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金洙暎1921.11.27∼1968.6.16)
참여시인. 서울 생. 1941년 선린상고 졸, 1942년 동경상대 전문부 입학, 1943년 학병 징집을 피하기 위해 귀국, 1944년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 광복 후 연세대 영문과 졸업. 「후반기」 동인,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여 등단.
1949년 [후반기] 동인인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 모더니스트로서 각광을 받았다. 교사, 기자 생활을 했고, 6ㆍ25 때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북괴군에 징집되었다가 생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도 했다. 그 후 교편생활, 잡지사, 신문사 등을 전전하며 시작(詩作)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4ㆍ19 후에는 대체로 현실 참여적인 시를 써 관심을 모았다.
59년에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하여 제1회 시협상(詩協賞)을 받았고, 에머슨의 논문집 <20세기 문학평론>을 비롯하여 <카뮈의 사상과 문학> <현대문학의 영역> 등을 번역하였다. <거대한 뿌리>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 등 2권의 시집과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 <퓨리턴의 초상> 등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에 간행된 것들이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ㆍ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쓴 그는 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한 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하였다. 이 시인이 가진 작품의 시사적(詩史的) 맥락에 대해 평론가 김현은 “30년대 이후 서정주ㆍ박목월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재래적 서정의 틀과 김춘수 등에서 보이던 내면의식 추구의 경향에서 벗어나 시의 난삽성을 깊이 있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공로자”라고 말하였다.
<풀>을 짓고 난 뒤 15일만에 밤늦게까지 통음하면서 시대의 울분을 토로하다 귀가 도중 취한 채로 집 앞에서 좌석버스에 치여 숨진 김씨의 유족으로는 디자이너인 부인 김현경(金顯敬)씨와 두 아들이 있다. 작품 200여 편을 남김.
사망 1주기를 맞아 도봉산에 시비(詩碑)가 건립되었고(1969), 미완성의 장편소설 <의용군>이 [월간문학](70)에 발표되었다. 1981년 김수영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시】<묘정(廟庭)의 노래>(1945) <공자의 생활난>(1945) <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1947), <아메리카타임지>(1947) <웃음>(1948) <이(蝨)>(1947) <토끼>(1949) <달나라의 장난>(1953) <헬리콥터>(1955) <병풍>(1956) <눈>(1957) <폭포>(1957) *<푸른 하늘을>(1960) <육법전서와 혁명>(1961), <적>(1962) <그 방을 생각하며>(1963) <적>(1963) <후란넬저고리>(1963) <강가에서>(1964) <거대한 뿌리>(1964)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 <엔 카운터지(誌)>(1966) *<풀>(1968)
【시집】<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공저) <달나라의 장난>(1959.춘조사), <거대한 뿌리>(1974.민음사), <주머니 속의 시>(1977.열화당),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9.민음사),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1984.열음사) <사랑의 변주곡>(1988.창작과비평사) <거대한 뿌리>(1974.사후출판)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6.사후출판)
【시선집】<거대한 뿌리>(1974.사후 발간)
【산문선집】<시여, 침을 뱉어라>(1975) <푸리턴의 초상>(1976.제2산문선집)
【장편소설】<의용군>(1970.월간문학사)
【전집】<김수영시전집>(1981.사후 발간) <김수영산문전집>(1981)
【저서】<20세기 문학평론>(1953.공저)
【역서】<카뮈의 사상과 문학>(1958.金鵬九共譯) <현대문학의 영역>(1962.Tate, A 原著, 李相沃 共譯)
【시경향】
▶1950년대 모더니스트의 주요 인물. 점차 모더니즘의 공허함을 느끼며 이로부터 탈피하고자 노력하였다.
▶1960년 무렵 4ㆍ19를 기점으로 강렬한 현실의식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시 세계】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당시 모더니스트들의 일반적 경향과 같이 도시문명의 비판과 신기성(新奇性), 암담하고 불안한 시대사조 등을 반영하였다.
그러나 점차 모더니즘에 공허함을 느끼면서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고, 4ㆍ19가 일어난 1960년을 고비로 강렬한 현실 의식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시의 모습을 바꾸면서 소시민의 자기각성, 지식인이 가지는 정직한 고뇌와 현실에 대한 항의를 다루었다. 그것은 기법의 차원이 아니라 정신의 태도에 결부된 문제이다. 즉 사회적 조건에 속박된 존재이면서도 주어진 여건을 묵인하기보다 현실의 의미를 탐구하고 이러한 탐구의 과정을 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이 자기 고백의 어조를 띠는 그의 시는 일상어를 적극 채용하여 격렬한 정서적 충동과 시적 형태의 파괴를 시도하였으며 시의 현실 참여를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시는 당시 모더니스트들의 일반적인 경향과 같이 도시문명의 비판과 신기성(新奇性), 암담하고 불안하던 시대사조를 반영했으나 유행성이나 시사성으로 타락하지 않고 지성과 감성으로 조화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강렬한 현실의식과 저항정신에 뿌리박은 시정(詩情)의 탐구로 참여파 시인들의 전위적 역할을 담당했던 그는 ‘반시론(反詩論)’의 기치 아래 어지러운 시단의 성벽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의 시세계는 바로 자유와 꿈의 세계였다고 말한 평론가 김현씨는 김씨의 ‘자유’는 그의 시에서 세 번의 변모를 감수한 것으로 분석했다. 즉, 그가 첫 작품을 발표한 1945년에서부터 4ㆍ19가 일어난 1960년에 이르기까지의 자유는 설움, 비애라는 소시민적 감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됐고 1960년에서 1961년에 이르는 사이의 그것은 사랑과 혁명으로 설명되며 그 이후의 시작활동에서는 자유를 불가능케 하는 적에 대한 증오와 그 적을 그대로 수락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연민, 탄식으로 설명된다고 김현씨는 말했다.
그는 죽고 난 뒤 점점 더 새로운 빛을 발하면서 신화처럼 우리 시단에 머물고 있다. 전형적인 난해시에서 거침없는 참여시까지, 개인적 서정을 노래한 시에서 혁명을 노래한 시까지 그의 시는 참으로 커다란 진폭을 가졌다. 그 때문에 지난 20년 동안 모더니즘 시 그룹에서는 꿈과 자유를 노래한 그를 ‘시적 스승‘으로 모시고 민족시쪽에서는 자유와 혁명을 노래한 그를 ’정신적 선배‘로 섬겼다.
그가 생전에 낸 개인시집은 <달나라의 장난> 한권뿐. 난해시와 서정시가 풍미했던 50∼60년대 시단에 별로 동료를 모으지 못했던 그의 시들은 74년에서 76년 사이 [민음사]에서 시선집 <거대한 뿌리>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 산문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 <퓨리턴의 초상>이 잇달아 나오면서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시와 산문, 그에 대한 비평들은 지난 83년 3권의 전집으로 정리됐다. 그러는 사이 그의 시가 ‘소시민적 한계에 머물렀다’느니 ‘모더니즘 취향을 극복하지 못했다’느니 하는 비판론도 심심찮게 제기되면서 ‘김수영 신화’의 맹목성은 상당 부분 깨져 나갔다. ‘서정주와 같은 동시대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 자기 시대의 자유를 위해 철저하게 싸우다 간 참여시인’(시인 황동규)이라는 평가도 있었고, ‘정치 권력을 고발하고 공격하기보다 자신과 이웃의 소시민성을 풍자하는 데 치중했다’(시인 김지하)는 비판도 나왔다. 어찌 되었든 174편의 시와 60여 편의 산문으로 60년대 참여시인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그는 사후에 대단한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도대체 무엇이 김수영을 우리 시사에 그처럼 장대하게 일으켜 세웠는가. 유종호씨(애대 교수)는 그것이 ‘뭔지 모를 것 같은 난해한 시들 속에 노다지로 숨어 있는 기발한 이미지의 결정’이라고 했고, 백낙청씨(서울대 교수)는 ‘당대 모더니즘시와 참여시를 모두 수용했으면서도 오늘날에도 폭넓게 공감을 자아내게 마드는 그의 선진적인 시대 정신’이라고 했다. 백씨는 70년대 이후 활발한 활동을 보인 시인 신경림, 고은, 조태일, 그리고 김지하까지도 김수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백낙청과 유종호가 똑같이 지적한 김수영 시의 미덕은 이런 것이었다.
“난해해 알 듯 모를 듯 하면서도 기가 펄펄 살아있고 강렬하고 역동적이며 양심적이고 솔직하며, 해방과 혁명의 이미지를 담고 있고 온몸으로 몸부림치며 썼다.”
“그 절실함은 당대는 물론 후배 시인들도 따르기 어렵다.”
밟아도 밟아도 꺾이지 않는 끈질긴 민중의 힘을 ‘풀’로 이미지화했다 해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의 마지막 시 <풀>이 "이제 민중이 나약한 풀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백낙청)고 재평가된 것도 흥미롭다. 또 유종호는 시 <사랑의 변주곡> 속의 한 대목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거다!’에 우리 현대시가 갖는 가장 발랄한 해방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고 평했다. -<한겨레신문>(88. 6. 7)-
【김수영 시의 문학사적 의의】
김수영은 신동엽과 함께 1960년대 한국 시단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1970년대 이후 한국시에서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던 민중문학의 선구자로서 이 두 사람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민중적인 성격이 강한 이 두 사람의 시는 모두 4ㆍ19의 역사적 경험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동엽은 투철한 역사 인식과 건강한 민중성에 기초하여 시를 쓴 데 비해,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김수영은 4ㆍ19를 계기로 점차 모더니즘의 한계에서 벗어나 강렬한 현실 인식과 민중성에 기초한 시를 쓰게 된다. 그런 점에서 김수영은 한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 또 모더니즘의 태내에서 자라난 모더니즘의 비판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풀>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김수영이 모더니즘의 한계를 넘어서서 투철한 역사 인식과 민중 의식을 획득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연보】
▶1921(1세)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종로2가 158번지에서 아버지 김태욱 씨와 어머니 안향순 씨 사이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본적 서울 종로구 조동 171번지. 조부는 희종 정삼품 통정대부중추의관(通政大夫中樞議官)을 지냄. 부친 태욱씨는 경기도 파주ㆍ문산ㆍ김포ㆍ강원도 홍천 등지에 500여석의 추수를 했음. 형제로는 수성, 수강, 수명, 수연, 수환, 송자 등 일곱 동생을 두었음. 종로 6가 116번지로 이사. 가세가 기울기 시작함.
▶1924(4세) 조양 유치원에 들어감.
▶1926(6세)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공부함.
▶1928(8세) 어의동 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입학
▶1931(11세) 조부 70세로 별세.
▶1934(14세) 보통학교 졸업. 6년 내내 성적 뛰어나 반장을 지냄. 선천적으로 병약한 편으로 잔 병치레가 많았으며 6학년 9월경 운동회를 끝내고 장티푸스에 걸린 후로 잇달아 폐렴, 뇌막염으로 앓아누움. 이로 인해 졸업식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진학도 못한 채 1년여를 요양. 서울 용두동으로 이사.
▶1935(15세) 선린상업학교 입학. 1년여의 휴학과 쇠약한 신체 조건 때문에, 일차 경기도립상고에 응시했으나 낙방, 2차로 응시한 선린상고 주간부에도 낙방하고 같은 학교 전수과(야간)에 입학. 상업학교 진학은 유산에만 의지한 채 독자적 생활 기틀을 잡지 못한 게 한이 된 부친의 일방적 선택에 따른 것임.
▶1938(18세) 선린상업학교 졸업. 본과(주간 2년)로 진학.
▶1940(20세) 집을 줄여 서울 현저동으로 이사.
▶1941(21세) 12월, 선린상업학교 졸업. 성적 우수. 특히 주산과 상업 미술에 재능을 보임. 동경 성북고등예비학교에 다님. 水品春樹에 연극 사사. 태평양전쟁 발발.
▶1943(23세) 전쟁 막바지인 12월에, 가족들 만주 길림성으로 감. 조선학병 징집을 피해 일본에서 겨울에 귀국. 안영일, 심영 등과 연극을 함.
▶1944(24세) 봄에 가족이 가 있는 만주로 감. 연극에 경도됨. 동생 주성, 일본군에 끌려감.
▶1945(25세) 8월 15일 광복. 9월,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옴. 임시로 종로6가의 고모댁에 머물다가 충무로 4가에 집을 마련하고 이사.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 시 <조정(朝廷)의 노래> <공자(孔子)의 생활란> <거리>(분실됨) <꽃>(분실됨) 등을 씀.
▶1946~48(26~28세) 연희전문 영문과 4학년에 편입. 졸업은 하지 않음. 수판화 그리기, E.C.A. 통역 등을 잠깐씩 함. 박준경, 임호권, 박일영, 김경린, 양병식, 김경욱, 이봉구, 이한준, 박연환, 김윤성, 박태진, 박훈산 등과 교우.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 <아메리카 타임誌> <이(蝨)> <웃음> 등을 씀.
▶1949(29세) 1월, 부친 49세로 별세. 김경린, 임호권, 박연환, 양병식 등과 함께 묶은 신시론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아메리카 타임誌> <공자(孔子)의 생활란> 수록. <토끼> <아버지의 사진> 등을 씀.
▶1950(30세) 김현경(金顯敬.1927년 6월 14일생)과 결혼.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8월 북괴군 후퇴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감. 평남 개천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탈출, 국군 최선봉 부대를 만나 서울까지 왔으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됨. 수강, 수경 두 동생 행방불명. 12월 26일, 나머지 가족들 화성군 조암리로 피난. 12월 28일, 피난지에서 장남 준(儁) 출생(호적의 51년생은 신고 잘못).
▶1952∼53(32∼33세) 포로수용소에서 석방. 수용 중에 미국인 외과병원 원장의 통역으로 일함. 부산, 대구에 머물면서 미8군 수송관의 통역관, 선린상고의 영어교사 등을 함.
▶1953(33세) <달나라의 장난> <애정지순(愛情遲純)> <풍뎅이> <부탁(付託)>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傷兵捕虜) 동지들에게> <너를 잃고> <미숙한 도적> 등을 씀.
▶1954(34세) 환도. 주간 [태평양]에 근무. 신당동에서 동생들과 같이 기거하다가 피난지에서 돌아온 부인과 성북동에 안착함. <시골선물> <구라중화(九羅重花)> <도취(陶醉)의 피안>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나의 가족> <거미> <더러운 향로> <PLASTER> <구슬픈 육(肉)> <체(體)> 등을 씀.
▶1955(35세)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으로 6개월 가량 근무. 6월, 마포 구수동으로 이사. 이후로 번역을 주로 하며 집에서 양계(養鷄)를 함. 안수길, 유정, 김중희, 박긍재, 박연희, 김리석 등과 교우관계를 가짐. <나비의 무덤> <긍지(矜持)의 날> <영사판(映寫板)> <서책> <헬리콥터> <휴식> <수난로(水煖爐)> <거리(一)>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국립도서관> <거리(二)> <연기> <레이판 탄> 등을 씀
▶1956(36세) <바뀌어진 지평선> <기자의 정열> <구름의 파수병> <사무실> <여름뜰> <여름 아침> <백의(白蟻)> <눈> <지구의(地球儀)> <꽃(二)> <자(針尺)> 등을 씀.
▶1957(37세) 김종문, 이인석, 김춘수, 이상노, 임진수, 김경린, 김규동, 이흥우 등과 묶은 시집 <평화에의 증언>에 <폭포> 등 5편 수록. <영롱(玲瓏)한 목표> <폭포> <봄밤> <채소밭가에서> <예지> <하루살이> <서시> <광야> <영교일(靈交日)> <꽃> 등을 씀.
▶1958(38세) 6월 12일 차남 우(瑀) 출생. 11월 1일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초봄의 뜰안에> <비> <말> <사치(奢侈)> <밤> <동맥(冬麥)> 등을 씀.
▶1959(39세) 1948∼59년 사이에 잡지 신문 등에 발표했던 시를 모아 개인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춘조사에서 간행. <사령(死靈)> 등 40 편 수록. <자장가> <모리배> <생활> <달밤> <사령(死靈)> <조고마한 세상의 지혜> <가옥찬가> <말복> <반주곡> <파밭 가에서> <싸리꽃 핀 벌판> <동야(凍夜)> <미스터 리에게> 등을 씀.
▶1960(40세) 4월 19일 학생의거 일어나다. 이후 죽을 때까지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시와 시론, 시평 등을 잡지, 신문 등에 발표. 왕성한 집필활동을 함. 서라벌 예대, 서울대, 연세대, 이대 등에서 강연함. <파리와 더불어> <하… 그림자가 없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기도> <육법전서와 혁명> <푸른 하늘을>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있지만>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거미잡이> <가다오 나가다오> <중용(中庸)에 대하여> <허튼소리>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 <그 방을 생각하며> <英田絃次郞> 등을 씀.
▶1961(41세) <눈> <사랑> <쌀난리> <황혼> <4․19 시> <여편네의 방에 와서> <격문(檄文)> <등나무> <술과 어린 고양이> <모르지?> <복중(伏中)> <누이야 장하고나!> <누이의 방> <이놈의 무엇이지?> <먼 곳에서부터> <아픈 몸이> <시> <여수> 등을 씀.
▶1962(42세) <백지에서부터> <적> <마아케팅> <절망> <파자마바람으로> <만주의 여자> <장시(一)> <장시(二)> <전향기(轉向記)> <만용에게> 등을 씀.
▶1963(43세) <피아노> <깨꽃> <후란넬 저고리> <여자> <돈> <반달> <죄와 벌> <우리들의 웃음> <참음은> 등을 씀.
▶1964(44세) <거대한 뿌리> <시> <거위 소리> <강가에서> <X에서 Y로> <이사> <말> <현대식 가교> 등을 씀.
▶1965(45세) <六五년의 새해> <제임스 띵> <미역국> <적(一)> <적(二)> <절망> <잔인의 초>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이 한국문학사>등 씀.
▶1966(46세) <H> <이혼취소> <눈> <식모> <풀의 영상(影傷)> <엔카운터誌> <전화 이야기> <설사의 알리바이> <금성 라디오> <도적> <네 얼굴은> 등을 씀.
▶1967(47세) <VOGUE야> <사랑의 변주곡> <거짓말의 여운 속에서> <꽃잎(一)> <꽃잎(二)> <꽃잎 (三)> <여름밤> <미농인찰지(美濃印札紙)> <세계일주> <라디오界> <미인> <먼지> 등을 씀.
▶1968(48)세) <성> <원효대사> <의자가 많아서 걸린 다> <풀> 등을 씀. 6월 15일 밤 11시 10분경 귀가길에 구수동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어 머리를 다침. 의식을 잃은 채 적십자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치 못한 채로 다음날 16일 아침 8시 50분에 숨짐. 6월 18일 예총회관 광장에서 문인장으로 장례를 치름.서울 도봉동에 있는 선영에 묻힘.
▶1969. 6월 1주기를 맞아 교우와 친지들에 의해 묘 앞에 시비가 세워짐.
▶1974. 9월 시선집 <거대한 뿌리>가 민음사에서 간행됨.
▶1975. 6월 산문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가 민음사에서 간행됨.
▶1976. 8월 시선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가 민음사에서 간행됨. 산문선집 <퓨리턴의 초상>이 민음사에서 간행.
▶1981. 6월 <김수영 시선>(한국현대시문학대계)이 지식산업사에서 간행되다. 번역서로 <에머슨 논문집> <20세기문학평론> <현대문학의 영역> <문화ㆍ정치ㆍ예술> 등 번역소설ㆍ평론이 30편 내외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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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및 성장】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지주(地主)이던 부친 태욱(泰旭)과 모친 안형순(安亨順)의 8남매중 장남으로 출생. 본관은 김해. 효제국민학교 졸업.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1941) 후 바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 전문부에 입학(1941). 일가족이 만주 길림성(吉林省)으로 이주(1943)함. 조선학병징집을 피해 귀국(1943)한 뒤 가족이 있는 길림성(吉林省)으로 가(1944) 길림성 길림제육고(吉林第六高)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며 영문학과 연극활동에 매진.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1945)되자 다시 서울로 귀국(1945)하여 미군 통역일을 하다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영어영문학과 4학년에 편입(1945)했으나 중퇴. 6ㆍ25 발발(1950)시 서울에 그대로 남아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게 징집되어 인민해방군으로 전투에 참가. 북으로 후퇴하는 인민해방군에서 탈출하여 포로가 된 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석방(1952)됨. 이후 미군통역, 주간 태평양 기자, 평화신문사 문화부차장(1954) 등을 맡아보며 생계를 유지하다 1955년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자택서 직접 양계(養鷄)업을 하며 시작(詩作), 번역, 평론에 전념. 1968. 6. 15 귀가길에 버스에 치여 의식 불명 상태에 있다 다음날 사망(1968. 6.16). 북한산 국립공원 입구에 김수영시비가 제막됨(시인의 시 <풀>이 새겨짐).두 권의 <김수영전집>(민음사, 1981)을 출간한 민음사에서 1981년부터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해 오고 있다.
【활동 및 작품경향】
한국문단사에서 대표적 참여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시인은 1960년대 참여시 운동의 선구자로서 부도덕한 정권의 탄압과 압제 속에서 펼쳐지는 추악한 현실적 억압과 좌절에 굴하지 않고 민중과 민주, 민족의 입장에서 시대와 역사가 요구하는 지식인의 사명,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은 미래의 이상과 암담한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옥조여 오는 절망을 극복하고 세속의 회유와 변절의 유혹에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양심과 정의를 지키려 고뇌하는 지성의 모습을 꼿꼿이 유지한 채 자신의 시속에서 적극적으로 또는 은유적인 표현을 통해 옳은 것이 무엇이며 왜 옳은 것을 찾아 부정과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노래하였으니 이러한 시인의 삶은 그가 그렇게 추앙해 마지않았던 4ㆍ19민중의거와 시인의 이름이 후세인에 의해 동격으로 불리 우는 까닭이요 한국의 대표적 저항시인으로 19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독재체제를 거쳐 1980년대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과 맞서 싸우던 수많은 민주투사, 재야학자, 학생운동가들과 후세 문인들은 물론 1990년대 민중시인과 민중운동가들에게 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친 이유라 하겠다.
▶(1) 초기(광복∼6ㆍ26이전)
해방과 함께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온 뒤 「예술부락(藝術部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1945)하며 문단에 첫 발을 내디딘 시인은 <공자의 생활난>(1945), <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1947) <아메리카타임지>(1947) <웃음>(1948) <이(蝨)>(1947) <토끼>(1949) 등의 작품을 발표하고 이어서 김경린(金璟麟), 박인환(朴寅煥), 양병식(梁炳植), 임호권(林虎權)과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1949)하는 등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이며 문단의 주요 모디니스트의 한 사람으로 각광을 받게된다.
이 때의 초기시들은 당시 대부분의 모더니스트 시인들이 유행처럼 표출해 내 보여주었던 시사성, 관념성, 생명성을 특색으로 하는 대상의 감각적 형상화, 서구지향적 감성의 시적표현등의 특징들을 극복하고 지성과 감성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근대화와 서구화를 맹목적으로 동경하며 찬미되던 당시 현대문명과 도시 생활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노래한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러한 시인의 모습은 우울한 일제식민지시절에 싹터 이어져오던 감상적이고 수동적이며 무기력한 경향의 모더니즘, 서구동경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좌절적인 표현이 주를 이루던 이전의 모더니즘계열의 시가 해방의 새시대와 더불어 차츰 주체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희망찬 기대속에서 현실과 우리주위의 현모습을 의식하며 시대와 함께 변화해가던 모더니즘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인은 이러한 변화의 경향을 이끌어 가던 해방이후 1950년대 모더니스트의 중심인물중 한 사람이라 하겠다.
* 대표작 : <묘정(廟庭)의 노래>(1945) <아메리카타임지>(1947)
▶(2) 1950년대
하지만 6ㆍ25전쟁의 발발로 인민해방군에 강제 징집되어 전투에 참여하고 포로가 된 뒤 거제소 포로수용소에 수용되는 등 시대적 격변을 몸으로 겪으며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고 전후 암담한 경제적 곤궁과 피폐한 조국현실을 바라보며 생존을 위한 처절한 생활고에 내몰려 가는 현실 속에서 이전의 작품경향과는 다른 내적변화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즉 이전의 감상적 모더니스트들이 가지고 있던 막연한 서구문물에 대한 동경과 비현실적 감상, 서구근대화를 이상적 가치로 동경하며 낭만적인 필치로 그려내던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경향이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희망에 찬 주체적이고 자기극복적인 모더니즘으로 막 변화하려는 와중 전쟁의 발발과 그에 후유증은 비현실적이고 감상적인 공허함을 탈피하고 현실속에 눈을 돌려 이를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으나 현실의 비참함이 극에 달한 상태, 한마디로 기가 막흰 상황으로 추락해 버린 시대상황하에서 시대의 아픔과 이에 따른 지식인의 방황을 풍자적인 시어로 읊조리며 지적인 언어로 시대의 번민을 표출해 내고 있다. 전쟁의 와중에 있던 1950년대 초반에는 작품활동이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중반 이후부터 발표된 작품들은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을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지식인의 방황과 암담한 시대 속에 내팽겨진 소시민적 비애와 슬픔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노래하고 있으며 차츰 사회와 현실에 눈을 뜨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불일치와 간극에 대한 지적번민과 치열한 지적탐색은 이후 현실을 보고 평가하는 나름의 시각과 틀을 형성하여 다음시기의 현실참여의 지적토대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
* 대표작 : <달나라의 장난>(1953) <헬리콥터>(1955) <병풍>(1956) <눈>(1957) <폭포>(1957)
* 1959년 그간의 발표작을 모은 시집 <달나라의 장난> 이 간행.
*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1958) 수상.
▶(3) 4ㆍ19 민주주의혁명
4ㆍ19민주혁명은 시인의 인생과 작품활동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 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을 말하면 4ㆍ19민주주의혁명이, 4ㆍ19 민주주의혁명을 말하면 시인의 이름이 연상될 정도로 이 후 시인의 모든 활동과 작품활동은 4ㆍ19민주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이를 현실 속에서 펼쳐 나가기 위한 방향으로 이루어졌으니 한 마디로 4ㆍ19민주혁명은 시인을 새로이 탄생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시인에게 크나 큰 영향을 끼쳤다.
4ㆍ19민주주의혁명을 체험한 시인은 강렬한 현실의식을 바탕으로 혁명과 사회변화,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열망을 드러내게 되는데 이 때를 기점으로 자유와 저항 의식을 기저로 강렬한 현실 의식을 표출하는 참여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곧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참여시인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4ㆍ19 민주혁명을 통해 시인은 참다운 자신의 시세계를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니 곧 평등한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유에의 열정과 이를 위한 혁명이라는 시적 주제가 바로 그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강렬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에 뿌리박은 치열한 시적 탐구는 그를 1960년대 참여시인들의 전위이자 민주주의와 양심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변모시키게 된다.
시인의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은 현실 속에서 부정을 제거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하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바로 사회를 옭아매고 있는 악한 체제의 부당한 지배권력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저항과 투쟁이며 이를 통해 사회의 긍정적 변화와 역사발전을 도모하고 및 부정을 극복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저항의 원동력, 역사변동의 주체는 사회의 참주인, 실체로서의 민중이라는 인식을 낳게되는데 이는 이후 19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독재체제와 1980년대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과 맞서 싸우던 수많은 민주투사, 재야학자, 학생운동가들과 후세 문인들은 물론 90년대의 민중운동가들에게 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올바른 사회와 나라, 민주주의의를 이룩하고자 했던 실천적 지식인의 올곧은 사표로 그를 추앙하게 계기가 된다. 이후 그는 시속에서 지속적으로 사랑과 자유를 주제로 하는데, 자유는 그의 시적, 정치적 이상이고, 사랑은 그 자유의 실현을 억압하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인식론적인 사랑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 대표작 : <하…그림자가 없다>, <육법전서(六法全書)와 혁명>, <푸른 하늘을>(1960)
▶(4) 5ㆍ16군사쿠데타 이후
4월혁명의 영향으로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시, 시론 등을 발표하던 시인은 1961년 민주시민들의 순고한 피로 이룩한 4ㆍ19혁명를 짓밟고 박정희 등 군부세력에 의한 5ㆍ16군사쿠데타가 발발하여 군사정권이 수립되고 그들을 위한 군사독재체제가 구축되어가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자유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적(敵)'에 대한 증오와 그 적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며 이를 연민, 탄식, 풍자 등을 사용하여 작품화하였고 이러한 그의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은 <거대한 뿌리>, <현대식 교량>, <사랑의 변주곡>등을 통해 표현된다.
<푸른하늘을>과 더불어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풀>은 민중이라는 개념이 전무한 시절 역사변동의 주체를 민중으로 파악하고 이를 풀로 형상화하여 표현함으로써 1980년대 후반 급격히 대두되기 시작한 민중운동과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효시로 평가되고 있다. 시인은 그의 대표적 평론으로 꼽히는 <시여, 침을 뱉어라>등의 평론을 통해 참여시와 시의 현대성을 주장하며 시와 평론등의 저술활동을 하며 지내다 급작스런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 대표작 : <그 방을 생각하며> <적> <후란넬저고리>(1963) <강가에서>(1964) <거대한 뿌리>(1964)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 <엔 카운터지(誌)>(1966) <풀>(1968)
*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1958)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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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론>
김수영 시인은 우리 나라 문단에서 가장 비중 있는 서정시인이자, 혁명시인이다. 끈임없는 실험과 모색 그리고 냉혹한 자기부정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 나라 현대사와 문단과 자신의 내면세계를 파헤친, 우리 문단의 '거대한 뿌리'와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에 시인 황동규는 83년 자신의 글에서 '지난 15년 간 이 땅에서 일어난 중요한 문화현상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김수영문학의 진화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수영의 문학은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6ㆍ25를 거치면서 인간의 삶의 문제와 그에 대응하는 개인적 정서에 초점을 맞추었던 첫 번째 시기, 4ㆍ19 기간의 감격과 좌절을 표현한 두 번째 시기, 소시민적 삶의 비애와 존재의 문제를 탐구하면서 사회적 삶의 조건을 내면화한 세 번째 시기이다. 이 중 김수영 문학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시점이라고 한다면 역시 4ㆍ19를 경유하며 혁명의 감격과 좌절의 아픔을 노래했던 두 번째 시기이다. 4ㆍ19는 김수영이 시에 대해 일대 전환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4ㆍ19를 거치며 그는, 개인적 삶에서 비롯되던 비극적 세계 인식에서 탈피하여 사회ㆍ역사적 세계 인식을 획득하게 되고 그와 함께 폭발적인 시적 성숙을 이룩한다. 그는 4ㆍ19를,
"하늘과 땅 사이의 통일로 느끼면서 동시에 남도 북도 없고 미국도 소련도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디다.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자유 독립 그것뿐입디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습디다. 나의 온몸에는 띠끌만한 허물도 없습디다. 그러니까 나의 몸은 전부가 극장입디다. 자연입디다. 4월의 재산은 이러한 것이었소. 이남은 4월을 계기로 해서 태어났고 그는 아직까지도 작열하고 있소. 맹렬히 치열하게 작열하고 있소"
라고 표현하며 흥분했다.
4ㆍ19 후 6개월 간 김수영은 혁명이 가져다주는 흥분의 도가니에서 자신을 채찍질하고 시적 자유를 자기화할 수 있는 크나큰 틀을 마련했지만 <그 방을 생각하며>라는 시를 쓰면서 정치적 혁명의 실패를 자인한다. <중용에 대하여>에서처럼 가면 쓴 민중과 지식인에 대하여 분노하게 되고, 시인의 무기력함에서 시인 무용론까지 좌절하여 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경유하며 시인은 내면적 혁명의 중요성과 지난함을 절절히 깨닫게 되고 시대를 앞서나가는 문학이 갖는 불온함에 대하여 정리하게 된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고 외쳤던 김수영의 도발성은 그의 시대에 시인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 '세상에 대고 침뱉기'였음을 웅변하고 있다
<김수영론-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 (김상환 지음/민음사)
조선시대, 즉 근대화 이전 한국문화의 한 특징적인 징표는 시와 철학, 그리고 정치경제학의 혼재였다. 그것은 갈수록 시대착오적인 혼재였다. 음풍농월과 경세철학이 혼동되었으니까. 김수영은 그런 전통적 ‘서정시’의 맥을 과감하게 자르고 진정한 한국 근대시 혹은 현대시의 장을 연 시인으로 평가된다. 이것은 시에서 철학이 삭제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구분과 결합’의 변증법을 통해 시의 의미가 심오해지는 동시에 의미의 감각이 첨예화하고 그 동시성이 공간적으로도 겹쳐진다는 뜻이다. 서양의 경우 보들레르가, T S 엘리어트가, 아니 모든 현대시인들이 그랬다.
‘철학자’ 김상환은 1200장이 넘는 연구서에서 ‘시인’ 김수영을 어떻게 논하고 있을까? 시와 철학의 ‘시적인’ 겹침을 포괄하는 철학적 겹침은 어떤 내용일까? 이것은 새로우면서도 벌써, 아니 이미 흥미로운 질문이겠다.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김수영론>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시적 자유와 존재 사유, 2부 모더니즘의 체험, 3부 사유의 금욕주의. 이 중 ‘겹침’에 대한 본격적인 접근은 1부다. 우선 소제목 자체가 그렇다. ‘교량술로서의 작시’, ‘풍자와 해탈 사이’, ‘시(詩)와 시(時)’, 그리고 급기야 ‘시(詩)의 시(視)’ 등등. 1부는 대체로 촘촘한 철학적 해석, 그리고 (이것이 더 중요한데) 특히 ‘교량술로서의 작시’에서 철학이 시에게 길을 내주는 대목이 장관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책의 장점이자 매력일 것이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김수영과는 다르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김수영의 ‘사유의 일관성’을 ‘현명한 관념론의 길’이라 부르고 있는데, 꽤나 재미있는 표현이지만 역시 ‘치열한 변증법의 길’이라고 고쳐쓰고 싶다. ‘시와 교양술’ 첫줄의 ‘김수영은 시를 썼다기보다 시에 대한 시를 썼다’라는 선언도 마찬가지. 이것은 언뜻 사소하지만 그것이 풍자〓사랑, 해탈〓죽음의 등식, 혹은 의사 등식에 이르면 (풍자 사랑 해탈 죽음 각각에 대한 심오하고 역동적인, 그리고 시적 상상력이 풍부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화한다. ‘시인으로서’ 철학하는 태도가 ‘신인으로서’ 철학하는 태도로 둔중해지는 격. 김수영에게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그 사이 ‘교량술’이 아니었을까.
2부는 다소 저널리스틱한 글을 모아서 통일성이 떨어진다. 반면 3부는 한 제목으로 한 잡지에 두 달 간격으로 4회 연재한 것. 시를 포괄하려는 철학의 과욕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풍자를 사랑으로, 해탈을 죽음으로 전화시키는 것은 80년대식 ‘진보파’의 보수주의를 연상시킨달까. 들뢰즈와 데카르트가 만나는 게 그 지점이던가.
<철학의 숲까지 거닐었던 시인 김수영> - 동아일보(2000. 9. 15)
시인 김수영 왜 지금, 아니 아직까지도 김수영인가. 한마디로, 김수영의 문학은 ‘역사의 교량’이 아니라 ‘교량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학과 삶의, 문학의 형식과 내용의, ‘내용의 형식성’과 ‘형식의 내용성’의 치밀한 변증법을 통해 건설된, 살아있는, 아니 미래를 자양분 삼는 ‘길〓교량’의 문학이며 문학의 ‘길〓교량’이며, 끝내는 (후대의 업적으로써) ‘역사의 교량’과 ‘교량의 역사’를 공(空)으로 통합하는 문학이다. 아니다 길이다. 아니다 교량이다…. 그리하여 어떻게 되는가.
그의 시에서 철학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지만, 형식으로 된 철학이 다시 내용을 압도한다. 그것이 그토록 매력적인 ‘위태로움의 미학’을 낳는 것. 그때 시는 다시 철학의 두뇌가 아니라 몸이다.
서양 계몽주의 철학의 근대적인 한계를 ‘예술 세계로의 모험’으로 극복, 현대철학의 장을 연 것은 니체였다. 그후 들뢰즈 등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현대 철학사의 역사는 예술, 특히 시와 음악이 지닌 ‘이성을 포괄․극복하는 능력의 명징성’을 철학의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전화(轉化)시키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시여 침을 뱉어라>
1968년 4월 부산에서 펜클럽 주최로 행한 문학 세미나에서 발표 원고로 그의 현실 참여적인 문학 정신이 잘 드러나고 있다. 나중에 그의 산문집 제목이 되기도 했다. 다음은 시에 대한 그의 관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그 글의 주요 부분이다. 그의 시론은 흔히 '온몸의 시학'으로 불린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 나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 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 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김수영 시비(詩碑)>
미아리에서 북쪽으로 달리는 19번 버스를 타고 수유리를 지나 종점에 내리면 사시사철 등산객으로 붐비는 도봉산 유원지다. 고운 산새 소리와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십 분 가까이 비탈진 등산길을 오르면 숲으로 둘러싸인 광장이 나타난다. 광장에 닿기 직전 길 오른쪽 잔디 속 김수영 시비가 오고 가는 길손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1968년 6월 어느날 문우(文友)들과 술자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마포 자택 앞길에서 좌석버스에 치여 일생을 마친 김수영님의 시비는 그의 1주기를 맞아 현대문학사 주관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제자(題字)는 배길기씨가 썼으며 비양(碑陽)의 시 <풀>은 1968년 5월 29일에 쓴 마지막 작품으로 고인의 육필(肉筆)을 그대로 확대 음각(陰刻)으로 전각해 놓았다.
고인의 원고 글씨가 너무도 부드러워 은근한 맛이 나고 여타의 다른 시비와 다른 것은 비양(碑陽) 오른쪽 상단부분에 고인의 얼굴을 양각(陽刻) 동판을 끼워 더욱 친근감이 든다.
<김수영문학상>
민음사(民音社)에서 김수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제정한 상.
1981년 제1회 수상작품으로 정희성의 <저문강에 삽을 씻고>를 선정하였으며, 이어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83),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84), 김광규의 <아니다 그렇지 않다>(85), 최승호의 <고슴도치 마을>(86), 김용택의 <맑은 날>(87),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89), 김정웅의 <천로역정, 혹은>(90), 이하석의 <우리 낯선 사람들>(91), 조정권의 <산정묘지>(92), 장석남의 <새떼들에게로의 망명>(93), 이기철의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94), 차창룡의 <해가 지지 않은 쟁기질>(95) 등 82ㆍ88년도를 제외하고는 해마다 1편씩을 선정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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