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선시 이론과 작시법 체계 세우기를 발원한 송준영 시인.
선시의 표현방법론에 관한 연구 (1) / 송준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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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오온이 텅 빈 것을 깨달아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셨다 ― 반야심경1) 1) 송취현, 《般若心經講論》, 경서원, 1993, p.35.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관자재보살이 반야의 심장인 저 언덕으로 돌아서서/깊은 반야에 들어섰을 때에/관자재 차원에서 내려다보시고/모든 물질적 현상을 오온인 물질(色), 느낌(受), 따짐(想), 의지적 충동(行), 버릇(識)으로 이루어졌으며/또한 오온 역시 모두 비었음을 분명히 아시고/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셨다.) 《반야심경》: 팔만대장경의 중심이고 대반야 600부의 강요이다. 이 《반야심경》은 일체 현상의 자성이 무자성임을 설파한다. 이것은 우리가 도출하여 사용하고자 하는 선시적 어법인 반상합도의 도식인 ‘A는 A가 아니므로 A다’하는 A=A??결정적이고 좋은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다. 일체 존재물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유전하는 사물과 삶의 자취는 시인의 인식을 초월하고 내재하며 시적 표현으로 승화된다. 시적 표현은 유전하는 사물의 표현상이다. 존재하는 만상의 존재 의미를 시인이 내면의 소리로 표현한 것이 시이다. 따라서 시는 만법의 진리를 표현하는 최상의 언어 수단이다. 사상적 진리나 종교적 깨달음도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표현이나 전달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최고 진리 발견의 수단으로 언어가 필연적 선택수단이 되며, 시가 적절한 표현방법으로 선택된다. 선적 깨달음도 예외가 아니다. 선 수행에서도 결국 최고 진리의 발견을 통하여 타자들과 자기 발견의 기쁨을 공유하려는 자기 표현의 목적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제일 명제를 인식하면 일반 시적 표현 형태가 선적 깨달음에 의한 선시의 특성을 내포하는 관계성이 포착된다. 선적 구도는 시적 특성에서도 최고 정수의 표현, 즉 절연성·간결성·명징성·초월성·당체성·무한성 등을 긴요하게 표현하려 한다. 선은 일반 종교와는 달리 시적 표현과의 관계성이 높다. 선적 깨달음의 표현에 요구되는 제반 특성, 즉 절연·간결·단아·명쾌·명징·무한·초월·본질성 등이 일반 시에서 추구하는 최고 표현성과 특성을 같이 하고 있다. 선은 종교적 구도를 추구하는 종교성이 높은 정신 수행과 그 표현의 결정체이지만, 어느 언어표현 형태보다도 시적 표현에 연관성이 많다. 즉 인간 보편의 진리와 감성에 정서적 충동과 울림을 주는 정도가 높다. 이 점에서 선시의 시적 표현 형태를 연구하여 당대의 선시 혹은 선취시(禪趣詩)의 흐름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한자 문화권의 시 일반 특성이 문체의 간결함·시적 밀도의 강화·단시·유유자적성·현실귀착성 등이라고 할 때 선시의 특성과 그 맥을 잇는 당대의 선시나 선취시는 표현 방법상 상호 밀접한 관계성이 나타난다. 즉 우리 나라 고전 선시의 맥을 잇는다고 분류되어지는 몇 시인, 특히 한용운은 전통적 선의 사상이나 선시의 표현 방법론적 특성을 많이 내재하고 있다고 본다. 또 전통 지향적 특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 관계성은 상당히 긴밀할 것이다. 그 변용 과정과 실제 변형태(變形態) 과정에 대한 연구를 선행하여야 하나, 우리의 글에서는 다만 선시적 특성인 시적 표현의 방법, 특히 깨달음이 시로 표현되는 선시의 표현 형태의 특성 중에서도 반상합도(反常合道)·초월은유(超越隱喩)·무한상징(無限實相)의 표현성에 초점을 맞추어서 선시적 특성을 추적하려 한다. 곧 많은 선시가 그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는 불교 본래의 수사적 특질을 표출하여 채집하고 그것을 근본으로 하여 선시에 표현되는 방법론을 제시한 후, 당대의 한글로 쓰여진 선시나 선취시라 일컫는 시가 고전 선시와 상호 표현되는 공통점을 찾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유구한 전통을 잇는 선시가 한글세대에 와서는 어떻게 계승 발달되는지 그 정신적 맥락과 선시에 나타난 표현 방법이 어떤 형태로 쓰이며 잔존되고 있는지 알게 한다. 또 당대 일반 시의 표현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된 것인지에 관한 비교연구의 한 초석을 마련해 줄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고유한 사상과 전통을 계승한 고전 선시가 오늘날에 이르러는 어떻게 한글로 정착되는지, 또 당대의 시가 봉착한 새로운 시적 표현의 탐구성을 선시적 표현법에서 발견하려는 관점에서 이 글을 논하고자 한다. 선시의 표현방법론의 특질과 선시적 전통의 개관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각 관련 시의 분석을 통한 고전 선시와 그 흐름을 잇는다고 보는 현대 선시류의 시적 비교 연구를 진행해 본다.2)2) 일반적으로 한자로 기록된 게송을 고전 선시라 지칭하고 한글로 쓰여진 한글 선시나 선취시를 현대 선시로 우리글에서는 갈라 부른다. 이형기는 현금의 시와 선시를 비교 검토하여 전혀 다른 토양에서 자란 두 시가 서로 만나게 되는 수사학적인 표현방법의 한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곧 선시의 한 표현방법인 반상의 합도를 A=A?遮?명쾌한 도식으로 제시하였다.3)3) 이형기, 《현대문학과 선시》, 불교문학연구회 제3차 회의 발표요지집. 고명수는 〈현대문학과 선〉이라는 발표 논문을 통하여 각종 현대문학 사상과 선을 비교하였다. 그는 선의 자유정신과 자족정신(自足精神)이 현대 사상을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4)4) 고명수, 《현대문학과 선시》, 불지사, 1992, pp.160∼177. 박찬두는 시어와 선어를 비교하면서, 선시의 비유를 동일적 초월은유(超越隱喩), 인드라망적 무한상징(無限象徵), 언어의 불완전성을 언어 자체로 극복하는 역설이라는 세 가지 비유로 분류하였다. 그는 선시의 본령이 이러한 모든 언어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보았다.5)5) 박찬두, 《현대문학과 선시》, 불지사, 1992, pp.204∼227. 김갑기는 〈선시의 국문학적 위상〉에서 선시와 고전 시가, 선시와 현금의 시를 비교 검토하였다.6) 그는 고전 시가뿐만 아니라 당대의 시에서도 선시적 특질을 발견하고, 깊은 유대성을 강조하였다. 6) 김갑기, 《현대문학과 선시》, pp.160∼177. 석지현은 선시의 유형을 제시하였으며 또 선의 표현방법을 5단계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다. 제1단계는 언어의 부정, 제2단계는 언어의 파괴, 제3단계는 언어 형성 단계에서 최초 관념인자의 제거, 제4단계는 언어의 철저한 파괴 및 그에 대응하는 창조의 쌍자적(雙者的) 제거, 제5단계는 언어의 본질적 회귀성이다. 이것은 부정의 단계인 제1∼4단계에서 직관의 단계인 제5단계까지의 선적 발전단계를 표현하는데, 5단계는 무분별과 초월정신으로 나타내고 있다.7)7) 석지현, 《선시감상사전》, 민족사, 1997, pp.84∼88. 《문학사상》 통권44, 1976, pp.231∼234. 이종찬은 선시를 선사들의 선적 체험, 선 수행의 결과 증득한 오도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한시 형식이 우리 나라 선시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선시를 교시적 유형과 선적 사유를 시화한 유형으로 나누는 한편, 교시적 유형은 시법시(示法詩)·오도시(悟道時)·염송시(拈頌詩)로, 선적 사유를 시화한 유형은 선리시(禪理詩)·선사시(禪事詩)·선취시(禪趣詩)로 각각 분류하고, 더 나아가 시론·작가론까지 체계화하고 있다.8) 8) 이종찬, 《한국의 선시(고려편)》, 이우출판사, 1985, pp.82∼112. 우리글에서는 선시와 선취시로 양분하여 부른다. 곧 선취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선시로 총칭하였다. 이승훈은 〈선과 백남준〉이나 〈선과 존 케이지〉의 논문을 통하여 서구의 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해 선적 읽기를 수행해야 하고, 또 선적 읽기를 통해서 작가의 깊이에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9)9) 이승훈, 〈禪과 백남준〉, 《시와세계》 2003년 가을호, pp.10∼24, 같은 책, 〈禪과 존 케이지 1〉, 《시와세계》 2003년 겨울호, pp.10∼25., 같은책, 〈禪과 존 케이지 2〉, 《시와세계》 2004년 봄호, pp.10∼26. 우리의 글은 선시학의 기틀을 마련한 이러한 학자들의 연구에 힘입어 선시의 표현방법을 연구하려 한다. 그 과정으로 관련 선시와 불교 본래의 수사적 특질을 채집하고, 연구 결과로 발견된 수사적 특성을 근본으로 하여 선시적 표현방법론을 제시하며, 현대 선시류와 공통되는 시적 표현법을 찾고자 한다. 아울러 선시류의 표현방법이 난해성과 절연, 기상천외한 표현으로 우리를 매혹시키며 동시에 당혹케 하는 본질적 이유도 같이 규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으로 발전 계승된 선사상과 그 표현법이 앞으로 우리 나라의 시에 어떤 형태로 남을 것인지 고찰하고, 우리 나라 전통시로서 선시의 유구한 흐름을 감지하고자 한다. 2. 선의 사상적 특질 1) 불립문자와 선
어느 날 밤에 열반에 들지만 이 두 중간에서 나는 아무 것도 말한 바가 없다. 안으로 몸소 증득한 법으로서 나는 이와 같이 말한다. 시방 부처님과 또한 나의 모든 법은 차별이 없다.10) 10) 한글대장경, 《입능가경》 제5권 〈佛心品〉, 동국역경원, p.131. 석가모니는 정각을 이루고 열반에 들기까지 45년 동안 8만4천 법문으로 지칭되는 수많은 대기 설법을 남겼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 것도 말한 바가 없다.”고 자신이 말한 바를 부정하고 있는 이 게송은 분명 언어초월 사상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 조계 선종의 소의경인 《금강경》에서는 정하여진 정상성(定相性)을 부정할 뿐 아니라 모순적 어법인 역설을 사용하여 관습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세계가 숨기고 있는 존재를 개시하고 있다.11)11) 이러한 역설법은 《금강경》 제7 無得無說分과 제8 依法出生分 등 경 도처에 나타난다. 경의 내용 중 “일체현성이 모두 무위법 가운데 차별이 있다.”에 사상적 근거가 제시된다. “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無得無說分 第七 2) 선과 간택심의 초월
이것이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12) 12) 한글대장경, 《잡아함경》 12권 〈인연경〉, 동국역경원, pp.344∼345. “나는 이제 인연법과 연생법을 말할까 한다. 무엇이 인연법인가?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것이니,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으며…… 내지 이렇게 하여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이는 것이다. 어떤 것을 연생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무명의 지어감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거나 나오지 않으시거나 확정된 법의 세계로 향상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상의성이다. 나는 이를 깨닫고 이를 완전히 이해하였다. 그래서 이를 가르치고 선포하고 설명하고 나타내고 명백히 하여 드날리는 것이다. 이른바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생을 연하여 노사(老死)가 있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아래 각주의 〈인연경〉에도 나타나듯이 상호의존적 관계에 의해 존재함을 밝히는 의존성(依存性) 원리이다. 각주의 〈인연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생을 연하여 노사가 있다’라 하신 연기의 구체적인 예와 또 하나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상호의존하는 상의성(相依性)의 표현이다. 연기란 ‘말미암아 일어난다’이니 조건으로 말미암아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곧 일체의 존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 생겼고, 그것을 다시 바꾸어 생각하면 일체의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조건이 없어질 때 저절로 없어진다는 것이며, 따라서 독립독존하는 불변하는 것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이다. 《아함경》에서 석가모니는 이를 상의성이라 했고,13) 우리가 보통 인과라 표현하여 온 상호관계성이다. 더 나아가선 이 책을 만드는 인쇄소, 그 안에서 땀 흘린 많은 기술자, 또 이 책을 읽는 수많은 독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외에 더 깊이 생각해보면 책을 읽고 책에서 퍼져 나오는 독서향(讀書香) 등 중중무진법계(重重無盡法界)가 펼쳐짐을 상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시한 이 몇 가지 관계 지어진 것 가운데 한 가지만 빠져도 이 책은 정상적인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이 명백하다. 이렇게 모든 사물은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수많은 요인들과 조건지어진 복합적인 상호의존 관계가 빚어낸 결과라고 보는 것이 연기설의 핵심이다. 이 경우 책을 책으로 만든 사물의 상호의존 관계는 물론 가변성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다른 원인과 다른 조건이 관계되어지면 관계 자체와 또 그 관계의 결과가 아울러 변화될 가능성이 언제나 수반하고 있다. 가령 이 책이 독자에 따라 많은 다른 결과가 빚어지게 되며, 또 이 책장 몇 갈피는 인화성 물질에 의해 대화재를 낼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책은 결코 책으로만 고정되어 있는 사물이라 할 수 없다. 이렇게 관계 지어진 일체 사물은 언제 무엇으로 변할지 모르는 가변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모든 사물의 존재 양태이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여, 불교에는 일체 존재물의 무자성(無自性), 곧 그 고유한 본체를 부정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 책이 되기도 하고 불쏘시개, 재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도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일체 삶은 모든 것이 각각 고유한 자성을 가졌다는 인식 위에 영위되고 있다. 그러나 그 현상들은 사물의 고유한 본질은 아니다. 일체의 존재물,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는’ 상호의존적 존재들이라면, 어떠한 것도 고유한 자성을 가질 리가 없다. 그래서 앞장에서 본 것과 같이 《금강경》에서는 “모든 깨달은 현인과 성인은 상대의 세계를 훌륭한 무위의 절대법으로 차별을 두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고유한 자성이 명백히 없다는 것이 성립될 때 우리는 일체의 존재물을 차별하여 인식할 필요가 없다. 가령 앞에 예를 든 책이 반드시 책으로 인식될 필요가 없으며, 된장 속에서 나온 구더기가 더럽게 인식될 까닭이 없다. 이럴 때 우리는, ‘A는 A다’라는, 우리의 고정된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논리적으로 모순된 명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관습화되고 합리화된 감각적 지각과는 정면으로 어긋나는 이러한 사태 앞에서 캄캄해짐을 느끼게 된다. 불교의 공도리14)는 이러한 난제를 명쾌하게 박살내 버린다. 앞장에서 살펴 본 《잡아함경》의 〈인연경〉에서와 같이 모든 존재물은 고유한 자성이 없다는 연기설의 상호의존설을 전제로 할 때, 일체의 존재물은 ‘존재물이 아닌 존재물일 뿐’이다. 곧 ‘책은 책 아닌 책’으로 거짓 존재할 수밖에 없다. 선에서는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한다. 진짜로는 공이지만 절묘하게 현상으로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공도리는 이 기묘한 책을 ‘공으로서의 책’이라 말한다. 14) 공도리(空道理) : 공의 도리. 공사상의 근본. 공을 현현시키는 이치. 교학에는 석가의 최고 상승법문인 반야 600부를 49년 설법기간 중 21년간을 설하였는데, 이것이 공도리 법문이다. 《반야심경》의 유명한 구절 ‘색즉시공(色卽是空)’은 이러함을 명약관화하게 설파하고 있다. 현상적으로 뭐라 불리든 일체의 존재물은 자성이 없는 공으로서의 존재일 뿐이다. A도 공, B도 공, C도, D도,…… 그러나 모든 것이 공일 때, 불교에서는 또한 공이 절대의 무기인 양하는 전지전능을 경계하고 공과 다른 것에 관해 분별심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공역부공(空亦復空)’15) 이라고도 말한다. 15) 나가르쥬나, 황산덕 역, 《中論頌》, 서문당, 1976, pp.185∼186.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는 것은 없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空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다. 그리고 인연으로 생겨난 것을 우리는 공하다고 말한다(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왜냐하면, 중연(衆緣)이 갖추어지고 화합하면 물건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물건은 중인연에 속하므로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다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공도 또한 (공으로서의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하다(空亦復空). 다만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가명(假名)을 가지고 설할 뿐이다. 여기서 있다든가 없다든가는 통하지 않고, 유(有)와 무(無) 양변(兩邊)을 모두 떠나 있으므로 중도(中道)라고 부를 수가 있다. 모든 존재는 자성이 없으므로 있다(有)고 할 수 없다. 또한 반면에 공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니 없다(無)라고도 할 수 없다 .만일 존재의 자성 모양이 있다면, 중연을 기다릴 필요가 없이 그것은 처음부터 있다(有)일 것이다. 그러나 중연 없이는 어떠한 존재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고 말하게 된다. 이상은 공가중(空假中)의 원리가 숨어 있는, 중국의 천태종의 성립의 기반이 되는 시구이다. 또 《반야심경》은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표현으로 공이 곧 현상, 본질이 바로 현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일체의 현상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허망한 망상이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할 원리가 공이라고 하여 너무 공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이를 선문에서는 여러 가지 화두16)로 경책하고 있다. 16) 한글대장경, 《경덕전등록》 10권, 동국역경원, 1978. 조주종심, 《조주록》 선림고경총서, 장경각, pp.73∼74.이 공도리를 박살내는 채로서 화두(話頭)라 불리는 제일 명제가 역사상 약 1700가지나 있다. 간화선계(看話禪系)의 선종에서는 이 화두에 의지하여 공을 보고 공에 미혹되지 않는 공부를 해나간다. 어떤 학인이 조주화상에게 물었다. “만법이 한 곳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선사는 아래와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에 일곱 근 나가는 무명옷을 지었다.” (問 萬法歸一 一歸何處 師云 我在靑州作一領布衫 重七斤) 나가르쥬나도 그의 저서 《중론》에서 “공이 있음에 사로잡힌 자는 구제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 실로 공은 자기 부정인 동시에 자기 초월인 것이다. 이 공이야말로 차별이 없는 절대 평등의 세계, 대자유의 세계다. 그것은 ‘이것’이고 동시에 ‘저것’이기도 한 세계, 다시 말하면 책이면서도 연필이기도 한 세계, 돌여자가 아이를 낳고, 얼음소가 불 속을 달리며, 앞집 김서방이고 뒷집 이서방이며, 경포대 난간에서 그린 소주를 마시면 LA의 리챠드 박이 취하는 세계이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두 세계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인식된다. 이는, 곧 A=A??표현되는 세계이다. 위에서 살펴본 《잡아함경》 《반야심경》 《금강경》 《중론》에서 볼 수 있듯이, 공도리에서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의 종지(宗旨)가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 공의 설파야말로 불교의 최고 진리를 헤아릴 수 있는 첩경이다. 3) 선시의 실증적 모형
쇠나무에 핀 꽃 밝음을 자랑한다 진흙소 큰 울음으로 바다 속 들고 바람에 우는 나무말 길을 메운 그 소리 ― 허백 명조18) 18) 이종찬, 《韓國佛家詩文學史論》, 불광출판부, 1993, p.433. 虛白 明照(1593∼1661), 병자호란시 수군 4000을 거느린 의병승장. 《虛白堂集》이 있다. (焰裡寒霜凝結滯 花開鐵樹映輝明 泥牛哮吼海中走 木馬嘶風滿道聲) 이 시는 1행부터 정상이 아닌 기이한 사물과 상호 충돌적인 이미지를 등장시켜 우리를 황당하게 한다. “뙤약볕 속 서리”와 “쇠나무에 핀 꽃”이 그것이다. 3행에 나오는 “진흙소 큰 울음” 울고, “진흙소가 바다에 든다”나 마지막 행의, “바람에 우는 나무말”의 등가물인 “길을 메운 그 소리” 역시 우리를 황당무계한 속으로 밀어 넣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충격적 당황감은 우리가 현실적인 기본 질서나 정상으로 인정하는 기본 바탕을 이 시가 고의적으로 깨어 버리는 데서 기인한다. ‘불 속에 핀 연꽃’이나 ‘돌로 만든 구름’과 같은 것들은 존재의 정상적인 양태를 벗어나 있으며 현실적인 분별상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앞장에서 보았듯이, 선의 기반이 되는 공도리는 차별적 인식을 거부한다. 일체가 회감하는 공도리는 마치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양자장(量子場)19)과 같다. 그것은 공이라고 이해되는 ‘빔’이 빈 것이 아니며, 가득 찬 것 같은 ‘장’이 일정한 터(시, 공간)가 아니라 빈 공의 장소일 수도 있다는 모순적, 상호 보완적 성격을 말해준다. 이것은 모순어법을 통한 선의 모순적 진리 표현법인 반상합도의 표현법과 다르지 않다.19) F. 카프라, 이성범·김유정 공역,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범양사, p.249. 아인슈타인의 중력장이론과 양자장이론은 둘 다 소립자들이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한편 그것들은 그 공간의 구조를 결정하는 반면에 독립된 실체로서 여겨질 수 없고, 전 공간에 미만해 있는 연속적인 장(場)의 응결로서 이해해야 한다. 양자장이론에서 이러한 장은 모든 소립자들과 그것들 서로의 상호 작용의 바탕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장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것은 결코 제거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물질적 현상의 수레이다. 그것은 그것으로부터 양성자가 파이 중간자들을 생기게 하는 〈허공(虛空)〉이다. 소립자들의 나타남과 사라짐은 단지 장의 운동형태에 불과하다. 우리는 무생물로 만들어진 진흙소나 나무말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울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길들어져 있다. 위의 “쇠나무에 핀 꽃”은 정상적으로 있을 수 없는 사물이며, A=A라는 정상논리로는 의미를 해독할 수 없다. 결국 차별에 의한 고정관념을 정상이라 생각하는 인식의 틀로서는 위의 시가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시구는 ‘A는 A가 아니므로 A다’는 등식으로 이해해야 비로소 해석이 가능해진다. ‘이것’과 ‘저것’이 없는 공이므로, ‘이것’과 ‘저것’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선시는 우리에게 정상이라는 기준치가 정말로 정상인가 되묻게 해준다. 공의 세계는 정상이 비정상이고 비정상이 정상인 세계, 정상과 비정상이 융합하여 서로 회통되는 세계다. 이것이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통일장의 세계이다. 신라의 의상은 화엄 대의를 간추린 노래 〈법성게〉에서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있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있다./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라고 노래한다.20) 이것은 여럿의 물질적 현상(色)이 하나로 모이고 그 본질(空)이 여럿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세계이다. 20)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법성게〉는 의상이 지은 《화엄경》의 대의를 게송으로 만든 것이다. 총 30구인데 인용한 것은 제7구와 8구이다. 여기서 일은 본질이고 일체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A와 A?가차별상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A가 곧 A일 뿐만 아니라 A가 아닌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등식으로 표현하면 A=A??등식이 된다. 모든 사물들은 이러한 양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공이며 그래서 불이세계(不二世界)라 한다.21)21) 송준영, 〈선시의 향기〉, 월간 《현대시》 2004년 4월호 p.166 참조. 불경 전반에 이런 반상합도의 삼단계 표현법이 깔려 있다. 이 말씀들은 중도를 현현하기 위한 표현들이다. * <반야심경》 “色性是空 空性是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色不異空 空不異色”이 원문인데 현장이 한역할 때, 본래적인 입장인 1단계를 고의적으로 누락시켰다고 본다. 첫 단계는 ‘원래’의 일상 단계이기 때문이다. *《중론》에 근거하여 천태종에서는 공(空)·가(假)·중(中)의 삼제(三諦)를 세움. 이 삼제의 전개는 무자성(無自性), 공의 변증법적인 논리 구현인 통일논리를 밝힘.* 《열반경》에는 불성은 ‘有無 非有非無 亦有亦無 有無合故 名曰中道’란 말씀이 있다. * 근래 성철 선사의 ‘山是山 水是水 山是水 水是山 山亦是山 水亦是水’란 법어가 있다. [정리] 선의 그 언어 표현인 선시는 문자를 차용하되 그 도리만 나타내기 위해 특이한 표현방법론을 사용한다. 언어 초월이라는 선의 본질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는 언어 양식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선의 도리를 나타내기 위해 선시는 정상적인 문법을 벗어난 어법, 즉 A=A??등식으로 표현하게 된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논리성을 완전히 무시한 표현방법론, 즉 역설적인 반상합도의 표현법이 사용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뙤약볕 속 서리” “쇠나무에 핀 꽃” “진흙소 울음”이나 “나무말의 울음”은 그 단적인 예다. 이러한 언어 표현은 언어의 문법을 고의적으로 파괴했다고 말할 수 있는 표현법이다. 4) 선시의 모순적 어법 ① 선시의 반상합도
나무사람은 조용히 머리를 끄덕인다 곤륜족이 쇠말을 타고 허공이 금채찍을 친다 ― 백운 경한23) 23) 이종찬, 《韓國佛家詩文學史論》, 불광출판부, 1993, p.190. 김달진, 《韓國禪詩》, 열화당, 1985, p.112. 白雲 景閑(1299∼1375), 고려 선승. 《백운화상어록》이 있다. (石女忽生兒 木人暗點頭 崑崙騎鐵馬 舜若着金鞭) 물 위에 진흙소가 달빛을 밭간다 구름 속 나무말이 풍광을 고른다 위음의 옛곡조 허공 속 저 뼉다귀라 외로운 학의 소리 하나 하늘밖에 길게 간다 ― 소요 태능24) 24) 석지현, 《禪詩》,현암사, 1975, p.42. 逍遙 太能(1562∼1649), 조선의 선승. 《소요당집》이 있다. (水上泥牛耕月色 雲中木馬製風光 威音古調虛空骨 孤鶴一聲天外長) 반야검이여 부처와 조사를 쳐죽이고 시퍼런 칼을 쓰면 급히 갈아라 나무까치는 비상하여 하늘 밖 사무치니 바로 천봉만악을 뚫고 가도다 ― 서옹 상순25) 25) 송취현, 《반야심경강론》, 앞의 책, p.11. 西翁 尙純(1912∼2003), 조계종 5대 종정 지냄.(般若劍兮殺佛祖 吹毛用了急須磨 木鵲飛翔徹天外 直透千峯萬嶽去) 고려의 백운(白雲) 화상, 조선의 소요(逍遙) 선사, 현금의 서옹(西翁) 선사는 모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일급선사들이다. 위의 시 4수는 모두 이해가 거의 되지 않는 기이한 표현들로 우리를 혼비백산하게 만들고 있다. 소요 선사의 게송에 종문곡(宗門曲)이라 제목이 붙어 있다. 선종의 본지를 노래한다는 뜻이다. 이 게송에서도 ‘달빛을 밭가는 물 위의 진흙소’, ‘풍광을 고르는 나무말’, ‘허공의 뼉다귀인 옛 곡조’라는 표현들이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당대의 우리 나라 거선(巨禪)인 서옹 선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지혜의 칼이 부처와 조사를 쳐죽이고, 나무까치가 하늘 밖을 뚫고 나가며, 천봉만악마저 직투(直透)할 수 있단 말인가? 시대 순으로 표집된 3수의 게송에서 석녀(石女)나 목인(木人), 철우(鐵牛), 허공의 금편(金鞭), 니우(泥牛), 목마(木馬), 옛 곡조의 등가물인 뼈, 지혜가 불조(佛祖)를 죽임, 목작(木鵲), 천봉만악을 뚫고 가는 나무까치 등의 표현은 우리의 기존 질서인 관습화된 합리성을 완전히 전도한다. 우리를 엄습하는 황당함과 곤혹감은 현실을 기준으로 하는 사물의 존재 양태를 배반하고 있는 데서 생기는 절연과 당혹감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들은 ‘돌로 된 구름’이나 ‘불 속에 핀 얼음꽃’과 같이 일상에서는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있을 수 없는 사물이다. 그럼 선시에서는 왜 이런 황당한 표현들을 만들어 내어서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차별하여 간택하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마음이 있을 때는 우리는 그러한 분별이 정상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의식 밑바닥에서 이미 판가름이 된 상태에서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광활한 공의 세계, 틈이라고는 없는 밀밀한 세계는 애당초부터 시비의 양견해가 붙을래야 붙을 자리가 없는 세계이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들을 이원론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을 정상으로 규정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근래 일본의 선사인 스즈키는 “선에 대하여 무엇인가 서술하려 한다면 언제나 역설적인 문자를 쓰게 된다.”27)고 말한다. 그는 극단적인 모순을 보이면서 불합리성을 통해 공 속으로 밀어 넣는 모순어법을 자유롭게 구사한 역설 공안들을 찬탄하며 그것들을 선의 이해에 제일 명제로 삼고 있다.27) 스즈키 다이세쓰, 동봉 역, 《선의 진수》, 고려원, 1987, p.13. 어떤 중이 물었다. 진리란 무엇이냐는 질의에 ‘마 서 근’이라는 황당한 대답을 하고 있다.28)28) 《선문염송》 27권, 1230칙. 이것은 ‘이것’인가 ‘저것’인가에 대한 시(是)와 비(非)의 양변에 대한 이원적 가치의 대답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이원적인 차별상을 벗을 때, 부처란 부처가 아니므로 부처란 말이 성립된다. 곧 ‘A는 A가 아니므로 A이니까’ A=A?罐?잡힐 수 있는 대답들, A=B, A=C, A=D……일 수 있다. 이러한 표현법이야말로 선시에서 특장으로 나타나는 반상합도이다. 그 대답은 우리의 차별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고 있다. 이 공안에 대해 읊은 우리 나라의 선사의 게송을 하나 음미해 보자.
쇠파리 반딧불 따위 접근을 금하나니 철마가 물 밟으며 말굽 젖지 않음이여 여긴 깊다 여긴 옅다 사사로움 못 붙인다 ― 청매 인오29) 29) 이종찬, 위의 책, p.338. 靑梅 印悟(1548∼1623), 조선 선승, 서산의 고제, 《청매집》이 있다. (三斤麻重太山輕 不許蒼蠅犯小星 鐵馬渡江蹄不濕 淺深無處納人情) 청매 인오의 게송은 1행과 3행을 모순어법으로 된 표현법을 사용함으로써 감동을 더해 주고 있다. ‘마 서 근’이나 ‘철마’와 같은 상징적 이미지가 역설적 상황에서 우리들로 하여금 심연으로 이끄는 강한 느낌을 받게 한다. 태산보다 무거운 서 근의 마(麻)와 발굽이 물에 젖지 않는 철마(鐵馬)는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비유하고 상징함과 동시에, 공이 다시 공한 가운데서 쑥 빠져나온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 곧 공도리 반조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온 것이다. 또한 이 게송은 쇠파리나 반딧불과 같은 하잘것없는 지혜와 깊다 옅다 하는 사사로운 분별로 고정된 덮개를 씌우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초월은유란 이질적인 두 사물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비유, 곧 “비동일성에서 동일성을 발견하려는 비유다.31) 즉 A=A?遮?도식에서, 이 두 세계를 동시에 포함하면서도 내적 속성을 초월하는 경지를 표현하는 비유를 초월은유라고 한다. 이승훈은 그의 《시론》에서 “현대시의 경우 모두 본질적으로 은유를 지향하는데, 근본적 형식 A is B(A=B)로 나타내고, 오늘날 많은 이론가들이 관심을 표명하는 다른 형식, 곧 병치은유의 도식 A-B를 첨가하여, 크게는 동일성(identity) 형식과 병치(juxtaposition) 형식으로 양분된다.”32)고 적고 있다. 여기에서 병치은유는 비동일성 은유를 말한다.31) 김준오, 《시론》, 문장사, 1986, p.120.32) 이승훈, 《詩論》, 고려원, 1979, p.134. 비유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은유인데, 휠 라이트(P. Wheel-wright)는 위에서 말한 동일성 원리에 입각한 은유를 치환은유, 비동일성에 입각한 은유를 병치은유로 설명하고 있다. 치환은유는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보다 구체적인 것으로 옮기는 의미론적 이동을 말하며, 병치은유는 상호 모방적인 인자가 없이 독립적으로, 또는 여러 사물이 병치되어 있음을 말한다.33)33) 이승훈, 위의 책, pp.139∼145. 선시에서는 치환은유보다 병치은유가 많이 발견되는데, 보다 뛰어난 선시들은 초월은유를 선호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A=A 혹은 A=B라는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논리로는 나타낼 수 없는 공도리에 의한 선사상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초월은유는 동일성의 치환은유와 비동일성의 병치은유, 곧 양변의 견해를 모두 벗어나는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초월은유의 도식은 ‘A는 A가 아니므로 A다’라는 A=A?慕?표시된다. 여기서 초월은유도 반상합도의 어법의 등식과 일치된다. 이것은 곧 모순적 어법을 바탕으로 선사상에서 말하는 양변을 융합하면서 동시에 초월하는 비유상태를 의미한다.
a. 동산 : 마 삼 근(麻三斤) b. 조주 : 뜰 앞의 잣나무 c. 운문 : 해 속의 산을 본다 d. 향림 : 오래 앉아 있으니 피곤하구나 e. 대매 : 조사에는 뜻이 없다 f. 임제 : 선상에서 내려와 묻는 자에게 빰을 때리고 확 떠밀다34) 34) 한글대장경, 《선문염송》 160·161·162·163·164권, 동국역경원, 1978. 《경덕전등록》 181·182권, 동국역경원, 1978. ‘불법의 적적대의(佛法的的大意)는 무엇인가’, ‘부처란 무엇인가’, 혹은 ‘부모에게 태어나기 전의 너의 참 얼굴은 무엇인가’는 모두 ‘진리란 무엇입니까?’하는 질의와 같다. 이 질문에 대해, a와 b의 선사는 치환은유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c, d, e, f의 선사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병치은유이고, 내적으로는 그 병치은유마저 거부하는 선문답을 하고 있다. f의 임제는 언술마저 거두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임제의 이런 행위는 우리를 바로 공도리 심층 속으로 데리고 간다. 임제의 행위는 상기 5개 은유와는 다른 선적 표현이다. 이런 행위는 언어가 음성화하기 전에 표현된 선기이다. 음성을 통해 나타난 언어만이 언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의식 속에 떠 오른 사물의 관념도 언어에 속한다. 임제의 선적 행위는 일체를 초월한 직지인심을 나타낸 표현방법이다. 예문에서 c, d, e 경우는 a, b, f의 경우와는 다른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마 삼 근’이나 ‘뜰 앞의 잣나무’처럼 치환은유도 아니고, 임제의 행위처럼 직접적이지도 않지만, 완전히 질문의 의도와는 격리된 대답이다. 곧 외형적으로는 서로 다른 이미지가 병치되지만, 내적으로는 서로 의미가 절연되는 수사법을 보인다. 그러나 ‘해 속의 산을 보듯이’ 질문과 대답 자체를 초월하여 새로운 경지를 제시하는 비유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 행위 자체를 초월하는 선문답적인 은유를 초월은유라고 한다. 실제로 막막한 절연감에서 새로 돋아나는 궁구심이 초월은유를 탄생시킨다.
소나무는 늙은 용의 비늘 구름에 막힌 개 짓는 소리 복사꽃 동네 사람들 ― 청허 휴정35) 35) 이종찬, 앞의 책, pp.279∼280. 淸虛 休靜(1520∼1604), 조선 선승, 서산대사. 《선가귀감》 《청허당집》(8권) 등이 있다. (泥爲靑石隨 松作老龍鱗 犬吠白雲隔 桃花洞裡人) 금사자(金獅子), 오음굴 여기 쪼그리고 앉아있다 그러나 그 몸에 한 조각 수경(水鏡)이 모공(毛孔)으로부터 빛 쏟아 일천강에 달빛이라 ― 만경 영안36) 36) 석지현, 위의 책, p.521. 萬鏡 映眼(생몰연대미상), 《曾谷集》에 실린 인연으로 보아 일제시대로 추측.(曾谷眞影贊 徐?金毛獅子 如何五陰窟內屈膝 雖然箇中應有一片水鏡 光明直射毛孔中出 落在千江) 위의 2수의 게송은 문자로 표현하였으나 언어도단(言語道斷)이 되고 이언절려(離言絶慮)가 됨은 앞에서 살펴보았던 시편들과 마찬가지다. 이 게송들은 위에서 살폈던 외형상으로는 치환은유이다. 그래서 비동일성(非同一性)의 병치은유적 수사학으로는 잣대가 맞지 않다. 현실적으로 존재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승 발전될 이런 시의 수사법을 일단 반동일성(反同一性)의 초월은유37)라고 명칭한다. 37) 박찬두, 앞의 책, p.259. 처음 인용한 시는 〈화개동(花開洞)〉이라는 제목이 붙은 서산 대사의 게송이다. 1행에선 진흙이 돌에 묻어 있어 흙은 살로, 돌은 뼈로 이해된다. 이와 반대로 흙은 뼈로 돌은 살로 치환된다. 일상 논리에 역행한 의미상 모순어법이다. 그러나 암벽을 휘덮고 있는 흙, 그 속에 흙이 뼈처럼 가렸다. 흙이 돌의 뼈가 되었다. 보는 시점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이다. 이것이 반상의 합도인 공도리이다. 비논리의 논리라 할까. 늙은 용 같은 소나무, 늙은 용과 소나무를 병치하여 새로운 합도의 세계를 드러낸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소나무를 보는 순간, 용의 비늘로 표현된 오랜 세월을 느끼게 된다. 선사는 찰나를 보이면서 영겁의 세월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다. 개 짖는 소리에 인가가 있을 듯도 한데 흰 구름에 막힘은 역시 반상합도의 모순어법에 의해 얻어진 세계로, 초월은유다. 4행, 결구에 가서는 꽃과 사람이 병치은유로 놓여 있다. 그 가운데도 복사꽃은 움직이지 않고 사람은 움직이니, 정중동(靜中動)이다. 그야말로 꽃인지 사람인지, 유정 무정이 공 가운데로 모셔졌다. 바로 A=A??세계다. 우리의 사유는 보통 동일성(同一性)과 비동일성(非同一性)의 양변을 내포하는데, 이 모순성을 뛰어넘은 고도의 선사상이 초월은유로 나타난다. 만경 화상의 게송은 〈증곡진영찬(曾谷眞影贊)〉이라는 제목이 붙은 찬시이다. ‘금사자가 오음굴38)에 갇혀 있는데, 그 오음굴엔 한 조각의 빛나는 거울 쪽이 있어 빛을 내뿜으니 곧 천강에 비치는 달빛이 아닌가’로 풀이된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공도리에 비취어 보면 ‘금사자가 즉 오음굴이고 오음굴 역시 한 조각 거울’이다. 또 ‘일천강의 달빛은 금사자이다.’ 이것은 동일성, 비동일성의 은유를 사량분별하는 양변 견해를 초월한 불이(不二)에서 쏟아져 나오는 선사들의 언설이다. 선시는 바로 ‘A는 A가 아니므로 A이다’라는 세계이니, A는 B이고 C이며 또 동시에 D, E……Z…… 끝없는 무한의 인드라망적인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의 세계이다. 38) 오음(五陰) : 오온(五蘊)이라 하며, 일체의 존재와 비존재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으로 되어 있다는 구성요소를 통틀어 오음이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초월은유는 A와 A? 즉 긍정과 부정의 양변을 모두 초월하면서 동시에 같이 내포하는 반상합도적 표현법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반상합도의 등식과 궤를 같이 한다. 이 또한 A=A??등식을 갖는다. ③ 선시의 무한상징 불교와 노장사상에서 자라난 선의 입장에서는 이 서구의 상징이란 단어에서 ‘색’이나 ‘가상(假象)’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 색이나 가상이란 말은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일체의 물질을 뜻한다. 이것은 공, 실상, 본체, 본성과 상대적 의미를 지니는 용어다. 서구의 상징은 물질적 현상을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암호의 숲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상징이란 말은 불교에서 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인 사유법, 또 ‘공(空)·가(假)·중(中)이 서로 벗어남이 없다’39)는 선적 사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39) 나가르쥬나, 각주 17)에 예시함. 선, 즉 공도리는 본질과 물질적 현상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선사들의 비유와 상징은 이들을 초월하는 방편으로 사용한다. 선사들의 시는 단순히 선시를 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중생들에게 진리를 현현시켜 깨우쳐 주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잡아함경》에 나오는 ‘뗏목으로 강을 건너고는 뗏목을 요긴하다는 생각으로 땅에서도 메고’ 다니는 어리석음과 《장자》에서 보이는 ‘고기를 잡으면 그물을 잊는다’는 사상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장은 긴요하게 사용한 후, 상징에 남아 있는 고리를 단절함으로써 ‘옳다/그르다’하는 분별 간택심을 놓아버리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선사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불립문자이며 직지인심이다. 선시에선 단어, 시구 혹은 게송 자체가 낱낱이 암시적 상징으로 형성된다. 즉 선시어의 암시성, 상징성이 일반 시보다 연결성, 밀도 면에서 훨씬 복잡하다. 복잡한 인드라망처럼 상징의 굴레가 복잡하기에 무한상징이라고 칭한다. 상징의 외연이 너무나 광범위하기에 상징적 의미를 한정할 수 없다. 이러한 무한정의 상징성이 모순적 어법과 궤를 같이하며, 반상합도의 A=A??등식을 보여준다.
바위 앞의 돌호랑이 아기 안고 졸고 있다 쇠로 만든 독사가 금강눈을 뚫고 든다 곤륜족 깜둥이가 코끼리 타고 해오라기 이끈다 ― 고봉 원묘40)40) 이지관, 《四集私記》 〈禪要, 示衆5〉, 해인총림, 1968, p.328. (海底泥牛含月走 巖前石虎抱兒眠 鐵蛇鑽入金剛眼 崑崙騎象鷺뺀牽) 바다 밑 제비집에는 사슴이 알을 품고 불 속 거미집에는 고기가 차 달인다 우리 집 이 소식을 뉘라서 알랴 구름은 서쪽으로 날고 달은 동쪽으로 달린다 ― 효봉 원명41) 41) 김달진, 앞의 책, p.188. 曉峰 元明(1888∼1966), 우리 나라 현대 선승,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어록》이 있다. (海底燕巢鹿抱卵 火中蛛室魚煎茶 此家消息誰能識 白雲西飛月東走) 앞 게송의 고봉 선사는 중국 송대의 선승으로 《선요》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우리들의 일상적인 상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절연감을 느낀다. ‘진흙소‘, ‘돌호랑이’가 진리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해도, ‘진흙소가 바다 속에서 달을 물고 달아나고, 돌호랑이가 아기를 안고 졸고 있다든지, 쇠뱀이 금강눈을 뚫고 든다든지, 티벳 지역의 흑인종족인 깜둥이가 해오라기를 끈다’는 상징적 이미지는 가히 광란자의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고찰한 선의 공도리 입장에서 비추어보면, 선의 쓰임을 무한계, 무차별, 무작정으로 그린 무한상징으로밖에 볼 수 없다. 선이 그렇고 우리의 본성이 그렇고 일체 두두물물(頭頭物物)의 자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선에선 무자성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서구의 쉬르레알리즘과 같이 자동기술에 의해 무작위로 쓰여진 것은 아니다. 분명 ‘깨달은 자’의 명료함에서 흘러나온 노래이다. 다음 게송은 우리 나라 조계종 통합 종단의 초대 종정을 지낸 선승의 오도송이다. “바다 밑 제비집에는 사슴이 알을 품고/불 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인다.”는 앞의 고봉의 게송과 같은 상징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서구 개념의 상징이란 “유추적으로 가시 세계, 곧 물질세계가 연상의 힘에 의하여 불가시 세계, 곧 정신세계와 일치하게 되는 표현 양식”이며 “상징은 은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42)고 정의한다. 42) 이승훈, 위의 책, pp.151∼153. 그러나 선사들은 상징을 써서 어떤 결정된 정상(定相)의 관습적인 관념의 견고한 껍데기를 박살낸다. 정상의 고정 관념을 깨뜨린 세계는 언어와 언어가 맞닿는 세계이며, 사물과 사물이 서로 조응하는 세계를 말한다. 이러한 상징 세계를 표현하는 어법, 모순적 어법을 무한상징이라고 정의한다. (계속) | ||
송준영 | ||
1947년 경북 영주 출생. 법명 취현(醉玄). 당호 월조(越祖). 1995년 《월간문학》 시 등단. 선문에 든 이후 동암, 탄허, 고송, 성철, 서옹 등 제 조사를 참문함. 서옹 선사에게 7년간 7차례 서래밀지(西來密旨)를 묻고 수법건당(受法建幢)하다. 시집으로 《눈 속에 핀 하늘 보았니》와 논저 《반야심경강론》 《표현방법론으로 본 선시연구》가 있고, 현재 월간 《현대시》에 〈선시의 향기〉를 연재 중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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