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시론

시인 김지향

자크라캉 2006. 7. 26. 12:05

 

시인 김지향

 

 

1937년  일본 큐슈에서 태어났다.경남 양산에서 성장했고, 홍익대 및 단국대 대학원을 거쳐 서울여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집「병실」(1956)발간 후, 시「별」을 세계일보에 발표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아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시인협회 자문위원,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평의원,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거쳐 한세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시집「막간 풍경」「빛과 어둠 사이」「사랑 만들기」「사랑, 그 늙지 않는 이름에게」「세상을 쏘다」「위험한 꿈놀이」「때로는 나도 증발되고 싶다」등 23권, 및「김지향 시선집」과「A HUT IN A GROVE」,에세이집, 시론집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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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별」을 세계일보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지향 시인. 지난 10월 15일 박인환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김지향 시인은 43년 동안 <병실>, <유리상자 속의 생> 등 20여권의 시집과 에세이, 시론집을 써온 중견작가로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번 시집은 급속도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의식이나 생활습관은 여전히 고정관념에 휩싸여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의식을 변화 또는 승화시키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다. 또한 이 시집은 '천성적일 수도 있고 오랜 시작에서 오는 노력의 소산일 수도 있는 감각의 발달함'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시편들 (「아침 산행 첫째날」,「새로 그린 그림 한 장」,「풍경읽기」,「새벽」)을 통해 세상을 향한 그녀의 다양한 시각과 다층적 정서를 힘껏 펼쳐보인다

 

21세기 이 시대 인류는 리모콘과 영상 문화, 컴퓨터 커뮤니케이션의 체제 안에 놓여 있고, 세계인식의 원리와 양식의 변화는 경이롭다. 모더니즘 시학을 부정적으로 계승한 포스트모더니즘 시학은 지금 주체의 해체와 미학적 대중주의 현상을 과시한다. 또한 소박한 서술체와 산문지향의 탈기교적 시편들이 대중 독자들에겐 더 친근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최근시는 디지탈 세대가 아닌 아나로그 세대임에도 그녀의 시세계가 시대의 흐름에 크게 변화된 일면을 반증하고 있다.
모더니즘 시학의 감수성과 지성의 엘리티즘은 리얼리즘과 형이상학 양쪽의 비난에 직면한다. 특히 개념적 진술 저 너머에서 고고히 빛나는 이미지즘의 감각적, 즉물적 언어 기교는 때로 ‘수사(修辭)의 성찬’으로 폄하된다. 생명의 충족성이나 이데화한 미감(美感)에 무심한 채 존재나 역사의 내면문제 의식이 없이 감성이나 지성의 생경한 끝자락을 맴돈다는 비판에서 모더니즘 시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 시단의 거인 김지향 시인의 「리모콘과 풍경」은 감성 미학의 극치를 가늠하며, 문명 비판의 정신 지향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한국 모더니즘 시학사의 한 도전적 의의에 갈음된다.


그녀의 김지향의 시집 「리모콘과 풍경」은 시대성을 환유한다. 리모콘은 영상 매체의 총아인 텔레비전을 비롯한 전자 기기를 원거리에서 조종하는 이 시대문명의 이기(利器)다.
(리모콘과 풍경」에서 리모콘은 이 시대 문명을 콘트롤하는 시적 변용의 매개자다. 따라서 김지향 시인의 ‘풍경’이란 이 시대 도회를 중심으로 한 세계상으로서의 정경이다. 그 정경이 김지향 시의 시적 자아가 조작하는 리모콘을 통하여 변화무쌍한 감성과 지성의 세계로 변용된다. 먼지와 소음에 부대끼는 빌딩숲 사이에서 창조적 에스프리를 새삼 가늠하는 그의 역량은 경이롭다.

세상은 시다.

(중략)

모양이 각기 다른 명찰을 달고 앉아 있는 건물들, 지퍼를 열어보면 차곡차곡 세월에 절인 핏빛 삶을 담은 생수 같은 시가 불쑥 나온다. 나는 날마다 삶의 시를 구경하며, 살아서 솟구치는 생것의 시를 만져보며 떠나가는 시간의 손에 한 잎씩 쥐어 보낸다. 얼마나 많은 시를 얼마나 많은 시간 속으로 보냈는지 아직 계산은 안 했지만 새로운 날들은 새로운 시를 보여줄 것이다.

세상은 시를 품고 있는 창고다.
― ‘세상과 시’에서

낭만주의 시학으로 보면 21세기 도회 문명의 이 시공(時空)은 참으로 비시적이다. 차가운 빌딩숲의 기하학적 조형은 반생명적 공간 외포(空間畏怖, space-shyness)를 환기한다는 T. E. 흄의 ‘사색’의 아픈 비판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김지향 시인의 감성과 지성이 빌딩숲의 지퍼를 열고 그것의 내면을 투시하여 내는 데서 도회의 반생명성은 극복될 기미를 보인다.
거기서 ‘세월에 절인 핏빛’의 농도가 짚이고, 그것이 곧 ‘생수 같은 시’로 탄생하는 시간적 존재의 존재성이 부각된다. 이로 하여 우리는 김지향 시집 「리모콘과 풍경」의 이미지가 도시의 다성악 ․ 인터넷 ․ 길 ․ 시간 ․ 바람들로 하여 전경화(前景化)해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것은 내면에 ‘핏빛 치열성’을 함축함으로서 역동적 이미저리로 떠오르며 생명력을 환기한다.

틈새를 내주지 않는다
눈 부라린 차량들만 땅뺏기 하듯
서로 시간의 끈을 꼬나쥐고 부르릉대는 길
지진 일보직전처럼 초조하다

빨대 같은 손가락 내밀어
차량 위로 길을 내고 싶은 사람들의 조급증이
길에 촘촘히 박혀 있다

지성과 결부된 모더니즘 시의 표상은 단순한 도상(icon)이나 지표(index)임을 넘어 상징을 가늠한다. ‘길’은 개인의 삶과 역사가 전개되는 현장이다. ‘차량’은 그 주체이고, ‘시간’은 역사다. ‘시간’과 만난 ‘차량’은 역사적 진보주의의 표상이다. 러셀과 르클레르크의 ‘게으름 찬양’이 그랬듯이. 이 시의 자아도 시간과의 불화관계에 있다.

땀 범벅의 푸석푸석한 세상
죽음처럼 늘어져 누운 길을
나는 오늘 눈 꾸욱 감은 채
살아 있는 만능 리모콘으로
말끔히 꺼버린다

내일의 생기를 위해.
― '길과의 싸움’에서

기계문명이 시간과의 싸움으로 빚어낸 반생명적인 ‘풍경’을 시의 자아는 리모콘으로 끈다. ‘내일의 생기를 위해’라는 직설적 진술까지 마다않는 그의 의도는 비시적이라 할 만큼 단호하다. 따라서 김지향 시의 풍경, 곧 화상(畵像)은 텔레비전 화면을 넘어 이 시대 사회 자체임이 드러난다.
김지향 시의 이미저리는 역동적이다 못해 격렬하다. 뇌성처럼 요란하거나 비수처럼 날카롭고, 바람과도 같이 강렬하다. ‘시퍼런 칼날을 휘날리며 번개가/머리 위에서 바람과 칼싸움을 한다’(어느 날의 경주), ‘믿어주지 않는 나뭇가지가/오늘 보니/바람을 마구 때려 패대기치고 있네’(나뭇가지에 매맞는 바람)에서 보듯이, 이미저리가 전율에 찬 치열성을 띠고 있다.

억새는 머리칼로 허공을 면도질한다
울퉁불퉁 등 굽은 허공을 가지런히 깎고 나서
허공 아래 웅크린 사람의 검은 욕망도 깎아낸다

억 년을 씻고 또 씻어
피가 말라버린 하얀 가슴의 억새
하늘에다 가슴문 열어 놓고 호수의 슬픔을 송신하려지만
바람은 갈고리를 쏘아 억새의 머리채를
땅으로 끌어내린다

(중략)

하얀 가슴의 억새
또는 은빛의 면도칼.
― ‘억새 또는 하얀 면도칼’에서

갈대의 고전적 이미지는 가뭇없다. 기상천외의 낯선 이미지가 독자를 경악케 한다. 신경림류의 애잔한 파토스의 기미를 씻은 예각적 지향성이 단호하기까지 하다. 김지향 시의 ‘억새’는 이제 울지 않고. ‘은빛 면도칼’의 금속성 이미지로 거듭나 있다.
모더니즘 시의 담론은 매우 자주 ‘의사 진술(擬似陳述)’과 ‘낯설게 하기’의 절정을 지향한다. 김지향 시는 그 한 전형이다. ‘빌딩 목으로 넘어가는 다리 짧은 시간’(리모콘과 풍경), ‘거울이/내일을 쓸어버린 나를 들고 있다(거울) "길이 길의 몸 속에 내 발을 꽂아준다’(길이 길을 버리다), ‘바람이/다 뭉그라진 갈퀴를 세우고’(어느 날의 경주), ‘겨우내 얼어붙었던 피톨이/나무의 정수리를 뚫고 풀려나는 소리’(오늘 문득), 등 그의 낯선 의사 진술은 절묘하다.
김지향 시인은 향수 짙은 아어(雅語)와 자연 서정, 신앙의 텃밭에서 성장했다. 그런 그가 이제 이순(耳順)에 들어 변신을 시도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모더니즘 시는 ‘좁은 길’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가는 넓은 길’에서 그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소외를 자처한 그의 변신은 모험이다.
김지향 시는 문명 비판의 어조를 놓치지 않는다.

내 눈이 바다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시대를 하늘에 구겨 넣고
하늘이 되어버린 새가
커다란 블렉홀을 몰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도 쾌속정은 도심을 향해
쾌속으로 달리는
이 완벽한 무지가
오늘은 신비로울 뿐이다
블랙홀과 언제 부딪칠지 모르는.
― ‘쾌속정을 타고’에서

시인은 이 시대 문명사의 향방을 묻고 있다. ‘바다 밑을 다 뒤져봐도 신비로운 사건/하나 나오지 않는 이 시대’에 대한 비판 의식이 엿보이는 시다.

오늘도 나는 리모콘으로 세상을 연다.

(중략)

나는 다시 리모콘의 다른 단추를 누른다
장면이 바뀌지 않는다
리모콘도 들어가 보지 않은 길 끝 세상,
‘내부 수리 중’이란 쪽지가
커다랗게 나부끼고 있을 뿐
사람들은 길 끝에서 하얗게 기다리고 있다.
― ‘내부 수리 중’에서

리모콘으로도 열리지 않는 ‘길 끝 세상’은 어디인가? 거기에는 ‘내부 수리 중’이란 쪽지가 적힌 세계 밖의 ‘길 끝에서 하얗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모더니즘은 신화가 소거된 합리주의적 사고의 소산이다. 그럼에도 T. S 엘리어트의 경우처럼, 모더니즘 시는 종종 신화적, 종교적 초월성을 향한 어조를 놓치지 않는다. 김지향의 시에서 ‘산딸기 익는 유년의 언덕’(산딸기나무), ‘귀가 몽그라지는 마을 길’의 고향과 ‘하늘 지향’의 어조가 끊임없이 감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죄로 다져진 돌덩이 삶.
돌덩이 깨는데 평생이 드는데,
평생을 벗는데는 한 순간이라니!)

나는 하늘 열쇠를 얻으려고
오늘도 가을이 깊은 외곽지대로 간다
하늘에 닿아 있는.
― ‘외곽지대로 간다’에서

욕망의 묵은 때가 낀 ‘세상의 자물통’을 ‘차 던지고 하늘’에 가 닿을 그 경계선에 김지향 시의 화자는 서 있다. 이는 ‘문 닫히기 전 하늘의 비밀궁전에 들어가/생명을 주는 전능자의 품에/닿았으면 좋겠다’(종이학)는 수직적 초월과 구원 의식에 사무친다.
절대주의와 이성, 주체와 엘리트주의가 도전을 받는 이 시대의 문명사에 대한 김지향 시의 모험에 찬 응전력, 그 속내는 이것이다.


김지향 시인의 「리모콘과 풍경」은 감성 미학의 극치를 가늠하며 문명 비판적 거대 담론을 내포하는, 모더니즘 시학의 21세기적 부활 선언에 갈음된다. 그의 시가 전율에 찬 낯선 이미저리와 언어도단의 의사 진술로써 창조적 상상력의 절정에 자리해 있다는 평자의 판단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는 감성의 촉수를 치열하게 번득이면서도 시상(詩想)의 깊은 바닥을 확인하는 성실성과 저력을 간단없이 보여준다.
그의 이미저리의 격렬성은 두 가지 기능에 값한다. 우선 ‘파브르의 개’에 비유되는 리모콘시대 인류의 비시적 타성(非詩的 惰性)에 대한 경악 충격요법(驚愕衝擊療法)으로서 그의 시는 유효하다. 또한 20세기 이 땅의 모더니스트 김광균, 정지용, 장만영류의 여성적 이미저리와의 결별 선언에 값한다.
이 시대 문명사의 문법이 된 해체주의 ․ 대중주의의 주류에 맞선 김지향 시인의 이 고고한 응전은 거듭 말하거니와 한 큰 모험이다. 이 모험이야 말로 김지향 시인을 우리 시사의 한 거인으로 자리매김하는 한 사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일임에 틀림없다.
김지향 시인은 그의 거시적 어조와 거대담론, 문명사적 비전 변이와 노작(勞作)의 큰 궤적 위에서 우리 시사의 거인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노천명, 김남조 시인을 잇는 20세기 우리 여류 시사의 거봉이다. 그는 어조의 치열성과 격렬한 이미저리, 문명사적 거대 담론으로 하여 ‘여류’라는 프리미엄을 떨친 최초의 한국 여성 시인이라 할 까닭을 「리모콘과 풍경」은 함축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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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디에 있을까/김지향

 

 

소나기 온 밤 집 없는 도둑고양이, 어둔 헛간에서 내
신경을 긁어댔다 나는 노트북을 들고 깜깜한 어둠 속
을 잠입했다 순간, 차량의 전조등 같은 사파이어가
잽싸게 내 눈에 발을 넣었다 나를 신어볼 눈치였다
나도 잽싸게 인터넷 사이트를 열었다 고양이 눈동자
가 왜 사파이어인지 인터넷 만물박사에게 물어볼 참
이었다 만물박사를 깨우는 사이 사파이어는 한바탕
잠든 공기를 뒤흔들어놓고 뒷구멍으로 내뺐다

창 밖엔 소나기에 섞여 번개가 몇 차례 창문에 불똥
을 갈겼다 어둠에 잠겨있던 나는 문득 고양이가 가엾
어졌다 (번개에 명중되었을지도 모를 집없는 도둑 고
양이!) 요 며칠 툭,부러뜨려 놓았던 여린 감성이 슬그
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감성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인터넷 속에서 '마음의
소재지를 찾아보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부에 누워
있는 내장 속속들이 잎사귀를 들춰보며 조직검사하듯
사이트와 사이트를 한 잎 한 잎 열어제쳤다 (처음에 ‘
마음‘은 무엇이 어떻게 짜깁기 되었을까?)

창밖은 벌써 뿌연 새벽으로 갈아입었다 다시 번개가
창문에 불꽃을 질렀다 언뜻 언뜻 눈을 껌벅이는 벽걸이가
나체를 드러내고 나를 놓아준 어둠이 창밖으로 발을 옮기
는, 하늘엔 간간이 꼬리뿐인 전기 코드가 빗금을 긋고
간다 바로 그때 잃어버린 고양이가 야~웅, 자기의 건
재함을 알려왔다 아, 그렇군! 잃어버린 생각을 돌려준
고양이, 우레 속에 야영한 그가 반가웠다 이 반갑다는
‘마음‘이 또 어디에 감춰져 있을까 생각 속에 있을까
생각은 늘 잡동사니로 가득한 머리 속에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