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의 세계

송준영의 <현대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 / 한 태 호 (문학평론가)

자크라캉 2007. 8. 29. 18:17

준영의
<현대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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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태 호 (문학평론가)

 

 

1. 학과 미학의 상관성
   송준영 시인의 <현대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를 다시 읽으면서 일차적 직감은 선과 시의 상호 통섭성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이다. 선은 미학이나 예술이 아니다. 더욱이 서양에서 형성된 미학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순수예술 분야에서도 아직 동양에서는 학문으로서의 미학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인데, 비예술적 정신성을 추구하는 선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다만 동양에서는 수많은 사상적 연륜과 퇴적( .+�사상 등)을 통해서 다양한 미적 사고나 개념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사상적 퇴적물의 한 단층으로서의 선과 시의 언어예술성과의 상호 관계성은 무엇인가? 과연 불가, 특히 선사상으로서 선시가 동양의 본래 미학과도 다르게 형성된 언어미학성, 예술성을 표출해낼 수 있을까?
 본래부터 미학은 예술에 대한 철학이다. 선학은 선시에 대한 철학이며 근본 이치다. 미학이 예술에 대한 사유의 학문이라면, 선학은 선에 대한 사유의 총합체이다. 미학을 통해 예술의 가치와 목표를 설정하여도, 실제 창작의 물꼬와 구체적 형태를 제시하는데 도움이 될까? 이에 대해서는 작의현장성을 강조하는 창작인의 반대의견과 이론정립을 강조하는 학문적 가치 제기 간에는 항상 갈등이 존재해왔다. 학문이란 실제적 창작행위의 결과를 후생적으로 정리, 합리화시키는 사후 지식의 정리체계다. 따라서 선행적 행동성을 강조하는 창작과정과 후행적 학문성을 강조하는 이론과는 상호 조화성이 결여될 수도 있다. 이러한 갈등은 선학과 선시 창작 간에도 존재할 것이다. 당연히 선학에 대한 선시의 정의적 가치관이나 미학론은 동일한 논쟁과 의미의 개념 범주를 갖고 있다. 더욱이 선학은 동양적 사유이기에 동양적 시가무서화(X歌�
Z)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예술과 유리된 종교철학적 사유론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종교철학적 선학의 사유론을 시라는 예술적 표현매체를 통해서 인간의 지고한 정신적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그 지적 작업의 의미는 무엇인가? 선시가 선 이론이나 교조와는 다른 순수 예술 활동이나 표현론으로 독립할 수 있는가? 과연 동양예술로서의 선시를 선학적 도그마의 또 다른 표현으로 수용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독특한 동양적 미학의 유파로서 인정해야 할 것인지, 수많은 대립항적인 논의가 예상된다. 따라서 선시에 대한 이 저서는 자연스레 철학과 예술, 종교와 시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논의가 전제된다.
   그러면 송준영은 본 저서에서 자신의 입장을 어떻게 천명하고 있는가? 그는 언표적으로 명시화하고 있지는 않지만, 선학의 도그마적 가치를 치환 및 차용하고 있다. 그의 창작 및 집필 정신은 그의 시 창작 기법에 의해 소멸될 수 없는 어떤 본질을 드러내는 글쓰기가 되고 있다. 이것이 서양 미학적 부산물인지 아니면 동양미학적 본색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선학사상의 기초 개념과 영역에서 그만의 분명한 좌표를 남기고 있다. 그의 사고 개념 및 성향은 분명히 선학의 종자를 유전인자처럼 안고 있다. 그 종자를 단순히 산목(�� 이식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그는 끊임없이 종자 개량과 묘목 이식을 시도하고 있다. 그의 선학은 미를 중심으로 하는 미의 실현과 예술적 안목을 승화시키려 하고, 그의 선시론 즉 예술론은 현대시학적 미와 예술성을 완성시키려 한다. 이러한 이중적 갈등 속에서 그의 선시론은 중중무진의 예술성을 펼친다.
   이것은 송준영이 오래 탐구하고 실참실수한 선 수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히 그가 바라보는 화엄법계는 곧 현실세계를 통해 볼 수 있는 이면에 덤덤히 버티고 있는 자존의 세계이다. 이제 그가 도표화한 선의 세계, 곧 중중무진화엄법계를 보자.

선가에는 본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없다. 그래서 『선문염송』 제1칙 「도솔래의」��6 n에서 “세존께서 도솔천을 여의기 전에 이미 왕궁에 태어나셨으며, 어머님의 태에서 나오시기 전에 이미 사람들을 다 제도하였다”(v
@ ���� �y
? ������T)하고 제1 공안으로 천명한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이 낌새는 화엄무애법계의 소식인 동시에 선의 세계이다. 인드라망적인 ‘거듭거듭 다함이 없는 법계’(
�����)의 소식이다. 도솔천은 욕계의 중앙 하늘로서 모든 부처님이 이 하늘에 계시다가 우리 세계로 태어난다고 하는 하늘이다. ‘도솔천을 떠나지 않고 가빌라성 왕궁에 태어나고, 어머니 배 속에 들어있으며 일체 중생의 제도를 마쳤다’하니, 시간으로 동시성이고 공간으로 전공간성이다. 그럼 한 선화를 살펴보자. 

청원 행사가 처음 6조를 뵙고 6조에게 물었다.
“어떤 일에 힘을 써야 상대적 계급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대는 일찍이 무엇을 했었는가?”
“성스런 진리까지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슨 계급에 떨어졌던 일이 있는가?”
“성스런 진리까지도 행하지 않았는데 무슨 계급이 있겠습니까?”
조사께서는 매우 갸륵하게 여겼다.

성스런 진리는 본래부터 하는 일이 없고          q�F6���
더구나 계급도 닦을 것 없다네更�v可��
지금까지 노로()는 쌀 방아를 찧는데
�c �
쌀까지 겨까지 누구를 주려는가?VRV糠�N�
                                       -금산원

『전등록』에는 청원 행사가 강서지방의 길주 사람이고, 성은 유씨로 기록되어 있다. 조계에 찾아가 6조에게 위와 같은 문답을 한 후, 6조가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여 회중에 아무리 문하생이 늘어도 행사를 수좌�X로 있게 했다고 적혀있다.
“일찌기 무엇을 했는가?”라고 6조가 행사의 수행과정을 물었다. 그런데 행사는 “성스런 진리도 행하지 않았다”(q�X��고 대답한다. 성제는 세제v씩�상반되는 말이니, 곧 성인의 진리, 여기서는 부처님의 진리도 행하지 않았다는 대답이 된다. 세제 곧 속제는 세속적인 이치나 규범을 말한다. 이런 행사의 대답은 곧 성인과 속인의 간택심이나 분별심을 모두 버렸으니, 무엇이 되고자 하거나 무엇을 닦는다는 인위적인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6조가 묻는 “어느 단계에 있느냐?”는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가를 묻는 것. “부처님의 지위, 곧 성제도 행하지 않았는데 무슨 지위(계급)가 있겠습니까?”하고 되묻는다. 이것은 이미 일체의 분별 간택심이 사라졌고, 성인과 속인의 차별심이 없으며, 이 때문에 자연 차별 관념이 있는 어떤 단계에도 머물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미 내적자증�r �ダ�되었음이 드러난다.

금산원의 게송, 1행과 2행에서 성스런 진리(q�인 부처님의 진리는 무위���무위��� 함이 없으나 일체가 두루 갖추어 있고, 지위가 없으나 일체 지위에 앉았으니, 무엇을 닦고 무엇을 바라겠는가. 노로는 6조 혜능을 가리킨다. 3행의 ‘지금까지 노로는 쌀 방아를 찧는다‘는 6조가 5조의 회상에서 방아 찧는 잡일을 하는 행자였으므로, 방아를 찧었다는 말은 맞으나, 지금까지 방아를 찧는다는 무슨 말인가?
바로 시간으로는 동시성이고 공간으로 전공간성이다. 두루두루 편재되어 있어 바로 꼬리며, 머리다. 미립자인 동시에 전 우주다. 또 시작인 동시에 끝이니, 바로 경포대 난간에서 최서방이 그린 소주를 마시면 LA에 있는 리차드 박이 코를 고는 진경이다. 이것이 선가의 형상이다. 4행에 ‘쌀과 겨, 누구를 주려는가?’는 3행에서 ‘지금까지 능행자가 방아를 찧는데’ 아직 쌀과 겨를 구분도 못하고 있는데 무엇이 바빠서 줄 사람부터 찾을까. 이렇게 진리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노능D이 방아 찧는 것과 우리가 지금 이것을 알기 위하여 한 마음 집중하는 것은, 전시간이나 전공간을 놓고 볼 때 아무런 차이가 없다. 바로 시공이 둘러빠진 소식, 골고루 편재된 소식이다. 이 선가의 소식이 바로 『선문염송』 제1칙 「도솔래의」��6 n에서 “세존께서 도솔천을 여의기 전에 이미 왕궁에 태어나셨으며, 어머님의 태에서 나오시기 전에 이미 사람들을 다 제도하였다”는 참 의미이다.『화엄경』에서 말하는 쌍차쌍조 차조동시� �  
 �M를 말하며, 바로 반상합도 되는 곳의 소식이다. 이곳의 표현은 정상을 비틀고 돌이켜 나타나는 둘이 아닌 수승한 세계다.
선시의 A=?라는 도식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시/비’의 이항대립을 모두 막고 융합하여 모두 비추니, 막고 비춤이 동시를 보여주는 것을 도식화한 것이다. 곧 정상이라 하면 A는 A인 동시에 A가 ?인 세계가 바로 공성이 활활발발한 세계니 시공이 초월된 세계다. 바로 쌍차쌍조� �  차조동시
 �M의 세계이며 선의 세계이다.

2. 선 예술론의 기본 인자
   송준영이 추구하는 선적 예술론의 기본 인자를 먼저 찾아본다.
   첫째, 그의 선시학은 순수 미적 탐구성을 전제하기보다는 동양 예술의 근본 특징인 동양사상, 특히 선사상이나 덕, 예, 도 등의 3 家 사상(유불선)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동양미학이 동양적 미적 사고, 동양 사상의 입장을 벗어날 수 없듯이, 그의 근본 선학 예술론도 동양성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즉 선시를 밝히기 위해 나를 다스리는 수기(��와 인간을 다스리는 치인(C �, 세상을 다스리는 치세(Cv)의 근본 3 영역, 심리적 및 인간 도리적 영역을 이미 가늠하고 있다. 이러한 일반 동양성을 포용하는 선학이론은 곧 모든 동양적 미학과 사상을 관류하게 되며, 순수 예술적 창조와 표현, 체험 등을 해석하는 근본 이치가 된다. 송준영의 시학의 미학성은 이러한 유가적 덕과 도가적 도를 이미 내포하면서 선시의 예악( ��을 표현, 체험된 해석으로 일관한다.
   둘째, 송준영의 선시적 미학은 분명히 동양 미학과 예악( ��을 상호 접목시키면서도 서양 미학의 파지(��인 현대시론의 미학성을 가미하고 있다. 동양예술/시학의 현대성이 배어나는 현대적 예술성이 강하게 윤색되고 있다. 그의 선시 해석은 동양 미학적 측면에서 강한 본색이 드러나며, 서양 미학의 아류로서 종속되지 않으려는 목소리가 깔려 있다. 그의 선시 해석 관점이 선학적 견해로는 정확하고 예지적 성향이 강하며, 그런 바탕에서 여태 우리나라 동양적 전통시 내지 선시류의 감상 및 시평을 서양의 이원론적 수사학을 바탕으로 평했을 때 많은 오류가 있어왔다. 선시류의 불이사상을 바탕으로 한 시를 서양의 이원론적 수사학에 의해 분석되어졌을 때, 오는 오독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왜소하고 비참한 종속적 결과를 우리는 보아왔다. 송준영이 순수 예술적 수용성의 망설임은 곧 이러한 동양적 선학적 미학을 서구적 예술 개념과 혼용시키는 데서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생성하는 선학적 정신은 서구적 미학의 아류나 시적 논리의 늪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선시의 특징이라 할 모순어법적 표현을 선시의 반상합도, 선시의 초월은유, 선시의 무한실상에 의해 세분화하므로 선시의 수사학을 처음 정리 발표하였고, 서구적인 시의 수사학이 선시를 마음대로 분석함에 오는 오류를 극복하려는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우선 선시라 하면 선사상을 시적으로 표현한 언어 양식을 말한다. 곧 선사들의 선적 체험, 이른바 선수행의 결과 체득된 오도의 경지를 선시적 수사법으로 표현한 시다.
여기서 선시적이라 함은 내용적으로 선사의 오도송을 비롯하여 불경이나 어록, 공안집을 바탕으로 하거나 혹은 형태적으로 고전 선시에 자주 나타나는 절연, 압축, 기상과 모순적 어법의 조화를 말한다. 결국 절연, 압축, 기상이 모순적 어법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으므로 모순적 어법을 철저히 규명하면 선시의 바탕을 대략 읽게 된다. 따라서 모순적 어법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선시의 반상합도!���선시의 초월은유��[  선시의 무한실상�z���일컫는다. 이 세 수사법은 선시를 표현하는데 불가분의 관계를 서로 내포하고 있다. 물론 선시, 특히 선적 사유는 언어를 만나 표현되어짐을 염두에 두었을 때, 그 기표야말로 바로 사상의 한 표현일 수밖에 없다. 선에 있어서 선사상이란 일상을 배제하고 이루어 질 수 없다. 바로 현장이 선의 알갱이다. 선을 항상 삶의 중심 사실을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상의 삶 자체다.“ <『현대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p.557.>
 
   셋째, 송준영의 선시적 해석과 시적 찬과 소는 근본부터 순수 예술적 주석이 될 수 없었으리라. 선시의 역사적 개관과 해석성은 그의 현대시 표현성에 대한 새로운 탐구 성향을 반영해준다. 송준영은 서구적 미학론보다는 동양적 선학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예술론을 펼치려 한다. 현대시의 서구적 표현력의 부족감을 극복하려는 나름대로의 모색이 선시적 신 표현성을 추구한다.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선시의 수사법은 무엇인지, 자신만의 새로운 발견과 만족을 이제 서구의 논리로 가득 찬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이 곧 그의 시론이며 예술론이 된다. 그의 미학은 동양의 시적 수사학을, 선시의 시 담론으로서 승화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송준영이 40여년을 선을 수련하고 현대시의 수사법을 탐구한 결과이며 그가 개척한 지분임이 분명하다. 특히 필자는 서구의 상징에 대해, 송준영은 선시에는 이원화된 상징은 없으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물질과 정신이 합도된 실상을 드러내고 보여주고자 한다. 특히 무한실상으로 오는 전제( � )와 후제(� )과 절멸되는 ‘적( l)=조(
 )’의 세계, 본질과 응용이 같이 드러나는 실상세계를 보여주려한다. 이것은 송준영이 읽은 마조 선사의 '일면불 월면불'( �~.
�~.) 화두와 그 선화에 대한 게송 두수를 살펴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마조는 선조사인 6조의 돈오법문을 착실히 실현한 적손임을 느낄 것이다. 자성의 바다로 돈입시키기 위해 제자들에게 긍정적인 방법과 부정적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혹은 이 양 극단을 넘어서서 순간적인 언어를 뛰어넘는 백장과 같이 코를 비튼다든가 수료와 같이 발길질을 하거나 양변에 떨어지지 않는 활어z &로 제자들을 가르쳐 왔음을 보아왔다.
선문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논리적인 정답은 없다. 늘 언저리를 돌리는 대답으로 질의자가 스스로 자기가 질문한 당처로 되돌려 깨닫게 한다. 그리고 질의자를 원천으로 회귀시킨다. 결국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한다.
장부일대사 인연을 마친 대선사에게도 임종을 맞이한다. 열반 하루 전 병세를 묻는 제자에게 깨달음을 안내하기 위해 마지막 간절 노파심을 보여준다.

마대사가 불편하므로 원주가 물었다.
“스님, 요즘 법체가 어떠합니까?”
마조가 대답하였다.
“일면불 월면불일세.”( �~.
�~.)

해 같은 부처님, 달 같은 부처님. 오래 오래 해와 같이 장수하는 부처님인 일면불과 하루 밤을 사는 부처님인 월면불.
이 대답에서 마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큰 파도나 작은 파도나 무궁한 영겁 속에 일어나는 파도는 바다 입장에서 같은 것이리라. 그럼 후대의 선장이 읊은 선시 한 수를 읽어보자.

일면불 월면불이여 �~
�~
외로 돌고 오른쪽으로 구른다
W ��3
만리에 광채가 싸늘하고A�n
천강에 그림자 비치네�江 ��
눈 푸르고 머리칼 누른 이여����
이 무슨 신통조화인고L\v�
                                            -보리원

깔방석에 단정히 앉아&Q�Z
V
바늘귀에 실을 꿴다b���<
서풍이 한 바탕 불어오니F ��6
낙엽이 두세 쪽 날리네����
                                                  -보녕용

앞의 게송에서 보리원����마조가 답한 ‘일면불 월면불’을 그대로 진리의 당체로 본다. 2행에서 누가 있어 시켜서 “외로 돌고 오른쪽으로 구르는 것”(
W ��3)이 아니고 스스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스스로 왼쪽으로 돌고 오른 쪽으로 구른다. 이 구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3행과 4행, 5행은 자성본체의 본질(�과 응용(
�의 조화를 노래하는 것이니 잘 보고 잘 보아라.
그럼 이 자성본체를 보고자하는가?
보녕용의 게송은 그대로 우리에게 있는 것을 다 들려준다.

‘이 가을 국화향 그윽한 방석에 앉아/황금색 실을 은빛 바늘귀에 넣는다
등솔기를 감싸 도는 바람 한줄기와/여인의 가르마 위로 날리는 갈잎 두어 장‘

어쨌든 마조가 만든 이 선화는 후세의 많은 수선납자들의 골치 덩어리 화두로 속을 썩인다. 그렇지만 수많은 후학들을 함정에 빠트리기도 하고 함정에서 건져주기도 하는 ‘일면불 월면불’을 집어 올려놓고 다음 해 2월, 80세를 일기로 입적한다. “ <『현대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pp.160-161.>

   넷째, 서양미학이 학문적 시론의 바탕을 형성한 반면, 동양미학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그처럼 송준영의 선 사상적 영역에 산재되어 있는 선(;) 시론은, 동양 사고의 강점인 표현의 종합성, 직관적 시성, 전통 선학의 내용 등을 바탕으로 시화되고 있다. 그의 미적 사고는 미와 예술, 형식과 창조성 등에 대한 근본 정의와 이론을 선학사(;j~)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하며, 시대마다의 선적 인간 표현성을 멋지게 해석하고 있다. 이럴테면 『선시의 세계』에는 수많은 선시가 송준영의 독창적이며, 혜안 번뜩이는 선시적 미학을 이 땅에 토해내고 있다. 종전에 많은 주소가들이 그 당시 언어와 의미를 소통하고 있는데 반하여 송준영은 아주 현대에 살아있는 언어, 생활언어로, 우리의 말로 새로운 선시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 일례를 들어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럼 약산 유엄을 간추리면서 한 폭의 고졸한 동양화와 같은 선화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덧붙인다.
이야기는 이렇다.
낭주자사 이고( �)가 약산의 덕화를 오래 전부터 듣고 흠모하여 산사로부터 내려오셔서 설법하여 줄 것을 자주 간청했다. 그러나 선사께서 끝내 하산하지 않으므로 산에 직접 찾아가 뵈니 선사가 경을 보면서 돌아보지도 않았다. 시자가 스님께 사뢰었다.

“큰 스님 태수께서 오셨습니다.”
약산이 미동도 하지 않자, 이고가 무안하기도 하고 성질이 나서 급히 말했다.
“얼굴을 보는 것이 이름을 듣는 것만 나을 게 없군.”
듣고 있던 약산이 태수를 부르니, 이고가 대답을 했다.
“어째서 태수는 귀만 귀히 여기고 직접 보는 눈을 천히 여기시오?”
약산에게 이고가 사과를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약산이 손을 들어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이어서 말했다.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안에 있네.”(
�:���:�
 
이 아름다운 선귀를 들은 이고는 환희와 수치심으로 뒤범벅이 된 채, 절을 하고 시를 지어 올렸다.

몸은 연마하여 학과 같이 되었으니 ���zm�
천 그루 솔 밑 두어 권 경�
k�[ ~
내가 도를 물으니 아무 말씀 없이�6���TU
푸른 하늘엔 구름 병 속엔 물
�:���:�

“운재청천수재병”(
�:���:�, 도를 이렇게 기표와 기의가 알맞게, 미적인 시구를 즉시 읊을 수 있다는 것, 또 이런 선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송림 우거진 숲, 아무렇게나 짠 경상 위에 두어 권의 경전/그 앞 솔가지 그림자, 조는 듯  일렁이는 바싹 마른 노스님/세속에 찌든 나, 도가 무어냐고 물으니/푸른 하늘엔 구름, 병 속엔 맑은 물’

그렇다. “운재청천수재병” 하늘 틈 새로 누군가 흘리고 간 말일 것이다.
누군가 빠트려버린 외짝 버선일 것이다.“ <『현대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pp.184-186>

   이러한 집필 정신은 동양 미학이 강조하는 인간적 표현과 직관을 많이 동원하면서도 하나의 학문적 담론으로 보여주고 있으나, 기계적으로 분류하지 않는 전통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 선시 해석과정에서 송준영은 시적 정신, 창조성이 무한한 언어 변화와 표현력을 광대하게 전개하고 있다.

3. 시유삼다(X �K)와 선적 미학성
   이러한 기본 특성을 바탕으로 그의 저서에 나타나는 선시에 대한 미적 이론을 같이 창출해본다.
  송준영의 저서는 근본적으로 선시 미학 또한 인간 예술 미학의 창조에 관한 것을 해석한다. 구양수의 시유삼다(X �K)에서 정의한 대로, 시는 볼 것이 많고(看K), 만들 것이 많고(
^K), 사유할 것이 많다(�IK). 선시의 의미와 정의에서 이보다 더욱 적합한 시적 정의가 있을까? 선시의 이미지는 저자가 주장한 대로 반상합도를 통한 모순의 모순적 대비와 병치를 통해서 볼거리가 풍부한, 즉 상상하고 시적 연상이 풍부한, 이미지가 계속 재생산된다. 선시는 끊임없이 시성과 표현성을 만들어 낸다. 모순어법은 곧 상호 모순되는 언어의 순리적 또는 역기능적 배치를 통해서 무한한 모순의 조합을 만들어 낸다. 시어의 무한성은 이러한 모순적 마방진에 의한 가변의 무한성에 존재한다. 이렇게 시어는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저자가 읽어내는 스물아홉 꼭지의 선시 읽기는 그의 풍요한 혜안과 거사 학자적 소양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의 투철한 구도 정신과 선수행적 거사 행각은 선학의 체득과 승화된 수행적 배움을 반영해준다. 이러한 것은 송준영의 수행일지인 「자정일지」를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그의 대사저인(��R �의 모습과 대사대활(���z)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1986년 2월 9일.
생일이었지.
음 정월 정일
나는 졸업을 하고 쌓여도 싸여도 더 쌓일 것 없는
그런 생일이었지.
부모미생전(����의 나
그런 건 개한테나 주어, 참학인(=j �의 속이나 편하게 하라.
그러나 말마라, 먹어도 먹어도 먹지 않는 내 나이.
날마다 나는 생일, 나는 생일
이날 나는 무시이래(�C ~6) 고향에서 생일을 맞다.

소쩍새 소쩍다/소쩍다 소쩍새
옛 하늘 속에 소쩍다는 소리
옛 물결에 물결 이어서 일고
옛 사람 오늘도
소쩍다 소쩍새/소쩍새 소쩍다

나는 위산선사(?�;�가 그의 제자 향엄(�9)에게 ‘자네의 총명과 재주가 대단함을 나는 짐작하네. 그러나 우리에게 생사문제가 가장 근본적이라는 걸 자네는 인정할 걸세. 자, 그럼 나에게 자네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이야기 해 주게.’를 읽다가 문득 어디선가 병과 병이 마주치는 소리를 듣다가, 홀연히 심안(��이 빛을 따라감을 보다가, 부모미생전(����의 나가 ‘나’임을, 도저히 알 수 없음을 알았다. 나는 웃었다. 콸콸콸 물 빠지듯 꼭 하루하고도 하루 낮을 웃었다. 끝내는 우스워 웃었다. -고불('.)의 공부도 별로 기특할 것이 없었군.- 1700공안 모두 한데 묶어 화장실 벽에 꽂아두라. 다시 한 수 적다.

옛 사람 홀연히 안광이 길을 찾는단 그 말/우린 속지 말자/눈 감아도 감아도 안광의 길은/암흑만큼의 깊이에서 빠져나고/온 우주에 올연히 솟아 오른 병 부딪는 소리/이 사람아 조주(
3
f) 그 영감 차 말고/내 한 잔주지 휘파람으로/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흔적 없다 누가/말 하던가/오직 연못을 뚫고/ 있을 뿐 일세

이 「자정일지」는 나의 40세 무렵의 파편이다. 그리고 1985년 2월 9일은 마흔들던 1월 1일 설날(
�U)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나와는 일면식도 없고, 『만공어록』제대로 한 번 읽지 안한 만공월면(=n
�~) 선사와 꿈 속 서늘한 조우는 스님한테 받은 큰 은혜였다.“ <『현대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pp.564-566.>
 
   송준영의 선시 읽기는 선의 법계도와 선시의 예술도를 꿰뚫을 수 있을 만큼 혜철(�하며, 언어의 두두물물을 적적확확하게 설파하고 있다. 오백나한처럼 많은 오백 쪽수에서 하나의 촛불처럼 타오르는 시 한편 한편의 해석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고, 현재와 과거, 생몰의 감각을 초월하여서, 이미 육체가 산화된 선사들의 공안과 혜안, 말씀과 언행을 거울처럼 드러내준다. 그의 시 해석은 간접적 시 창작에 버금갈 만큼 독특한 시 읽어내기가 된다.

4. 선시의 수사법
   송준영 역저, 『현대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의 장점은 선시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인 시적 접근이라는 점이다. 선학의 교조적 설명이나 해설이 아니라, 시로써 읽어내는 예술적 접근이 된다. 그는 선시의 수사법을 이해하는 방법론으로 위에도 밝혔듯이 반상합도, 초월은유, 무한실상 표현법으로 접근하고 있다.

“선시의 반상합도(!���란 우리가 정상이라 규정하는 일상을 돌이키고 뒤틀어서 정상과 비정상이 융통하고 회감하여 수승된 다른 세계로 나아감을 말한다. 즉 서로 다른 것이 상호 합일되어서 고차원의 것으로 합도되는 경지다. 수사학적으로 말하면, A라는 시적 요소(시어)가 B라는 시적 요소와 상치하는 듯하나, 보다 커다란 차원에서 보면 하나의 통일된 수사적 효과를 거둔다. 즉 A와 A가 아닌 요소(즉 ?)가 서로 상치하고 대립하는 듯하나, 보다 큰 차원에서는 서로 어우르는 것, 즉 A=?의 상태를 의미한다.
선시의 초월은유란 이질적인 두 사물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비유, 곧 “비동일성에서 동일성을 발견하려는 비유다. 즉 A=?라는 도식에서, 이 두 세계를 동시에 포함하면서도 내적 속성을 초월하는 경지를 표현하는 비유를 초월은유라고 칭한다. 곧 초월은유는 ‘A는 A가 아니므로 A다’라는 A=?다로 표시되는 반상합도의 어법의 등식과 일치된다. 곧 양변을 융합하면서 동시에 초월하는 비유상태를 의미한다.
선시의 무한실상은 저쪽과 이쪽에 서로 닿은 공의 세계 속에 있는 선사들은 언어마저 진언(
�3), 곧 선으로 본다. 선어는 비유나 상징을 초월하여 닿는 절대 현재의 진실불허(
����한 세계로 보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서구 개념의 상징이란 ‘유추적으로 가시 세계, 곧 물질세계가 연상의 힘에 의하여 불가시 세계, 곧 정신세계와 일치하게 되는 표현 양식’이며 ‘상징은 은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선사들은 실상을 써서 어떤 결정된 정상( ��의 관습적인 관념의 견고한 껍데기를 박살낸다. 정상의 고정 관념을 깨트린 세계는 언어와 언어가 맞닿는 세계며, 사물과 사물이 서로 조응하는 세계를 말한다. 이러한 실상을 표현하는 어법, 모순적 어법을 무한실상이라고 정의한다.“<『시와세계』「선시와 아방가르드 시」송준영. 2006, 봄호, pp.95-99.참조.> 

   이러한 세 가지 수사적 방법론은 결국 선의 4종 교지인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 제법무아, 제행무상, 등을 바탕으로 형성된 시인만의 시적 언어와 사유로 거듭난다. 시는 결국 인간 정신/인식/깨달음을 언표화하는 언어작업이다. 사유가 행위로 귀착되면 선가의 행이요, 사유가 언어로 귀결되면 시학의 언어 보시다. 인간행위나 지적 형이상학도를 시어로 표출하는 무한창조의 연금술사인 시인은 결국 언어로서의 수사적 표현론을 중시한다. 시적 수사의 다양한 방법론을 선가의 숭고한 정신과 적합한 분류성을 통해 취사선택하며 표현론을 구사할 때, 선시의 언어 구사론이 형성된다. 그 수사적 구사론이 대개는 저자가 주장하는 압축, 절연, 기상, 모순, 병치, 사물성 등으로 표출된다.
   송준영은 수백 수의 공안과 선시를 분석하는 분석 틀을 수사적 요소에 근거를 두고서, 세밀하게 역사적으로 회자되는 선시를 읽어낸다. 예술적 차원의 표현성을 초월하는 공안이나 깨달음 경지를 드러낸 시적 언표를 분석한다. 그리고 그의 선적 체험에서 솟는 에너지인 돈오와 오랜 수행으로 축적된 에너지를 무차별 자발광한다.

5. 선시 읽기의 세 지형도
   송준영의 선시 읽기가 선가의 심법 읽기와 유사한 궤를 같이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시와 철학적 또는 종교적 마음자리는 서로 양보할 수 없을 만큼 확연하게 위치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선시, 자체가 선리와 오도의 미학이미 실제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의 시 읽기 지형도에서 삼분된 파이 도표를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몫이 큰 선가(;家)의 도표는 그의 행간읽기, 정언적 언어 읽기, 선수행적 역사성과 의미론으로 점철되고 있다. 다음으로는 선가와 방향의 공통성을 가지는 일반 동양 사상의 몫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유교 및 도가에서도 명시되는 동양사상적 화(V)와 친화력의 심상이 강하게 발견된다. 다음으로는 인간의 창조력을 깊이 인식하는 서구적 시적 창작성을 발견할 수 있다. 서구적 시성에는 자연을 변화시키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지적 도전심이 강하게 가미된다. 그의 선시적 시론은 전체적으로 동양적 순응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선가적 지적 도전성과 서구적 창조성과 형이상학성을 확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동서의 양면성의 수용 속에서 그는 새로운 시 쓰기를 읽어내고 있다.
   반상합도된 제3 세계가 상호 조화되며 공히 표출되는 점은 서양 미학과 선가 미학의 공통점에 기인한다. 서양은 자아의 발견과 인간의 무한 창조력을 주창하고, 인식(지식) 자체가 미적행위의 규명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서양 미학은 예술적 철학으로 새로운 해석과 실험시를 양산한다. 선도 이와 유사하게 자아의 무한 추구를 바탕으로 인식 자체의 초월, 실상으로 당체적 접근을 강조한다. 이는 곧 언어 초월적 자기 버림의 가능성을 추구하며, 더욱 확장된 언어 초월적 사유세계를 얻어내려 한다. 더 나아가서 이는 새로운 미에 대한 탐구이며, 선시를 통한 실험시나 포스트모던적 새로운 발견 노력이 된다. 비록 이러한 사유와 시 읽기가 서구 예술론에 국한되지는 않더라도, 인간 가치의 무한성과 한계범주에서 조명될 때에는, 동서 구분을 넘어서는 동일한 유형의 사유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공통점 위에서, 그의 시적 관조가 선시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해석을 낳는다.
   송준영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전통적 동양미학 속의 시적 창조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현대시 사조를 접목하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현대시의 새로운 해석은 결국 전통 선가 및 동양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글쓰기의 모색이다. 재해석되는 기존의 시적 정의를 또 다시 새롭게 수정하고 보필하는 과정으로서 그는 선시를 재해석한다. 이렇게 그는 시를 다시 만들며 전통적 사유 예법, 시법을 통제한다. 그의 새로운 미적 탐구 노력은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이론 창출이며 미학의 확장된 사고 영역에 대한 탐험이다. 이러한 사유와 행법은 송준영의 선법사인 서옹 선사를 표제로 하는 시를 읽어봐도 알 수 있다.
    
돈을 받을 때마다 그는 ‘너는 누구냐?’하고 물었지만, 누구나 돈만 드렸지 누가 누군지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름 어느 날 장승배기 임제선원 조실, 그를 찾아뵈려 동해에서 전복 열 대 여섯 마리를 스티로폼 통에 담아 들고 들어선 적이 있었다. 이 날도 ‘너는 누구냐, 취현이 무엇이지?’하는 물음에 ‘저지요’하여도 ‘저가 누구인데?’하여서 엉겁결에 ‘통 속에 전복이지요.’하였더니, 벽력같은 소리로 ‘시자야, 빨리 이놈을 내다 죽을 쒀라’하였다. 이날 내가 가져온 전복은 죽이 되어 그도 먹고 나도 먹고 대중들의 저녁공양이 되었다.
                                                                    <서옹 선사 1>

반야심경강론 초고를 들고 그를 찾아뵈었다. 청하기도 전에 ‘선승이 무슨 글이 있나’고 하시며 한사코 거절하였다. 다급하여 ‘선승이 무슨 글이 있나’라고 만 써주시면 서문으로 싣겠다하니 웃으며 “거 놓고 가거라”하길래 훗날 찾아뵈었더니 ‘반야칼이여 부처와/조사를 처죽이고/싶어런 칼을 쓰고는/급히 갈어라/나무 까치는 날러서/하늘 밖에 사모치니/바로 천 봉오리 만/산악을 통과해 가도/다’하였다. 무슨 아방가르드 시인지 문자는 있는듯한데 학력이 짧았는지 맞춤법과 띄어쓰기, 행 가르기가 다 틀렸다.  
                                                                              <서옹 선사 2>
                                                <『습득』제6회 박인환문학상수상작품집.p19-20>

   선가의 기본 개념의 새로운 해석론자인 송준영은 이미 탈구조주의자, 해체론자가 된다. 그의 선시 읽기의 대다수는 아직 구조적 안정주의 즉 지적 전통성을 취사선택하지만, 새로운 시법 확립의 연장선에서 그는 스스로 해체적 심법을 추구한다. 그 해체성이 서양이 아니고, 중국이나 인도가 아니고, 과거의 선사가 아닌 오늘의 거사로서 한국적, 산수적(��r) 해체의 양태를 취한다. 즉 한국의 특정 지역에 살고 있는 동양인의 창조력을 해석하고 재해석한다. 여기서 송준영의 동양적 사고에 의한 창작행위가 그만의 새로운 미적 표현이 되고 인식되면서 자신의 동양적 창조력을 구체화시킨다. 그의 선시 읽기는 이러한 면에서 새로운 선시 쓰기, 재해석된 선시의 현대시적 글쓰기가 된다. 그만의 특수성으로 보편적 가치를 인식한다.
   송준영의 해체적 시적 사유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아직도 깨달음의 선적 교지의 지배력이 강하여서 예술적 자유성과 흐트러짐, 언어적 드잡이성, 서양이론적 예술론과 미학성, 등이 상대적으로 침해를 받는 점이다. 선적 사유로 달통하지 않는 게 무에 있겠는가마는 언어의 예술론이 선적 사유론과 넘어설 수 없는 양궤도성을 바라본 입장에서 두 간격을 더욱 좁힐 수 있는 시도가 더욱 첨예화되었으면 싶다. 그의 시적 사유가 최종 겨냥하는 바는 예술과 선의 접목이겠지만, 수많은 선시 연재 속에서 문헌학적 참고와 교조적 암시에서 벗어난 사유의 자유로움이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번이고 거듭 읽어보라. 그러면 자연 행간이나 저 너머에서 넘실대는 자유로움을 느낄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경직은 충실한 『선시의 세계』의 장점인 원전비교 및 문헌적 가치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6. 선시적 미래성의 해석
   송준영의 선시 읽기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선가적 의식과 수행가치는 그만이 지닌 고유 가치로 생존한다. 그의 선시 읽기가 개성적 해석이 되는 연유는 이러한 수행적 가치에 더욱 의미 있어진다. 앞으로 그의 선시를 통한 선과 시학적 접근, 선의 예술적 접목이 완성되는 날에는 더욱 커다란 시학의 수목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의 선시 읽기는 새로운 현대시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시를 시학사 한 장르에 올려놓겠다는 바램을 곳곳에서 읽게 된다.
   그가 설정 계획한 마지막 29회인「한국의 선과 선시」에서 우리나라 9산 선문의 법맥을 낱낱이 고증하여 밝히고 있으며, 또 하나 특기할 것은 송준영의 선시의 분류법이다. 그는 역사상 어쩔 수 없이 한문으로 저작된 선시를 고전선시라고 보았고, 한글로 씌어졌고, 시의 맛이 명징 단순 청량 격외 무사 표일 등의 선미를 드러내는 시를 현대선시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현대선시에서 수사법상 서구의 모더니즘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으나, 앞의 선미를 고스란히 간직한 시를 전위선시라 명명하고 분류함은 선시에 관한 우리나라 선구적인 연구 업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해가 남긴 한글 선시집이라 할 『님의 침묵』은 우리나라 현대선시의 기초가 되며 또 한글 선시를 남긴 미당거사 서정주와 조지훈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고전선시의 정통과 그 수사법을 잇고 있는 오세영과 조정권, 이성복, 이홍섭의 시를 들 수 있다. 한편으로는 서구 수사법에 의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시를 연구하고 작시한 김춘수가 있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던 간에 그의 시는 명징 청량 단순한 선미를 느끼게 하는 선시를 발표하였고, 이승훈 역시 근래에 와서는 서구적 수사법과 동양적인 선의 세계를 회통하여 전위선시(Abant garde-Zan poetry)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 세대에 속하는, 근래의 전위선시 작가로는 황지우와 송준영을 들 수 있다.  <『현대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p.531.>
 
   송준영의 시적 사유가 미래 동양 미학의 사고 성향을 모태 시킬 수 있는 사유의 종자로 더욱 담론할 수 있는 기회를 기원하며, 이러한 선시 사상을 탐구하는 사유와 노력에 더욱 발전적 정진을 앙망해본다. 필자 스스로도 오견의 망상에 젖지 않기 위해서 신견(見)을 벗어난 미학의 자아성을 추구하고, 사견(��을 넘어서는 미추(�)의 미학성을 바라보며, 견취견(見(見)에서 미학의 가치판단에 얽매여서 타가치의 품위를 고민하지 않는 미적 가치 판단이 되지 않기를 심학(�j)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