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의 세계

―송준영 현대 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 이 만 식(시인 . 경원대 교

자크라캉 2007. 8. 29. 18:15



시의 현대성
―송준영 『현대 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


                                                   이 만 식(시인 . 경원대 교수)


1. 선불교 법통의 승계.
 
가. 인문학의 위기와 선불교 연구.

    2006년 9월 26일 인문학 부흥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인문학 주간’ 행사가 학술진흥재단과 전국인문대학장단의 주최 하에 열렸는데, 전국 80여개 대학교 인문대학장들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처하자는 주장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신승환 가톨릭대 교수는 “인문학은 본성상 현재를 위기로 인식하고 그 위기를 성찰하는 학문”이라고 전제하면서 “이러한 위기 선언이 동감을 얻지 못하는 까닭은 그 선언이 일면적이며 위기의 원인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으며, 극복 방안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경향신문》 10월 12일자). 여러 해 전 ‘문학의 위기’라는 주장에 대해 내가 「!Xダ�반시론」으로 반박한 바 있는데, 마찬가지 맥락에서 현재 크게 강조되는 인문학의 위기도 관습적으로 인정되어온 분야에서만 크게 느껴질 뿐, 어찌 보면 새로운 형태의 인문학이 태동하고 있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몸이 되는 언어인 힙합 음악, 언어가 되는 몸인 비보이의 브레이크 댄스 등은 기존 인문학의 연구 분야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무협소설에 관한 평론을 썼던 아직도 그리운 평론가 김현의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온라인 세상에서는 ‘몽골리안포스’라는 이름의 바람정령마법사로 이름을 날리는 세계 정상급 게이머로써 소설가 이인화가 속해 있는 디지털 세상에서는 현재까지의 인문학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공동체의 권력 구조가 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선불교도 관습적으로 인정되어온 인문학의 대표적인 분야일 것인데, 인문주간 학술제에서 “참선이 뭐냐는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한 시간도 참선을 안 해봤다”(《중앙일보》 9월 27일자)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송준영의 589쪽짜리 대작 『현대 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푸른사상, 2006년)는 바로 그런 지적에 대한 훌륭한 대답이다. 송준영은 1965년 선문에 든 이후 30여년간 동암성수, 탄허택성, 퇴옹성철, 고송종협, 서옹상순 등 제조사를 참문하였고 서옹선사에게 7년간 일곱 차례 서래밀지(6 
�를 묻고 수법건당(���)하였기 때문이다.
   『선시의 세계』의 서평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작업이다. 선의 세계는 지식뿐만 아니라 체험이 먼저 요구되는 분야이기에 아는 사람만이 아는 소리를 할 수 있다. 1998년 8월 백양사에서 개최된 한국선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참사람 수행결사에 동참함으로서 알게 된 선의 세계에 있어서 실제 수련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송준영이 선시 해석자의 자격에 대해 “선시는 말과 생각이 끊어지고( �3 �O) 마음의 길이 멸해지는(��o€) 곳에서부터 전개되는 까닭에 선시의 번역은 해박한 지식을 뛰어넘어 그 보따리를 벗어놓은 사람, 선의 일미를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의 몫입니다”(17-8쪽)라고 말할 때, 그는 『선시의 세계』를 읽는 작업이 독자의 선적 깨달음의 깊이를 자신과 견주는 작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선승(;8)이 아닌 송준영의 강점은 일반적인 선승(;8)과 달리 자신이 체험적으로 도달한 선의 세계를 지식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불교 시 연구의 범주에서 교시(�X)를 배제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제시한다. “선시가 생명 그 자체를 움직이는 그대로 포착하려고 하는데 비해, 교시는 움직임의 흔적을 지적으로 추상화하여 일반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라 생각 듭니다. 곧 선시는 생명의 최고를 구체적인 것 실체적인 것 가운데 구현하려고 하고, 교시는 그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 상대적으로 대상화하여 눈앞의 세계를 고착화하려고 애쓰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집단화된 종교의 정신세계와 선사상의 차이에도 해당하는 내용입니다.”(11-2쪽) 송준영의 혜안은 불교 전체를 연구하는 대신 연구의 초점을 다음과 같은 선불교에 집중하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선종은, 선불교는 6조 혜능을 중시조로 하는 사상 집단임이 분명합니다. 이 혜능선 즉 조계선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자성게의 포인트인 본래무일물(�6���을 시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11쪽) 왜냐하면 불교가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인정되어온 인문학의 분야라면 선불교야말로 그런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핵심 분야이기 때문이다.


나. 서옹(
) 스님의 인가.

    송준영은 자신의 깨달음을 “그럼 30여년 넘게 찾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본래 잃을 것이 없으므로 얻은 것조차 없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지요. 이젠 저 밑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의심만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지요.”(20쪽)라고 요약한다. 송준영이 30여년의 수련 끝에 알게 되었다는 “본래 잃을 것이 없으므로 얻은 것조차 없다”는 것이 바로 조계선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자성게의 포인트인 본래무일물(�6���의 번역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그의 주장이 얼마나 당당한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저 밑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의심만이 사라졌다”는 경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높은 수준의 경지에 서지 못한다면 화두(_�의 ‘의심’이 아니라 ‘희미한’ 의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희미한 의심만이 ‘사라진’ 경지는 어떠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인(c �된 선사(;�의 인가( �)가 중요해진다.
   송준영은 백양사 방장 서옹 스님의 인가를 받았다. 아주 중요하고 드라마틱한 에피소드이기 때문에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10시쯤 백운암 조실에 드니 제주도에서 올라온 법화원에 계시는 시몽스님이 앉아 있고, 당시 스님의 시자가 있은 듯하다. 스님은 반가워하시며 나에게 몇 가지 물건을 주시며 징표로 삼으라고 하셨다.
    고방선사의 『벽암록』과 스님 직접 친필로 현토하신 『신심명』, 수처작주(�o �[)라고 쓴 스님의 대필 글씨, 스님이 직접 수결 낙관한 스님의 저서 서옹연의 『임제록』 그리고 백양사 법맥을 인쇄한 계보 첩. 그리고 「시 송월조거사(R ��%居�」라고 쓴 진리의 노래를 주셨다. 그 게송은 아래와 같다.(576쪽)

내용의 번역본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한자 생략). “송월조거사에게/ 마음을 열어보이다//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니/ 이 사람이 진인이다/ 면밀한데서 일보 이동하니/ 날으는 용을 보도다/ 진리의 향주머니를 따서 깨뜨리니/ 온 나라가 훈훈하고/ 하늘 틈을 버선목 뒤집듯 열으니/ 맑은 바람이 울부짖도다// 임신년 8월 15일 서옹”(576쪽) 이 시에서 서옹 스님은 송준영 거사의 깨달음의 경지가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진인(
��’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가한다. “면밀한데서 일보 이동”했다는 표현은 “저 밑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의심만이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경지를 인정하시는 내용이다. 뒤이은 에피소드는 더욱 놀랍다.

   게송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네 이름을 하나 지었지. 월조야, 월조.”
   옆에 잠자코 있던 인사차 조실방에 들린 시몽스님이 ‘월조는 달월 비칠 조자입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께서 ‘아니야 뛰어 넘을 월자에 할아비 조자야’ 하시었다.(576쪽)

조상을 뛰어넘었다는 뜻의 월조(
�%)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바는 아주 크다. 황룡 선사의 게송에 ‘월조’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내 손과 부처의 손 모두 드노니/ 선객들은 곧바로 알아차려라/ 무기를 쓰지 않고 이르는 곳/ 그 자리에서 초불월조하리라”(466쪽) ‘월조’는 ‘초불(�.)’과 의미가 같으므로 부처를 초월한다, 즉 뛰어넘은 자리에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서옹 스님의 이와 같은 인가로 송준영, 아니 월조 취현(3�은 선불교의 법통을 계승하게 되며, 선승(;8)이었다면 조실 스님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는 77대 조사가 된다는 사실을 송준영의 친절한 설명에 의해서 필자는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2. 현대 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

가. 21세기 종교성의 모색.

   19세기와 20세기 서양 사상의 선구자들이 사상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 불교 사상을 검토했다는 단편적인 연구가 있어 왔다. 송준영은 “당대의 이름난 선사인 스즈끼 박사는 중세기 기독교의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의 말을 인용한다. ‘내가 그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그 눈은 그 안에서 나를 보는 눈과 같다.’는 선의 불이사유(�}� )인 반야지혜(3��)를 표현하는 말이 된다.”(557쪽)고 지적하면서 기독교적 신비주의 신앙과 선적 깨달음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선은 인위적인 생각이나 논리적인 이해 차원에 넘어서서 있다. 아니 생각이나 이해와 똑같이 서로 침범하지 않는 언어나 문자 밖에 덤덤히 자존( �?)하기 때문이다. 선은 우리가 이해하고 만들어진 어떤 철학적 종교적 범주에 맞추어도 적합하지 않다.”(556쪽) 기존의 철학적 종교적 범주에 적합하지 않은 선불교야말로 21세기 종교성의 모색에 있어서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 송준영의 다음과 같은 혜안처럼 선이 불교라는 종교 이전에 있었다면, 아니 인류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다면 선에서 21세기의 종교성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억지로 굳이 말하자면, 선은 역사상 일컫는 불교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아니 인류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다 말할 수 있겠지요. 바로 이 선을 인류의 정신 테두리로 틈입시켜 그의 후예들에 의해 성립시킨 원조, 석가조차도 『화엄경』에서 “신기하고 신기하다. 모든 생물 무생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구나”하였는데, 여기서 불성은 만물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성품을 말합니다. (10쪽)

무엇이라 이름 붙이든 ‘만물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성품’에 관한 이해야말로 종교의 핵심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나. 21세기 문학성의 모색.

   송준영은 선시의 수사법에 관한 지대한 관심을 다음과 같이 표명한다. “젊은 시절 조금한 시공부의 욕심을 또 떨치지 못하고, 늦게나마 내가 본 세계를 시로 담아보겠다는 욕망이 다시 일게 되었습니다. 이 없는 것을 언어문자로 유형화시켜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갈등을 오래 겪어야 했지요. 그건 그렇고, 사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한 마디로 현대선시인 전위선시입니다. 서구의 긴장과 부조화로 팽배한 문장과 언어의 건축은 우리 선시적 오랜 사유와 결합하므로 전개되는 세계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내는 시입니다.”(20쪽) “서구의 긴장과 부조화로 팽배한 문장과 언어”를 “선시적 오랜 사유와 결합”하려는 전위선시의 작업이야말로 상징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수사법이 봉착한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송준영은 상징의 시대적 한계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사실 서구의 상징은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암호의 숲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다분하지요. 이 상징이란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Ln n
�L�의 사유법인 선적인 사유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선의 도리는 본질과 물질적 현상을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선시에서 실상이란, 상징에 남아있는 논리적 고리를 단절시킴으로 우리와 같은 중생의 분별간택심을 초월시키려는 아니 제자리로 환지본처하게 하는 불립문자(�#��의 표징일 뿐이지요. 곧 선시에서는 단어, 시구 혹은 선시 자체가 낱낱이 암시적 상징이 아닌 끝없는 실상으로 형성됩니다.”(14쪽) 선시의 수사법이 문학적으로 상징적 수사법의 대안이 되는 이유는 선시의 단어, 시구 또는 선시 자체가 암시적 상징의 체계를 초월하는 실상이기 때문이다. 선시는 모순적 어법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쉬르와 같이 자동기술에 의해 무작위로 씌어진 것이 아닌, 무자성을 철저히 깨친 선사들의 명료함에서 흘러나온 노래이어서 무한실상을 한량없이 휘두르고 있”기 때문이다(15쪽).


다. 21세기 종교와 문학이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의 모색.

   송준영은 21세기 종교성의 모색과 21세기 문학성의 모색이 전위선시에서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선과 시는 종교와 문학의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여 그 성질 면에서 융화될 수 없지만 앞의 시에서 보듯이 선사들은 깨침의 경지를 시로 표현한다. 이것은 시와 선의 서로 상보적 발달을 보며 선사들은 시에다가 선리를 담고, 시인들은 선리와 선취를 시에 받아들이고 선리로 시작 이론을 세웠다.”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24쪽).
   그러나 송준영에게 “반상합도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시를 그려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있지만, “아직 미숙하여 제대로 표현해내지는”(21쪽) 못한다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전통선시에서 전위선시로 넘어가는 길을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와 선이 합해질 수 있는 이유를 밝힌 논지”로 『현대 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 589쪽 전체에서 유일하게 제시된 사례가 중국 명대의 시론가 서정경( ��의 『담예록(t ��』의 일부일 뿐인데 다음과 같다. “이치를 대략 말하지 않고 사물의 상태를 형상화하여 이치를 밝히며, 도를 헛되이 말하지 않고 그 그릇의 쓰임(
�을 묘사하여 도를 싣는다. 형이하의 사물을 들어 형이상의 이치를 밝혀, 고요하고 텅 비어 형상이 없는 것을 사물에 가탁하여 일으키고, 황홀하여 조짐이 없는 것이 자취를 드러내어 눈에 보이듯 한다. 비유하면 무극과 태극이 응결하여 하늘과 땅(  l) 태양, 소음, 태음, 소음(��이 되는 것과 같다.”(35쪽) 전통선시와 변별되는 전위선시를 위한 시론으로 제시된 것이 중국 명대의 시론의 일부분의 인용일 뿐이라는 점은 “현대 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라는 제목을 무색하게 만든다.
    “현대 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라는 제목을 제안하여 채택하게 만든 당사자로서 필자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전위선시를 위한 시론 구축의 두 가지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전위선시는 논리가 아닌 실상 위에 구축된다는 선시의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위선시는 선시 자체의 전위성을 드러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선과 선시의 다음과 같은 특징 자체가 전위적이기 때문이다. “선은 그 장점이 실생활 자체를 여과 없이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여과 없다는 그 자체를 말한다. 그래서 선시의 이해는 그 변두리에 있다고 판단되는 선화(;_) 속이 바로 요체다. 마치 『금강경』이 서양에 처음 전해져 번역되어졌을 때, 심오하며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교리로만 가득 차 있지 않고 왜? 짧고 중요한 경문에 ‘밥을 빌러가고 밥을 나누어 먹고 발을 닦고 똑바로 앉고’ 같은 일상사가 기록되었는지 납득을 못한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36쪽) 둘째, 격의불교의 다음과 같은 전통을 부활시켜야 한다.

   처음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는 격의(格 u)라는 방법에 의해 이해되어졌다. 격의불교는 기존의 노자, 장자의 사상을 차용하여 불교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가령 『도덕경』 제40장에 ‘천하의 모든 만물은 유에서 생하고 유는 무에서 생한다’(�[A�"  �"�라는 말은 대승불교의 공사상을 노자의 무라는 용어로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유입되었을 때 불교의 열반(nirvana)을 무위(��로, 보리(bodhi)를 도(�, 진여(tathata)를 본무(��라고 격의적으로 수용 번역되었다. 곧 노자 장자의 사상을 빌어 불전을 번역하고 불교를 이해한 것이다.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불교는 전자가 명상을 통해 현실의 괴로움을 초월하려 했기 때문에 인식론적 논리가 발달하게 되었다면 이와는 반대로 후자는 그 국민성에 기인되는 행동적이고 현실적인 직관이 발달했다. 그런 까닭에 직관적으로 체험하고 실천하는 실제적인 종교정신이 발달하게 된다. 곧 불교의 궁극적인 경지를 어떻게 체득하고 실참실수(�=��하느냐 하는 문제가 바로 참선과 같은 수행법으로 발전을 봄으로 선종의 태동을 보게 된다.(57쪽)

격의불교의 성립 경과를 자세히 인용한 이유는 바로 지금이 ‘현대 언어,’ 즉 서양 사상의 용어나 체계에서 새로운 격의불교의 방안을 찾아내야 하는 시대라는 역사적 인식 때문이다. 5조 홍인(L �의 생몰연대는 601-678년이고, 신수(v�는 605-706년이며 6조 혜능(D)은 638-713년이다. 모든 생물 무생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궁극적 깨달음의 내용은 석가 이래로 변함없어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지만, 1300여 년 전의 언어를 변함없이 그대로 사용하면서 현대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전위선시의 시론을 제시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공인된 선사에게 인가받지 못한 수준에 있는 필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엄청나다. 이제 겨우 문제의 제기에 성공했는데, 앞으로는 월조 거사가 달성하여 589쪽에서 제시한 선적 깨달음을 현대 언어로 정리한 다음 그로 인해 파생된 과제와 해결의 방향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3. 삼단논법.

가. 불립문자의 이해.

   5조 흥인의 법통 승계를 위한 다음과 같은 대중 법문은 선불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만든 질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가장 큰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너희들은 종일토록 다만 복전만 구하고 생과 사의 고달픈 바다에서는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자성이 미혹하다면 복을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너희는 각자의 지혜를 스스로 살펴 자기 본심인 반야의 성품으로 게송을 하나씩 지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만일 큰 뜻을 깨친 사람이 있으면 법과 옷을 전하여 제6대조로 삼을 것이다. 지체하지 마라. 생각으로 헤아린다면 핵심을 놓칠 것이고 견성한 사람은 말 아래에 모름지기 볼 것이니, 이런 사람은 칼싸움하는 진중에도 볼 수 있다.(27쪽)

공인된 선사에게 인가받는 수준으로까지 생사의 문제를 벗어나는 최고 수준의 종교적 인식의 양상은 “생각으로 헤아린다면 핵심을 놓칠 것이고 견성한 사람은 말 아래에 모름지기 볼 것이니”(�I
����見g
�� 3[��로 요약된다. 이러한 핵심적 요지의 중요성은 “대중에게 존경을 받는 아주 정신적 깊이가 있고 진정한 믿음과 겸손을 지닌”(28쪽) 것으로 평가되던 교수사 신수에게 홍인이 “무상보리는 언하에 자기 본심을 깨달아야 하며 직관에 의해 자기 본성을 보아야 하네.”(������3[ g ��g 見 ��g)라는 기준에 의거하여 실패라고 평가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29쪽).
   ‘말 아래( 3[)’에서 파악해야 하는 핵심 사안이지만 말로 표현하라고 요구받는다는 점에서 선의 대표적 사상적 특질인 불립문자, 교외별전(�D��, 직지인심(
����, 견성성불(見gi.)이 드러난다. 혜심은 『선문염송』의 「서문」에서 불립문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세존과 가섭 이후에 대대로 이어받아 등불과 등불이 다함이 없이 차례차례 비밀히 전함으로써 바른 전법을 삼으니, 바르게 전하고 비밀히 준 자리는 말로서 표현치 못할 바는 아니나, 말로는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비록 가리켜 보이는 일이 있어도 문자를 세우지 않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할 뿐이었다.”(52쪽) 그러나 “불립문자의 전체적 이해는 언어나 문자에 매달리지 않아야 하며, 단지 불립문자란 자구에 집착하여 고지식하게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에만 매어달리는 편집된 생각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데에 이해의 어려움이 있다(37쪽).

어느 날 밤에 정각을 이루고
어느 날 밤에 열반에 들지만
이 두 중간에서
나는 아무것도 말한 바가 없다

안으로 몸소 증득한 법으로서
나는 이와 같이 말한다
시방 부처님과 또한 나의
모든 법은 차별이 없다

석가모니는 정각을 이루고 열반에 들기까지 45년 동안 8만 4천 법문으로 지칭되는 대기설법(��U�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것도 말한 바가 없다’고 자신이 말한 바를 부정하고 있는 이 게송은 분명 언어초월 사상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50쪽)

대기설법은 “시방 부처님과 또한 나의 모든 법은 차별이 없다”는 “몸소 증득한 법”의 경지에 이른 석가모니께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지만 대중을 위한 자비의 마음에서 기회에 맞추어 말씀을 해주셨다는 것을 시사한다. 선과 선시의 이해와 해석에 있어서 핵심 문제는 불립문자인데 어떻게 문자로 선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착된다. 그런데 “불립문자란 문자를 사용하지 않음이 아니라 문자에 대한 집착이 없어야 함을 말한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문자를 사용하되 집착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바로 문자를 쓰되 적합하게 매어달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을까. 이것은 지혜와 관계가 있다. 반야바라밀과, 곧 지혜의 완성은 중도이고 견성이다. 자성( �g)을 본 사람은 지혜를 완성한 사람이어서 모든 사물에 자연 응답하며, 또 응답을 할 줄 안다.”(39쪽)


나. 삼단논법의 전개.

   송준영은 서옹 스님의 인가를 받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자신(송취현)의『반야심경강론』에서 통일논리로서의 삼단논법을 다음과 같이 전개하고 있다.

불경 전반에 자성본원의 무자성을 밝히는 변증법적 논리 구현, 바로 통일논리를 밝히기 위해 삼단논법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일체의 삿됨을 깨뜨리고 올바름을 드러나게 하는 파사현정(����하기 위함이다. 몇 가지 경론에 나타나는 삼단논법을 정리할 것 같으면 다음과 같다.

원래적 입장―�gLn ngL��쐴����L��L�
사상적 표현―��� n����쐴�` `���L��L�
체험적 결괴―�TLn nTL���쐴�X  X���XL��XL�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반야심경』의 표현이고 공가중(n假
�의 삼체(��는 천태종의 2조 혜문이 나가르주나의 『중론송』에 얻은 반상합도고, 유무 비유비무 역유역무는 『열반경』에 불성 비유비무 역유역무 유무합고(.g ` `� X  X� ��)에서 근거한다. 그리고 선시에서도 본래적인 산시산 수시수와 사상적 표현인 산시수 수시산인 경지와 실참실수한 뒤에 나타나는 산역시산 수역시수의 확연한 경계를 노래한다.(237-8쪽)

이를 다음과 같이 지식, 지혜와 예지로 구분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knowledge는 경험을 갖지 않고 얻어진다면, wisdom은 삶의 경험을 통하여 얻어진다. 그러나 prajna는 존재 자체의 자발광( �=�으로 ‘본질에서 솟는 근원적인 예지’다. 곧 분별함이 없는 상태에서 솟는 지혜인 무분별지(���다.”(44쪽)
   혜능은 『육조단경』에서 삼단논법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준다. “그대들의 마음이 이미 선과 악의에서 벗어났다면, 깍은 듯한 공허에 떨어지지 말도록, 앞과 뒤가 끊기는 고요를 지키며 즐기는 경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대들은 오로지 학문을 넓히고 많은 견문을 쌓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러면 스스로의 본심을 깨달아 모든 깨달은 이의 근본 이치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과의 사귐에 있어서 화합이 자연 이루어지고 나와 남이라는 생각이 없어지게 됩니다. 바로 보리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는 우리의 진심을 깨달을 것입니다.”(46-7쪽) 혜능의 “친절하고 인간적인 말”(46쪽)은 이미 선과 악의를 벗어난 첫 번째 단계 이후, 즉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에 설명을 집중하고 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공허와 고요에 침잠하지 말아야 스스로의 본심을 깨닫는 학문적 진전을 성취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는 우리의 진심을 깨달으면 나와 남이라는 생각이 없어진 화해의 세계를 달성할 수 있다고 격려한다.
   우리 시대의 선사 서옹 스님은 『벽암록』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 자리는 우리의 심식(�g)으로 되어 있는데, 공부에 깊이 들어가면 모두가 무심의 경계가 된다. 곧 무심의 경계가 되어서 우주 대자연과 차별이 없는 절대경지에 들어간다. 그러나 참선은 그것이 그치지 않고 더 정진을 하면 아뢰야식(8식: 무의식)을 완전히 타파한 부처의 반야지가 된다. 그리고 부처의 경지도 타파하고 초월하여 자유자재하게 된다. 이것을 평상심시도(��L�라고 한다.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차 마시고 자유자재하게 되어야 선의 구경인 낙처(�o)인 것이다.(57-8쪽)

지식으로 파악되는 심식의 제1단계를 넘어선 무심의 경계에 이르러 우주 대자연과 차별이 없는 제2단계 지혜의 절대경지에 들어간다. 서옹 스님이 제시하는 선적 깨달음의 제3단계,  반야지에 관한 설명은 아주 구체적이다. 아뢰야식, 즉 무의식을 타파하면 부처의 경지를 초월하여 자유자재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상심시도는 백장(y )의 불락인과(� �)와 불매인과(�^ �)로도 설명된다. “불락인과는 현상계를 초월하여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고 정신적으로 초월자가 되어 신통묘용이 자재하다는 의미로 읽히고, 백장이 말하는 불매인과는 인과법칙에 밝다, 혹은 인과를 알아 지혜롭다는 의미로 풀린다. 다시 말해 자성을 본 견성한 사람은 초월의 불변성과 현상계의 변화성도 한 눈에 간파할 수 있는 반야의 지혜를 갖춤으로써 자재( �:)로운 마음을 갖는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는 ‘범(�/성(q)’이 무너지고 ‘내(�/외(
D)’가 밝게 뚫려 불이(�})의 세계에 산다. 이것은 석가모니가 초전법륜(����에서 말한 중도(
��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209쪽)


다. 혜능의 대법: 지식에서 지혜로 가는 길.

   지식의 제1단계에서 지혜의 제2단계로 가는 길도 험하기만 하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리의 직관에 의해 보여 지는 세계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사실 이것을 언어문자를 통하여 전달하기란 쉽지 않다. 언어와 문자는 제1의(
 �u)를 다시 한 번 되새겨 정리하여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활발발한 이 순간의 이미지를 한 겹 되새기고 논리적으로 정리하므로 생기는 문제점. 우리가 본 모든 사물이 보여주는 1차적 심상의 세계가 2차적인 정리 이해의 세계로 변화하는데서 오는 착오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언어문자의 한계는 우리를 영원히 눈뜬장님으로 만들뿐 아니라 영원히 언어문자의 테두리 안에 가두고 만다. 누구나 언어와 개념의 세계의 복잡다단한 굴레에 빠져들면 그 한계 안에 거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 우리에게 한층 자유로워질 것이다.”(263-4쪽) “흔히 지식을 선가에서는 알음알이라 한다. 머리 하나만 이해되고 통달되어 아는 기술적 지식과 달리 선적 체험은 정신적 지혜와 육체적 경험, 머리와 마음을 모두 통하여 증장(
�6)시킴을 의미한다.”(41쪽)
   혜능은 『육조단경』에서 지식을 여의고 지혜로 나아가는 방법인 대법(��을 석가모니의 대기설법(��U�의 응용 방안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나아가고 사라짐에 양변을 여의고 일체 법을 설하는데 자성을 여의치 말아야 한다. 그리고 법을 묻는 사람에게 설법은 반드시 쌍으로 하여 대법을 사용하여 오고 감에 서로 원인이 되게끔 하여 마지막에 두 법이 다 제거되어 다시 갈 곳이 없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혜능이 말하듯이 ‘유( )를 물으면 무(�의 의미로 대답하고 범상한 것을 물으면 성스러운 것으로 말하고, 또 성스러운 것을 물으면 범상한 것으로 대답한다. 이렇게 두 극단의 상호 관계에서 중도의 의미가 드러난다.’”(37-8쪽) 이런 원리는 “『금강경』 제7분의 ‘여래가 설하신 법은 모두 취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현성은 모두 함이 없는 가운데 차별을 두기 때문이다’에 사상적 근거를 둔다.”(113쪽)
   송준영은 진리 추구 과정에서 지식과 지성인의 한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인간의 이항적 관습의 장애는 지금도 소를 채찍질하여 영원히 멈춤이 없는 수레를 몰고 가는 지성인과 지성인의 끝없는 행렬을 보는 것.
   아아, 우습다! 지금도 소에다 채찍을 치는 거와 같이, 좌선으로 부처를 이루고자하는 어리석은 부처들이여, 정녕 우습구나.(122-3쪽)

   지식에서 지혜로의 전환이 아무리 강조되더라도 합리성을 포기하고 비합리성을 옹호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선을 잘못 이해한 선학자들은 선은 어떤 비합리성을 그 근본 원리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이런 잘못된 태도는 합리성을 최선인양 숭배하는 것보다 잘못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종의 오가칠종의 조사들은 ‘합리/비합리’를 초월해 있다.”(497쪽)


라. 반상합도(!���의 줄탁동시(?x�M)와 하화중생([U
��의 이상.

   일반적인 불교의 종파, 교학 위주의 교종이나 다른 종파들이 대상화된 불교를 일반화하려는데 반해, 선은 현실이나 생명 그 자체를 활활발발한 그대로를 포착하여 주체가 되려 한다. 신수의 경우처럼 망상을 벗어남을 수도하는 것이 교학의 이상으로 생각하지만, 선에서는 혜능의 경우처럼 “성범의 분별심을 벗어나므로 무명(��, 실성(�g)이 둘이 아님의 경계에서 ‘함이 없는 행위’(�
�가 된다.”(103쪽) 선의 언어는 선문답이라는 용어에서도 드러나듯이 “동문서답, 논리의 맥이 끊기는 것을 말한다. 바로 논리의 대화가 아니고 직관에 의한 대화이기 때문이다.”(155쪽) 예를 들어 “운문(
��의 일자관( ��)은 선학인이 묻는 질문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 아니 무의식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운문은 질의자의 정신 상태와 요구를 그 질문에서 직관적으로 느낀 반사작용으로 봄이 타당하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운문의 가르침의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다.”(497쪽)왜냐하면 “우리의 언어는 단지 현상세계와 사물과 사물이 끝없이 대립하고 융화하는 사이에 가유(假 )해 있을 따름이다. 가유해 있는 흔적을 우리는 자성 위에서 마음대로 사용할 뿐이다. 견성한 사람은 언어로 유희하되 마음에 흔적이 남지 않는다.”(45쪽)
   “당착적인 모순어법은 선사들이 이원적인 상대세계에서 그들이 보았던 일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데 사용한 주된 수사법이다. 이들은 일상적인 것을 비틀고 돌이키고 융화시켜 다른 수승된 일원론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곧 반상합도(!���의 솜씨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데, 이것은 우리를 더 심원한 세계로 몰아넣기에 족하다.”(80쪽) “절대 진리를 묻는 사람에게 여릉의 쌀값은 어떻던가? 하는 반문은 반어적인 대답. 이 되묻는 대답은 선사로서 납자를 제접하는 능숙한 솜씨는, 인간의 관념과 개념, 관습으로 뒤덮여 있는 두꺼운 벽을 깨는 줄탁동시(?x�M)의 비범하고 매혹적인 수법으로 읽힌다.”(88쪽) 예를 들어 “선시의 석녀(&), 목작(�), 니우(H
�, 목인(�� 등은 바로 우리가 만들어낸 이항대립적인 언어로는 표현되지 않는 진리 당체를 우회한 실상의 표현이니, 주체이며 바로 그곳에 만날 때만이 계회(�되는 그 표현을, 현실로 존재하지 않는 이것을, 이렇게 밖에 나타낼 수밖에 없는 선사들의 곤혹스런 표현이다. 물론 이런 표현들은 결국 이항대립적인 세계를 일원의 세계로 환지본처(w
��o)시키고자 하는 선사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형성시킨 언어 형식들이다.”(70-1쪽)
   선종에서 가장 근본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원칙이 되는 핵심사상은 일상생활에서 긍정적인 태도다. “선종의 매력은 무위에 자재하는 노장사상을 뛰어넘어 후대에 확암(c�의 「십우도」에서 입전수수( ����로 나타나며 이어서 활활발발한 선화와 법거량, 고함소리, 몽둥이질과 거침없는 실제의 행위로 나타난다는데 있다. 이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행위하고 머무르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한(�\
V
$ &?�� 모든 생활이 선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바로 현실 생활의 찰라지간에 번득이는 지혜, 이것이 선이다. 삶의 끄트머리에서 반야의 검으로 삶을 재단한다.”(130쪽) 다른 종교와 “불교가 다른 것은 상구보리(��� 후에 하화중생([U
��과 자리( �� 후에 이타( €h)에 모든 낙처(�o)가 있다.”(133쪽)


4. 송준영이 도달한 깨달음의 경지와 앞으로의 전망.

가. 송준영이 도달한 깨달음의 경지.

   나보다 더 많이 진전된 깨달음의 경지에 있는 필자의 저서에 나타난 깨달음의 경지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저 그가 도달한 깨달음의 정점이라고 여겨지는 지점들을 지적하면서 독자의 평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형식의 측면에서 송준영 자신이 제시한 다음과 같은 선시의 수사법을 가장 잘 반영한 부분을 『선시의 세계』에서 읽어내는 것이 한 방법일 것이다. “선시의 수사법은 압축, 절연, 기상, 모순, 병치, 사물의 가탁에 의한 형상화 등 현대시의 수사법과 거의 동일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특히 많이 나타나는 수사법은 모순적 어법입니다. 선사의 모순적 어법은 스스로 깨친 세계를 문자로 보여주어 미혹한 중생들을 깨닫게 하기 위한 선사들의 간절한 노파심의 발로입니다.”(12-3쪽) 다음은 영운( ��의 오도송이다. “30년 동안 검을 찾던 나그네여/ 몇 차례나 잎 지고 가지가 돋았던가/ 복사꼭 한 번 보고 난 뒤엔/ 아직까지 두 번 다시 의심치 않네.”(271쪽) 송준영은 이 오도송을 분석하면서 마지막 2행을 위해 자신이 제시했던 수사법을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적용한다.

   3행에서 “복사꽃 한 번 보고 난 뒤”( �F ���]�란 시구에서 보듯이 복사꽃을 한 번 본 다음은, 4행에서 “아직까지 두 번 다시 의심치 않네”(
��Ec更�s)라고 했는데, 도대체 복사꽃을 어떻게 보았단 말인가. 문제는 복사꽃이 문제이다. 복사꽃은 피었고, 복사꽃은 피고, 복사꽃은 필 것이다. 이렇게 설정되는 복사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분별되는 복사꽃이다. 이 분별의 복사꽃은 관념과 합리적인 약속 아래 복사꽃일 뿐이다. 어제에 본 복사꽃, 지금도 보고 싶은 복사꽃, 내일에도 필 복사꽃, 창경원에서 본 복사꽃, 어린 날 고향산천에 피던 복사꽃일 뿐이다. 그러나 3행에서 영운이 ‘한 번 본 복사꽃’은 영운과 복사꽃과 대립적인 분별이 끊어진 복사꽃이었고, ‘영운( �/복사꽃(h)’이 무너진 무간(�>)의 복사꽃이니, 바로 영운 자체이다. 이것은 자성본원에 영회이며, 진여 실상 자체인 절대 현재의 이 찰나에 한 몸이 되니, 다시는 의심을 갖지 않는 4행의 이유다.(272쪽)

   내용의 측면에서 송준영이 제시하는 선의 경지를 가장 잘 반영한 부분에 있어서 필자는 『선시의 세계』의 두 부분을 읽고자한다. 하나는 줄탁동시(?x�M)의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하화중생([U
��의 장면이다. 무착(�#)의 ‘전삼삼후삼삼( ������’ 설화에 대한 송준영의 다음과 같은 해석은 줄탁동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비밀의 일단을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는 항상 ‘흑/백’의 판가름의 세계를 살아왔고, 이항대립적인 가름에 답을 선택하게 하였고 또 선택해왔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총체적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연되어지는 전성전일( �g ��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사유에 던져지는 벽력같은 말 “저기 셋, 여기 셋 정도.” 무언가 정답이 없는, 정답을 내기 위한 정신작용에 문제가 생기므로 오는 멍청함. 여기에 우리는 사량(�I)하는 잣대를 잃는다. ‘전삼삼 후삼삼’은 일반적으로 ‘범인과 성인이 동거하고, 용과 뱀이 뒤엉켜서’(�q��
��D ) 여기 한 무리, 저기 한 무리 무리지어 있다 쯤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는 문수가 일깨우고자 하는 것, 곧 우리를 자성본원으로 계합시키려는 음흉한 의도가 숨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280쪽)

보명(��이 지은 「십우송」의 ‘10. 쌍민(�)’은 다음과 같다. “사람과 소 보이지 않고 자취 묘연한데/ 밝은 달빛 머금고 만상이 비었어라/ 만약 그 중 분명한 뜻 묻는다면/ 들꽃 향기로운 풀 절로 무성하다 하리.” 확암(c�의 「십우도」에서 입전수수( ����와 동일한 맥락인데, 이를 해석하면서 송준영은 하와중생의 경지가 진유의 세계임을 다음과 같이 입증한다.

   이 진유의 세계를 알고자 하는가?
   바로 “들꽃 향기로운 풀 절로 무성하다”(�]W����라고 표현되어지는 묘유의 세계다. 이 세계는 일상사의 원래적 입장인 ‘유/무’가 ‘비유(` )/비무(`�’의 사상적 탐구 뒤에 나타나는 현상을 거쳐 다시 ‘역유( X )/역무( X�,’ 즉 체험적 결과로 나타나는 세계가 바로 4행의 ‘야화방초자총총’이다. 『열반경』에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또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또한 없는 것이니 바로 있고 없고가 융합된 까닭이다”(.g ` `� X  X� ��)라고 말하는 세계다.(296쪽)


나. 앞으로의 전망.

   송준영의 대작(�� 『현대 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를 읽으며 기대했던 21세기 종교성과 문학성의 모색에 대한 해결책이 충분히 찾아지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적이며 집단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첫째, 송준영이 목표로 하는 전위선시는 논리가 아닌 실상 위에 구축되는 선시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선과 선시는 바로 그 자체로 전위적이기 때문에 전위선시는 선시 자체의 전위성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둘째, ‘현대 언어,’ 즉 서양 사상의 용어나 체계에서 새로운 격의불교의 방안을 찾아내야 하는 역사적 인식이 그러한 작업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모든 생물 무생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궁극적인 깨달음의 내용은 석가 이래로 변함없어 시간의 흐름에 영향 받지 않지만, 1300여 년 전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현대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전위선시의 시론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송준영은 자신이 선불교의 법계도(��를 최초로 완벽하게 정비하여 부록으로 제시했다고 설명한다. 향후 지속될 송준영의 작업에 큰 희망을 걸 수 있는 근거를 두 가지 제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하나는 선불교 5가7종을 다음과 같이 현대 언어로 개괄할 수 있는 전문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5가7종은 선종 종파의 총 명칭이다. 종지나 교의에 의하여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각 문의 선풍이 달라서 갈라 부른다. 위앙종은 완숙하고 조동종은 세밀하며 임제종은 통쾌하고 운문종은 고고하며 법안종은 간명하다. 그리고 각 종파의 성쇠는 법이 강하고 약함에 있지 않고 사람을 얻고 얻지 못함에 있다.”(244쪽) 또 하나 보다 중요한 근거는 송준영이 조사선의 변화와 발전 과정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 장에서 본 6조 혜능이 말하는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는 식심견성(g��g)’의 성(g), 그리고 그의 제자 하택 신회가 주장하는 ‘지지일자중묘지문(
��������’이라 하는 지(
�, 이 지자(
��는 6조의 성자(g �보다 동태성을 띤다. 그리고 마조의 ‘평삼심시도(��L�’나 즉심즉불(T�T.)의 심자(��는 앞의 이 지자(
��보다는 더 작용의 의미를 가진다. 다음 조주나 임제에 이르러는 훨씬 형상화되고 동태적인 표현을 하여 구체화시키고 있다. 이를테면 임제의 무위진인(����이나 이 선화에 보이는 ‘진주의 큰 무우’가 그 예다. 조주에 이르러 보이지 않는 자성의 편재를 그의 구순피선으로 형상화하여 납자의 면전에 확연히 보이고 있다. 조주야말로 대시인의 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 선사라 할 것이다.(335쪽)

송준영은 선종의 변화가 표현의 형상화와 동태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이는 송준영의 현대 언어로 선시를 읽는 작업이 현대 언어로 선을 읽으려는 작업과 직결된다는 올바른 역사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