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난촌>님의 카페에서
김수영의 설움의식과 詩作태도 / 오 봉 옥(시인, 문학평론가)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靈感이여 -<봄밤> 전문
제목이 <봄밤>이군요. ‘봄’의 원형적 상징의 이미지는 새 생명의 탄생, 생명의 분출, 희망 같은 것이지요. 시간적으로 ‘봄’은 또 새 출발의 이미지를 가지고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봄’은 새벽의 이미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은 <봄밤>입니다. 새벽이 희망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밤’은 절망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밤’은 공간적으로 성찰의 이미지를 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봄밤>이라는 제목이 재미있는 거지요. 이 시는 시인의 자기다짐 같은 거, 자기주문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화자는 지금 자신에게 ‘서둘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지요, 반대로 자신은 ‘애타도록 서두르는 존재’, ‘혁혁한 업적을 바라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늘 분당에 있는 탄천을 거닐곤 하는데요, 이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을 보면서 상념에 젖곤 합니다. ‘강물’은 움직이는 물질이지요, 그러나 ‘불빛’은 정지된 물체입니다.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은 곧 사그라질 불빛이지요. ‘불빛’은 한 순간의 화려함일 뿐 ‘강물’의 흐름처럼 영원성을 담보하진 못 합니다. 하지만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은 실제의 불빛보다 훨씬 더 은은하고 광채가 납니다. 그런 점에서 ‘혁혁한 업적’이라는 구절이 쉽게 연결되는군요.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개’가 짖고, 종소리가 울리고, 달이 떠있는 걸로 보아 새벽녘인 듯싶네요. 지금 밖에서는 달이 떠 있습니다, 인기척이 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종소리가 울리지요, 그때 화자는 그렇다하더라도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합니다. 남보다 쳐져있다는 생각, 마음은 다급한데 몸이 안 따라주는 상황이 절망을 안겨주지요. 그런 점에서 ‘밤’은 절망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요. 반대로 그런 상황이기에 자기위안, 자기다짐을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여기엔 성찰의 이미지가 함께 있는 것이지요. 저는 1연의 정서가 쉽게 느껴집니다. 제가 경구처럼 생각했던 말이 ‘서두르지 말자’였지요. 서둘러서 될 일이 없지요.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지 않고서는 이 ‘서두름’이 타자에게 해악을 끼치게 되지요. 욕이 늘 화를 부릅니다. 서두르지 말고 좋은 생각을 해 보는 게 참 중요합니다. 좋은 생각이 없이 좋은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나처럼 시를 쓰는 사람에게 좋은 말의 생산은 더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좋은 말은 기술로 나오지 않습니다. 기술은 가끔 기발한 표현을 얻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기발한 표현일 뿐이지요. 거기엔 진정성이 없습니다.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한 좋은 생각이 있어야 하고, 이 좋은 생각으로 인한 좋은 말이 나와야 합니다. 좋은 말에서 좋은 행동이 나옵니다. 김수영은 ‘온몸의 시학’을 말했는데요, 온몸의 시학은 좋은 생각, 좋은 말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 시는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고 있는 김수영, 끊임없이 자기를 누르고 가다듬고 다짐을 하고 있는 김수영이 보입니다. 1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은 반복에 의한 속도입니다. 이것은 발화하고 있는 화자의 심리상태를 엿볼 수 있는 지점이고, 또 이것은 그런 화자의 심리상태와는 정반대로 ‘서두르지 말라’는 내용이어서 재미있게도 느껴지는 지점입니다.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은 <폭포>라는 시에 나오는 ‘나태와 안정’을 추구하는 마음, 자포자기의 마음, 안일과 태만한 마음이 아닐까 싶네요. 여기서의 ‘너’는 1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입니다.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김수영은 ‘궤도 속에서는 꿈이 실현되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런데 ‘달의 행로’란 일정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이 대목은 부정적 의미로 씌어진 것 같네요. 아님 의미를 조금 더 축소시켜서 ‘달’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체로 해석을 하여 ‘너의 꿈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뒷말이 ‘서두르지 말라’가 따라오는 것으로 보아 긍정적으로 씌어진 것 같지는 않네요.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서 꿈이 실현될 리 없지요, 다람쥐 쳇바퀴 돌리 듯 따라가면 꿈이 실현될 리 없습니다. ‘꿈’은 궤도를 따라가되 주체적이고 창조적으로 가야만 하고, 진취적 자세로 가야만 실현되는 것입니다. 시집 제목으로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가 있는데요, 이 대목에서 따온 듯 하군요, 그런데 시집 제목의 표현이 더 낫군요. 저는 1연의 ‘개가 울리고 종이 울리고’의 표현에서 속도를 읽었는데요, 그러니까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쯤으로 해석을 했는데요, 여기서의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는 그보다 더 정서적 의미로 읽혀집니다. 자신의 몸은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거나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몸입니다. 그럼에도 마음만은 다급하여 ‘혁혁한 업적’을 바라고 있지요. 이런 모순 속에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 ‘종이 울리는 소리’는 서러운 감정이 생기게 하지요. 그리하여 ‘기적소리’가 슬프게만 들리는 것이지요. ‘기적소리’가 새벽에만 울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기적소리’하면 새벽을 먼저 떠올리지요. 이 ‘기적소리’에는 출발의 이미지, 이별의 이미지 등이 있는 것 같아요. 근대 이후 기차는 속도를 상징하는 물체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차는 ‘꿈’과도 연결되지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저는 ‘꿈’을 말하라고 하는 자리에서 ‘서울에 가는 것이다’라고 말하여 웃음을 자아낸 적이 있습니다. 모두들 앞에 나와 대통령이 되겠다, 권투선수가 되겠다, 장군이 되겠다, 판검사가 되겠다고 하는데 저만 유독 서울에 가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지요. 그러니 아이들이 웃지 않을 수 없었지요. 저는 기차를 타고 서울에만 가면 제 꿈이 모두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죠. 그 꿈이 고등학교 때 이루어졌는데요, 형을 따라서 서울구경을 가는데 얼마나 설레던지 지금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것 같군요. 기차를 이야기했으니까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서울에 와서 전철을 탔는데요, 종착역을 서너 정거장 앞두고 모두들 일어서 움직이더군요. 형에게 저 사람들이 왜 모두들 일어서서 움직이는 것이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종착역의 출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리기위해 그런다고 하더군요. 이런 속도가 서울에, 기차에 있는 것이지요. 그때 제 뇌리에 서울의 이미지, 기차의 이미지는 그렇게 쾅, 하고 박혔습니다. ‘꿈’꾸는 자아에게 이 ‘기적소리’는 슬프게만 다가옵니다.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의 대목에서 ‘과연’이라는 말은 독자들의 의표를 찌르는 말이지요. 이건 제가 하는 소리가 아니라 유종호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인데요, ‘과연’이라는 부사가 창조적으로 구사됨으로써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의 대목이 우리의 기억 속에 강하게 입력된다는 사실, ‘과연’이라는 범상한 말이 대단히 아름다운 말로 환치된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지요. 일종의 낯설게 하기의 효과라고 할 수 있는데요, 비문이 아니면서 비문 같은 느낌을 주는 말이 여기서의 ‘과연’이라는 말 같아요. ‘과연’이라는 말은 정서적 효과를 고양시키고 극대화시키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기적소리가 슬프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말로 기적소리가 슬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적소리의 슬픔’을 새삼 강조하다보니 이것이 아직은 달성하지 못한 ‘꿈’으로 연결되고,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으로 연결되고, ‘혁혁한 업적’으로도 연결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시적 화자의 바람 또는 욕망 같은 것이 그만큼 크고 격렬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이것을 또한 억누르고자 의지가 그만큼 강하고 절실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의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그동안 표기했던 ‘너’가 바로 ‘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빛’은 ‘꿈’이기도 하고 ‘존재’이기도 합니다. 보통 ‘빛’의 원형적 상징의 이미지는 신성, 구원 같은 것인데 여기서는 이 ‘빛’이 1연의 ‘불빛’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자연스레 ‘존재’ 쯤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지요.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밤은 고요의 순간입니다, 자기를 차분히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상주불변하는 평정심, 평상심 같은 것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지요. 평상심은 될 대로 놓아두는 게 아닙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조삼모사는 더욱 더 아닙니다. 중심을 찾는 마음, 인격적으로 완성된 마음입니다. 이런 눈으로 생각하니 바깥의 현실이 다 보이는 거지요.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靈感이여”,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명체입니다. 그 어떤 사고도 없이 자각도 없이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움직이는 생명체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젖을 찾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이 식욕으로 인해 본능적으로 입을 움직이는 것이지요. 이렇듯이 그 어떤 사고나 자각도 없는 존재처럼 서두를 수는 없다, 그건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와 같은 것이다, 하고 다짐하고 있네요. 또한 그런 욕구는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도 해봅니다. 깨달음의 구체적 결과로 적시하고 있는 것이 ‘절제’네요. 그것은 ‘나의 귀여운 아들’과도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마지막 행인 ‘오오 나의 靈感이여’에서는 시인으로서의 존재가 느껴집니다. 훌륭한 시인, 훌륭한 시는 서두르지 않는 마음, 자기를 차분히 돌아보는 마음, 성찰하는 마음, 절제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법이지요. 김수영의 깨달음은 이 지점까지 온 듯합니다. 저는 이 시가 정서적으로 잘 다가옵니다. 이 시는 김수영의 시에서 눈여겨볼만한 작품으로 생각되어집니다. 저는 이 시가 속도의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복에 의한 정서적 고양이 눈에 보이고, 그래서 다급하게 빠른 속도로 토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3행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형식적으로는 빠른 호흡, 내용적으로는 비약을 해버리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말하고 있는데 내용은 역으로 천천히 가자는 잠언적 내용입니다. 마치 태평한 오리가 물 속에서는 정작 끊임없이 발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겉과 속이 다르지요. 이 시는 잠언적인 시적 전개를 취하고 있고 시의 호흡은 빨라지는 반면 의미는 서두르지 말자는 경구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눈여겨 살펴보아야 할 시입니다. 저는 이 시가 좋은 시라기보다는 문제적인 시로 여겨집니다. 정서적으로 잘 다가오면서도 잠언에 치우친 나머지 그만큼 울림을 까먹고 있는 시가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지요. 문학적 치기도 보이고 포즈도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김수영의 시 중에서 읽어볼만한 시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사는 지붕 우를 흘러가는 날짐승들이 울고가는 울음소리에도 나는 취하지 않으련다
사람이야 말할수없이 애처로운 것이지만 내가 부끄러운 것은 사람보다도 저 날짐승이라 할까 내가 있는 방 우에 와서 앉거나 또는 그의 그림자가 혹시나 떨어질까보아 두려워하는 것도 나는 아무것에도 취하여 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번씩 찾아오는 수치와 고민의 순간을 너에게 보이거나 들키거나 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의 얇은 지붕 우에서 솔개미같은 사나운 놈이 약한 날짐승들이 오기를 노리면서 기다리고 더운 날과 추운 날을 가리지 않고 늙은 버섯처럼 숨어있기 때문에도 아니다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있을 운명 그것이 사람의 발자욱소리보다도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주는 것이 나는 싫다
나야 늙어가는 몸 우에 하잘것없이 앉아있으면 그만이고 너는 날아가면 그만이지만 잠시라도 나는 취하는 것이 싫다는 말이다
나의 초라한 검은 지붕에 너의 날개소리를 남기지 말고 네가 던지는 조그마한 그림자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나의 귀에다 너의 엷은 울음소리를 남기지 말아라
차라리 앉아있는 기계와같이 취하지 않고 늙어가는 나와 나의 겨울을 한층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의 눈이랑 한층 더 맑게 하여다우 짐승이여 짐승이여 날짐승이여 도취의 피안에서 날아온 무수한 날짐승들이여 -<陶醉의 彼岸> 전문
이 시는 꿈꾸는 자아와 현실 속의 자아가 길항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꿈꾸는 자아는 이 시의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와 같이 ‘도취의 피안’에 안주하려는 자아입니다. 현실 속의 자아는 ‘도취의 피안’에 ‘취하지 않으려는’ 자아, ‘도취의 피안에서 날아온 무수한 날짐승들’을 보고 경계심을 갖는 자아입니다. 여기엔 현실에 대한 그 어떤 절망의식, 부정의식이 깔려있고, 그리하여 그것은 역설이나 아이러니의 방식으로 표출됩니다. 화자는 지금 ‘도취의 피안’에서 날아온 날짐승들을 대상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관찰하고, 고민하고, 그 어떤 진실을 찾아냅니다. 김수영이 아이러니스트라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태도, 대상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선 때문입니다. 김수영의 내면에 자리 잡은 이상적 자아는 ‘도취의 피안’에 쉽게 젖어들곤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 자아는 그것이 현실을 망각한 도취일 뿐임을 끊임없이 지각하는 방향으로 치닫습니다. 이와 같은 갈등이 냉소나 자학과 결합하여 시로 드러나지요. ‘기계와 같이 취하지 않고 늙어가겠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그러한 심사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있을 운명/ 그것이 사람의 발자욱소리보다도/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주는 것이 나는 싫다”, ‘날짐승’은 시인이 꿈꾸는 대상이지요, 시인은 자신의 ‘운명’이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거기엔 그 어떤 바람이 스며있는 거지요, 그런데 그것이 자신에게 한사코 닫힌 현실 속에 살고 있는 냉엄한 ‘시간’을 가르쳐줍니다. 형상이 보이지 않나요? 시인은 날짐승을 지그시 쳐다보며 그 어떤 상념에 사로잡힙니다. 나의 자유로운 운명은 저 날짐승의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있겠지, 그런데 그 순간 날짐승이 푸르륵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면서 현실로 돌아옵니다. 날짐승이 날아가 버림으로써 닫힌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자기 자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냉엄한 시간을 지각하는 것이지요. 순간, 몸서리가 쳐지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시간’이라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것을 냉엄한 현실을 지칭하는 나의 시간으로 읽었습니다만 ‘날짐승’의 시간을 생각해본다면 그와는 전혀 다른 시간이 될 터입니다. 현실의 시간은 일방향의 직선적 흐름을 지니는 시간이지요, 하지만 날짐승이 오고, 살고, 가고, 다시 오는 시간은 순환적 흐름을 지니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날짐승이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주는 것이 싫다’라고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날짐승의 시간은 아니겠고 나의 시간일 터인데 그럼 나의 시간이란 대체 어떤 ‘시간’일까요?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도취의 시간일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이 시에서 ‘취하지 않겠다’는 표현, 이 시의 키워드이기도 한 이 표현은 그 어떤 지각이 있어서 나온 표현이란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간’은 그런 지각이 생기는 순간, ‘도취’에서 깨어나 허탈해하는 순간, 좌절감과 도전의식이 동시에 생기는 순간, 지극히 현실적인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있을 운명’, 표현미가 기막힌 대목이네요. “나야 늙어가는 몸 우에 하잘것없이 앉아있으면 그만이고/ 너는 날아가면 그만이지만/ 잠시라도 나는 취하는 것이 싫다는 말이다”, 내가 내 몸 위에 앉아있다? 모순 어법이고 비문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가 길항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상적 자아는 ‘도취의 피안’으로 가고자 하고 현실적 자아는 ‘잠시라도 취하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잊는 沒我, 망각의 일임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이때 절망의식, 부정의식이 생기는 거지요. ‘나야 늙어가는 몸 우에 하잘것없이 앉아있으면 그만’이라는 심리는 절망의식에서 나온 것이지요, ‘잠시라도 나는 취하는 것이 싫다’는 심리는 부정의식에서 나온 말일 터입니다. “나의 초라한 검은 지붕에/ 너의 날개소리를 남기지 말고/ 네가 던지는 조그마한 그림자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나의 귀에다 너의 엷은 울음소리를 남기지 말아라”, 좌절과 두려움이 가득한 구절들이군요, ‘나의 초라한 검은 지붕’은 현실이고 ‘너의 날개소리’는 꿈같은 일이면서 ‘도취’의 대상이고,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대상이고, 그리하여 이 시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날개소리’는 비상, 초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요. 이 시가 역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화자는 비상, 초월을 꿈꾸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자의 삶이 ‘하루에 한번씩 찾아오는/ 수치와 고민’의 시간들이라는 점에서 이 ‘날개소리’에는 그 어떤 바람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시인은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자신의 운명이 담겨있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그저 ‘도취’일 뿐임을, 몰아의 한 순간일 뿐임을, 망각의 한 차원일 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냉엄한 현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 화자는 꿈과 현실 사이를 길항하면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괴로워합니다. ‘네가 던지는 조그마한 그림자가 무섭다’는 것은 이러한 고민, 갈등, 괴로움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극단의 순간에서 나온 역설이지요, 과장입니다. “차라리 앉아있는 기계와같이/ 취하지 않고 늙어가는/ 나와 나의 겨울을 한층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의 눈이랑 한층 더 맑게 하여다우/ 짐승이여 짐승이여 날짐승이여/ 도취의 피안에서 날아온 무수한 날짐승들이여”, 여기엔 내가 처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말없이 받아들이겠다는 자세, 자신의 공허한 삶에 오히려 침잠하고자 하는 태도, 그러한 현실인식을 더욱 더 단단히 다지고자 하는 다짐 같은 게 보입니다. 화자가 날짐승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것은 꿈이 일깨워지기 때문이고, 현실을 망각한 도취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신을 지각한다는 것이 몸서리쳐지게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화자는 자신의 현실을 더욱 더 잘 인식할 수 있도록 ‘한층 더 맑은 눈’을 바라게 됩니다. 여기서의 ‘눈’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현실을 지각하는 이성의 눈이지요. ‘무거운’ 현실을 무거운 현실 그 자체로 바라보는 눈, 받아들이는 눈, 견디는 눈입니다. 이런 다짐이 있어 이 시를 무겁고 처절하게 만드는 거지요. 이 시에서는 꿈꾸는 자아와 현실 속의 자아가 끊임없이 부딪히고 대립하고 갈등하는 게 보입니다. 또한 이 시에서는 시인의 비극적 현실인식이 보이고, 절망과 부정의식이 보이며 냉소나 자학의 자세가 보이기도 합니다. 이 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아요. 묘사보다는 진술로 이루어진 시이고, 이 진술 속에서 그 어떤 처절함이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것이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지는 작품이네요.
고색이 창연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全靈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스러운 향수와 우주의 위대함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안에서 나의 위대한 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나의 家族> 전문
김수영의 작품에는 가족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 아내와의 갈등과 화해를 다루는 것이 가장 많고, 아버지, 아들, 누이 등도 많은 작품에서 등장하지요. 단순히 언급되는 차원이 아니라 그 가족과의 관계가 전면으로 드러나면서 그 갈등양상, 화해양상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가족과의 관계라는 것이 단순히 가족의 차원이 아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축소판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시인의 현실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한 행 한 행 읽어나가면서 그 현실인식을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1~2연은 가족의 변화상을 보여주고 있네요. “고색이 창연한 우리집”은 구식이요, 전통입니다. 가족들이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즉 “신선한 기운”은 신식이요, 외부로부터 유입된 문화, 외부로부터 유입된 정신입니다. 화자는 지금 그 가족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일정한 거리에서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의 변화상을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지층’은 물, 빙설, 바람 등에 의해 운반되고 침적된 여러 종류의 암석이지요, 흙덩어리이고 화석입니다. 그것을 일정한 거리에서 보면 “파도처럼 옆으로” 갈라져 있고 여러 가지의 “아름다운 색깔”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요. 상당히 표현미가 살아있는 대목인데요, 보통의 가족들을 생각해보아도 세대별로 문화가 달라서 그 빛깔과 냄새가 각기 다르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고색 창연한’ 빛깔과 냄새를 가지고 있고, 젊을수록 “신선한” 빛깔과 냄새를 가지고 있지요. 이 “신선함”은 곧 근대와도 연결시킬 수 있는데요, 서구의 미학이 요구하는 게 바로 이 “신선함”이지요. 발상의 신선함, 표현의 신선함을 아주 높이 사는 게 서구 미학의 정신입니다. 반대로 우리 동양 미학은 신선함보다는 곰삭임을 더 강조합니다. 어필의 미학이 아니라 여백의 미학이지요. 서구의 미학에서는 어필이 중요하니까 신선함이 강조되는 것이고 동양의 미학에서는 곰삭임이 중요하니까 여백의 미가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 “신선한 기운”은 긍정 면과 부정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에서도 “신선한 기운”은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이 됩니다.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구식과 신식이 버무려지면서 신질서가 만들어집니다. 계승 발전되는 구식은 살아남고 우리의 생활현실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신식은 구식과 융화되면서 우리의 것이 되어갑니다. 화자는 지금 가족의 변화양상을 긴장 속에서 바라봅니다. 그것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더 차가운 것이지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그 무엇입니다. 관조의 눈, 냉철한 눈은 여기서 생기지요. 화자는 그 객관화된 ‘눈’으로 가족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고, 그 ‘웃음’으로부터 소외되어 자신만의 세계에 골몰하고 있는 자기 자신까지를 내다봅니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는 근대적 시민사회의 가족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가족구성원들의 조화로움, 평화로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全靈을 맡긴 탓인가” 하고 자문하는 대목에서는 가족의 의미를 새삼 생각해보고 있는 화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全靈’은 당시로서는 쓰지 않는 과거의 한자인데요, 영혼까지를 포함한 나의 전부쯤으로 해석을 하면 문제가 없겠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가족의 의미와 함께 자신의 운명을 되새김질해보는 대목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가족구성원들의 웃음소리로부터 소외되어 “위대한 고대조각의 사진”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길 수 있는 것”은 가족의 웃음소리와 함께 하는 순간이 아니라 그 “서책”을 보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서책”은 닫혀있는 현실에 뚫려있는 유일한 출구입니다. 거기서 “성스러운 향수와 우주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고, “나의 위대의 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볼 수”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서책”이 “위대한 고대조각의 사진”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대조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조화와 질서, 장대한 구도 속에서의 세련미 같은 것인데요, 이것을 화자는 지금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고, 반대로 신식으로 살아가는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과도 비교하고 있지요. 이 시는 겉돔의식이 잘 드러나는 시입니다. 화자는 지금 가족구성원으로서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또 넘어서고자 합니다. 가족구성원으로서 그는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들”을 걱정하고,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게” 가족이라고 하여 가족간의 유대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가족에 대한 사랑을 “유순한 가족”,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화자는 또 그 가족의 울타리가 “위대한 것을 바라는 자신”, “위대한 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는 자신”을 제약하고 있는 실체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화자는 지금 그것을 한사코 넘어서고자 합니다. 화자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성스러운 향수와 우주의 위대함을 담아주는” 책으로부터 생긴 “삽시간의 자극”입니다. 그러면서 “위대한 것을 바라고 있는” 자신, “위대한 소재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는” 자신입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실체는 한사코 자신에게 망설임과 주저와 곤혹을 안겨줍니다. 여기서 설움이 생깁니다. 겉돔의식이 생기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거칠기 짝이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의 마무리는 가족 간의 유대와 사랑을 확인하는 감탄의 어조가 아닌 겉도는 의식에서 발생하는 설움의 어조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시는 일상의 행복 또는 가치체계와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내면의 욕구 사이에서 발생한 설움의식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그 안에 전통과 근대의 갈등, 일상과 정신의 갈등이 내재해 있습니다. 근대적 자아로서의 분열의식, 겉돔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괜찮은 시라고 여겨집니다.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났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 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自體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은 켜지고
나는 잠시 아름다운 統覺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지 않으려 한다
어둠 속에 본 것은 청춘이었는지 대지의 진동이었는지 나는 자꾸 땅만 만지고 싶었는데 땅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삼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 없어져버린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을 찾으려 하는 것은
생활이여 생활이여 잊어버린 생활이여 너무나 멀리 잊어버려 천상의 무슨 등대같이 까마득히 사라져버린 귀중한 생활들이여 말없는 생활들이여 마지막에는 해저의 풀떨기같이 혹은 책상에 붙은 민민한 판대기처럼 무감각하게 될 생활이여 조화가 없어 아름다웠던 생활을 조화를 원하는 가슴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조화를 원하는 심장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지나간 생활을 지나간 벗같이 여기고 해 지자 헤어진 구슬픈 벗같이 여기고 잊어버린 생활을 위하여 불을 켜서는 아니될 것이지만 천사같이 천사같이 흘려버릴 것이지만
아아 아아 아아 불은 켜지고 나는 쉴사이없이 가야 하는 몸이기에 구슬픈 육체여. -<구슬픈 육체> 전문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나 본적이 있으신지. 사람에게는 꿈이 있지요, 그런데 그 꿈이 현실화되지 못할 때 좌절감이 생기고 사무침이 생기지요. 고달픈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면 그 사무침이 더욱 더 절실해집니다. 어둠 속에서 천장 모서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좌절한 자아, 사무침이 일상화된 자아가 보이지요.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가 바라던 꿈은 단지 허황된 꿈일 뿐인 것인가, 나의 꿈은 환상이었나, 현실 속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그 무엇이었나, ‘애처로운’ 나의 꿈, ‘아름답고 화려한’ 나의 꿈,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꿈, 그래서 ‘부박한’ 것일 뿐인 나의 꿈, 잠이 들락말락 할 때 불현듯 떠오르는 게 그런 사무친 생각들이지요. 그래서 벌떡 일어나 담배 한 대를 물어야만 합니다. 1연에서는 어둠 속에서 되살아나는 자아에 대한 꿈을 형상적으로 펼쳐놓고 있네요. 그것이 불을 끄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는 형상으로 제시됩니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 어둠 속에서 상상한 것들, 어른거린 것들은 불을 켜는 순간 없어져 버립니다. 사무침이 밀려오면 잠을 청할 수가 없지요, 괜히 주먹이 쥐어지고 눈물이 나고 그럽니다. 그래서 의지적 자아는 불을 켜야만 합니다, 평상심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자세를 고쳐 앉거나 담배 한 대를 꺼내 무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사라져버린 뒤의 일이지요.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른 것들, 그려본 것들, 그래서 어른거리는 형상들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지요. 아쉬움과 허탈감, 그리고 무기력함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순간입니다.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自體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은 켜지고”, 시를 쓸 때 설명적 요소를 배제하라고 늘상 말하고 있는데요, 이 대목이 바로 그런 대목이군요. 의지적 자아가 불을 켜는 것은 어둠 속에서 어른거린 것들을 찾으려거나 ‘없어지는 그 자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니겠지요. 또 불을 켜는 순간은 자신이 어둠 속에서 그려본 실체를 잊어버리는 순간이고, 그것을 잊어버렸다고 하여 아깝다, 아깝지 않다 하고 헤아려볼 수도 없는 아주 짧은 시간, 불교용어를 빌리자면 찰나에 불과한 시간,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지요. 그러한 점들을 설명해주고 있네요. 그런데 이러한 설명이 단순히 설명적 요소로만 작용하지는 않고 그 어떤 형상, 여기서는 비현실에서 현실로 돌아올 때 한 순간 희미해져버리는 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잠시 아름다운 統覺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지않으려 한다”, 불을 켜는 순간은 이성을 되찾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성과 감정, 꿈과 현실이 이분법적으로 딱, 구분지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매순간 서로 간섭하고, 친교하고, 영향을 주고받고, 그렇게 넘나들면서 합쳐지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지요. 불을 켜는 순간은 그 둘의 관계가 미약해지는 순간이면서 동시에 그 상호소통이 투명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화자는 지금 자신이 꿈꾸는 이상과 현실의 조화, 그런 ‘아름다운 통각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지 않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이것은 현실을 자각하면서 그 어떤 의지를 내보인 말이며 동시에 그 ‘아름다운 統覺’의 바램이 그만큼 강렬한 것이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 본 것은 청춘이었는지 대지의 진동이었는지/ 나는 자꾸 땅만 만지고 싶었는데/ 땅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삼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 없어져버린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을 찾으려하는 것은”, 화자는 자신이 발을 딛고 현실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땅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원하는’ 자아, 그 속에서만이 그 어떤 힘이 생기고 ‘불굴의 의지’가 생긴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지요.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힘은 ‘땅과 몸이 일체’가 되어 ‘불굴의 의지’를 가져야만 생기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불굴의 의지가’가 ‘꿈’이 있기에, ‘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 없어져버린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일망정 그런 ‘꿈’이 있기에 생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꿈꾸는 이상이 없이 살아가는 현실은 ‘힘’을 만들어내지 못하지요. ‘불굴의 의지’를 만들어내지 못 합니다. 화자는 지금 냉엄한 현실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그 잃어버린 꿈에 대한 아쉬움, 안타까움을 ‘-싶었는데’, ‘-있었는데’ 등의 서술어로써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활이여 생활이여/ 잊어버린 생활이여/ 너무나 멀리 잊어버려 천상의 무슨 등대같이 까마득히/ 사라져버린 귀중한 생활들이여/ 말없는 생활들이여/ 마지막에는 해저의 풀떨기같이 혹은 책상에 붙은 민민한 판대기처럼 무감각하게 될 생활이여/ 조화가 없어 아름다웠던 생활을 조화를 원하는 가슴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조화를 원하는 심장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화자의 내면에서 희구하는 것은 ‘천상의 등대’같은 표현으로, 화자의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은 ‘해저의 풀떨기같이 혹은 책상에 붙은 민민한 판대기처럼 무감각하게 될 생활’같은 표현으로 드러나고 있네요. ‘천상의 등대’와 ‘해저의 풀떨기’ 사이의 거리, 이상과 현실 사이의 까마득한 낙차가 한편으로 그를 절망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그를 분발시키고 있습니다. ‘꿈’이 현실을 자각시키고 분발시키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지요. ‘조화가 없어 아름다웠던 생활’은 냉엄한 현실의 반대편에 놓여있는 것, 그 이전에 놓여있었던 그 무엇일 터입니다. 앞행에서 ‘청춘’을 운운하고 있는데요, ‘청춘’은 가슴이 뛰는 시기, 범박한 말로 꿈을 먹고 사는 시기라 할 수 있지요. 꿈을 먹고 사는 시기는 이상과 현실이 따로 놀면서도 아름답기만 하는 시절입니다. 냉엄한 현실이 전제되어 있지 않기에 아름답기만 하는 시절이 되지요. 또 ‘조화가 없어 아름다웠던 생활’은 어둠 속에서 화자가 그려본 생활이기도 합니다. 상상 속에서는 단편적인 상들이 하나로 꾀어지기도 하지요. 단편적인 상들이 각기 따로 놀면서도, 이를테면 꿈꾸는 자아와 꿈을 향해 다가가는 현실적 자아가 따로 놀면서도 어둠이라는 실체가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놓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조화를 원하는 가슴’, ‘조화를 원하는 심장’은 불이 켜진 현실 속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자아의 가슴, 심장이겠지요. 현실적 자아는 ‘가슴’과 ‘심장’이 뜨거우면서도 뜨거울 수만은 없는 존재입니다. 발을 딛고 있는 현실, 냉엄한 현실이 끊임없이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자아를 잡아채고, 돌려세우고, 주저앉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현실적 자아와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자아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간섭하고, 충격을 주면서 어우러집니다. “지나간 생활을 지나간 벗같이 여기고/ 해 지자 헤어진 구슬픈 벗같이 여기고/ 잊어버린 생활을 위하여 불을 켜서는 아니될 것이지만/ 천사같이 천사같이 흘려버릴 것이지만”, ‘지나간 생활’은 ‘천상의 무슨 등대같이 까마득히 사라져버린 귀중한 생활들’입니다. ‘지나간 벗’, ‘구슬픈 벗’, ‘천사같이 흘려버릴 것’은 아쉬운 마음, 허탈한 마음이 아로새긴 표현들입니다. 불을 켜자 이렇게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들이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화자인 ‘나’는 너무도 아쉬워서 그 생활을, 그 지나간 생활을, 그 꿈꾸는 생활을 ‘지나간 벗’과 같이 여겨야 한다고, ‘구슬픈 벗’과 같이 여겨야 한다고, 그리고 그렇게 사라져가는 ‘꿈’을 위하여 ‘불을 켜서는 아니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천사같이 흘려버릴 것’이라는 표현 속에 아쉬움으로 가득한 극에 달한 화자의 마음상태는 드러납니다. 불이 켜지면서 사라지는 꿈꾸는 자아를 ‘천사같이 흘려버릴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아 아아 아아/ 불은 켜지고/ 나는 쉴사이없이 가야 하는 몸이기에/ 구슬픈 육체여”, 화자인 ‘나’는 불이 켜지는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또 ‘쉴사이없이 가야 하는’ 존재이지요. 여기엔 꿈과 현실 사이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괴리감, 현실을 살아야 하는 비애감이 묻어있습니다. 나아가 매순간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긴장감, 내일을 향해 적극적으로 투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장함까지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지요. 이 시는 꿈과 현실사이의 괴리감, 비애감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체화된 사무침의 일상화를 보여주고 있는 시, 그 현실적 좌절감을 노래한 시입니다. 그러나 너무 느슨하고, 개념적으로 풀어쓴 시라는 점에서, 감동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점에서 좋은 작품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사무치는 내용이 건조하게 다가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겠지요.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 개의 번개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보다 -<矜持의 날> 전문
우리는 모두 순환적 시간 속에 존재합니다. 잠자고, 일어나고, 밥먹고, 일하고, 다시 잠이 드는 순환적 과정을 거치면서 하루를 보내지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순환적 시간은 자연적 시간이기도 하지요. 반대로 직선적 시간은 서양적 사고 속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근대라는 개념은 이 직선적 시간 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지요. 직선적 시간은 인생을 생노병사로 보는 관점, 역사발전을 단계론적으로 보는 관점 등을 거론할 수 있겠지요. 인간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역사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진행되고 있지요. 이것이 일직선적 사고, 직선적 시간 또는 선조적 시간의 사고입니다. 속도에 민감한 시인이 김수영인데요, 여기서는 “순환의 원리”를 이야기하고 있군요. “순환의 원리” 속에 있는 “나”는 “피로”한 존재 앞으로도 “영원히 피로할” 존재입니다. “피로”의 존재는 일하는 존재, 가난한 존재, 현실적 존재입니다. 우리는 모두 일하는 존재로써, 가난한 존재로써, 현실적 존재로써 “피로”할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 어떤 정신지향을 하는 존재이기도 하지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정신지향을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합니다만 사실 뇌가 없다면 인간은 한낱 하등동물에 지나지 않게 되지요.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보셨는지요? 타이타닉호는 호화 유람선이지요, 선장 이하 수많은 선박기술자들이 탔을 것입니다만 그 배가 좌초될 것이라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쥐였습니다. 최근 생명공학계에서는 유전자지도가 완성되었다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유전자지도를 완성시켜 놓고 보니 인간이 가진 유전자 중 움직이는 유전자는 100여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지요. 쥐는요, 움직이는 유전자가 인간의 30배에 이르지요. 움직이는 유전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을 정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쥐보다도 더 정복이 쉬운 존재가 되지요. 이것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인간은 고등동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뇌가 있어서 고등동물,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큰소리치며 사는 존재가 되었지요. 이렇듯이 인간은 뇌가 있어서 정신지향을 하는 존재, “아름다운 존재”가 되었지요. 물론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붙이기위해서는 그 정신지향이 어떤 정신지향인지가 중요하게 부각되겠지요. 김지하는 생명의 본성을 자각하고 그 본성에 가장 알맞게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가난의 존재’라고 하였지요. ‘가난의 존재’는 현실의 하중을 가장 많이 받는 존재, 현실의 고통을 가장 많이 느끼는 존재이기에 생명의 본성, 그 실상 및 근원을 가장 잘 인식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겠지요. 일하는 존재, 가난한 존재, 현실적 존재는 “순환의 원리” 속에 어떻게 하면 잘 들어갈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반대로 일하지 않는 존재, 가난하지 않는 존재, 비현실적 존재는 어떻게 하든지 이 “순환의 원리”를 뚫고 나아가려는 존재, 일직선의 방향으로 혼자서만 앞서고자 하는 존재이지요.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 보면 가난한 존재, 일하는 존재, 현실적 존재로서의 “피로”와 “설움”의 개념, 나아가 “아름다움”의 개념까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지요. 이렇듯이 “나”는 가난한 존재, 일하는 존재, 현실적 존재로서 “설움과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긍지”를 갖게 됩니다. “나”는 “피로한” 존재이고 또 “피로할” 존재로서의 “긍지”를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존재에 대한 고민이 들어있지요. “나”는 “피로한” 존재이니까 “순환의 원리를 위한” 존재가 되지요. 가난하고 일하는 “나”의 존재는 “순환의 원리를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긍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가장 모호한 연이 2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2연은 일행일설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 개의 번개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나”는 “피로한” 존재이기에 “순환의 원리를 위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긍지”를 느끼기도 하지만 “나”는 또 정신지향의 존재로서 불가피하게 ‘몇개의 번개같은 환상’을 품어보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환상은 환상일 뿐이지요. 환상으로서의 “꿈”은 “청춘 물 구름”처럼 흘러가버리는 것입니다. 환상과 현실은 끊임없이 간섭하고 교섭하고 아우르고 놓아주고 넘나들면서 공생합니다. 환상으로서의 “꿈”과 현실로서의 “교훈”은 그런 점에서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나’의 현실적인 ‘피로’와 ‘나’의 정신적인 ‘아름다움’은 ‘나의 원천’, ‘나의 최종점’인 ‘순환의 원리를 위한’ 존재로서의 ‘나’를 깨달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 됩니다. ‘나’는 가난한 존재, 일하는 존재, 현실적 존재이지만 ‘순환의 원리를 위한’ 존재이고, 그러기에 의미있는 존재, 일하는 ‘긍지’를 가져도 좋을 만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파도처럼 요동하여도 소리가 없는’ 존재, ‘비처럼 퍼부어도 젖지 않는’ 존재입니다. ‘긍지’를 가지고 있는 ‘나’의 존재는 일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성장 ? 변화한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일하는 존재로서의 ‘나’가 ‘순환의 원리를 위한’ 존재임을 깨달은 자아는 ‘피로도 내가’ 만들고,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임을 역설하게 됩니다. 모든 게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런 말이라기보다는 자의에 의한 일의 ‘피로’는 ‘긍지’가 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생각할 때에 ‘나’의 몸이 ‘한치를 더 자라는 꽃’임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모든 실체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지요, ‘나’라는 존재도 어느 한 면만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안에는 수많은 자아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싸우고 간섭하고 영향을 주면서 아우러지기도 하고 공생을 하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또 그것을 우리는 빤히 의식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방향’은 다름 아닌 인간의 본성, 생명의 참 본성과 합치되는 방향일 터입니다.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보다”, 존재에 대한 숙명을 깨달은 자아는 ‘피로’와 ‘설움’을 더 이상 ‘피로’와 ‘설움’으로 느끼지 않고 그것을 ‘긍지’로 승화해 냅니다. ‘피로’를 기꺼이 견디어내야 하는 긍지, 자신의 존재가 ‘순환의 원리를 위한’ 존재라는 ‘긍지’,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 생명의 참 본성을 실현해내는 존재로서의 자신됨을 자각하고 벅찬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 연은 이러한 화자의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만 별로 맘에 안 드는 시네요. 많은 생각을 해보게 하고, 그만큼 독자가 유영해 들어갈 공간이 많은 시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다분히 관념적인 시라는 점에서 다가오는 시는 아니네요. 이 시는 일하는 자로서의 긍지, 일 속에서 성장하는 자로서의 긍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진짜 일하는 자는 이러한 관념적 고민을 하지 않지요. 이것이야말로 정신적 귀족주의라는 생각도 갖게 됩니다.
남의 집 마당에 와서 마음을 쉬다
매일같이 마시는 술이며 모욕이며 보기싫은 나의 얼굴이며 다 잊어버리고 돈 없는 나는 남의 집 마당에 와서 비로소 마음을 쉬다
잣나무 전나무 집뽕나무 상나무 연못 흰 바위 이러한 것들이 나를 속이는가 어두운 그늘 밑에 드나드는 쥐새끼들
마음을 쉰다는 것이 남에게도 나에게도 속임을 받는 일이라는 것을 (쉰다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면서) 쉬어야 하는 설움이여
멀리서 산이 보이고 겨울 대신 실가락처럼 먼지나는 군용로가 보이는 고요한 마당 우에서 나는 나를 속이고 역사까지 속이고 구태여 낯익은 하늘을 보지 않고 구렁이같이 태연하게 앉아서 마음을 쉬다
마당은 주인의 마음이 숨어있지 않은 것처럼 안온한데 나 역시 이 마당에 무슨 원한이 있겠느냐 비록 내가 자란 터전같이 호화로운 꿈을 꾸는 마당이라고 해서 -<休息> 전문
이 시는 잘 읽혀지는 시입니다만 막상 내용 파악을 하려고 하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제목이 <休息>인데요, 그 휴식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할 듯싶습니다. 첫 행을 보면 “남의 집 마당에 와서 마음을 쉬다”로 되어있는데요, 쉬는 장소가 ‘남의 집 마당’이라고 하니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있고, 또 몸이 아니라 ‘마음’을 쉬고 있다고 하니 모호함이 증폭됩니다. 2연은 ‘나’의 존재에 대한 진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매일같이’ 술을 마시는 존재, 모욕을 받고 있는 존재, 스스로를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존재, 가난한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네요. 그러한 존재가 ‘남의 집 마당에 와서 마음을 쉬고’ 있으니 불안한 휴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매일같이 마시는 술’에서 우리는 화자의 고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에서 오는 괴로움이겠지요.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삶과 실재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그 괴로움도 비례하여 증폭될 터입니다. ‘모욕이며 보기싫은 나의 얼굴’은 그 괴리감이 얼마나 큰 지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 없는 나는 남의 집 마당에 와서 비로소 마음을 쉬다’에서는 그 어떤 상실감으로부터 생긴 설움과 비애 같은 것이 느껴지네요. 부평초 같은 자신의 삶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고, 또 그러한 삶을 감내해야만 하는 자신의 복잡다단한 심정을 직설적으로 내보이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잣나무 전나무 집뽕나무 상나무/ 연못 흰 바위/ 이러한 것들이 나를 속이는가/ 어두운 그늘 밑에 드나드는 쥐새끼들”, 전기적 사실을 비추어보면 김수영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망한 사람인데요, ‘잣나무 전나무 집뽕나무 상나무’가 있고 또 한 켠엔 ‘연못 흰 바위’가 있는 ‘남의 집’을 오니 그 옛날이 떠올려지고 그래서 그 추억에 잠시 사로잡혀 있는 듯 하군요. 그것을 확인하고 있는 구절이 이 시에서는 마지막 두 행입니다. “비록 내가 자란 터전같이 호화로운 꿈을 꾸는 마당”이라고 하여 자신이 잠시 쉬고 있는 ‘남의 집’은 자신이 자란 호화로운 집과 같다는 점을 확인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가난’하고 현실 속에서 ‘모욕’을 느끼는 ‘나’의 존재는 쉴 여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그 옛날이 떠올려지는 ‘남의 집 마당’에 와서 잠시 상념에 빠지고 보니 그 休息이 자기기만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내가 이렇게 감상에 빠져 있을만한 처지인가, 내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구렁이처럼 태연하게 앉아서’ 쉬어도 좋을 만한 존재인가, 이건 내 자신을 속이는 행위가 아닌가, 이렇듯이 별의 별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상을 지금 화자는 ‘이러한 것들이 나를 속이는가’라는 자문 형식으로 표출하고 있지요, 비애감이 묻어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두운 그늘 밑에 드나드는 쥐새끼들’은 두 갈래로 해석을 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선 시적 자아가 투영되어 있는 존재가 ‘쥐새끼들’이 아닌가 하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런 하찮은 존재로서의 ‘쥐새끼들’까지도 나를 속이고 있다는, 그래서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하게 하고 있다는 뜻으로도 읽혀지는 것입니다. 문맥의 흐름을 놓고 본다면 후자가 더 맞는 것 같고, ‘잣나무 전나무 집뽕나무 상나무’와 ‘연못 흰 바위’가 ‘쥐새끼들’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는 전자로도 해석을 해 볼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을 쉰다는 것이 남에게도 나에게도/ 속임을 받는 일이라는 것을/ (쉰다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면서)/ 쉬어야 하는 설움이여”, 진정한 휴식은 몸과 마음이 함께 쉬는 것이지요, ‘몸은 쉴 사이 없이’ 가야하는데 마음만 잠시 쉬고 있다는 게, 그것도 ‘남의 집 마당에 와서’ 호화로운 생활을 보며 잠시 상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게 ‘남에게도 나에게도’ 기만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지요. 그렇듯이 ‘쉰다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쉬어야 하는’ 것은 ‘설움’이요, 비애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몸은 현실 속에 놓여있고, 마음은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고 있으니 그 어떤 상실감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고, 그것은 다시 설움의 감정, 비애의 감정, 자조의 감정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자연스럽게 자의식을 발동시키게 됩니다. “멀리서 산이 보이고/ 겨울 대신 실가락처럼 먼지나는/ 군용로가 보이는/ 고요한 마당 우에서/ 나는 나를 속이고 역사까지 속이고/ 구태여 낯익은 하늘을 보지 않고/ 구렁이같이 태연하게 앉아서/ 마음을 쉬다”, 자신을 속이고 역사까지 속이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게 자의식이지요, 그런 자의식이 있어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낯익은 하늘’까지 회피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시적 자아는 ‘구렁이같이 태연하게 앉아서 마음을 쉬다’라고 자조 섞인 토로를 하는 것이지요. ‘돈 없는’ 존재, ‘매일같이 술이나 마시는’ 존재, 모욕을 느끼는 존재, 자신을 혐오스럽게만 느끼는 존재에게 ‘남의 집’의 호화스런 모습, ‘남의 집’에서 바라보는 그림 같은 모습, 즉 저 멀리 산이 보이고 그 아래 ‘실가락처럼 먼지나는’ 길이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풍경은 사치에 다름 아니지요. 그것은 일상의 삶과는 사뭇 다른 허위라고도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런 세상의 허위성에 사로잡혀 사는 이상적 자아와 일상적 삶의 세속성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자아가 대립하고 있고, 그 대립각 속에서 시적 자아는 현실적 자아에 무게 중심을 두면서 자의식을 발동시켜 부끄러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당은 주인의 마음이 숨어있지 않은 것처럼 안온한데/ 나 역시 이 마당에 무슨 원한이 있겠느냐/ 비록 내가 자란 터전같이 호화로운/ 꿈을 꾸는 마당이라고 해서”, ‘주인’은 현실과 이상이 행복하게 결합된 사람입니다, 시적 자아는 그것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자란 터전같이 호화로운 꿈을 꾸는 마당’이기 때문이고, 부정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마당’이 ‘주인의 마음이 숨어있지 않은 것처럼 안온한’ 상태라고 언급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대목은 <달나라의 장난>에서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화자는 그때 그 주인 앞에서 ‘결코 울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했습니다만 여기서는 ‘무슨 원한’까지를 가질 필요가 있겠냐는 식으로 자신을 먼저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 시에서의 ‘休息’은 다분히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휴식은 자기기만 즉 진정한 ‘나’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 허위적이고 비현실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휴식은 자칫 비현실적인 존재로 치닫기 쉬운 현실에서 각성의 기재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휴식을 통해 변화하는 현실을 내다보고, 자기 자신을 또 들여다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불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비애감이 엿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 읽혀지고 진정성이 느껴지기도 하는 시입니다. 다만 호흡도 느리고 작품 후반부에서 풀리는 감이 있네요. 뛰어난 시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연기는 누구를 위하여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해발 이천육백척의 고지에서 지렁이같이 꿈틀거리는 바닷바람이 무섭다고 구름을 향하여 도망하는 놈 숫자를 무시하고 사는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오래된 연기
자의식에 지친 내가 너를 막상 좋아한다손 치더라도 네가 나에게 보이고 있는 시간이란 네가 달아나는 시간밖에는 없다
평화와 조화를 원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選手 백화가 만발한 언덕 저편에 부처의 심사같은 굴뚝이 허옇고 그 우에서 내뿜는 연기는 얼핏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연기의 정체는 없어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필 꽃밭 넘어서 짓궂게 짓궂게 없어져보려는 심술맞은 연기도 있는 것이다. -<煙氣> 전문
이 시를 대충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화자가 바라보는 ‘연기’의 존재는 ‘누구를 위하여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바닷바람이 무섭다고 구름을 향하여 도망하는’ 존재이고 ‘숫자’로 대변되는 지상의 현실을 무시하고 사는 존재입니다. 우주 만물이 氣로 이루어져 있고, 그래서 모든 기가 서로 넘나들고 부딪히고 전달되고 아우러지고 통하는 게 우주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만민은 평등한 것이고, 아니 평등한 것이어야 하고 평화와 조화를 원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연기’라는 ‘놈’은 약삭빠른 ‘현실의 選手’입니다. 온갖 꽃이 ‘만발한’ 현실에서 한사코 위만 쳐다보는 존재, 허공에 발이 떠있는 존재, 그렇게 현실을 훌쩍 저 혼자서 초월해버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현실에 지친 ‘나’로서는 부러운 존재이면서 ‘우스운’ 존재로 비치기도 합니다. ‘나’는 부럽기 때문에 ‘나에게 보이고 있는’ 너, 나로부터 ‘달아나는’ 너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하지만 ‘연기의 정체’는 소멸해버리는 존재일 뿐입니다. 대지에서 벗어나 허공으로 줄달음치는 존재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초월은, 진정한 초월은 그런 것이 아니지요. 대지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꽃밭’의 존재, 그런 식물의 존재가 더 수직적 초월을 이룰 수 있는 것이지요. 진정한 초월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화자는 생각합니다. 일행일설로 한번 살펴볼까요. “연기는 누구를 위하여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해발 이천육백척의 고지에서/ 지렁이같이 꿈틀거리는 바닷바람이 무섭다고/ 구름을 향하여 도망하는 놈/ 숫자를 무시하고 사는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오래된 연기”, ‘연기’는 저 혼자서 하늘로 치닫는 존재입니다, 바닷바람이 무섭다고 저 혼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구름을 향하여 도망하는 존재이지요, 그렇게 이기적인 존재, 비겁한 존재가 ‘연기’라는 ‘놈’입니다. 그 ‘놈’의 존재는 ‘숫자’의 개념, 현실의 개념이 없이 살아온 지가 ‘헤아릴 수 없이 오래’되었지요. “자의식에 지친 내가 너를/ 막상 좋아한다손 치더라도/ 네가 나에게 보이고 있는 시간이란/ 네가 달아나는 시간밖에는 없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는 ‘자의식’이 강한 존재입니다. 약삭빠르지도 않고, 도덕과 윤리의식에 둔감한 자도 아닙니다. 나에게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자의식’이란 게 있어서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그러니 현실 속에서 ‘지칠 수’ 밖에 없고, ‘너’와 같은 존재, 즉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가 부럽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의 존재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존재입니다. ‘너’의 존재가 ‘나에게 보이고 있는 시간이란’ 고작해야 ‘네가 달아나는 시간밖에는 없기’때문이지요. “평화와 조화를 원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選手/ 백화가 만발한 언덕 저편에/ 부처의 심사같은 굴뚝이 허옇고/ 그 우에서 내뿜는 연기는/ 얼핏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우주만물은 평화와 조화 속에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물질은 늘 움직이고 순환하고 변화하는 등 생명이 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주자학에서는 理와 氣로 설명하면서 理가 氣를 다스려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또한 氣가 理의 운용의 주역임을 말하는 것이고, 최한기의 기학에서는 그것을 氣만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에 따르면 우주 자체는 기로 이루어져 있어서 살아있는 것이고 평화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여하튼 세상의 원리, 대자연의 원리, 우주만물의 원리는 평화와 조화 속에 있는 것인데 이와는 달리 ‘너’는 약삭빠른 ‘현실의 選手’이지요, 여기서 ‘選手’는 영어로는 플레이어, 우리 말로는 경기에 뛰어난 사람이니까 ‘현실의 選手’라고 하면 약삭빠른 현실의 選手, 속도로 대변되는 근대의 현실, 즉 대자연의 원리이기도 하는 ‘평화와 조화를 원하는 것이 아닌’ 저 혼자서 앞서는 者입니다. 뿐만 아니라 ‘너’는 온갖 꽃이 만발한 ‘언덕 저편’에서 오로지 하늘로만 향하는 존재이지요. ‘부처의 심사같은 굴뚝이 허옇다’라는 말은 ‘부처’가 인생을 고행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초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부처’는 生이 苦임을 깨닫고 나아가 덧없음과 無我의 원리를 깨달은 뒤 해탈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인물입니다. 모든 것을 비워내는 정신이 불교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부처의 심사같은 굴뚝이 허옇다’라는 대목은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물론 ‘부처’의 의미를 말한다기보다는 ‘부처의 심사같은 굴뚝’에서 오직 ‘바닷바람이 무섭다고 구름을 향하여’ 도망을 치는 ‘연기’ 쯤으로 치부하고 다분히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너’의 형상을 ‘백화가 만발한 언덕’과 비교하여 진술하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얼핏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는 직접적인 언술 행위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백화가 만발한 언덕’을 외면하고 한사코 도망을 치려는 ‘너’의 모습에서 비웃음이 생긴 것일 터이지요. ‘너’는 지상에 안착하지 못하는 존재, 허공에 발이 떠있는 존재입니다. “연기의 정체는 없어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필 꽃밭 넘어서/ 짓궂게 짓궂게 없어져보려는/ 심술맞은 연기도 있는 것이다”, 현실에 발을 딛지 못 하고 있는 존재, 현실에서 벗어나 허공으로 줄달음치는 존재의 시도는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명한 진리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걸맞게 허공으로 줄달음치며 사라지면 그만인데 ‘하필 꽃밭 넘어서 짓궂게 짓궂게 없어져보려는 심술맞은 연기’도 있다는 것입니다. 화자는 지금 ‘꽃밭’을 운운하고 있는데요, 이런 식물적 이미지가 화자에게는 수직적 초월을 꿈꾸게 해주는 표상이 됩니다. ‘하필’의 단어 속에는 그런 뜻이 함유되어 있지요. 시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지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만 진정한 초월, 수직적 초월을 꿈꿀 수 있다는 의식은 건강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시의 맹숭맹숭한 점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보려는, 맛을 내보려는 대목 같기도 합니다. 이 시가 거의 습작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여름아침의 시골은 가족과 같다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 우리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 원활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후각과 청각과 미각과 통각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 어느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르나 차차 시골동리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뜨거워질 햇살이 산 위를 걸어내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우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사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고뇌여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내려가는데 천국도 지옥도 너무나 가까운 곳
사람들이여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고물개질을 하자
여름 아침에는 자애로운 하늘이 무수한 우리들의 사진을 찍으리라 단 한 장의 사진을 찍으리라 -<여름 아침> 전문
김수영에게는 이질적인 시라고 할 수 있는데요, 형상이 살아있어 좋습니다. 이 시 속에는 한국의 전형적인 농촌풍경이 있고, 그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의 형상이 있습니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만 시골 풍경에 익숙합니다. 학교를 다닐 때엔 방학만을 기다렸고, 방학이 시작되면 시골로 들어가 방학이 끝나가도록 큰 집에서 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