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시론

성속聖俗의 가로지르기 혹은 아우르기 / 고영섭

자크라캉 2006. 3. 29. 10:16
聖俗의 가로지르기 혹은 아우르기
고영섭



김광규/ 「일주문 앞」(『문학과 사회』, 2000년 가을호)


갈잎나무 이파리 다 떨어진 절길
일주문 앞
비닐 천막을 친 노점에서
젊은 스님이
꼬치 오뎅을 사 먹는다
귀영하는 사병처럼 서둘러
국물까지 후루룩 마신다
산속에는 추위가 빨리 온다
겨울이 두렵지는 않지만
튼튼하고 힘이 있어야
참선도 할 수 있다

현대시는 길다. 그리고 어렵다. 여기서 ‘길다’는 것은 가락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고, 불필요한 듯한(?) 부분이 많다는 뜻이다. ‘어렵다’는 말은 시적 화자의 메시지가 불분명하다는 말이다. 퍼소나가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있는 듯한데도 잘 잡히지 않는다. 아마도 독자의 시력(안목)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시를 보는 이의 눈의 힘이기보다는 시인의 불분명한 어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시는 노래”라는 고전적 담론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노래 가사가 길면 다 외우지 못한다. 다 외우지 못하면 노래방에 가지 않는 한 부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애창곡집을 당장 구해볼 수도 없다. 그렇게 되면 그 노래는 불릴 수 없게 되고 읽힐 수 없게 된다. 물론 빼어난 시라면 아무리 길어도 평소에 외워둔 실력으로 불리게 되고 읽히게 된다. 아울러 매스컴도 단단히 한몫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엔 그런 시를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가급적이면 긴 시는 피하게 된다. 읽는 데도 그렇고 초점도 쉽게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시가 본디 언어의 농밀한 절제와 팽팽한 긴장을 장기로 삼듯 단단한 알맹이로 뭉쳐 있어야만 고소한 맛이 있게 된다. 호두를 보라. 그 껍질이 얼마나 단단한가?
어렵다는 것는 이미지나 정서의 문제로 귀결된다. 낯선 이미지는 그 나름대로 새로움을 머금고 있다. 그것이 이국적이어서 그렇기도 하고, 또는 우리가 잃어버린 정서여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 낯선 이미지도 다듬고 갈무리해서 우리의 이미지와 긴밀하게 닿게 할 수 있다. 정서 역시 마찬가지다.
이른바 보편성이란 것이 무엇인가? 첫째는, 있는 것(현실, 존재)과 있어야 할 것(이상, 당위) 사이의 거리의 최소화라는 축과 둘째는, 살아 있는 것들의 생물학적 조건의 동일성이라는 축에서 비롯되는 성질이 아니던가?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을 일치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성인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또 어떠한 사건이나 사태에 반응하는 느낌의 체계는 동서고금과 남녀노소가 모두 동일하다. 동서 고전의 담론에서 잘 확인된다. 우리의 남북 이산가족의 만남을 보고 전 세계 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머금거나 감동을 하듯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김광규의 시 「일주문 앞」은 종래 그의 시세계가 보여주었듯이 쉽고 짧다. 그러나 그의 시가 쉽게 읽힌다고 해서 가볍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그의 시가 짧다고 해서 내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주문 앞」은 짧으면서도 많은 의미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고, 쉬우면서도 두터운 층위를 온축하고 있다.
이 시는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말처럼 성과 속의 공간을 설정해 둔 뒤 이 두 공간을 일상의 삶으로 관통시키고 있다. 그것은 한 젊은 스님의 자연스런 ‘일탈’이 계기가 된다. 일주문은 우리의 마음을 한 갈래로 묶듯이 기둥이 일직선상의 한 줄로 나란히 늘어서 있는 문이다. 이 일주문이 “갈잎나무 이파리 다 떨어진 절길”과 “비닐 천막을 친 노점”을 갈라 놓고 있다. 시인은 “일주문 안”의 얘기가 아니라 “일주문 앞”의 얘기를 통해 성속을 가로지르며 일주문의 안팎을 아우르고 있다.
세속의 세계와 진리의 세계는 본디 한 마음(一心)에 의해 갈라지게 된다. 대승불교의 교과서인 『대승기신론』의 일심(一心) 이문(二門)의 구조를 연상해 볼 수 있다. 우리 마음에는 보리의 맑고 깨끗한 측면(眞如門)과 번뇌에 물들어 때묻은 측면(生滅門)이 내재해 있다. 이 측면을 공간적으로 설정해 보면 일체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갈잎나무 이파리 다 떨어진 절길”과 생사의 윤회로부터 매어 있는 “비닐 천막을 친 노점”으로 상정할 수 있다. 이 대비의 공간은 “꼬치 오뎅을 사 먹는” 젊은 스님의 자유로움으로 가로지르게 되고 아우르게 된다.
본디 성과 속은 방편적 설정일 수밖에 없다. 성 안에도 속이 있을 수 있고 속 안에도 성이 있을 수 있다. 성이 속이 되고 속이 성이 되는 것은 모든 분별의 근거에 있는 한 마음(一心)의 발견에서 가능한 것이다. 원효가 땅막(土龕)과 무덤(鬼鄕)이라는 분별의 그 근거에 있는 인간의 보편성(一心)을 발견함으로써 당나라로의 유학을 포기하고 이 땅에서 보편적 인간학을 창업하였듯이 말이다. 이 젊은 스님은 동안거 동안 자기와의 싸움(참선)에서 이기기 위해 “튼튼한 힘”(내공)을 쌓고 있는 것이다.
“추위가 빨리 오는 산 속에서” 한겨울을 이기며 참선하기 위해서는 기본 체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인간다움이라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세계에서는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체에 걸림없는 한 사람이 한 길로 생사의 길을 넘어서나니”라는 『화엄경』의 말처럼 말이다. 성을 지향해 가는 스님이라는 신분이 속에서 “꼬치오뎅을 사 먹는다”고 해서 결코 현실과의 타협이나 타락으로 읽혀지지 않는다. “후루룩 서둘러 마시는 국물”이 새로운 성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성은 속을 향할 때 진정한 성이 되고, 속은 성을 향할 때 진정한 속이 되듯이 성과 속은 가로지르거나 아우르는 “살아 있는” 주체에 의해서 구현되는 것이다. 일주문은 한 젊은 스님의 자연스런 일탈에 의해 열리게 된다. 일체에 구애없는 한 사람에 의해 문은 무화된다. 여기서는 안팎이라는 구분이 없게 된다. 하지만 시인은 너무 손쉽게 달관의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그는 “일주문 안”이 아니라 “일주문 앞”에서 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 「일주문 앞」은 자기와의 싸움에 직면한 모든 이들에게 ‘몸’이라는 화두를 던져준다. 몸은 마음을 담은 몸이며, 마음은 몸을 담은 마음이다. 몸은 성이며 속이다. 몸 속에서 성과 속은 하나가 된다. 내 몸은 몸과 마음의 본체인 법계인 것이다.◑ (시인, 한림대·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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