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

“발목까지/발밑까지”의 의미 / 정 과 리 | 문학평론가

자크라캉 2007. 9. 16. 00:07

목까지/발밑까지”의 의미 / 정 과 리 | 문학평론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1921-1968


“발목까지/발밑까지”의 의미

정 과 리 | 문학평론가

문학성이 ‘잘 빚어진 항아리’로서의 작품 안에 담겨 있다기보다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화응을 통해서 생성되며 변화한다는 현대적 관점은 김수영의 「풀」에 역설적인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역설적인 방식이라고 한 것은, 지금까지 이 시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한 편의 완미한 서정시이자 김수영 시 전체의 최후의 결산으로서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사태, 즉 김수영의 모든 것을 「풀」 안에 압축해 넣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열정이, 지금의 눈으로 언뜻 봐서는 평범한 서정시로 스쳐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또렷이 부각시키고 그 수명을 성큼 늘렸던 것이다.
지금의 눈으로 봐서? 그렇다. 이 시의 주제라고 일컬어져 온 ‘민중의 생명력’은 이젠 진부하거나 불확실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가 발표될 즈음에서 보자면 이 시는 역사의 중심을 지식인(의식인)으로부터 민중에게로 돌려놓는 근본적인 인식론적 단절의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숱한 아류들뿐만 아니라 정희성의 「답청」 같은 수작을 낳은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오늘 누가 저 순진한 믿음을 여전히 비벼대고 있겠는가?
게다가 김수영 시의 총결산이라고 이해되고 있는 이 시가 실은 그의 다른 시들과 아주 다르다는 것은 흔히 간과되어 왔다. 김수영 시의 특장 중의 하나는 시의 화자가 시의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목청을 드높인다는 것인데(그래서 김현은 “그의 시가 노래한다라고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절규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풀」은 정말 김수영의 시인가 의심을 하게 할 정도로 온전히 묘사적이다. (「폭포」도 묘사적이지만, 묘사의 격정이 시의 화자의 존재를 단호히 그리고 격정적으로 알리고 있다. 아니 그 단호함과 격정이 화자 그 자신이며, 그 단호한 격정적 화자는 바로 ‘폭포’를 묘사의 행위로써 체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풀」에 드리워졌고 오늘날까지도 퇴색하지 않고 있는 그 영광은 단지 지나간 믿음의 화석으로서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은 끈질긴 교육의 기념비이고 박물관 건물 안의 명예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이러한 회의를 이겨낼 만한 힘이 「풀」에는 분명 있다. 그리고 그 힘은 저 과거적 사건의 반향이 아니라 이 작품의 내재 구조의 내구력이다. (그리고 내구력을 가진 것만이 독자와 반향할 수 있다. 문학성에 관한 고전적 관점과 현대적 관점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 내구력은 적어도 세 개 층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다.
우선, 섬세한 문학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었던 「풀」의 리듬이 그것이다. 황동규가 직관적으로 ‘주술적’이라고 정의한 그 리듬은, 서우석에 의해서 분석되고 김현과 김치수에 의해서 발전적으로 이해된 바에 의하면, 바람/풀의 명사적 대립의 반복이 아니라 눕다/일어서다, 웃다/울다의 동사적 대립의 교차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동사들의 교차 반복이 자아내는 효과는 무엇보다도 운동감이다. 운동을 일으키는 한 시는 화석으로 굳지 않는다.
그러나 반복은, 차이를 발생시키지 않는 한, 활동을 증대시키는 만큼 의식을 마비시킨다. 의식의 마비가 절정에 다다르면 주술에 빠진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김수영의 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시가 무엇보다도 의식의 고뇌이고 그것의 벼림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니 과연 그럴까? 정말 이 시는 오직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 시에는 눕고 일어서며 울고 웃는 동작의 되풀이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동작의 물결과 마찰하면서 이 반복적 리듬을 첨예하게 인지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는, 서우석이 설명없이 제시하였고(“풀과 신발만이 화면에 가득찬 정경”) 김현에 의해서 날카롭게 포착된, 그러나 이후의 평론가들에 의해서 은근히 무시된, 숨은 존재의 무엇이다. 그러니까, “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의 ‘발목’, ‘발밑’으로 지시된 존재의 발목, 발밑이다.
시의 본령이 디에게시스Diegesis라는 일반적인 합의에 근거한다면, 이 발목으로 지시된 존재는 화자 이외의 인물일 수가 없다. 화자는 묘사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인물로서 풀과 바람의 너울춤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가 온전한 묘사시라는 앞서의 진술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이 시에서도 김수영은 실상 시의 상황 속으로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시의 내구력이 저장된 두번째 창고층이다.) 다만, 그의 다른 시에서 화자가 ‘말’로써 개입하고 있다면, 이 시에서는 ‘발목’으로써 개입하고 있다. 발목으로 개입하고 있다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바로 이 점이 김현의 분석에서도 간과되어 있는 점이다. 김현은 발목으로 지시된 존재의 ‘서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것의 강조는 그로 하여금 그 서 있는 존재가 풀의 ‘울음’을 ‘웃음’으로 뒤집는다고 해석하게 한다: “「풀」의 비밀은 바로 이곳에 있다. 그 시의 핵심은 바람/풀의 명사적 대립이나, 눕는다/일어선다, 운다/웃는다의 동사적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풀의 눕고 욺을 풀의 일어남과 웃음으로 인식하고, 날이 흐리고 풀이 누워도 울지 않을 수 있게 된 풀밭에 서 있는 사람의 체험이다.” 그이다운 해석이다. 김현은 활동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한 믿음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 그 활동하는 개인이 민중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사람’은 깨어 있는 의식인이다.
그러나 시 자체는 그러한 해석을 보증하지 않는다. 일반적 상황에 비추어보아도, 깨어 있는 의식인이 곧바로 삶의 비탄을 유쾌한 생의 활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장담할 근거는 없다. 민중에 기대든 의식인에 기대든 그러한 발언은 단지 소망의 피력일 뿐이다. 독자가 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존재가 발목으로써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유일한 사실이 의미의 원천이며, 내구력의 세번째 창고이다. 가만히 눈을 감아보자. 바람이 불고 풀이 쓸렸다 일어났다 하는 풀밭에 한 사람이 서 있다. 이 사람이 풀밭에 있지 않은 다른 사람과, 가령, 근처의 어느 집 문간에 있는 사람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두 사람은 모두 풀의 쓸리고 일어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풀밭에 있지 않은 사람은 단지 볼 뿐이다. 풀밭에 있는 사람은 또 하나의 감각을 체험한다. 바로 발목에서 바람과 풀의 오묘한 밀고 당김을 느낀다는 것, 체감한다는 것 말이다. 그 체감은 또한 풀밭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는 사람이 느끼는 것과도 다르다. 후자들은 풀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에 바람과 풀의 ‘작란’을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 있는’ 존재의 특별한 가치가 있다 하겠는데, 그러나 그 서 있는 존재는 세상의 고통을 의식적으로 극복하는 사유하는 주체의 표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의식인이라기보다 감각적 존재인데, 그 감각은 세 가지 감각들의 동시적 복합체이다. 그는 우선 “비를 몰아오는 동풍”을 몸으로 맞는 존재이고(풀과 함께), 다음, 풀의 쓸리고 일어남을 보는 존재이며, 마지막으로, 풀과 바람의 밀고 당김을 발목에서 느끼는 존재이다. 풀밭에 앉아 있는 존재는 첫번째와 두번째 감각을 체험할 수 있으나 마지막 감각을 체험할 수 없으며, 풀밭에 누워(혹은 엎드려) 있는 사람은 첫번째 감각을 체험할 수 있으나 나머지 두 감각을 체험할 수 없으며, 집 문간에 있는 사람은 두번째 감각을 체험할 수 있으나 첫번째와 세번째 감각을 체험할 수 없다.
풀밭에 서 있는 존재가 느끼는 이 세 이질적 감각의 동시성이 풀의 울음을 울고 웃음으로 풀의 쓸림을 눕고 일어남으로 ‘인식’케 한 근거가 되지 않았을까? 풀의 울음은 풀 그 자신으로부터 터져나온 게 아니라 첫번째 감각을 겪는 자의 풀에 대한 감정 이입의 결과이며, 풀의 누움 역시 두번째 감각의 주체가 사실적으로 포착한 것을 첫번째 감각의 주체의 감정을 투사해서 얻어낸 인식이다. 풀의 일어남은 우선은 두번째 감각의 주체가 사실적으로 포착한 것이지만, 그것을 ‘일어남’이라고 명명한 데에는 그가 풀의 누움이라고 인식한 것을 ‘추정적으로’ 늘리고 의식적으로 조작하는 ‘소망’의 작업이 작동하고 있다. 이 소망의 작업은 궁극적으로 첫번째 감각의 주체가 느낀 고통스런 감정의 회복, 즉 울음을 웃음으로 뒤집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이 소망 작업의 현실적인 근거는 두번째 감각의 주체에게는 없다. 오직 그것을 ‘실감’할 수 있는 존재는 세번째 감각의 주체, 즉 발목의 주체이다. 이 발목의 주체는 눕고 일어남을 체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타자들의 사건이 주체의 감각에 전달된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이것은 ‘고통을 겪는-나’와 달리 풀과 바람이라는 고통 모르는 존재들이 서로 밀고 당기는 작란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즐거운 짐작을 갖게 된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라든가,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와 같은 묘사는 일단은 그 짐작된 작란의 표현으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작란하는 타자로서는(이 작란하는 타자는 이미 그의 초기시 「공자의 생활난」, 「달나라의 장난」에 나타났었다) 풀은 고통 모르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첫 연에 기술되어 있듯이 그것은 ‘나’와 마찬가지로 고통하는 존재이다. ‘나’는 고통하는 존재로서 풀과 동렬에 서며, 이 연관 덕분에 고통 모르는 존재들의 놀이인 풀-바람의 작란에 동참할 가능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세번째 감각의 주체 즉, 순수 감각의 발목 주체에 첫번째와 두번째 감각 주체들의 공동작업인 소망의 작업이 끼어들어(이 세 주체는 실은 한 주체이다. 이것이 세 주체의 자연스런 이동과 협력을 가능케 한다), 동풍을 이겨내는 의지의 표상으로 풀을 재구성한다. 두번째 연에서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의 ‘빨리-먼저’의 추월형(앞질러 달아나기야말로 작란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다)이 세번째 연에서 “늦게 누워도/ 〔…〕 먼저 일어나고/ 〔…〕 늦게 울어도/ 〔…〕 먼저 웃는다”의 ‘늦게/먼저’의 대결형으로 바뀐 것은 그 재구성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 재구성의 결과는 의지의 획득이나 행동의 실천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능성으로 열어놓는다는 것일 뿐이다. 풀의 사건에 발목으로 참여한 ‘나’는 몸 전체로는 참여하지 못한다. 상상적으로는 그것이 가능하겠지만 그 동참의 순간 그는 스스로 타자가 되어버리고, 그의 ‘고통받음’이라는 주체의 성질은 엄연히 남는다. 마지막 행이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로 메지난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은 생의 한복판에서 맞는 고통의 엄존성을 똑바로 가리키면서, 동시에 그 고통 겪는 존재가 발목의 체험에 힘입어서 근본적인 즉 뿌리째 뒤바뀌는 존재의 전환을 열망케 하는 존재로서 재탄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 개의 이질적인 감각의 복합이 궁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존재와 열망 사이의 날카로운 의식이다. (지나는 길에 덧붙이자면, 이 가능성이 실천태로 나타난 것은, 물론 ‘풀’이라는 제재 상징에 한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훗날의 시인 천양희가 “풀아 날 잡아라/내가 널 당겨 일어서겠다”고 요청한 「풀 베는 날」에 와서이다.)
그러나 이 날카로운 의식은 관념적·이상주의적 의식이 아니라 체험적 의식이며, 분열적 의식이 아니라 운동감각적 의식이다. ‘발목, 발밑’이 그 체험 운동이 샘솟는 장소이다. 이것, 즉 의지의 실현을 가능성으로 여는 체험 혹은 운동감각이, 지극히 의식적인 이 시인이 4·19의 좌절 이후 피 말리는 고통 끝에 가 닿은 마지막 지점이다. 4·19 직후부터, 특히 4·19의 좌절 이후 ‘신귀거래’ 연작과 더불어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바로 존재와 의식의 근본적인 괴리이며, 그가 사활을 건 투쟁을 벌인 것은 존재를 앞질러 나아가버린 의식을 어떻게 존재케 하는 것인가, 라는 문제였다. 그 투쟁의 도중에서 그는 「거대한 뿌리」에 와서 그 해답을 관념적으로 선취하고, ‘꽃잎’ 연작의 “여름풀의 아우성”에 와서 실제적으로 인지하게 되며, 「풀」에 다다라 마침내 그것을 체험적으로 느끼게 된다. 물론 그 체험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발목으로만 겪는 체험이다. 그러나 그 부분성 때문에 그것의 의미는 더욱 첨예하게 의식된다. 그 첨예한 의식이 짧은 서정시 「풀」을 더욱 날카롭게 떠는 악기로 만들어, 훗날의 숱한 시인들로 하여금 그것에 앞다투어 호응케 한다. 「풀」의 관념적 영광은 교육과 제도(정부적이든 비정부적이든)의 소산이지만, 그것의 실제적 영광은 미완성의 형식으로 완성된 텍스트의 구조의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