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깡(Lacan),팔림세스트(palmipsest)
윤규홍
지금으로부터 구 년 전이다. 당시 독서토론회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주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였다. ‘스터디’는 새로운 무엇을 배우는 자리이기보다는 저마다 얄팍한 지식을 확인하고 자랑하려던 곳이었다. 나는 두 명의 자크(Jacques),에 빠져있었다. 특히, 알뛰세르와 푸코를 맑스의 대안으로 점찍었던 강단PD들과 달리, 의과대학을 가려고 재수학원을 기웃거리던 나에게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라깡은 매력적이었다. 정신의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프로이트나 애들러를 들먹이는 것에 불쾌해한다고 한다. 만약 그들이 나를 봤다면 얼마나 우습게 여겼을까? 라깡의 논문집 Ecrit의 글 몇 편을 읽은 것이 고작이면서 라깡을 안다고 자부했었는데, 이제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당시에 책장에 꽂혀있던 “욕망이론” 사럽의 “알기쉬운 자끄 라깡”과 같은 입문서 네댓 권도 이제는 불어난 책들 속에 파묻혀 그 내용조차 기억에 희미해졌다.
모든 책이 마찬가지이다. 서재에서 책표지를 발견할 때, 비로소 읽었던 내용이 기억된다. 누구에게 빌려줘 못 받거나 헌책방에 팔아버린 책의 내용은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말하자면, 내 라이브러리가 사적인 인식 지평을 결정하는 것이다. 나의 공부방과 학교 연구실이라는 장소, 내가 한 권의 책이라는 존재를 확인했던 장소는 기억의 축적물이기도 하다. 나는 기억을 특정한 장소에서 끄집어냈을 뿐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펴들면 온전한 텍스트와 함께 당시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가령 책을 샀던 하늘북,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던 계대 노천강당 등... 과거의 텍스트 자국이 남아있는 이미지를 우리는 팔림세스트(palmipsest)라고 부른다. 프로이트에게 팔림세스트는 꿈이다. 꿈의 해석은 일차적으로 지워졌거나 손상된 텍스트를 다시 드러내고자 하는 과정에서 행사되는 어떤 힘을 밝히려는 작업이다. 라깡은 그의 스승과 다르게, 꿈이 아닌 말로 드러난다고 한다. 했을까? 했겠지, 후기구조주의자니까.
라깡은 주체가 없거나 해체된다고 말하진 않았으므로 탈근대론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주체(subject)란 매우 복잡한 개념이다. 라깡이 말하는 주체는 주체가 아닌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나(I)는 나의 영상이지만, 그렇다고 나는 아니다. 나를 나답게 보여주는 주체의 이미지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지워진다. 그의 유명한 세 가지의 거울단계는 마지막 단계에서 아기가 거울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일련의 동일화과정을 보여주는 가설이다. 왜 아기는 다른 아기가 울면 따라서 우는가? 그 다른 아기가 자기인줄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기가 자기가 아닌 타자(other)를 통하여 자기를 알기 때문에, 아기의 주체는 헤겔의 소외 개념처럼 항상 결핍되어있다. 우리는 언술 행위의 주체지만 바로 그 행위로 인해 주체가 모호해질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에 부딪힌다. “너를 사랑하고도 늘 외로운 나는......” 사랑을 빠지면 고독에서 벗어나야 되는데 그/녀를 끊임없이 갈구하므로 더욱 고독해진다. 이것이 그의 욕망이론이다.
사유하므로 고로 존재하는 데카르트 식의 주체개념은 라깡에게 의심받는다. 생각하는 주체는 실존이지만, 그 주체가 순수한 본질이나 진실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주체의 그림자인 꿈이나 실언, 농담 따위가 주체를 찾아가는 데 중요한 꽉찬말(la parole plaine)이며 일상에서 페르소나를 쓴 채 내뱉는 논리적이고 세련된 말은 텅빈말(la parole vide)이기 쉽다.
우리는 예술사 시간에 초현실주의와 모더니즘이 정신분석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배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팔림세스트라는 혼성적인 주체의 흔적은 난해한 현대예술의 텍스트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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