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속 詩

역마차 / 김철수

자크라캉 2008. 7. 24. 13:15
 

                            사진<송운 사랑방 Song Woon Art Hall>님의 카페에서

 

마차 / 김철수

 


설움 많은 밤이 오면은

우리 모두들 역마차를 타자


반기어주는 이 없는 폐도(廢都) 여기 별없는 거리 자꾸 그리운 합창이 듣고파 내 오늘도 또 한 잔 소주에 잠겨 이리 비틀거리는 사내이구나


 흔들려 부딪치는 어깨 위에 저 가난한 골들이 형제요 동포이라는 나의 외로움 속에서는 우리 좀더 정다운 나그네여서 따뜻한 마을을 찾아가는 것이냐


이제는 통곡조차 잊어버린 사람들……

열리는 아침을 믿어 가는 길인가


그러면 믿븐* 사람이여 어디 있는가 높은 곳에 기다리는 공화국의 문이여 어디 있는가 절름거리는 궤짝 위의 차거운 꿈에서도 역마야 너와 나와는 원수이지 말자


 미친 채찍이 바람을 찢고 창살 없는 얼굴에 빗발은 감기는데 낙엽도 시월도 휘파람 하나 없이 이대도록 흔들리며 폐도의 밤을 간다

 


* 믿븐 : 믿음직한.

 

-「신천지」,  1948.2 -


[시평]

이 시는 시인 김철수의 대표작으로 뚜렷한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지 않는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이다. 이 시는 ‘역마차’라는 이국적 제재를 택하여 1940년대 후반 분단이 고착화되는 현실에서 느끼는 비애를 시인 특유의 서정으로 노래하고 있다.

‘설움 많은 밤’ ‘반기어 주는 이 없는 폐도(廢都)’ 서울에서 시적 자아는 ‘자꾸 그리운 합창이 듣고’ 싶어서 ‘오늘도 한 잔 소주에 잠겨 이리 비틀거’린다. 비틀거리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통곡조차 잊어버린 사람들’은 과연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 그들에게 ‘열리는 아침’은 도래할 것인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지닐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시적 자아는 ‘믿븐 사람’과 ‘높은 곳에 기다리는 공화국의 문’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자신의 희망은 역마차의 ‘절름거리는 궤짝 위의 차거운 꿈’에 불과한 것. 그래도 시적 자아는 어디에선가 자신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 것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역마야 너와 나는 원수이지 말자’라고 다짐한다. ‘미친 채찍이 바람을 찢고 창살 없는 얼굴에 빗발은 감기는’ ‘폐도의 밤을’ 가면서.

이처럼 이 시는 봉건 잔재와 식민 잔재의 청산이라는 민족사적 과제는 사라진 채 분단 현실이 고착화되어 버린 해방공간의 서울의 밤을 배경으로 하여, 삶의 어려움에 지친 민중들을 감싸고 위로하며 소중한 꿈으로 상승시키는 힘과 서정을 보여 준다. 바야흐로 혁명의 열기나 투쟁의 의지보다는 분단의 민족 현실에서 비롯되는 비애가 더욱 짙게 배어나기 시작하는 해방공간의 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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