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으로 쓰는 시 - 이경림

이미지들 -시론으로 쓰는 시 / 이경림 | 詩 창고 2006/04/02 11:18 http://blog.naver.com/gulsame/50003024160 이미지들―시론으로 쓰는 시 / 이경림   구멍  르네 마그리뜨의 그림 속에 모자를 쓴 한 남자가 돌아서서 창 밖의 바다를 보고 있다. 옆에는 그의 실루엣이 있고 그것은 뻥 뚫려 있다. 뚫린 구멍인 그것도 모자를 쓰고 바다 쪽으로 서 있다. 실루엣인 그것은 現在 구멍이므로 자신 속에 끌어들인 출렁거리는 바다와 구름 한 채를 다 보여주고 있다. 그와 그의 실루엣인 구멍 사이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서로를 볼 수 없지만 그들이 나란히 서서 같은 바다를 보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은 그들의 세계인 그림 안에 있고 나는 또 다른 세계인 그림 밖에서 그의 실루엣 속 구멍에 들어가 논다. 실루엣의 몸 속 바다에서 헤엄치며 구름을 과자처럼 뜯어먹는다. 모자 모양의 검은 구멍을 슬쩍 벗기니 그의 몸인 구멍에 갇혀 있던 바다와 하늘이 확 솟구친다. 솟구친 하늘과 바다가, 그 속에서 헤엄치던 나와 갈매기가 무한천공 속으로 후루룩 빨려 든다. 무섭다. 나는 황급히 다시 모자를 씌운다. 그러자 구멍은 다시 좀 전처럼 바다를 보고 서 있다. 구멍 속에는 거짓말처럼 갈매기가 날고 구름이 과자처럼 바스락거린다. 곁에는 여전히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존재  y가 말기 암으로 시한부 생을 살고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소실점에 겨우 붙어 있다. y와 나는 가까이 살지만 사실은 한없이 멀리 살기도 한다. 그와 나 사이에는 뻥 뚫린 구멍인 하늘이 있고 그 속에 집, 길, 나무, 산, 물, 사람, 새, 구름, 바람, 비, 흙, 개미, 쥐, 고양이, 이름 모를 털벌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병치되어 있다. 그것들 모두 제 각각 자신의 소실점에 겨우 붙어 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누구도 거기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한 공포보다 자신이 붙어 있는 소실점이 너무 작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실 목숨 붙어 있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소실점 겨우 붙어 있는 것들이다. 모든 존재는 흘러가는 것 같지만 고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모두 어느 날 아득히 한 소실점에서 솟아올라 또 어느 날 문득 그 자리에서 소실되어 보이지 않게 고여있는 것인지 모른다. 투명한 연체동물인 시간이 흐느적거리며 몰려와 제각각 제 소실점에 간신히 붙어 있는 것들을 먹어치우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동안 그것의 뱃속에서 잠깐 어른거리다 사라지는 것들을 우리는 '존재'라고 부른다.   뱀  티비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 속에는 지금 뱀 한 마리가 흘러가고 있다 어느 나무에서 흘러내려 바위와 바위 사이를 지나 마른 뿌리들이 뒤엉켜 있는 사이를 지나 어디론가 자꾸 흐르고 있다 자세히 보니 길다란 김밥 한 덩이 같은 것이, 아니 둘둘 말린 물 한 덩어리 같기도 한 것이 어디론가 흐르고 있다. 그는 지금 시간이란 연체동물에 싸여 흘러가고 있다 그 속에서, 김밥 한 덩이 같은, 둘둘말린 물 한덩이 같은, 뱀 한 마리가 다 소화되기까지 저 기괴한 흐름은 계속될 것이다. 그 길에서 나무들은 분수처럼 솟구치며 어른거리고 계곡은 아래로 아래로 굽이치며 어른거리고 밤마다 집들은 속에 불항아리를 담고 어른거리며 그 사이에서 온갖 날 것들은 윙윙거리며 어른거리다 사라진다. 저 광활한 한 소실점의 밖으로.   말더듬이  어느 날 한 드라마 속에서 말더듬이를 보다가 '가장 뛰어난 말솜씨는 더듬거리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한 적 있다. 더듬거림 속에는 채 뛰쳐나오지 못한 말들이 웅크리고 있다. 모든 말들은 내 뱉는 순간 천하고 되바라진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된다. 내 것이 아니었던, 현재의 이전, 그 이전의 것이었던, 나의 존재가 현존의 형태로 뭉쳐지기 전, 공기 속을 수세기 동안 떠돌던 말 같은…… 혹은 말 같지 않은…… 것들이, 현존의 내가 욕망하는 말들 사이에 슬쩍 끼어들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올 때의 당혹스러움을 더듬거림은 다독거려 준다. 더듬거림 속에는 더듬 더듬 가는 길의 멀고 길고 하염없음…… 같은,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꽃병  거실 구석에서 빈 꽃병 하나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따금 누군가 들고 온 꽃들이 꽂혔다 사라지고 그 속에 어둠이 가득 찼다 사라지고 입구에서 잠깐 씩 햇빛이 출렁거리다 사라지는 동안, 그 위로 먼지 같은 고운 것들이 보이지 않는 더께를 이루며 꽃병의 나이를 만들 동안, 꽃병은 그 자리에서 조금씩 표정을 바꾸면서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색깔을 바꾸면서 그저 서 있었던 것. 오늘 아침,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눈길이 꽃병에 철썩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안광이 저 구석에서 꽃병과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니! '나'는 언제나 모든 것을 '내가 보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앵글을 거꾸로 돌려놓고 보니 내가 보는 것들 보다 훨씬 많은 것들에 의해 '나'도 보여진다는 사실이 보인다. 그 많은 것들 중에 하나, 혹은 둘 혹은, 셋…… 그렇게 소수의 것들만이 선택되어 나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는 사실이 보인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다 보았다고 말하고 생각해 왔다.   유리와 물  유리와 물은 제 속을 다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닮았다. 물이 흐느적거리는 유리라면 유리는 규정된 틀 속에 갇힌 물이다. 물이 물렁물렁한 유리라면 유리는 딱딱한 물이다. 물이 흐르는 유리라면 유리는 우두커니 서 있는 물이다. 흐르는 유리는 붙박인 것들을 온 몸으로 통과하며 되비추고, 우두커니 굳은 물은 흐르는 것들을 잠시 불러 세워 우두커니 서 있게 한다. 유리 속에 들어간 것들은 모두 잠깐! 우두커니 멈추어 서야 한다. 그러다 마침내 창틀에 부딪치며 아득히 흘러가고 만다. 갑자기!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싶다 '흘러 가는 저 유리에 몸 담그고 온 몸으로 흔들리는 물풀들처럼……' 그래, 유리와 물은 닮았다, 유리가 썩지 않는 물이라면 물은 깨지지 않는 유리이다. 그것들은 모두 멈춘 듯 흐르고 텅 빈 듯 가득하다.   향기  유월이었다 줄장미가 담장 가득 홍홍거리고 있었다. 텅 빈 골목에 줄장미들과 나뿐이었다.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자꾸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누군가 자꾸 등을 툭툭 쳤다. 누군가 자꾸 휘파람을 불었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시끄러웠다. 턱턱 부딪쳤다. 가만히 보니 장미 송이 속에서 가이없이 넓은 신작로가 넝쿨손처럼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 길에 겨자씨보다 작은 것들이 휘파람을 불며, 퉁소를 불며, 가야금을 퉁기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혼미한 햇빛이 흐느적, 걸어 나오고 장난꾸러기 악대 같은 것들이 우우우 걸어나오고 있었다 이상한 향기를 뿜으며,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그것들이!       이경림 시인   1947년 경북 문경 출생 1989년 『문학과비평』 봄호에 「굴욕의 땅에서」외 9편으로 등단. 시집 「토씨찾기」「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상자들」2005년 렌덤하우스중앙 시평집 『울어라 내 안의 높고 낮은 파이프』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