속에 면면히 내재하는 원형심상에 해당한다.

 정철훈의 시세계가  북한 지역은 물론 러시아, 중국 등지의 곡진한 정취와 풍광을 그려 보여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지층에 내장된 북방의 정서를 표면으로 끌어올려 현현시킨 의미를 지닌다.

 그의 시적 표현은 해방 이전 백석의 시세계를 연상시킨다. 제 2의 이용악, 백석이라는 수사가 무색하지 않다.  백석 투의 화법은 북방과 얽힌 굴곡 많은 삶의 표현에서 성공적인 방법론이 되고 있다.  시인의 시적 삶의 환경또한 북방의 정서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환경이 있음을 확인할 수있다. 그의 친가과 처가를 아우르는 가족사와 자신의 모스크바 체험이 절박한 북방의 언어와 이산가족의 사연들을 머금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자신의 북방의 정서에 대한 시적 구현이 북방의 민족정서와 민중적 삶의 원형과 미감을 응축적 거리와 절조를 통해 형상화한 백석이 화법과 유사한 양식을 빌림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북방의 서에 대한 표현에서 현재와 미래형적 상황론에 맞는 화법과 양식의 창조적 모색이 요구되는 것이 그이 다음 시세계에 대한 기대이다.

  
  ‘너무나도 강렬한 과거는 어쩔 수 없이 현재와 미래를 규정짓는다’ 는 말을 지인에게 들었다. 정철훈 시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강렬한 현재가 과거를, 미래가 현재를 규정짓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