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빛그림 사진여행>님의 카페에서
김수영 다시읽기 1 / 오봉옥(시인, 문학평론가)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 ․ 15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지금까지 하지 못 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 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 하면……
#<巨大한 뿌리> 전문
이 시는 아주 유명하지요. 김수영 하면 떠오르는 몇 안 되는 작품이고, 김수영을 논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하는 작품입니다.
김수영의 시에서 모처럼 형상이 보이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모더니스트로 살아온 김수영이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898)을 읽고 그 어떤 자각이 있어 쓴 시가 이 작품입니다.
자각이란게 이 시에서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있는 전통에 대한 막연한 자각인데요, 그것이 선언적으로 나온 것이 이 시입니다.
일행일설로 읽어볼까요.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 ․ 15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셋이서 술을 마시는데 앉는 방법이 모두 다르군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성은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아주 중요한 힘이기도 한데요,
여기서는 그런 다양성이 자신에게는 매우 낯선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듯싶어요, 그래서 첫 행에서부터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앉는 법’은 살아가는 법이기도 하겠지요, 그런 점에서 ‘앉는 법’의 비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이 지금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정체성에 대해 명확하게 정리를 못 하고 있다, 그것을 토로하는 행이 첫 행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긴 김수영의 시세계를 보면 설움, 비애의 세계에서 무기력과 자기비하의 세계로 옮겨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현실의 비판정신, 부정의 정신이 없다면 그런 감정은 나올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또 한편으로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에서 오는 것이거나 비판을 넘어선 대안적 인식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요.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는’ 것은 한 발을 완전히 다른 발 위에 올리는 그야말로 양반식 자세이고요, ‘도사리지 않고’ 앉는 것은 그냥 편하게 가부좌를 트는 자세이지요. 그냥 편하게 앉아있는 ‘이북 친구들’ 앞에서 자기 혼자 양반식 자세로 앉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릴 수가 있지요, 다소 경직된 자세로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지요. 이 대목을 보면 화자의 심리랄까, 화자의 성격이 읽혀지기도 합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관계’라는 말인데요,
이 관계를 풀어가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지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 왠지 소심하고 예민한 사람들은 상대의 자세 하나에도 신경을 쓰게 되어 있지요.
‘이북 친구들’ 앞에서 ‘앉음새’를 고쳐 앉는 화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앉는 법’이 서로 다른 ‘이북 친구들’을 이야기하자니까 자연스럽게 자기에게 영향을 준 김병욱을 떠올립니다,
그는 월북시인이었지요. ‘김병욱’은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야기를 했군요,
그런데도 그런 자세와는 달리 4년 동안이나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노동자였군요.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지요. 언뜻 이광웅이라는 시인이 떠오르네요.
그 분은 키가 아주 작습니다, 1m 60cm나 될까 말까한 시인이지요. 얼굴도 童顔이어서 너무도 선하게만 보이는 분이었지요.
오랜만에 만나면 그 분은 너무도 환한 얼굴로-사실은 수줍은 웃음으로 가득한- 우리를 맞이해주곤 하는데 정작 내미는 손은 아주 작고 의식적으로 또 아주 조금만 내밀기 때문에 그 작은 손의 손가락만을 만지게 될 뿐이지요.
그렇게 여성스러운 분인데 사실에 있어서는 아주 강골이지요,
오송회라는 조작된 사건으로 감옥생활을 오랫동안 하셨고 나와서는 전교조 활동도 하셨습니다.
그 분의 시를 노래로 만든 게 ‘목숨 바쳐라’인데요, 그 가사 내용이 대충 이렇지요,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사랑은 그렇게 아름다운 거, 전선에서 맺어진 전우가 있다면 바쳐야 한다, 죽는 날까지 아낌없이 바쳐라”
사랑을 한다고 해도 목숨을 바친 사랑을, 전우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는 우정을, 독재정부 앞에서는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웅변하고 있죠.
이처럼 표면과 내면이 다른 사람이 많습니다. 이 시에서는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역사’도 마찬가지로 그 표면과 이면이 다를 수가 있는 거죠. 화자는 지금 ‘역사’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말하기 전에 그런 이치를 베이스로 깔아놓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비숍이라는 서양인의 눈으로 씌어진 게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이지요, 비숍은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군요, 따라서 여행을 온 게 아니라 그 어떤 목적이 있어서 온 것이군요, 19세기 후반에 영국의 지리협회가 하는 일을 상기한다면 그녀는 식민지 개척 차원에서 온 것이겠지요,
그러니 다분히 한국을 미개한 나라로 그리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사실에 있어서도 그녀는 한국을 ‘치유 불가능한 땅, 중국의 패러디인 땅, 서구 열강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음에도 멍한 상태로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고 있는 땅’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식민지 개척의 차원에서 건너와 이 땅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또 그것이 객관화된 시선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소중한 자료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화자가 이 서양인인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는 진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연애’라는 게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일을 일컫는 것인데 언뜻 보아 이해가 잘 안 되는 대목이지요.
그 책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요, 그 책이 화자에게 그 어떤 각성을 안겨주었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은 또 아닐까요, 아님 풍자의 한 표현으로서 쓸 수도 있는 거지요,
이를테면 그 식민지 담론을 전유함으로써 저항하는, 즉 패러디를 통해 그것을 공격하고 넘어서는 차원에서 풍자한 것일 수도 있겠지요.
2연은 ‘비숍여사’의 글을 그대로 인용한 게 아니지요, 거기엔 화자의 감정이 묻어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극적인 서울’, ‘이 아름다운 시간’등의 표현이 그것이지요.
다시 말해 ‘비숍 여사’가 미개한 형상으로 본 것을 화자는 그것을 전유하여 ‘극적인 서울’, ‘아름다운 시간’으로 뒤집어버렸습니다.
‘인경전’은 보신각의 속칭인데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려 남자들의 세상에서 부녀자들의 세계로 바뀌는 풍경, 남자라곤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기생들만이 가마를 타고 움직이는 풍경, 심야에는 그런 여자마저 없어지고 남자들이 다시 오입을 하러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풍경을 ‘기이하다’는 표현으로 비하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엔 한국인들을 미개한 인간쯤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있고 상대적으로 자신들은 또 우월하게 여기는 시선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런 풍경을 김 수영은 전치시켜 버립니다.
‘극적인 서울’, ‘이 아름다운 시간’으로 전치시켜 버리는 거지요. 이것은 일본에 의해 짓밟히고 미국에 의해 왜곡당하기 이전의 풍경, 훼손 없는 조선의 풍경, 비록 외부의 눈으로 볼 때에는 기이하고 봉건적으로 비칠지라도 우리 역사 그대로의 풍경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에서 ‘아무리’는 강조구절, ‘더러운 전통’은 반어적 어법, ‘이라도’는 양보적 어절입니다.
같은 말법으로 씌어진 대목이 두 군 데 더 있군요,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이런 말법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데요, 여기엔 어떤 의도가 있을까요?
더러운 전통, 더러운 역사, 더러운 진창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역사와 전통이라면 그것을 싸안고 가야겠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뿌리’임에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래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해서 한 단계 더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이 대목은 냉철한 정신, 타오르는 의지, 참다운 사랑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전통’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시구문’과 빨래터를 연상합니다.
‘시구문’은 시체가 나가는 문이지요, 사형장에 있고요, 서울 4대문에 있지요, 양반은 죽으면 큰 문으로 나가고 하층민이 죽으면 시구문인 좁은 문으로 나갑니다. ‘시구문’을 연상하던 화자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빨래하던 아낙들을 떠올립니다.
빨래터는 아낙들이 모이는 곳이지요, 아낙네들이 모여 공공연하게 떠들던 장소, 온갖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는 장소, 때론 소문의 진원지로 작용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양잿물 솥’이 끓듯이 온갖 말들이 살아 움직이는 장소입니다. 우리네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지요. 그러한 연상 끝에 화자는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는 긍정의 지점에 도달합니다.
‘썩어빠진 대한민국’과 ‘진창’의 표현에서는 우리 역사에서 그 어떤 좌절의 순간들, 이를테면 4 ․ 19같은 것이 떠오르네요. 4 ․ 19는 우리 역사에서 ‘진창’입니다. 정치적 혼란, 관리들의 무능, 부패로 덧씌워진 역사의 진창길이지요.
그것을 갈아엎자 라고 나선 게 4 ․ 19인데 그것은 곧 실패하고 말지요, 군사쿠테타로 인하여 좌절하고 맙니다. 화자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3연 마지막 두 행에 담겨있네요.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화자는 지금 ‘썩어빠진 대한민국’을 전근대의 모습을 떠올림으로써 넘어서고자 합니다. 그것이 주체성이고,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여러분에게 생각할 거리 하나를 안겨주겠습니다.
우리는 일제를 거쳐왔지요, 근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 통로인 일본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학만 해도 서구문학이 일본을 통로로 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본문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럼 일본의 근대 문학과 한국의 근대 문학을 연구함에 있어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까, 아님 우리 문학의 주체성을 고려하여 연구해야 합니까?
물론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양편 모두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실증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여 모든 것을 일본의 영향이라고 재단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를테면 김소월은 7 ․ 5조를 즐겨 쓴 시인인데요, 그것이 일본의 하이쿠 영향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하이쿠가 5 ․ 7 ․ 5조이기 때문에 그런 모양입니다만 그것은 잘못 된 생각입니다. 향가 이래로 우리 시가에서는 6 ․ 5조, 7 ․ 5조, 8 ․ 5조 등이 많이 있었지요, 그것을 기준음절수로 생각해 볼 때 7 ․ 5조라 하여 7 ․ 5조로 부르는 것인데요,
이것은 노래로 보면 두 토막이지요.
근대 이후의 시들이 읽는 시여서 좀 헷갈릴 수가 있는데요, 이를테면 7 ․ 5조만 해도 3음보로 놓고 그냥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김소월하면 3음보, 7 ․ 5조로 이야기 하고 그러면서도 민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시인이라고들 하더군요. 기본적으로 민요는 주거니 받거니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보통 2음보 중첩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김소월이 민요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 7 ․ 5조라는 것도 두 토막으로 봐야 한다, 그의 의식 속에는 노래로서의 두 토막이 전제된 상태에서 7 ․ 5조를 즐겨 쓴 것 같다, 그것은 우리 전통 시가 양식에서 차용했거나 민요에서 차용한 것 같다, 그래서 표면적 유사성만을 놓고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주체성이 없는 안일한 생각일 뿐만 아니라 자칫 본질을 왜곡할 소지까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요.
주체적 역사인식이 필요합니다. ‘전통’과 ‘역사’를 ‘거대한 뿌리’로 보고 있는 이 시도 그런 점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제 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이 대목은 어려운 대목은 아니지요, 이미 위행에서 ‘전통’과 ‘역사’를 강조했으니까 비록 못 나고 미개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라는, ‘비숍여사’의 눈에는 미개한 것으로 보이는 풍물들, 한낱 박물관에나 안치되어 있어야 할 낡은 것에 불과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그것이 소중한 전통이라는, 그래서 아무리 ‘더러운 전통’, ‘무수한 반동’이라고 하더라도 좋다, 라는 말이겠지요.
거침없는 욕설이 등장하는데요, 욕설은 부정의 강도를 증폭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한 시적 방식이지요,
그런데 그 대상을 살펴보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지기도 합니다.
이 시가 4 ․ 19 이후에 쓴 것임을 감안한다면,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또는 ‘통일’의 개념에 대한 거부감은 4 ․ 19직후의 좌 ․ 우익 논쟁, 온갖 통일논쟁에 대한 비현실성을 비판한 대목으로 보입니다.
곧이어 군사쿠테타가 일어났음을 상기해본다면 그런 논쟁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어리석은 논쟁, 그러니까 환상적 논쟁이고 비현실적 논쟁일수가 있는 거지요.
아니 이 때 김수영만큼은 그렇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해방 이전의 일제에 얽힌 것들, 해방 이후의 미국에 얽힌 것들에도 강한 부정을 드러내는군요. 미국에 대한 거부의식이 좀 의아스럽게 느껴지는데요, 김수영이 반미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요, 단지 4 ․ 19이후의 미국에 대한 실망감이 그렇게 표출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군요.
1980년 5 ․ 18광주 민중항쟁 때에도 그랬지요. 군사쿠테타를 일으킨 세력을 미국이 그냥 둘 리가 없다고 생각한 민중들이 ‘남해안에 미국의 항공모함이 떠있다’ 라는 식으로 기대감을 표출했고, 그것이 무참히 끝나자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내보였지요.
미문화원 점거농성이 그렇게 생긴 것 아닌가요? 그러나 그것들과 대비시켜 긍정적으로 노래하는 것들은 전근대적 풍물이네요.
‘장죽’은 담뱃대고요, ‘장전’은 세간을 파는 집,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다 아는 단어들이네요. 그런데 ‘요강’에서 ‘피혁전’까지는 전근대적 풍물이라는 점에서, ‘곰보’에서 ‘무식쟁이’는 소외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데요, 이것들과 대비시켜 부정적으로 노래하는 대상들은 공통점이 있나요?
‘진보주의자’에서 ‘미국놈’까지는 그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 같지는 않군요. 그냥 거침없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내뱉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맘모스’는 일본식 표현이지요, 매머드라고 해야 합니다, 매머드는 실상 코끼리보다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다만 상아가 3m 쯤 되어서 괴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것을 김수영은 ‘시꺼먼 가지’로 표현했네요.
그러나 그 매머드가 ‘괴기영화의 맘모스’이기 때문에 거대한 매머드로 느껴지고,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로까지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매머드의 그 큰 상아가 ‘시꺼먼 가지’, ‘거대한 뿌리’로 이어지고 있네요. 그만큼 ‘전통’과 ‘역사’가 소중한 것이라는, 존재론적으로 우리에게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겠지요.
저는 이 시가 김수영에게 있어 문제작으로 인식됩니다.
설움과 비애, 무기력과 자기 비하의 세계에서 전통을 발견하는 데에 까지 이르렀으니 문제작으로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모처럼 형상이 보이는 시라는 점에서도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싶습니다.
다만 전통이라는 것이 과거의 것이 아닌 현재의 삶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흘러왔고 그리고 또 긍정적으로 우리의 삶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시에서 보여지는 전통에 대한 자각은 다소 막연한 것이 아닌가,
또 그 전통에 대비시켜 부정적으로 나열한 대상만 해도 그 어떤 공통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 있는 의식이 아닌가 하고 여겨집니다. 문제작이기에 더욱 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네요.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
식민지의 곤충들이 24시간을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닌다
나이어린 사람들은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
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이 다리를 건너갈 때마다
나는 나의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킨다
(이런 연습을 나는 무수히 해왔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반항에 있지 않다
저 젊은이들의 나에 대한 사랑에 있다
아니 신용이라고 해도 된다
‘선생님 이야기는 20년 전 이야기지요’
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나이를 찬찬히
소급해가면서 새로운 여유를 느낀다
새로운 역사라고 해도 좋다
이런 경이는 나를 늙게 하는 동시에 젊게 한다
아니 늙게 하지도 젊게 하지도 않는다
이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처럼
늙음과 젊음의 분간이 서지 않는다
다리는 이러한 정지의 증인이다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
그러한 속력과 속력의 정돈 속에서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나는 이제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을
똑똑하게 천천히 보았으니까!
-<現代式 橋梁> 전문
이 시를 보니까 김규동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김수영이 퇴계로에 있는 육교를 지나다가 갑자기 서더니
“이거 무너지는 거 아냐?
박정희가 우리를 죽이려고 세워놓은 거 아냐?”라고 말하더래요.
김수영은 박정희에 대한 절대부정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을 하면서 그런 증언을 하셨지요. 한번 읽어볼까요?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 식민지의 곤충들이 24시간을/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닌다/ 나이어린 사람들은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이 다리를 건너갈 때마다/ 나는 나의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킨다/ (이런 연습을 나는 무수히 해왔다)”,
이 시를 보면 현대식 교량이 육교인지 한강다리인지 분명치 않지
요, 또 그 다리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다리인지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진 다리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다리’라는 게 근대의 상징으로서의 사물이고, ‘속도’를 느끼게 하는 매개체로서의 사물이라는 점이지요.
다리 위에서 보면 차들이 쌩쌩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고, 상대적으로 도로 밖의 존재들은 너무도 느리게 움직이는 걸 확인할 수 있지요.
차들이 너무도 빨리 달리니 경이로울 수밖에 없지요, 세상의 속도에 비해 자기만 늦었다고 생각한다면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되어 옛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고, 그래서 서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거지요.
2연을 보면 20년 전을 운운하고 있으니까 한강다리 같기도 해요, 일제 식민통치의 제도적 상징으로서의 다리, 근대의 상징으로서의 다리 같기도 하지요. ‘나이어린 사람들은’ 이 ‘다리’가 식민지 시절의 유산 혹은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를 상징하는 것임을 알지 못 하지요,
그래서 ‘식민지의 곤충’이 되어 ‘24시간을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닙니다.
1행에서 ‘회고주의자’를 운운했고 또 일반민중들을 ‘식민지의 곤충들’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식민지 시절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아님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떠올린다면 마구 밀어붙이는 그런 속도에 대한 반감으로 이런 표현이 나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리’의 성격을 명확하게 꿰뚫고 있는 화자로서는 그 ‘다리’를 건너다니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나이어린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 합니다. 이렇듯이 화자는 ‘회고주의자’가 되어 과거를 돌아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실체에 대한 경이를 느낍니다.
이건 식민지의 유산이야, 이건 개발독재의 합리화를 위한 산물일 뿐이야, 하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 가공할만한 속도를 보며 긴장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그러는 것이지요.
저 역시 육교 위에서 똑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속도가 늦을까, 왜 나만 뒤처져서 따라가는 것일까, 과연 저 속도를 따라붙을 수 있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지고, 핸드폰이며 인터넷이며 하는 것들이 등장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국경을 무너뜨리고 지역을 무너뜨리는데 나만 왜 뒤처져서 걷고 있는 것일까,
이젠 생명공학이 발전하니까 나의 생명조차 맘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는데 왜 나만 고루한 나로 남아있는지, 나만 한가하게 자연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면서 그것은 어쩌면 직무유기이고 자기합리화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내려왔지요.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반항에 있지 않다/ 저 젊은이들의 나에 대한 사랑에 있다/ 아니 신용이라고 해도 된다/ ‘선생님 이야기는 20년 전 이야기지요’/ 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나이를 찬찬히/ 소급해가면서 새로운 여유를 느낀다/ 새로운 역사라고 해도 좋다”,
‘반항’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경이’입니다.
자신은 정작 속도로 대변되는 젊음을 이해하지 못 했는데, 다시 말해 ‘식민지의 곤충’이 되어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니는’ 젊은이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반대로 젊은이들은 구세대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젊은이들은 구세대의 ‘20년’ 세월을 한꺼번에 이해하고, 사랑과 존경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니 속도의 한 복판에 놓여있는 그들로서는 ‘20년’의 과거를 따질 겨를도 없이 그냥 위로하고 함께 가고자 합니다.
화자는 그런 젊은이들을 보면서 ‘새로운 역사’를 느낍니다.
이제 자신과 같은 구세대들은 ‘그들의 나이를 찬찬히 소급해가면서 새로운 여유를 느껴도’ 좋을 만큼 그들은 앞날을 스스로 개척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생님 이야기는 20년 전 이야기지요’라고 위로를 보낼 만큼 성숙해 있고, 그러면서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갈 만큼 젊은 패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리’위에서 화자가 깨달은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끈에 대한 자각입니다,
사랑이지요. ‘젊은이’들은 구세대에 대한 ‘사랑’과 ‘신용’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구세대들은 ‘젊은이’가 보내는 ‘사랑’의 시선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각은 화자에게 시간의 흐름을 따져보면서 ‘새로운 여유’를 느끼게 하고, 그것이 ‘새로운 역사’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합니다.
“이런 경이는 나를 늙게 하는 동시에 젊게 한다/ 아니 늙게 하지도 젊게 하지도 않는다/ 이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처럼/ 늙음과 젊음의 분간이 서지 않는다/ 다리는 이러한 정지의 증인이다/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 그러한 속력과 속력의 정돈 속에서/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나는 이제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을/ 똑똑하게 천천히 보았으니까!”,
신 ․ 구세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시인은 ‘경이’라 표현합니다. 젊은이들에게서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을 느낀 화자는 그 순간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를 떠올리며 서로가 공존하는, 상생하는 모습을 그려냅니다.
‘엇갈리는 순간’이야말로 ‘정돈’의 순간인 거지요, 또 ‘이러한 정지의’ 순간의 ‘증인’이야말로 ‘다리’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게 하고, 서로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게 하고, 그것이 ‘사랑’임을 깨닫게 하는 하나의 매개체로써 작용합니다.
‘늙음’의 ‘속력’은 과거에서 현재로 오는 느린 속력입니다, ‘젊음’의 ‘속력’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빠른 속력이지요.
그런데 서로 간 교차점에 서있는 순간만큼은 그 상이점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 ‘늙음과 젊음의 분간이 서지 않는’ 정지의 순간이 되는 거지요.
어쩌면 화자는 다리 위에 서서 다리 밑으로 엇갈리며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그 자체의 조화, 그 자체의 질서를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낡은 것이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는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상생하는 그것이 세상의 아름다움임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화자에게 ‘다리’는 더 이상 ‘식민지의 곤충이 24시간을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니는’ 죄 많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를 교접하게 하고, 넘나들게 하고, 상생하게 하여 그야말로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식 교량’이라는 ‘실증’은 이미 ‘적’을 넘어서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속도라는 감당하지 못할 ‘적’을 공존하는 실체로 느끼게 만들었으니까 말입니다.
이제 더 이상 ‘적’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실체,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실체, 아름다움을 소멸시키는 실체, 인간의 의식을 황폐화시키는 실체가 아니지요. 그것을 ‘현대식 교량’이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이제 ‘다리’는 서로가 통하는 길이며 생존을 더불어 확인하는 길입니다.
‘현대식 교량’은 역사의 현존이며 실제입니다. 이렇듯이 이 시의 미덕은 관념이 아닌 실제로부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현대식 교량’이 역사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만만치 않고, 또 그 속에서 갈등을 끄집어내어 노래하면서도 결국엔 그것을 넘어서는 지점에까지 다다르고 있으니 괜찮은 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까지 다다른 과정에 대한 고민, 천착과 수용, 이해와 사랑으로의 발전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니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 ․ 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사랑의 變奏曲> 전문
이 시는 김수영 하면 떠오르는 시 중 하나이고, 이 시선집의 표제시이기도 하네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김수영은 비극적 세계인식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고, 자기분열을 의도적으로 드러낸 시인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있어 현실은 부정적 현실, 타락의 현실이고 시적 자아에 있어서는 부끄러운 자아, 반성에 반성을 거듭하는 자아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현실을 딛고 선 모습이 보입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욕망’이 ‘도시’와 연결되고, 그 ‘욕망’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고 하는 걸로 보아 ‘욕망’은 다분히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는 단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의 ‘욕망’은 일차적으로 도시의 세속성, 일상사의 비속성을 드러낸 단어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그 ‘욕망’이라는 단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 다시 말해 시적 자아가 발을 딛고 선 현실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욕망’은 세속적 ‘욕망’의 의미를 넘어선 욕망, 시적 자아가 진정으로 취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단어로도 느껴집니다.
이 양가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게 ‘욕망’이라는 단어인 듯 합니다. 도시의 현실이니까 세속적이고 비속적인 현실이겠지요, 그리고 타락한 현실일 겁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고 진술하고 있군요. 일종의 선언처럼 들리는 말입니다. 이러한 선언이 있기까지는 현실 속에서 숱한 좌절이 있어야 하고, 고뇌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김수영은 이런 좌절과 고뇌를 충분히 보여주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는 타락한 현실의 소리입니다,
그러한 현실을 보며 ‘사그러져간다’, 꺼져간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숱한 좌절을 딛고 일어선 자만이 내보일 수 있는 확신이요, 낙관입니다. 또 그 ‘소리’가 ‘사랑처럼 들린다’고 하니 혁명적 낭만주의자로서의 자질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1연은 시간적 순차성을 따라 묘사되고 있습니다.
타락한 현실이 ‘사그러져’ 가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시간(강)이 흐르고, 그 시간 뒤에 밤 또는 깊은 겨울(암흑)이 있고, 그 깊은 겨울 속에서 봄(삼월)을 기다리는 ‘마른나무들’이 있고, 그 ‘마른나무들’은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를 피우기 위해 새순이 자기들끼리 속삭이고(속삭임), 장난치고, 서로 떠밀고, 그러한 모습들이 한 눈에 바라보이고, 나아가 그런 ‘봉오리’들이 ‘쪽빛 산’을 이루게 되는 순간까지 머리에 그려지고 말입니다.
가히 혁명적 낭만주의자로서의 진술이고 묘사라 할 수 있습니다.
‘욕망’과 ‘사랑’은 대척점에 놓여있는 듯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그 ‘욕망’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 그 둘은 변증법적 관계에 놓여있다 라고 할 수 있지요.
다시 말해 세속적 현실, 타락한 현실은 ‘사랑’의 마음과는 대척점에 놓여있는 분노와 경멸에 가까운 감정이지만 그 둘은 끊임없이 부딪히고 싸우고 그렇게 넘나들면서 닮아가고 상생하고 합일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럴 때에 그 ‘욕망’은 저차원의 욕망을 넘어 고차원의 욕망, 시적 자아가 진정으로 취하고자 하는 ‘욕망’이 되는 것입니다.
1연은 형식이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갈이를 자기 마음대로 해 버렸어요, 아니 의도적으로 행걸침을 했다고 할 수 있죠.
의미론적으로 행갈이를 해 본다면,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정도가 되겠지요.
의미론적 연결은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의도적으로 행걸침을 했어요, 이를테면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의 부분은 의미론적으로는 이어서 읽어야 하는데 시인은 그것을 강제적으로 분절해놓았다 말입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그 어떤 긴장이 생기는 거지요, 또 의도적으로 분절해놓으니까 강조점이 달라지는 측면이 있지요,
보통 행의 첫 음에 강세가 찍히는데요, 그러니까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의 부분이 원래는 ‘그’에 강세가 와야 하는데 행걸침을 해버리니까 ‘사랑’에 강세가 찍히게 되죠, ‘그’에 강세가 오면 ‘욕망’에 강조점이 찍히게 되는 것이고, ‘사랑’에 강세가 오면 ‘사랑’이라는 개념에 강조점이 찍히게 되어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또한 행걸침을 해버리면 속도가 빨라지는 경향이 있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행이 끝날 때 쉬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그 행이 의미론적으로 다음 행과 연결되고 있으니 빨리 이어서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동시에 생기게 됩니다.
여기서 또 긴장감이 배가되지요. 이렇게 모든 행을 의도적으로 행걸침해 놓았으니 1연이 한 눈에 읽히는 감이 있네요.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행걸침이 파격을 이루고 있다면 연 나누기 역시 파격을 띠고 있습니다,
1연과 2연은 의미론적으로 따져보면 연결되어야 정상이지요,
그런데 시인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그러니 2연 자체만으로 해석을 하자면 1~3행이 비문이 되지요. ‘슬픔처럼 자라나는’ 주체가 2연에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주체는 1연의 ‘쪽빛 산’이지요. ‘사랑의 기차가 지나간다’는 대목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화자의 심상이고, 시간의 흐름입니다.
1연에서 이미 화자는 ‘사랑’으로써 ‘욕망’을 다스리려는 심상, ‘사랑’으로써 ‘욕망’까지를 싸안고 넘어서려는 심상을 보여준 바 있지요. 그러면서 떠올리는 것이 ‘쪽빛 산’입니다.
하지만 이 ‘쪽빛 산’을 떠올릴 때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건 ‘현실’입니다.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는 ‘슬픔’을 낳게 만들지요.
또 화자는 1연에서 이미 ‘욕망’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언일 뿐 현실화된 게 아니지요. 현실화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렇듯이 각오를 다지고 마음의 품을 넓게 가지고자 하나 눈에 보이는 것은 ‘도야지우리의 밥찌끼같은 서울의 등불’이지요. 화자는 지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꾸만 각오를 다지고 있고, ‘쪽빛 산’을 떠올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도야지우리의 밥찌끼같은 서울의 등불’은 자신이 그려내는 ‘쪽빛 산’의 실체에 슬픔을 배가시킵니다.
이렇듯이 ‘욕망’과 ‘사랑’이 합일화 되기까지 ‘현실’과 ‘의지’는 서로 넘나들면서 간섭하고, 교섭하고, 교직하면서 갈등을 하고, 그러면서도 조금씩 합일화의 과정을 진행해 나갑니다.
그 갈등 양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게 2연입니다. 한편으로는 ‘도야지우리의 밥찌끼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하고’, 또 한편으로는 ‘가시밭’까지도 ‘사랑’을 느껴가게 되지요.
도시적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대목은 ‘도야지우리의 밥찌끼같은 서울의 등불’입니다.
반대로 자연적 이미지는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까지도’ 사랑의 공간으로 형상화합니다. 전혀 이질적인 심상이 결합되고 있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범주를 말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로도 느껴집니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사랑’을 깨우쳐가는 심상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인데요,
‘도야지우리의 밥찌끼’가 차츰 거부의 대상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전환해가는 심상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 과정에서 ‘사랑의 숲은’ 차츰 무성해져 갑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도야지우리의 밥찌끼’를 ‘사랑의 음식’으로 전환시키는 동적 능력이 되고,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까지도’ ‘사랑’으로 느끼게 하는 근본 동력이 되는 것이지요. 사랑의 힘은 대단한 거지요, 적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게 사랑의 힘이지요,
내가 그토록 부정하고 경멸해마지 않던 세속적 욕망까지도 사랑의 욕망으로 승화시키는 게 사랑의 힘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느껴가는 화자에게 사랑의 힘에 대한 감동이 밀려오지 않을 수 없지요,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의식의 도취상태에서나 나올 수 있을 법한 이러한 진술은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지요.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 ․ 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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