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세탁기/ 이동호<`94년 매일신춘신춘문예당선>

자크라캉 2006. 3. 1. 18:56
    세탁기

 

 

                                      이동호

 


  빨래집게가 줄 위에 허공을 걸어놓고 있다.  
  주인은 세상 이불을 늘어놓고 살균 중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덮었던 허공인가

 

  허공을 깨끗하게 빨아내기 위하여
  몇 날 며칠 장맛비는 계속 내리는 것이고
  천둥이 빨래방망이처럼 자꾸만 울리는 거다

 

  주인은 새벽 위에 표백제를 뿌려놓았다
  저 지린 허공을 깨끗하게 삶기 위해 
  섣달내 한 여름철이 철철철 끓어오른다

 

  펄럭이는 허공을 어금니들이 깨물고 있다
  금방이라도 허공이 쭉 찢어질 것만 같다
  새들이 바늘 입으로 뾰족하게 날아오른다

 

  바구니 하나 서쪽 산에 걸려 반짝인다
  허공의 한쪽 면이 조금 접히었다
  사방이 어둑해진다 허공을
  걷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