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禪과 라캉 / 이 승 훈 < 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

자크라캉 2008. 8. 22. 10:11

   禪과 라캉


                                                                                               이 승 훈 < 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


1. 분석가는 무엇을 원하는가 ?


 분석가의 욕망이라는 개념은 ‘치료의 방향과 그 능력의 원리’ ( 1958 )에 처음 나타난다. 라캉이 여기서 강조한 것은 치료의 방향이고 분석의 기법이 아니라 기법 너머 존재하는 것, 곧 욕망과 윤리의 문제이다. 분석가는 이제 대타자가 아니라 욕망이 부여된 인물이고 이때 분석가와 환자의 동일시가 제기하는 저항의 문제가 해결된다. 그렇다면 분석가는 무엇을 원하는가?

 첫째로 분석가의 욕망은 환자를 이해하려는 욕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해는 착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는 상호 주체성을 토대로 하지만 이 주체들은 상상적 동일시 혹은 상징적 동일시의 관계에 있고 따라서 참된 이해는 불가능하고 착각이 된다. 따라서 라캉은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게 낫고 최소한의 생각도 하지 않으면 순간에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분석가는 환자의 요구를 충족시켜서는 안되고 그가 강조하는 몰이해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새롭게 반복한다. 프로이트는 분석가가 새로운 사례와 만날 때마다 그 특이성을 인식하고 그때까지 그가 지녔던 지식과 경험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로 분석가는 환자에 대한 무지를 의도적으로 공고히 해야 한다. 환자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고 분석가 자신의 지식과 경험도 보류할 때 남는 것은 분석가의 무지이다. 이 무지는 환자의 무지, 곧 분석가를 아는 주체로 가정하는 무지와 알려는 무지에 대한 반응, 그러니까 분석가는 환자의 무지에 대해 무지로 반응한다. 왜냐하면 무엇을 알려는 건 무지의 소치이고 분석가를 아는 주체로 생각하는 것도 무지의 소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석가가 환자에게 말하는 것은 ‘나는 모른다’는 것.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 이 무지는 분석가의 주체성의 포기를 의미하고 이런 포기는  환자의 에고, 자아, 주체가 허상이고 남는 것은 몸이고 이 몸이 언어, 대타자, 상징계를 초월하는 깨달음을 지향한다. 라캉의 주장에 의하면 환자는 상징화의 잉여, 잔여로서의 분석가의 욕망, 대상 타자a 주위를 맴돌고 마침내 실재계 곧 잉여 향락을 지향한다. 

 분석가의 무지 혹은 불식不識이 禪과 통하는 것은 이런 문맥을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분석가의 입장은 선사禪師의 입장과 비슷하다. 선사들의 공안이 강조하는 것은 나는 없다는 인식을 전제로 스님들의 깨달음, 곧 너도 없다는 깨달음을 목표로 하고 이때 선사가 강조하는 것은 무지 혹은 불식不識이다. 다음은 달마의 공안.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성스러운 진리의 핵심인가 ?

   달마가 말했다.

   ‘확연무성廓然無聖, ( 텅 비어서 성스러운 진리마저 없다.) ’

   무제가 말했다.

   ‘그렇다면 짐을 대한 자는 누구인가?’

   달마가 말했다.

   ‘불식不識, ( 모른다 )

   무제는 달마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달마는 양자강을 건너 위나라로 갔다.


 성스러운 진리는 절대진리,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확연무성은 이른바 활구活句. 활구는 언어 해석만으로는 그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수행을 통한 의문에 의해 그 뜻을 알고 이때 깨달음이 온다. 그러므로 확연무성을 ‘텅 비어서 성스러운 진리마저 없다’는 식으로 해석해도 안된다. 불식不識 역시 활구다. 양무제는 그후 달마에 대해 지공志公에게 묻는다. 지공은 ‘폐하께선 이제 달마가 누군지 아셨습니까?’ 라고 말하고 무제는 ‘불식不識.( 모른다 )’고 대답한다.

 달마도 모른다고 하고 무제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전자는 무제에게 禪을 가르친 것이고 후자는 일상적 언어의 수준, 곧 안다/ 모른다의 2항 대립 체계 속의 ‘모른다’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달마의 ‘불식은 그저 ’모른다‘는 의미가 아닌 활구이다. 그러나 원오의 평창에 의하면 이런 해석, 곧 달마의 불식은 활구이고 무제의 불식은 그저 ’모른다‘를 의미한다고 해석해도 빗나간다. 왜냐하면 달마의 불식과 무제의 불식에 대한 분별심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 벽암록 1, 원오극근 저, 석지현 역주 해설, 민족사, 2007, 90 )

 분석가의 무지, 불식, ‘나는 모른다’는 말 역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이런 깨달음이다. 분석가는 안다고 가정된 주체이고 환자는 자신의 증상의 진실을 알려고 하는 욕망의 주체이다. 그러므로 환자가 ‘당신은 누구인가?’ 라고 물을 때 분석가가 ’나는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은 환자의 알려는 욕망과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의 분석가 모두를 부정하고 해체한다. 분석가의 무지는 주체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이런 부정을 매개로 환자 역시 주체의 부정에 이르게 된다. 환자의 무지 ( 증상의 진리에 대한 무지와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의 분석가에 대한 무지 )에 대해 분석가는 무지로 반응한다.

 그러나 분석가는 무지로 반응하기 때문에 환자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이런 관계가 공안에 나오는 선사와 스님의 관계와 유사하다. 분석가의 무지는 無我와 통하고 이 무지가 동시에 환자의 무아를 환기한다. 달마의 불식이 강조하는 것 역시 무아이고 空이고 중도이다. 무지, 불식은 활구이고 언어의 벼랑이고 이런 활구 속에서 환자는 헤매고 고통받고 마침내 진정한 주체, 곧 무아와 만나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사들은 모른다고 말한다.

 셋째로 분석가의 욕망은 환자의 행복 증진이 아니다. 분석이 환자의 행복에 기여한다는 것은 거짓 희망이고 사기이다. 왜냐하면 라캉은 자아 심리학을 비판하는 입장이고 따라서 건강한 자아, 주체는 허위이고 나르시스적 대상, 자기애의 대상에 지나니 않기 때문이다. 분석가는 환자의 행복에 기여하지 않고 거꾸로 환자의 고통에 기여해야 하고 이 고통이 선불교의 수행과 통하고 이 고통이 깨달음을 낳는다. 이런 주장 역시 공안에 나오는 선사와 스님들의 관계를 연상케 하고 실제로 라캉은 분석가를 근대의 소크라테스, 혹은 서구의 선사禪師로 묘사한다.


2. 쟈크 라캉, 선사禪師?


 지금 내 책상에는 며칠 전 강남 교보문고에서 사온 슈나이더맨이 쓴 책 ‘쟈크 라캉: 지적 영웅의 죽음’ ( 허경 옮김, 인간사랑, 1997 )이 놓여 있다. 이 책의 저자 슈나이더맨은 버팔로에 있는 뉴욕 주립 대학에서 셰익스피어 전공의 영문학 교수로 있다가 라캉에게 정신분석을 배우기 위해 교수직을 사직하고 프랑스로 건너간다. 이 책이 출판된 건 1983년이고 라캉은 1981년 타계한다. 이 책은 그후 1986년 ‘쟈크 라캉: 선사禪師maitre zen?'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어로 번역된다.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이 책의 저자가 라캉을 선사로 본다는 것은 그냥 스쳐갈 문제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 분석은 마치 선불교처럼 들린다. 당신은 ‘--처럼 들린다sound like’라는 소리를 들어보려 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경험해 볼만한 영적 체험일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유명한 선불교의 공안을 생각나게 한다. 한 손으로 박수치는 소리. 자 이 공안은 수수께끼다. 사실 아마도 이 수수께끼가 한 손으로 여섯까지 세기보다는 나은 수수께끼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요점은 이 두 수수께끼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당신이 한 손으로 박수치는 소리가 무엇인지를 알아낸다면 당신은 한 손으로 여섯까지 세어보기도 알아낼 수 있다. 물론 한 손으로 박수치는 소리가 내 오른 손의 여섯 번째 손가락이라는 말이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 슈나이더맨, 위의 책, 20 )


 도대체 슈나이더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마지막 분석은 이른바 라캉이 주장한 ‘짧은 상담’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분석 시간을 50분 내외로 고정시켰지만 라캉은 분석 시간을 줄이고 10분이니 50분이니 고정시키지 않았고이런 문제로 그는 국제정신분석협회에서 제명된다. 그가 주장하는 ‘짧은 상담’은 언제 끝날지 모르고, 환자는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꾸미지 않고 곧장 말할 수 있고 에고의 조작에서 자유롭다. 그런 점에서 분석가는 환자를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라 고통과 불안으로 몰고 간다. 이런 방법 역시 크게 보면 분석가의 무지, 곧 끝나는 시간에 대한 무지를 동기로 하고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시간에 대한 무지, 처음, 중간, 끝이라는 시간적 계기성에 대한 부정과 해체를 암시한다. ‘금강경-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에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나온다.


   모든 중생의 온갖 마음을 여래는 모두 알고 있으니 왜냐하면 마음은 모두 마음이 아니고 다만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衆生 若干種心 如來率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일정한 시간을 정하지 않고 환자를 분석하는 태도는 시간을 망각하고 시간 망각은 자아 망각과 통하고 자아 망각은 마음도 망각하는 선을 지향한다. 선불교의 경우 제자는 선사의 가르침을 구하고 정신분석의 경우 환자는 분석가의 가르침을 구한다. 라캉의 경우 분석가와 환자는 선사와 제자의 관계에 있다. 환자는 한 손으로 박수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한 손으로는 박수를 칠 수 없다. 깨달음은 한 손으로 박수치는 소리이고 이 소리는 소리 없는 소리, 라캉이 주장하는 ‘말 없는 담론’discourse without words다.

 말 없는 담론은 영도의 담론이고 나는 이런 담론을 영도의 기표, 영도의 음소로 해석한 바 있다. 영도의 기표는 기의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나 기의가 되는 기표이고, 영도의 음소는 음소가 없지만 의미를 생산하는 음소이다. 소리가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이른바 변별적 자질에 해당하는 음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라는 소리가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나/ 너의 차이, 특히 음소에 해당하는 ㅏ/ㅓ의 대립 때문이다. ( 좀더 자세한 것은 이승훈, ‘영도의 시쓰기’, 『시와세계』, 2008, 봄호 참고 바람 )

 말 없는 담론 역시 비슷한 논리를 보여준다. 낱말이 없으면 의미는 불가능하지만 선이 지향하는 것은 이런 불가능의 가능성이고 그것은 영도의 음소가 의미를 생산하듯 의미를 생산하지만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는 담론, 예컨대 활구가 그렇다. 소리 없는 소리는 한 손으로 박수치는 소리이고 한 손으로 여섯 째 손가락을 세는 행위이고 석녀石女가 아이를 낳는 행위이고 진흙소가 바다로 들어가는 행위이고 손으로 허공을 잡는 행위이다.

 여기까지 쓰고 일주일이 흘렀다. 아니 열흘인지 모른다. 그동안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나는 한국언어문화학회 세미나 주제 원고 ‘목월시에 나타난 상징계 읽기’를 썼다. 이번 주제는 박목월의 시이고 나는 목월 선생님 제자이지만 선생님 시에 대해 쓴 글은 많지 않고 이번 기회에 선생님 시를 새로 읽기로 했다. 한양대 교수가 된 것도 선생님과의 인연 때문이고 올 2월에 정년퇴임을 하면서 선생님 생각도 나고 해서 주제 발표를 허락한 것. 그러나 막상 글에 손을 대면서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선생님에 대한 글이기 때문에 걸리는 것도 많고 아무튼 힘들게 원고를 마치고 오늘부터 다시 이 글을 쓴다.

 지금은 2008년 4월 4일 금요일 오후 세시 반. 아파트엔 내가 좋아하는 벚꽃이 피고 날씨는 맑지만 정신은 개운치 못하고 글의 흐름도 단절되어 여간 고생이 아니다. 라캉을 선사禪師로 읽은 것은 이른바 ‘짧은 상담’을 전제로 하고 선사로서의 분석가는 환자의 행복보다 고통에 기여한다. 나는 노버스의 견해를 참고하면서 분석가의 욕망은 첫째로 환자를 이해하려는 욕망이 아니고, 둘째로 환자에 대한 무지를 지향하고, 셋째로 환자의 고통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요약했다. 

 넷째로 분석가는 치료하려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치료든 무엇이든 열망은 오류이고 허위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이 착각인 것처럼 무엇을 열망한다는 것, 욕망한다는 것도 착각이기 때문이다. 선사들 역시 제자들의 고민, 의문에 해답을 주려는 욕망이 없고 그런 욕망 자체를 부정한다. 다음은 조주趙州 선사의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공안.


   그때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스님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않는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조주 선사에겐 스님을 이해하려는 욕망이 없고 스님에겐  알려는 욕망이 있고 스님은 선사를 아는 주체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스님의 생각은 무지의 소치이고 따라서 선사는 스님의 질문에 대해 무지로 대답한다. 이런 대답은 스님의 고통을 증진하는 데 기여하고 따라서 스님 스스로대답을 찾아야 한다. 결국 선사에겐 스님을 가르치려는 욕망이 없고 이런 태도는 욕망 자체에 대한 부정을 암시한다.    

 분석가 담론에서 분석가의 위치는 대상 타자a의 자리에 있고 환자는 이 타자의 주위를 맴돈다. 그러므로 환자는 대상 타자로서의 분석가를 욕망한다. 그러나 욕망은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욕망이고 따라서 분석가는 대상 타자로서의 위치를 포기해야 한다. 분석가(a)의 실존은 이른바 탈존脫存으로 전환된다.

 탈존은 존재로부터의 벗어남이고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소문자 존재being에서 대문자 존재Being로의 전환이고 라캉에 의하면 욕망 자체가 되는 것, 곧 욕망이 목적도 방향도 대상도 상실하는 것. 그러므로 욕망 자체가 되는 것은 결핍 자체, 결여 자체, 부재 자체, 무 자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순수한 욕망, 무로서의 욕망, 혹은 무에 대한 욕망이고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궁극적으로 무이고 비대상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런 욕망을 안티고네의 욕망에 비유한다.

 안티고네는 외디프스의 딸이고 그녀에겐 두 오빠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니케스가 있다. 에테오클레스는 테베 국가를 위해 싸우고 폴리니케스는 테베를 공격하는 전투에서 상대를 죽인다. 테베의 통치자 크레온은 외디프스의 아내 이오카스타의 동생으로 에테오클레스의 시체에 대해서는 국가의 영예스러운 매장을 선포하고 폴리니케스의 시체는 개와 새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지도록 내버려 두도록 선포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오빠 폴리니케스의 장례를 거행하고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동굴에 가둔다. 견딜 수 없는 안티고네는 자살하고 크레온의 이들이고 그녀의 약혼자 하에몬 역시 이 사실을 알자 자살하고 하이에몬의 어머니이고 크레온의 아내 에우리디케도 자살한다.

 안티고네의 행동이 윤리적인 것은 신들의 욕망을 따랐기 때문이고 그녀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이며 동시에 타자의 욕망이다. 그녀는 자신의 에고를 버렸고 크레온은 이른바 강한 에고를 표상한다. 라캉은 안티고네의 행동을 ‘이익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정화된 욕망, 곧 죽음을 향한 욕망’으로 부른다. 따라서 그녀의 행동은 크레온에 대한 복수가 아니고 그녀는 어떤 정열에 사로잡혀 행동한 것도 아니다. 요컨대 이런 행위는 행위의 순간에 옳고 그름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 이상 슈나이더맨, 앞의 책, 318-323 참고 )


3. 분석가의 욕망은 순수한 욕망이 아니다


  그러나 다섯째로 분석가의 욕망은 순수한 욕망이 아니다. 라캉은 1964년 순수한 욕망으로서의 분석가 개념을 수정한다. 그는 다음처럼 말한다.


   분석가의 욕망은 순수한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 차이를 획득하려는 욕망이며 주인 기표와 만난 주체가 주인 기표에 종속되는 자리에 개입하려는 욕망이다. 이런 욕망은 법의 한계 밖에 있고 이때 무한한 사랑의 의미작용signification이 나타날 것이다. (J. Lacan, The Four Fundamental Concept of Psycho-Analysis, trans. A. Sheridan, Norton & Company, New York, 1977, 276 )


 분석가의 욕망은 무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절대적 차이, 곧 주체를 주인 기표(S1)에 종속시키려는 욕망, 대타자의 욕망이다. 이제 대타자는 순수한 욕망, 무에의 욕망이 아니고 대타자, 법, 순수, 무 속에는 욕망이 있고 분석가는 대타자의 욕망이 된다. 환자는 자신과 분석가를 동일시하는 게 아니라 대타자의 욕망에 의해 자신의 욕망이 변조되고, 따라서 자신의 욕망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라캉이 분석가의 순수한 욕망, 무에의 욕망을 이렇게 수정한 것은 법과 욕망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 때문이다. 순수한 욕망, 무에의 욕망, 죽음에의 욕망 ( 안티고네 )은 칸트가 말하는 최고선에 비유할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행복은 물질적이고 유한한 대상들에 의해 주어지나 최고선은 그 대상을 현실 속에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최고선은 선한 대상에 의해서도 만족될 수 없고 행복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선을 위한 보편율을 도출하는 방식은 법으로부터 대상, 병리적 대상을 빼버리는 것. 이렇게 해서 남은 것이 선험적인 주체와 선의 의지다.

 그러나 라캉에 의하면 칸트는 진리를 말하지 못했고 싸드가 칸트의 진리가된다. 칸트의 ‘실청이성비판’이 출간되고 8년 후에 싸드의 ‘규방 철학’이 출간된다. 싸드가 칸트의 진리라는 말은 칸트가 말하지 못한 것을 싸드가 말한다는 것. 칸트는 내면의 법, 선으로부터 대상object를 분리시켜 대상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법을 강조하나 싸드는 그 법 속에서 법을 지탱하는 목소리를 강조한다. 이 목소리는 환각처럼 내면에 새겨진 것으로 물질성이 사라진 목소리다. 라캉은 이 목소리를 실재계의 목소리로 간주하며 이른바 대상 타자a에 포함시킨다. 이 대상 타자는 주체가 상징적 거세에 의해 상징계에 진입하지만 상징적 거세에도 불구하고 남는 잉여, 잔여물이다. 이런 명제를 공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S- J= S+ a


 주체S에서 향락, 병리적 대상J을 제거하면 이른바 상징적 주체, 금이 주체, 분열된 주체S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 주체는 완벽하게 거세된 게 아니고 잉여 향락, 대상 타자a를 포함한다. 상징계에 진입하는 것은 주체로부터 향락을 제거하는 것. 그러나 주체를 거세하는 상징계 속에는 잉여 향락이 있고 잉여 향락이 상징계를 지탱한다. 그러므로 칸트가 말하는 순수한 법, 최고선은 진리가 아니고 순수한 욕망도 진리가 아니다. 순수한 법, 최고선 속에는 목소리가 있고 상징계 속에는 잉여 향락, 대상 타자가 있고 칸트 속에는 싸드가 있다. 칸트가 언표, 진술의 주체라면 싸드는 언표행위, 언술의 주체다.


   언표행위의 주체    싸드

     언표의 주체      칸트


  칸트의 선험적 법은 싸드적인 외설적 목소리에 기초한다. 법은 민주주의 의 강령, 모두 같은 주체S를 강조하나 싸드는 말한다. 법을 즐겨라 ! 라캉이 분석가의 순수한 욕망 개념을 수정하는 것은 법과 욕망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법, 순수한 욕망 속에는 잉여 향락, 대상 타자가 있고 후자가 전자를 지배한다. 법은 금지의 세계이고 욕망은 위반의 세계이다. 금지는 위반을 전제로 하고 위반이 있기 때문에 금지가 있고 욕망이 있기 때문에 법이 있고 잉여 향락, 대상 타자a가 있기 때문에 상징계가 있다. ( 이상 칸트, 싸드, 라캉에 대해서는 맹정현, ‘라깡과 싸드’, 김상환, 홍준기 엮음, 창작과 비평사, 2005, 참고 )

 환상의 공식은 S   a이고 상징적 거세 후에도 주체에게 잉여 향락, 대상 타자가 남는다는 공식은 S- J = S +a다. 환상은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거세된 주체가 거세의 잉여, 대상 타자에 의해 거세 이전의 세계를 구성하고 S+ a는 주체가 거세되어도 잉여 향락, 대상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 분석가 담론에서 분석가는 대상 타자a의 위치에서 환자S로 하여금 중심 기표S1을 생산하도록 암시한다. ( a-- S/ S1 ) 분석가는 무에의 욕망이 아니라 환자의 욕망의 원인이 된다. 분석가가 대상 타자가 된다는 것은 순수한 욕망, 무로서의 욕망 ( 칸트의 법, 최고선, 상징계, 대타자 ) 속에는 대상 타자a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고 이제 환자는 욕망 충족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원인으로서 대상 타자를 지향한다. 따라서 분석가는 환자의 욕망의 원인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욕망의 원인이 된다.

 문제는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원인이 됨으로써 분석가는 대상, 실체를 상실하고 따라서 존재를 상실한다는 것. 말하자면 분석가는 소멸해야 하고, 탈존재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분석가가 대상 타자a가 되는 것은 분석가의 존재가 소멸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때 그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라캉의 경우 사유와 존재, 코기토와 존재의 역설을 강조한다. 데칼트의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그러나 사유와 존재의 동일시는 논리적으로 모순이고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태어난다.

 분석가는 생각하지 않을 때 분석가로 존재한다. 앞에서 분석가의 탈존에 대해 말했지만 이때의 탈존은 주체, 자아로서의 소멸을 뜻하지 분석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하고 그가 생각하지 않는 곳은 무의식이고 그는 무의식, 향락, 욕망이 되고 환자의 욕망 원인이 된다. 그러나 분석가의 이런 소멸, 탈존은 선불교의 시각에서 해석하면 다시 무아無我 사상과 관계된다. 물론 이때의 무아는 대상 타자a를 매개로 한다. 분석가가 소멸하면서 환자의 욕망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공안에 비유하면 선사의 자아가 소멸하고 이런 소멸이 학승의 욕망, 깨달으려는 욕망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조주 선사의 공안 역시 이런 시각에서 읽을 수 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라는 스님의 질문에 선사는 ‘뜰 앞의 나무다’라고 대답한다. 이런 대답은 이른바 무분별, 선사가 강조하는 지도무난 단혐간택至道無難 但嫌揀擇을 지향한다 분별, 간택이 없는 것은 자아가 없고 이성이 없고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뜰 앞의 잣나무’라는 말은 법이나 상징계를 초월하는 목소리이고 라캉 식으로 말하면 법, 상징계의 빈 구멍으로 법을 지배하는 욕망이고 선불교 식으로 말하면 법을 지배하는 깨달음의 세계다.

 이상에서 나는 분석가의 욕망을 첫째 환자에 대한 이해 거부, 둘째 환자에 대한 무지, 셋째 환자의 고통 부여, 넷째 치료 거부, 다섯째 순수하지 않음으로 요약했다. 이런 요약은 노버스의 견해를 토대로 나대로 정리한 것임을 밝힌다. ( 노버스, 앞의 책, 117-156 참고 )


4. 분석가 담론 다시 읽기


 남은 것은 대상 타자a로서의 분석가 문제다. 나는 다른 글에서 라캉의 분석가 담론을 시적 담론과 관련시켜 읽은 바 있다. 그때 내가 주장한 것은 시적 담론은 분석가 담론이고 베케트의 경우 베케트는 분석가이고 동시에 환자가 된다. 말하자면 시의 경우 분석가-시인이 있고 환자-시인이 있다. 이때 분석가는 환자의 무의식과 그 언어적 표현을 유도해야 하고 이런 역할을 하기 위해 분석가는 환자의 욕망의 대상 타자a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상 타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 나는 분석가 담론의 상부 ( a ---S )가 환상의 공식 ( S   a )이 거꾸로 된다는 점을 전제로 이른바 환상 가로지르기 ( a   S )를 강조하고 그러나 이런 가로지르기에도 불구하고 증상은 남기 때문에 증상과 환상의 종합으로서의 이른바 생톰sinthome과의 동일시를 지향한다는 것이 그때의 주장이다. ( 좀더 자세한 것은 이승훈, ‘분석가 담론 읽기’ 참고 바람)   그러나 지금 분석가 담론을 다시 읽는 것은 시인과 분석가의 관계보다는 분석가 담론과 선의 관계를 새롭게 해명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 책의 기본 가설은 시가 禪이고 정신분석이고 모두 자아해방을 지향한다는 것. 다음은 주인 담론과 분석가 담론.


     S1  ---  S2             a  --- S 



     S         a             S2      S1

      

    < 주인 담론 >           < 분석가 담론 >


 분석가는 존재 소멸을 통해 대상 타자a가 된다. 대상 타자가 된다는 것은 분석가가 환자의 욕망의 원인이 된다는 것. 그러나 욕망의 원인에 대한 오해가 많기 때문에 라캉은 마침내 대안으로 분석가의 욕망은 대상 타자a를 탈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분석가는 대상 타자가 아니라 대상 타자의 모사, 사이비 대상 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 노버스, 앞의 책, 170 )

 이런 주장이 암시하는 것은 분석가의 지지할 수 없는 위치이고 치료와 분석의 불가능성이다. 프로이트에 의해 치료 작업은 분석 작업으로 대체되고 라캉에 의해 분석 과정은 분석가의 위치로 대체되고 분석의 불가능성은 분석가 위치의 불가능성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정신분석은 예술, 불가능한 예술이 된다. 도대체 불가능성이란 무엇인가 ? 다음은 라캉의 말.


   불가능성의 기능에 대해서는 부정적 형식으로 나타나는 기능이 그렇듯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이 개념에 접근하는 최상의 방식은 이 개념을 부정negation과 동일시해선 안 된다는 것. 이런 방법은 가능성의 문제를 환기하지만 불가능성은 가능성의 반대가 아니다. 혹은 가능성의 반대가 실재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실재계를 불가능성으로 정의할 수 있고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런 정의에 반대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경우 실재계, 곧 쾌락 원칙의 방해물은 이런 형식으로 나타난다. 실재계는 방해물을 동반하는 충격이다. 물物 자체는 외적 대상을 지향하는 직접적 방법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이런 견해는 제한적이고 환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실재계는 쾌락 원칙과 분리될 때, 탈성화desexualization될 때, 그리고 새로운 어떤 것, 곧 불가능성에 의해 분별된다. ( J. Lacan, 앞의 책, 167 )


 불가능성은 가능성의 반대가 아니라 실재계와 관련되는 라캉의 중심 개념이다. 실재계가 쾌락 원칙과 분리된다는 점에서 불가능성은 죽음 충동과 관계되고 한편 실재계가 상징계를 초월한다는 점에서 언어 질서를 초월하는 개념이다. 라캉의 이런 주장은 과학의 진리와 정신분석의 진리의 차이에 대한 성찰을 매개로 한다. 그에 의하면 과학은 형상인formal cause으로서의 진리에 토대를 두고 정신분석은 질료인material cause으로서의 진리에 토대를 둔다. 전자는 ‘물건이 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관심을 두고 후자는 ‘물건이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에 관심을 둔다. 그러므로 과학적 진리의 가치는 어떤 사건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용되는 범위이고 정신분석적 진리는 기표로 구성된다. 왜냐하면 증상의 진리는 상징계에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증상의 진리는 기표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고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된다. 과학적 진리는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면 ‘좋은 근거’에 해당하고 그것이 좋은 근거인 것은 오직 그것이 그 사건의 발생을 그럴 듯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이영철 옮김, 서광사, 1994, 206 )

 그런 점에서 불가능성은 과학적 진리의 불가능성과 통하고 정신분석의 진리는 이런 불가능성을 매개로 한다. 분석가 담론을 중심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정신분석은 지식에 의해 진리를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석가 담론에서 분석가는 대상 타자a의 자리에 있고 분석가는 지식, 기표들의 연쇄 (S2)를 억압한다. ( a/ S2 ) 한편 라캉에 의하면 모두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것은 말들이 언제나 실패하기 때문이다. 기의는 기표 아래로 미끄러지고 계속 표류한다. 그러나 이런 불가능에 의해 진리는 실재계와 결합된다. 지식, 말의 인식론적 불가능성 때문에 정신분석은 과학보다 예술에 가깝고 따라서 정신분석은 불가능한 예술이다. 禪불교 역시 말을 부정하고 과학적 인식을 부정하고 한 마디로 인식론적 불가능성을 강조한다. 앞에서 보기로 든 조주의 공안에 나오는 선사의 말 ‘뜰 앞의 잣나무다’는 인식론적 불가능성을 암시하고 이런 불가능성이 또한 진리, 깨달음과 통한다. 물론 선불교는 깨달음을 강조하고 라캉은 실재계를 강조한다.

 둘째로 불가능impossible과 무능력impotence 개념. 불가능과 무능은 다르다. 불가능은 인간의 힘으로 미치지 못하는 것이고 무능은 재능, 능력이 없는 것. 불가능은 처음부터 할 수 없는 것이고 무능은 할 수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 주인 담론의 경우 주인-주인 기표 (S1)는 타자-지식 (S2)을 지배할 수 없다. 말하자면 주인은 지식에게 명령할 수 없고 주인 ( 통치자 )이 아무리 지식을 지배하고 통제해도 지식의 일부는 도망가고 이것이 잉여 향락, 대상 타자 (a)를 구성한다. 이렇게 통제가 불가능한 것은 아래 항목의 관계, 곧 분열된 주체 (S)와 대상 타자 (a)가 단절되기 때문이다. 주인의 지식 지배가 잉여 향락, 대상 타자를 생산하지만 이 대상 타자는 진리 (S)에 대해서는 무력하다. 말하자면 분열된 주체와 대상 타자의 결합은 무능력의 관계에 있고 그것은 대상 타자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환상의 공식S   a를 회상하자. 분열된 주체와 대상 타자 사이엔 언제나 잉여가 있다.

 그러나 분석가 담론의 경우 이런 관계는 역전된다. 분석가-대상 타자 (a)와 환자-분열된 주체 (S)는 불가능성의 관계에 있고 그것은 아래 항목, 곧 주인  기표 (S1)와 지식 (S2)이 무능력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주인 기표가 지식을 통제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S  S ) 분석가 (a)는 환자 (S)에게 지식을 전달할 수 없고 따라서 분석가 담론은 무의미의 효과, 실재계, 불가능성을 지향한다. 이런 불가능성에 의해 환자 (S)는 새로운 주인 기표 (S1)를 생산하지만 이 기표는 지식 (S2)에 대해 무력하고 (S2   S1), 진리 (S2)에 대해 무력하다. 말하자면 새로운 주인 기표는 지식, 곧 상징계를 구성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분석가 담론이 지향하는 무의미, 불가능성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초월하는 진리, 실재계를 지향한다.

 셋째로 전통적인 정신분석은 의미 만들기와 환자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다. 의미 만들기는 환자가 생산하는 주인 기표(S1)와 지식, 상징계 (S2)의 결합을 뜻하고 따라서 라캉이 주장하는 무능력을 배제한다. 한편 많은 분석가는 주인 기표로 지식을 통제하고 이런 통제를 즐긴다. 라캉에 의하면 이런 향락을 강조할 때 분석가 담론은 도착증의 영역으로 이탈한다. 환자에 대한 분석가의 이해 역시 향락을 동반한다. 분석가 담론의 위 항목은 a--- S이고 도착증의 공식은  a   S이다. 분석가가 환자에게 지식을 전달할 수 없는 것은 아래 항목이 무능력의 관계 (S2  S1)에 있기 때문이다. 도착증의 경우 분석가 (a)가 주인  기표로 지식을 통제하는 것은 이런 무능력을 무시하고 통제를 즐기고 이해를 즐긴다는 점에서 분석가는 환자 (S)의 향락의 대상, 향락의 도구가 된다. 도착증 환자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성행위를 추구하지 않고 타자의 쾌락을 위해 활동한다. 노출증이 그렇고 관음증이 그렇다. ㅇ

 그러나 분석가 담론은 도착증의 영역이 아니다. 분석가는 대상 타자의 위치에 있지만 이때 대상 타자는 환자의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원인으로 존재하고, 아니 실체가 없기 때문에 부재하며 존재하고 이제 분석가의 향락이 제거된다. 대상 타자는 욕망의 원인이고 이 욕망은 향락과 결합되기 때문에, 아니 대상 타자는 상징계 통제에도 불구하고 남는 잉여 향락이기 때문에 ( 주인 담론 ), 대상 타자가 향락과 통하기 때문에 분석가(a)는 향락을 제거하면서 분석가로 존재/ 부재한다. 그렇다면 향락을 제거한 다음의 분석가의 욕망은 무엇인가 ?

 

5. 분석은 사랑이다


 넷째로 향락을 제거한 다음 분석가의 담론은 두 가지 측면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지식 (S2)를 진리의 자리에 놓아두려는 욕망이다. (a/ S2). 분석가 담론의 경우 지식은 진리의 자리에 있고 분석가 (a)는 진리로서의 지식 (S2)을 억압한다. 한편 분석가(a)와 환자(S)는 불가능의 관계에 있고 따라서 분석가는 환자를 지배할 수 없고 그것은 환자가 생산하는 주인 기표(S1)와 지식(   S2)이 무능력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식을 진리의 자리에 둔다는 것은 지식과 진리의 불가능성을 부정하는 발언인가 ?

 라캉에 의하면 진리의 자리로 작용하는 지식은 명백한 진리, 과학적 진리,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좋은 근거로서의 진리, 사용 가치로서의 진리와 다르다. 그러므로 지식을 진리로 만드는 방법은 앞에서 말한 분석가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의존한다. 분석가의 무지는 환자의 무지에 대한 반응이고 앞에서 나는 이런 무지를 주체성의 포기로 해석하면서 남은 것은 몸, 욕망, 대상 타자로 환자는 이 대상 타자 주위를 맴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때 분석가는 선사와 비슷한 입장에 있다고 말했다. 요컨대 너도 없다는 깨달음, 달마 대사의 不識과 관련시킨 바 있다.

 그러나 이제 분석가의 무지는 향락을 제거한 다음의 욕망과 관계되고 지식을 진리로 만드는 일과 관계된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지식과 진리의 역설. 지식은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지식에 대한 무지를 매개로 분석가는 진리에 도달한다. 달마의 ‘나는 모른다’는 말은 자아 부정과 타자 부정을 노린다. 따라서 이 말 (S2) 자체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로 가는 도구이다. 말, 지식이 무지에 의해 진리가 되는 사례, 곧 말, 지식에 대한 무지가 진리가 되는 사례로는 앞에서 보기로 든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를 들 수 있다.

 조주의 이런 대답은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 조주는 스님이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라고 물을 때 ‘뜰 앞의 잣나무다’라고 대답한다. 이런 대답은 자신의 말에 대한 무지, 곧 판단 주체로서의 자아를 망각한 말이기 때문에 지식, 말에 대한 무지가 되고 이런 무지에 의해 이 말(S2)은 역설적으로 진리가 된다. 조주(a)는 스님(S)의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원인, 그러니까 대상 타자로서의 실체를 상실하고 향락을 제거하고 자신의 말에 대한 무지를 매개로 진리에 도달한다.

 조주가 한 말 ‘뜰 앞의 잣나무’는 스님이 물었을 때 그의 눈에 띈 잣나무를 가리켰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선사의 이런 대답에 대해 스님은 ‘스님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사는 ‘나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경계란 무엇인가 ? 경계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6식識에 대응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6境을 뜻하고 6경에 대한 인식 작용이 6식이다. 그러므로 선사는 자신의 말이 6식을 거부한다는 것. 안다는 것, 지식은 6식이고 모른다는 것, 무지는 이런 6식의 거부와 부정과 초월을 뜻한다. 요컨내 뜰 앞의 잣나무는 잣나무가 아니고 잣나무가 아닌 것도 아니다. 무지는 무지가 아니고 무지가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무지에 의한 진리도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아닌 것도 아니다.

 ‘석녀가 아이를 낳는다’, 돌 기둥 보고 절하기, 손가락 하나 세우기, 때리는 행위 등도 무지에 의해 진리가 드러나는 보기가 된다. 말에 대한 무지는 결국 말을 구성하는 기표와 기의 가운데 기의를 포기하는 경우, 말을 구성하는 문법을 해체하는 경우, 말할 줄 모르며 말하기, 생각 없이 말하기 등을 들 수 있다.

 다음은 향락이 제거된 분석가의 욕망이 탈존과 관계된다는 것. 앞에서도 말했듯이 분석가 (a)는 환자의 욕망의 원인이고 이때 대상 타자는 실체를 상실하기 때문에 분석가는 탈존의 영역으로 떨어지고 분석가는 환자의 욕망을 환기할 수 없게 된다. ( a---S의 불가능성 ) 왜냐하면 대상 타자는 동일시 (상상계)를 거부하고 언어화 ( 상징계)를 거부하기 때문이고 이때 대상 타자는 불안을 동반하는 실재계, 물 자제가 된다. 거울을 볼 때 거울의 여백이 나를 응시하고 나를 이승훈이라고 부를 때 명명에 포함되지 않는 나, 언어의 잉여가 있고 이 잉여가 명명된 나를 응시한다.

 그런 점에서 분석가는 무지의 대상, 잉여, 실재계에 의존함으로써 환자의 욕망을 환기할 수 있다. 조주의 공안에 나오는 ‘뜰 앞의 잣나무’는 동일시를 거부하고 언어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무지의 대상이고 잉여이고 실재계에 해당한다. 해당한다는 말은 같다는 말이 아니다. 비유된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禪불교는 깨달음을 지향하고 라캉의 정신분석은 실재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깨달음도 실재계도 상상계와 상징계를 초월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고 특히 향락을 제거한 다음의 무지와 대상 타자라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다시 회상하자. 라캉은 선사禪師다. 그러나 조주는 분석가가 아니다.

 선사로서의 라캉이 강조한 것은 결국 분석가의 향락 제거이고 욕망 제거이고 결국 아무 것도 할 게 없다는 불교적 무위법無爲法의 인식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함, 현상, 있음, 존재, 유위법有爲法은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인연의 조작이고 생주이멸生住離滅의 변화이고 그러므로 자성이 없고 모두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기 때문이다. 무위법은 이런 것이 없는, 하는 것이 없는, 상대성, 이항 대립의 체계를 벗어나는 절대 경지의 법이다. 그러므로 향락, 욕망의 제거는 이중의 불가능성을 은폐하고 이 불가능성이 가능성과 통한다. 하나는 진리와 지식의 불가능성, (a/ S2) 다른 하나는 환자의 욕망을 일으키지 못하는 불가능성. (a---S) 그러나 이런 불가능성은 무위법과 통한다.

 아니 이런 불가능성은 무위법의 정신분석적 수용이고 변주이다. 라캉에 의하면 분석가의 욕망 (a)은 채택될 수 없고 따라서 분석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 앞에서 말했듯이 라캉의 정신분석은 과학적 진리를 부정한다. 말하자면 말의 인식론적 불가능성을 강조하고 따라서 분석적 경험의 객관화를 부정하고 이런 부정은 시적 경험이나 예술적 경험을 객관화할 수 없다는 인식과 비슷하다. 시적 진리나 예술적 진리는 언어화할 수 없는 진리의 출현이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유의 절망, 영도의 사유, 라캉 식으로 말하면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그가 생각하는 것이다.

 김수영에 의하면 시쓰기에 대한 사유는 모호성에 토대를 두고, 이 모호성이 무한대의 혼돈에 접근하는 유일한 도구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간다는 뜻이며 ‘무엇’은 ‘동시에’의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 그것이 사랑이며 시의 형식이 된다. ( 좀더 자세한 것은 이승훈, ‘김수영의 시론’, 한국현대시론사, 고려원, 1993, 175-201,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 한국모더니즘시사, 문예출판사, 2000, 222-228 참고 바람 )

 김수영의 모호성은 라캉의 불가능성과 통하고 요컨대 라캉의 경우 정신분석은 불가능성의 예술, 예술로서의 정신분석이다. 그것은 새로운 주인 기표 (S1)의 결정화를 노리고 전이의 개념을 발전시킨 사랑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분석은 사랑의 작업이고 이때 사랑은 만남의 우연성을 관계의 필연성으로 전환시키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우연한 첫 만남의 경탄과 불확실성 양쪽을 모두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사랑이다. 왜냐하면 관계의 필연성, 곧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의 관계는 환상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고 성적 관계는 없기 때문이다.

 분석가 담론의 경우 사랑받는 사람(a)은 사랑하는 사람 (S)이 되고 그러므로 이른바 사랑의 은유 ( 전이 )가 발생하지만 이때도 대상은 환상의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은 환상을 가로지르는 우연의 경탄과 불확실성을 강조하는 사랑이고 치료는 사랑의 치료다. 김수영이 말하는 사랑은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 곧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고 그것이 시적 형식이다. 그러나 라캉이 말하는 사랑은 우연과 불확실성을 강조하는 사랑이다. 전자는 육체와 정신의 2항 대립을 해체하고 시쓰기/ 시론, 형식/ 내용의 2항 대립을 해체하면서 혼돈의 시작, 아무도 못한 말의 시작을 강조한다. 나는 이런 작업이 궁극적 실재를 실현하기 위한 선불교적 노력과 통하고 하이데거가 말하는 개시성開示性과 통한다고 해석한 바 있다. 그가 말하는 개시성은 존재의 개시이고 과거, 현재, 미래라는 계기성 혹은 개념화를 거부하는 실존 범주로서의 시간성, 그러니까 무시간성을 노리고 이런 무시간성이 김수영의 경우에는 모험의 의미와 통한다. 모험은 대지의 은폐가 아니라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의 개진을 지향한다. ( 이승훈,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 앞의 책, 227 )

 문제는 라캉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우연성과 불확실성을 강조한다. 우연성은 하이데거적인 실존을 뜻하고 불확실성 역시 실존의 범주에 속한다. 인간은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지고 미래에 대해 확실한 것은 죽음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자아는 우연히 타자를 만나고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이데거가 만남의 우연을 존재의 개시로 발전시키면 라캉은 만남의 우연에 경탄하고 불확실성을 즐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크게 보면 둘 모두 우연성을 강조하고 이 우연은 필연을 모르고 필연의 허구와 조작과 환상을 부정한다. 그런 점에서 우연성과 불확실성 역시 禪불교가 강조하는 무위법無爲法을 지향한다. 요컨대 라캉이 강조하는 정신분석은 불가능성에 의해 불가능성을 실현하는 예술이고 시이고 마침내 禪과 만난다. ( 이상 불가능성을 매개로 분석가 담론 읽기는 노버스, ‘정신분석의 불가능한 예술’, 위의 책, 170-185 참고 )

 

출처: 만해축전, 만해마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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