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샌님-눈내리는 내소사>의 카페에서
눈이 내리느니 / 김동환
북국(北國)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을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히는 하아얀 북조선이 보이느니.
가끔가다가 당나귀 울리는 눈보라가
막북강(漠北江)* 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어다가
추위에 얼어 떠는 백의인(白衣人)의 귓불을 때리느니.
춥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
부득이 만류도 못하느니,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눈 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에 돌려보내느니.
백웅(白熊)이 울고 북랑성(北狼星)*이 눈 깜박일 때마다
제비 가는 곳 그리워하는 우리네는
서로 부등켜 안고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 얼음 벌에서 춤추느니.
모닥불에 비치는 이방인의 새파란 눈알을 보면서,
북국은 추워라, 이 추운 밤에도
강녘에는 밀수입 마차의 지나는 소리 들리느니,
얼음장 트는 소리에 쇠방울 소리 잠겨지면서.
오호, 흰 눈이 내리느니, 보오얀 흰 눈이
북새(北塞)*로 가는 이사꾼 짐짝 위에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
* 막북강 : 고비 사막 북쪽을 흐르는 강.
* 발귀 : ‘발구’의 함경도 사투리로 마소가 끄는 운반용 썰매.
* 북랑성 : 큰개자리별(시리우스, sirius).
* 북새 : 북쪽 국경 또는 변방.
-「시집:금성 3호」, 1924.5
[시평]
이 시는 원래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는데, 시집 <국경의 밤>에 수록될 때 약간의 손질과 함께 제목이 바뀐 것이다.
김동환의 시는 우수와 침울한 분위기로 대표되는 북방적 정서를 드러내는 데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김소월, 이용악, 백석 등 북쪽을 고향으로 둔 시인들의 작품이 대개 삶의 애상적 비애와 향수를 시의 제재로 삼고 있는데, 김동환은 이러한 정서를 민족의 수난사와 결부시키고 있다.
이 시의 배경이 되는 북방은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는 동토(凍土)이며, 막북강 건너에서 불어오는 모래 바람이 귓볼을 때리는 삭막한 고장이다. 따뜻한 남쪽 고향을 뒤로 하고 북방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운명이 북방의 매서운 추위와 연계되어 더욱 절실한 비애를 자아낸다. 몸도 마음도 위축되어 버린 이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적성을 손가락질’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부질없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제3연의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 눈 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에 돌려보내느니’라는 구절은 화자의 안타까운 마음과 절실한 소망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소망이라는 사실은 화자나 유민 모두가 깊이 인식하고 있는 터이다. 그러기에 화자의 시선은 다시 북방으로 옮겨지면서, 우리 민족이 밀수입(수출)을 하며 살아가는 고달픈 삶이 제시된다. 제4연의 3,4행은 ‘국경의 밤’의 시상과 놀라울만치 닮아 있는데, 이것은 시인이 국경 부근에 거주하면서 경험하였던 사건이 그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刻印)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향에서는 농사의 풍요를 담보할 것으로 여겨져 기쁘게 맞을 소담한 눈조차도 북방으로 쫓겨 가는 이주민들에게는 혹독하고 매정한 자연 현상일 뿐이며, 자신들의 운명이 갈수록 암담해질 것이라는 비극적 조짐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물론, 이 시의 제3연과 제4연에서 유민들의 고향 회귀 혹은 조국의 독립에 대한 강렬한 소망과 의지가 담겨져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유민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얼음벌에서 추는 춤이 환희와 희망의 군무(群舞)가 아니라, 실의와 좌절 속에서 서로를 위무(慰撫)하는 통곡의 포옹이요 춤이라 해석하는 것이 온당하며, 따라서 그것이 갖는 의미도 분명해진다. 그것은 조국의 독립에 대한 확신과 신념이라기보다 그런 믿음이라도 가짐으로써 자신의 불행을 감내하려는 내적 의지의 간접적 표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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