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시론

인생사용법과 사회처방전―밀레니엄 이전의 독일시 경향

자크라캉 2007. 6. 25. 22:26
인생사용법과 사회처방전
―밀레니엄 이전의 독일시 경향
서장원
(고려대 독문과 교수)


시인은 시를 찾는 사람이다. 시를 찾아 떠나는 길에는 반드시 언어가 있다. 시인과 함께 길을 동반하는 언어는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자기가 습득한 자기와의 동일체이다. 하지만 타자의 언어도 한번쯤은 고려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길을 찾는 자에게 타자의 언어는 자기의 모습을 한번 반성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구실을 자주 제공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언어는 많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외국어로 된 시이다. 본 글은 2000년대 독일의 작가나 작품을 가까운 거리에서 이해하기 위한 전초작업의 하나로 밀레니엄 이전의 독일시 경향을 조망해 보려는 소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1. 인생의 참의미와 사회변혁 사이에서

외국의 시를 개괄한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왜냐하면 해당 문학사에 대한 기본 소양은 물론 정치 사회 문화 역사적 배경에 대한 복잡한 이해가 항상 전제조건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세기 독일의 문화와 역사는 동시대를 살아온 외국인들에게도 생생한 세계사의 중요한 한 단면을 제공했다는 의미에서 타자보다는 멀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특히 ‘1945년’과 ‘전쟁’이라는 화두는 굳이 독일인이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번은 간단하게 혹은 진지하게 떠올려 볼 수 있는 테마이다.

1945
전쟁 전쟁
전쟁 전쟁
전쟁 전쟁
전쟁 전쟁
전쟁 오월
전쟁
전쟁
전쟁
전쟁
전쟁
전쟁
전쟁
―에른스트 얀들, 「한 전환기의 표지」 전문, 1968

이 시는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구체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시학적으로 볼 때 언어는 실험적이며 동시에 다다이즘과 연결 고리를 맺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인이 사용한 시어는 “1945” “전쟁” “오월”의 세 단어뿐이다. 그림으로 그려진 시에서 우선 “1945” 만큼 강력하게 눈길을 끄는 것은 왼쪽으로 길게 내리뻗은 “전쟁”이라는 글자 무더기의 기둥과 오른쪽의 내리뻗치다가 중단된 “전쟁”이라는 문자들이다. 정확히 왼쪽은 전쟁이 12개이고 오른쪽은 4개의 전쟁이다. 그리고 오른쪽의 4개의 “전쟁”은 “오월”로 마감되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난 12개의 전쟁과 4개의 전쟁은 12년과 4개월을 의미한다. 1945년은 1933년에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지 12년째가 되는 해이고 연합군에게 독일이 항복한 것은 정확히 그해 5월 8일이다. 이러한 시각적인 구체시는 특별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제로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나 1945년의 독일 상황을 아는 사람은 전쟁이 얼마나 비참했다는 것을 그림으로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오른쪽 백지의 하얀 공간을 누구나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0여년이 넘는 1968년에 왜 시인이 굳이 언어와 개별어휘를 바탕으로 독자에게 주위와 반성을 강요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시의 주제는 내용이 아닌 시 제목과 발표 시기에 있다는 것을 독자는 쉽게 깨달을 수가 있다. 시인은 68년을 ‘한 전환기의 표지’로 삼고 있다. 시인이 68년을 전환기로 표방하고 싶은 직접적인 배경은 1945년 5월 8일이 독일인에게 패전인지 아니면 해방된 것인지 불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에른스트 얀들 시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고 68세대로 불리는 당시 젊은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 당시까지는 사회의 전통적인 도덕과 질서 혹은 체계를 위해 개인이 무시되고 자유는 억압받던 시대였다. 아버지 세대에 의해 저질러진 독일인들의 나치만행과 전쟁에 대한 원죄문제 등 구세대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채 논의가 중단된 지 오래된 상황이었다. 68세대는 68년을 전환기로 삼아 사회를 변혁시키려 했다. 그들은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권위주의를 거부하며 체제에 도전했다. 그리고 환경운동, 남녀권리의 평등, 빈곤과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 등이 이때부터 주요쟁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하는 사회문화혁명은 조직적인 역량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에만 비중을 두지는 않았다. 그들은 사회변혁을 위한 저항정신을 일상화한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생의 참의미와 개인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욕망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찾아 각 개인의 주관으로 빠져든 또 다른 일면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들은 인생의 참의미와 사회변혁의 발판을 구축한 새로운 세대였다.

2. 외적인 치유와 상처로 남은 현실

68세대의 출현을 축으로 볼 때 20세기 독일의 역사는 어찌 보면 세대와 세대로 이어진 인간과 사회의 연결고리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숙명적으로 전쟁세대 (1935~1945)를 배출했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은 전후세대 (1945~1955)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처럼 전쟁세대와 전후세대 그리고 68세대라는 역사적 현실에서 도출해낸 시대적 명칭은 ‘세대’라는 이름하에 시대와 사회를 특징지려는 새로운 공식의 법칙을 탄생시켰다. 예를 들면 68세대 직전의 사람들은 회의적인 세대(1955~1965)이고, 68세대의 다음은 X세대(1970~1980), MTV세대 (1980~1990), 인터넷세대 (1990~2000), Y세대(2000~ )로 정돈되었다.
그러나 68세대 이후는 단체나 무리에 따라 제각각의 형태로 나타났고 본인들이 직접 명명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싱글세대는 1947년부터 1965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로 68세대가 되기에는 너무 어리고 폭스바겐 골프세대가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든 사람들을 일컫는다. 폭스바겐 골프세대는 1965년부터 1975년 사이에 서독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다음은 1990년에 발표된 한 싱글세대의 작품이다.

몇 개 남은 마지막 머리카락을 없애라.
인간은 두개골과 뇌라고들 한다.
진단: 해가 갈수록 오그라들었다.
하늘의 달과 나의 별자리는.

전망은 항상 마찬가지다.
경치: 나무들은 아마도.
인간: 처음엔 젖먹이 그리고 나서는 시체.
별은 영원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창백한 피부색깔의 한 환영.
오래 전에 너무 매끄럽게 완성되었다.
한 생채기, 하나의 균열, 하나의 흉터:
고친 자화상
―한스 울리히 트라이헬, 「고친 자화상」 전문, 1990

「고친 자화상」은 1990년에 발간된 한스 울리히 트라이헬의 시집 『며칠이 지나도 기적은 없다』의 제 4장 「대도시들에서」에 수록된 작품이다. 트라이헬은 1952년생으로 전쟁과 전후세대를 부모로 둔 서독 경제부흥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싱글세대 작가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시인 자신의 정체성 문제와 자기 개인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일상의 체험을 묘사하고 있다. 시적 대상은 현재이지만 장소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독자로서 굳이 장소를 고려해 보고 싶은 욕구는 90년이라는 역사적인 숫자 때문이다. 90년은 동ㆍ서독이 통일된 해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통독이 된 지 며칠이 지나도 어느 장소 누구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는지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는 가정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전개는 다른 한편으로 시 해석에 있어 90년의 전환기에만 국한시킬 필요 없이 시간적인 영역을 좀 더 넓혀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게 만든다. 즉 ‘며칠이 지나도 기적은 없는’ 것이 아니라 몇 년이 흘렀어도 혹은 통일이 되었음에도 ‘기적은 없다’라는 가능성의 해석이다. 이러한 가정은 이 시 자체보다도 본인의 대표적인 소설인 『실종자』에서 받을 수 있는 암시이다.
「고친 자화상」은 주어진 현실을 ‘가정-진단-전망’의 의학적인 단계개념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시인은 시적 자아를 “해가 갈수록 오그라들”은 심각하고 암울한 상황으로 진단하고 있다. 자화상을 고쳐야할 이유를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수술을 한다 하더라도 “전망은 항상 마찬가지”로 시인은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경치”와 “인간”의 전망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독자는 이 시가 시적 자아의 개인적인 초상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독일의 현실과 역사에 대한 반성을 시적 전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경치” 부분에서는 환경문제를 그리고 인간의 문제에서는 바로크적인 ‘메멘토 모리’(죽음을 생각하라!)를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시인은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카르페디엠’(오늘을 즐겨라!)의 상태로 머물지 않고 “창백한 피부색깔의 한 환영”인 자화상을 “매끄럽게 완성”하는 의지를 보인다. 그러나 고친 자화상에 남은 것은 “한 생채기, 하나의 균열, 하나이 흉터”이다. 시가 발표된 1990년의 역사와 현실을 감안한다면 동ㆍ서독 통일을 통해 외적인 것은 치유가 되었지만 남은 현실은 상처뿐으로 해석 해 볼 수 있다.

3. 조롱받는 사회와 포기할 수 없는 희망

1968년 이후 2000년이 되기까지 독일시의 대체적인 발전경향을 주제별로 개괄해 보면 ‘반전 및 평화시’ ‘정치시’ ‘사회비판’ ‘자연시’ ‘여성시 혹은 ‘섹스’ ‘연애시’ ‘패러디 그로테스크 난센스 시’ ‘시작법Ars Poetica 시’ 등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그 이외에 시인들의 주요 관심분야로는 ‘동ㆍ서독시’ ‘분단과 베를린 장벽’ ‘시와 정치’ ‘신주관성’ ‘시의 일상성’ ‘시어 및 언어에 대한 회의’ ‘시인의 당위성’ ‘시의 형식’ ‘독일시의 국제적 위상’ 등등이 있었으며 동시에 이러한 과제들은 이 시대를 살아간 시인들이 중심 화두를 형성했다.
이제 정치 사회적으로 그 동안 분단되었던 나라는 통일이 되었고 이와 함께 20세기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면 밀레니엄을 맞이하며 독일의 시인들에게 비친 독일의 사회와 현실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그들은 어떠한 대상을 찾아 시를 만들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젊은 시인보다는 20세기를 60년 이상 살며 경험하고 관찰해온 1937년생의 중후한 한 시인인 로버트 게른하르트의 작품을 예로 선정해 보기로 한다.

권력, 망상, 탐욕, 종교를 충분히 집어 들어
사기, 기만, 위트, 지식으로 섞으시오:
그러면 피, 땀, 눈물, 콧물, 오줌은
전쟁, 방화, 학대, 살인, 약탈로 우려내져

부끄러운 듯 병을 채웁니다. 끓인 액을 잘 젓고,
신과 함께 부어넣어 예술로 맛을 보고,
지옥의 불안과 구원의 말씀으로 묽게 만듭니다.
그리고 수단, 의도, 의미, 목적의 용도에 따라 장식을 합니다.

인간들아, 어떠한 술인가! 우리가 마시기 이전에
최후의 질문을 위한 마지막 시간은 남아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신이 될까? 그것이 우리에게 동물이 될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 곧 시간은 울릴 것이다!
잔들을 가져와라 그리고 시간을 놓치지 말라:
얼른 따르라 그리고 아주 차가운 것으로 제공하여라.
―로버트 게른하르트, 「“밀레니엄” 칵테일 혹은 1999년 송년회를 위한 우리의 건배」전문, 1999.

이 시는 전통적인 소네트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문체상으로는 풍자와 조롱을 사용하고 있다. 시인은 지독한 풍자와 비꼬임 속에 조롱받는 사회를 칵테일 제조사용법을 이용하여 격정적으로 독자들 앞에 거울로 들이대고 있다. 거울에 비친 밀레니엄시대의 대표적인 부조리 집단 및 인간의 욕구는 “권력, 망상, 탐욕, 종교”이고 이들이 사용하는 결함 있는 도덕성은 “사기, 기만, 위트, 지식”이다. 결함 있는 현실은 “전쟁, 방화, 학대, 살인, 약탈”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결과는 일상의 언어인 “피, 땀, 눈물, 콧물, 오줌”이 되어 인간 개인을 엄습해 온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시인의 급박한 인식은 결함 있는 도덕과 현실을 책임 없이 고발하고 개선하려는 소박한 목적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시인은 웃기는 현실과 대화하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시인이 실제로 의도하는 바는 이러한 사회가 계속해서 조롱받는 상태로 진행되지 않기를 바라며 시를 사회처방전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적인 유희와 위트 그리고 코믹함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게른하르트는 풍자와 조롱 그리고 패러디로 시작을 일관해온 작가다. 조롱과 풍자의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사회를 비판할 수 있다는 능력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인들이 존재하는 한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은 값어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맺는말

20세기 중후반부터 밀레니엄 전까지 독일의 시편들을 살펴보면 독일시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시를 통해서 인생사용법과 사회처방전을 작성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적 현실이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지 절감한 시인들이다. 이러한 타자의 모습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또 다른 타자에게 반성과 더불어 새로운 시의 길을 찾아 떠나도록 재촉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