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인들

Die gestundete Zeit <유예된 시간> / 잉게보르크 바하만

자크라캉 2007. 7. 5. 18:34

잉게보르크 바하만
Ingeborg Bachmann (1926 - 1973) 
      Die gestundete Zeit <유예된 시간> Es kommen hartere Tage. 더욱 더 혹독한 날들이 다가온다. Die auf Widerruf gestundete Zeit 판결의 파기로 유예된 시간이 wird sichtbar am Horizont. 지평선에 나타난다. Bald musst du den Schuh schnuren 이제 곧 그대는 신발을 동여신고 und die Hunde zuruckjagen in die Marschhofe. 개들을 농가의 습지로 다시 쫓아버려야 한다. Denn die Eingeweide der Fische 왜냐하면 물고기의 내장들이 sind kalt geworden im Wind. 바람에 냉각되었기 때문이다. Armlich brennt das Licht der Lupinen. 초라하게 루우핀의 빛이 타고 있다. Dein Blick spurt im Nebel: 그대의 시선이 안개속에 자국을 남기니, die auf Widerruf gestundete Zeit 판결의 파기로 유예된 시간이 wird sichtbar am Horizont. 지평선에 나타난다. Druben versinkt dir die Geliebte im Sand, 저 편에서 그대의 연인이 모래속으로 가라앉는다. er steigt um ihr wehendes Haar, 모래는 그녀의 흩날리는 머리카락까지 솟아오르고, er fallt ihr ins Wort, 모래는 그녀의 말속으로 떨어져 er befiehlt ihr zu schweigen, 그녀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한다. er findet sie sterblich 모래는 그녀가 죽어감을 und willig dem Abschied 그리고 모든 포옹후 nach jeder Umarmung. 기꺼이 이별함을 보고 있다. Sieh dich nicht um. 돌아보지 말아라. Schnur deinen Schuh. 그대의 신발을 동여매고 Jag die Hunde zuruck. 개들을 쫓아보내라. Wirf die Fische ins Meer. 물고기들은 바다로 던져버리라. Losch die Lupinen! 루우핀의 빛을 꺼버리라. Es kommen hartere Tage. 보다 혹독한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


유예된 시간, 커다란 미지의 힘 앞에 잠시 놓여진 시간, 빌려 받은 제한된 시간, 판결의 파기로 미루어져 있을 뿐 언제라도 그 파기가 취소되어 다시 판결이 집행될 수 있는 시간, 이 시간은 오스트리아 크라겐푸르트 출신의 여류시인 Ingeborg Bachmann의 시간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 독자들은 불안해 집니다. "그대"라는 시의 호명효과에 빨려들어가 무언가를 서둘러 정리해야 하는, 어디론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급박하게 도주해야 하는 그런 상황과 갑자기 마주치게 됩니다. 문학이 절대선이나 절대미를 추구하던 강박에서 벗어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녀는 성급한 위로나 가리우는 치장보다는 세상의 불안과 절박한 도주를 택한 듯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도주는 대책없는 도피나 무책임한 회피는 아닌 것 같습니다. 도주의 출발점에서 조차 유예라는 시간이 던져주는 파급은 모든 친숙한 일상을 뒤엎고 있습니다. 이 도주는 "더욱 더 혹독한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감지의 불안에서 비롯됩니다. 이미 지평선에 그 유예된 시간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제 할 일은 신발끈을 동여매는 일입니다. 데리고 있던 개도 돌볼 여력이 없어진 상태이고요. 일용할 양식이던 물고기는 그 내장까지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합니다. 남은 것은 아주 희미하게 초라히 타고있는 루우핀의 빛뿐...

루우핀은 말려서 태우면 빛을 발하는 식물인데, 지금은 그 희미한 빛마저 꺼져가는 시간입니다. 더욱이 안개로 시선은 가리워져 있으며, 그 흐린 시야 지평선으로 바로 저 무서운 불안덩이, 유예된 시간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사실 이미 한번 판결은 났었습니다. 그 판결이 내려졌을 때의 공포를 알고 있는 "그대"이기에, 그 판결이 파기되었을 때 그리 크게 기뻐하지 않았으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불안감이 날로 커 가고 있던 차였습니다.

1연에서 2연으로 시간이 흐르는 사이 혹여 이런 상황을 모면하게 해 줄 수 있는 어떤 것을 작가도 독자도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미는 없고 오히려 구원이며 지주였던 연인마저 모래속으로 파묻혀 들어갑니다. 연인의 사랑스런 머리카락까지, 연인의 부드러운 말까지 앗아가고 모래의 위력은 더욱 커져 급기야 연인을 죽음으로 몰아가며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결별을 맞게 합니다.

Bachmann의 시어들 가운데 몇몇 시어는 그녀만의 지정된 상징이나 은유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모래"가 그 한 예인데요. Bachmann에게 "모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내 존재의 전부였던 "연인"도 시간의, 더욱이 유예된 시간의 파괴력앞에서는 무기력한 소멸일뿐입니다.

눈앞을 가로막는 유예된 시간, 한번 파기되었기에 더 이상 파기될 가능성도 전혀 없는 막막한 시간앞에서, 일상도 자신의 전부이던 연인도 잃은 이 존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돌아보지 않은 도주를 택하는군요. 할 수 있는 유일한 준비라곤 "신발을 동여매는" 일입니다. 그리고 개들을 �아 버리고 얼어 붙은 물고기도 원래의 고향 바다로 던져주고 그나마 희미하게 비쳐주던 루우핀의 빛마저 스스로 꺼버립니다.

신발끈을 동여맨 "그대" 어디로 가려는 걸까요...

시의 첫 연과 마지막 행은 같은 시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빠져 나갈 수 없는 닫힌 날들이기 때문인지... 그러나 일단 도피나 회피로서가 아니라 길위로 떠남으로서의 도주만이 유일한 출구라는 것을 판결의 파기로 이미 체험한 우리들은 또 다시 안주할 어딘가를 찾아 도주할 수 밖에 없는 듯 싶습니다.


도주가 안주이기도 한 그 여정을 말입니다.


그녀는 작가였지만 <마틴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의 비판적 수용> 이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철학박사이기도 하였지요. 비인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 독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전후 온 유럽사회가 전쟁의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을 무렵, 이성의 부재에 어찌할지 몰라 쩔쩔 매고 있을 무렵, 그녀는 이성과 감성의 상징인 언어를 매개로 세상의 실존과 인간의 실존을 다독이려 한 아름다운 시인이였습니다.

모두들 언어도 믿지 않고, 자연도 믿지 않고, 사랑도 믿지 않고, 신도 믿지 않고 헤매일 때 그녀는 이미 그 한계의 절정에 다른 언어와 더불어 그 한계를 한 치라도 넘어서려는 시도를 감행 하였던 것입니다. 그녀의 언어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과 "언어의 한계가 바로 내 세계의 한계"라고 토로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그 사이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줄도 아는 그녀였고요. 그녀는 두 권의 시집밖에도,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독자들의 호응이 높았던 단편집 <삼십세>나 <동시에>, 그리고 새로운 20세기의 러브스토리라는 찬사를 받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진 장편소설 <말리나>, 50년대, 60년대 텔레비젼이 보급되기 전 대중들의 사랑을 받던 라디오 방송극 <맨하탄의 선신> 등 다양한 쟝르의 글을 쓴 작가였습니다.

그리고 독일 프랑크프르트 대학의 문학부 강사로 강단에도 섰으며, 비인 방송국에서 편집인으로 일하기도 하였지요. 30세를 전후하여 그녀는 모든 직업을 뒤로 하고 글쓰기에만 몰두합니다. 여행을 좋아했던 그녀는 직장을 그만 둔 후로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였는데, 특히 로마에 자주 머물곤 하였지요. Max Frisch(1911 - 1991)와 사랑에 빠집니다.

노벨상후보에도 여러 번 오른, 그러나 매우 복합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반복이다" 라고 스스로 고백할 정도로 끊임없는 변화의 자아를 추구하던 사람이었지요. 그는 인간 정체성의 문제를 주로 다룬 작가이지만, 삶과 문학의 허구를 구분하지 않아 Bachmann과의 사랑을 <내이름은 간텐바인> 이나 <몬타우크섬의 연인들>이라는 소설에다 그대로 다 적어 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1958년부터 62년까지, 즉 그녀의 나이 32세에서 35세이고 그의 나이가 47세에서 50세에 이르는 4년간 거의 동거에 가까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관계가 Max Frisch에 의해 파경에 이르자 그녀는 2년여간 글을 쓰지 못 할 정도의 정신적 혼란과 깊은 정체감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말했던 그녀는 끝난 사랑의 곤궁함을 벗어나 이미 언급한 단편집과 장편들을 쓴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의 사랑이 끝난 후 그녀는 더 이상 "시"는 쓰지 못합니다.

그와 더불어 그녀는 시도 잃은 것입니다.

"가장 행복한 것은 피곤하게 되어 저녁이면 쓰러지는 것, 그리고 아침 첫 햇살과 함께 밝게 되는 것"이라고 그녀의 시에서 작은 소망을 밝힌 그녀는 그런 소박한 일상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47세 되던 어느 가을날, 로마의 한 모텔 에서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화재로 목숨을 잃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두고 자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평소 담배를 무척 즐기던 그녀가 담뱃불을 소홀히 하여 화재가 났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의 시간, 유예된 시간, 비오는 날이면, 그녀가 썼던 단편 <운디네>의 주인공 물의 정령 운디네처럼 잃어버린 연인 "한스"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함께 실려, 불가능의 한계에서 가능성의 원을 넓혀가려 애를 쓴 그녀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오는 듯 합니다.

"우리는 한계내에서 완전한 것, 불가능한 것, 도달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사랑이든 자유이든 또는 순수한 위대함이든, 그 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것을 가지고 불가능에 부딪히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가능성을 넓혀 나가는 것이지요."

- Iris -

Marianne Faithful - Who will take my 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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