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속 詩

의자 / 김명인 <길의 침묵 >시집 중에서

자크라캉 2007. 3. 1. 20:38

 

                            사진<다음지역포토>에서

 

/ 김명인

 

창고에서 의자를 꺼내
처마 밑 계단에 얹어놓고 진종일
서성거려온 내 몸에게도 앉기를 권했다
와서 앉으렴,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때로는 창고 구석에 처박혀
어둠을 주인으로 섬기기도 했다
마른장마에 잔 비 뿌리다 마는 오늘
어느새 다 자란 저 벼들을 보면
들판의 주인은 바람인가,
온 다리가 휘청거리면서도 바람에게
의자를 내주는 것은
그 무게로 벼를 익히는 것이라 깨닫는다
흔들리는 생각이 저절로 무거워져
의자를 이마 높이로 받들고 싶어질 때
저쪽 구산 자락은 훨씬 이전부터 정지의 자세로
지그시 뒷발을 내리고 파도를 등에 업는 것을 본다
우리에게 어떤 안식이 있느냐고 네가
네번째 나에게 묻는다
모든 것을 부인한 한낮인데 부지런한
낮닭이 어디선가 길게 또 운다
아무도 없는데 무엇인가 내 어깨에 걸터앉아
하루 종일 힘겹게 흔들린다


*출처 : 『길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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