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이 시는 화자의 참모습을 알아주는 존재를 만나고 싶은 갈망이 형상화 되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않았다’와 ‘되었다’의 현재로 이어지는 과거 경험이 서술된 1연과 2연 그리고 ‘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낸 3연과 4연이다.
1연과 2연은 화자인 ‘내가’ 경험하고 행한 사실이고 3연과 4연은 화자의 바람을 말하고 있다.
1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에서 ‘하나의 몸짓’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의 그에 대한 나의 인식을 말하고 있다. 그는 ‘몸짓’으로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했는데 나는 왜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하나의 몸짓’으로만 인식했을까? 그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어 ‘몸짓’을 했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몸짓’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은 것은 내가 그의 몸짓의 참된 의미인 그의 ‘빛깔과 향기’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빛깔과 향기에 알맞’지 않은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참된 이름이 아니면 나는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지 못하고 그는 나에게 ‘다만 / 하나의 몸짓’을 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이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려면 서로가 서로의 ‘빛깔과 향기’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주어야한다. 여기서 ‘빛깔과 향기’는 ‘외면과 내면의 참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상대에 대한 참모습을 보고 그에 맞는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한 존재의 ‘빛깔과 향기’를 알려면 시간과 관심이 필요하다. 관심이 없으면 ‘그’가 나에게 아무리 오랫동안 아무리 많은 몸짓을 해도 나에게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에 대한 ‘빛깔과 향기’를 정확하게 알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누군가에 의해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참된 이름을 듣게 된다면 나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격할 것이다. 이 감격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고 ‘나의 이름을 불러’ 준 사람에게 가서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할 것이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갈 것이다. ‘그의 꽃이’ 될 것이다.
화자는 ‘그’의 참모습을 파악하고 ‘그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줌으로써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에게 아름다운 존재로 다가온 것이다.
내가 상대를 알아주고 상대에게 내가 상대의 참모습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름을 불러 주어’ 알게 한다면 상대는 나에게 아름다운 ‘꽃’으로 다가올 것이다는 인식이 1연과 2연에 나타내고 있다. 화자가 그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주어 그가 나에게 ‘꽃’으로 와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된 것처럼 화자도 누군가가 화자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주어 화자가 누군가에게 ‘꽃’으로 가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이 되고 싶어한다. 이러한 마음이 인간의 속성임을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로 표현하고 있다. ‘무엇’은 막연한 ‘무엇’이 아니라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를 말한다. 상대방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알리고 싶고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기만 하지 다른 사람을 알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인간은 스스로 고독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주는 사람 주위에 있기를 누구나 바란다. 화자도 마찬가지이다. 화자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갈망한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은 것이다. 화자 혼자만 상대방을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화자도 상대방이 화자의 ‘빛깔과 향기’를 알아주고 그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기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불행하게도 화자의 ‘빛깔과 향기’를 알아주고 그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는 상대가 없다. 화자가 알아주고 불러준 ‘그’도 자신을 알아주기만 바랐을 뿐 화자의 참모습을 알아주지 못한 것이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라는 서로가 서로의 참모습을 이해하고 불러주는 참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만이 참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참모습을 본다면 둘 사이에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인가 보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도 만나기 어려운데 하물며 서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란 더 어려운 것이다. 20060112후0324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이 시는 화자의 참모습을 알아주는 존재를 만나고 싶은 갈망이 형상화 되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않았다’와 ‘되었다’의 현재로 이어지는 과거 경험이 서술된 1연과 2연 그리고 ‘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낸 3연과 4연이다.
1연과 2연은 화자인 ‘내가’ 경험하고 행한 사실이고 3연과 4연은 화자의 바람을 말하고 있다.
1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에서 ‘하나의 몸짓’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의 그에 대한 나의 인식을 말하고 있다. 그는 ‘몸짓’으로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했는데 나는 왜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하나의 몸짓’으로만 인식했을까? 그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어 ‘몸짓’을 했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몸짓’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은 것은 내가 그의 몸짓의 참된 의미인 그의 ‘빛깔과 향기’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빛깔과 향기에 알맞’지 않은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참된 이름이 아니면 나는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지 못하고 그는 나에게 ‘다만 / 하나의 몸짓’을 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이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려면 서로가 서로의 ‘빛깔과 향기’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주어야한다. 여기서 ‘빛깔과 향기’는 ‘외면과 내면의 참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상대에 대한 참모습을 보고 그에 맞는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한 존재의 ‘빛깔과 향기’를 알려면 시간과 관심이 필요하다. 관심이 없으면 ‘그’가 나에게 아무리 오랫동안 아무리 많은 몸짓을 해도 나에게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에 대한 ‘빛깔과 향기’를 정확하게 알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누군가에 의해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참된 이름을 듣게 된다면 나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격할 것이다. 이 감격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고 ‘나의 이름을 불러’ 준 사람에게 가서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할 것이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갈 것이다. ‘그의 꽃이’ 될 것이다.
화자는 ‘그’의 참모습을 파악하고 ‘그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줌으로써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에게 아름다운 존재로 다가온 것이다.
내가 상대를 알아주고 상대에게 내가 상대의 참모습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름을 불러 주어’ 알게 한다면 상대는 나에게 아름다운 ‘꽃’으로 다가올 것이다는 인식이 1연과 2연에 나타내고 있다. 화자가 그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주어 그가 나에게 ‘꽃’으로 와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된 것처럼 화자도 누군가가 화자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주어 화자가 누군가에게 ‘꽃’으로 가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이 되고 싶어한다. 이러한 마음이 인간의 속성임을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로 표현하고 있다. ‘무엇’은 막연한 ‘무엇’이 아니라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를 말한다. 상대방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알리고 싶고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기만 하지 다른 사람을 알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인간은 스스로 고독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주는 사람 주위에 있기를 누구나 바란다. 화자도 마찬가지이다. 화자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갈망한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은 것이다. 화자 혼자만 상대방을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화자도 상대방이 화자의 ‘빛깔과 향기’를 알아주고 그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기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불행하게도 화자의 ‘빛깔과 향기’를 알아주고 그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는 상대가 없다. 화자가 알아주고 불러준 ‘그’도 자신을 알아주기만 바랐을 뿐 화자의 참모습을 알아주지 못한 것이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라는 서로가 서로의 참모습을 이해하고 불러주는 참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만이 참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참모습을 본다면 둘 사이에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인가 보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도 만나기 어려운데 하물며 서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란 더 어려운 것이다. 20060112후0324
출처 : 현대시해설
글쓴이 : 서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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