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신춘문예 당선작(시 부문)] |
[2005 신춘문예 당선작(시 부문)] 1.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영옥의 '단단한 뼈' 실종된 지 일년 만에 그는 발견되었다 죽음을 떠난 흰 뼈들은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독극물이 들어 있던 빈 병에는 바람이 울었다 싸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경찰차가 사내의 유골을 에워싸고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 비닐봉투 속에 들어간 증거들은 무뇌아처럼 웃었다 접근금지를 알리는 노란 테이프 안에는 그의 단단한 뼈들이 힘센 자석처럼 오물거리는 벌레들을 잔뜩 붙여놓고 굳게 침묵하고 있었다 당선소감 함께 있어도 인식하지 못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못해 밖에서 서성거리게 했던 내 외로웠던 시들아! 나를 용서하기 바란다. 문제는 늘 내 안에 있었다. 내가 본 죽음이란 것은 또 하나의 완벽한 실존이었다. 그는 뼈의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바람의 울음을 듣고 있었다. 세상의 빛들은 일순간 그를 위해 적막해졌다. 나는 너무 일찍 알아버린 삶과 죽음의 근사치에 대해, 근접해 있는 존재와 소멸의 함량에 대해, 세포처럼 끊임없이 분열하는 것들을 쓰고 싶었다. T S 엘리엇은 말했다. 시는 언제나 모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면 나의 도전은 무모했다. 시의 중심을 알 수 없었던 나는 늘 이방인이었다. 당선 소식을 듣고 난 후, 성탄 캐럴이 울리는 번잡한 거리를 혼자 걸었다. 마치 동굴에서 탈출한 크로마뇽인처럼…. 나는 그날, 화석 속에서 튕겨져 나온 구석기인처럼 외로웠다. 나를 믿고 지켜봐 준 남편과 자신감을 뿌리 깊게 심어주신 하현식 교수님, 이재무 선생님, 감사합니다. 호된 비평가인 딸 다혜와 아들 정빈이에게 사랑한다는 말 전하고 뽑아주신 심사위원 두 분께 내 안의 혹독한 다짐을 바친다. 심사평 예심에서 올라온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을 거듭 읽고 검토한 끝에 남은 작품이 배대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코드(CODE)’ 외 9편과 이영옥의 ‘단단한 뼈’ 외 4편의 시들이었다. 다른 응모시들이 지니고 있는 상대적 결함들이 이들 시에서는 극복되고 있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분명한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까닭 없는 우회나 굴절이 야기하는 몽상의 어눌한 언어들을 자제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특히 이른바 화자 우월주의에 빠져 시를 수다스러운 설명으로 이끌거나, 대상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독단의 왜소성으로부터 깔끔하게 벗어나 있었다. 장고 끝에 우리는 이영옥의 ‘돛배 제작소’와 ‘단단한 뼈’로 의견을 압축했다. ‘돛배 제작소’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선 안과 밖을 하나로 짚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호감이 갔다. ‘설계도면에는 오래된 고뇌까지 꼼꼼히 그려져 있었고/돛배가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그의 환멸은 정교해져 갔다’ 같은 대목 말이다. 그러나 ‘단단한 뼈’에서 더욱 중요한 대목들을 확인했다. 짧은 분량으로도 많은 것을 담아내는 자재로움과 절제된 감정이입을 통해 죽은 것들을 또 다르게 살려내는 전환의 힘, 그 핵을 이 시는 지니고 있다.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는 비극적 삶의 전력에 대한 암시도 놀랍지 않은가. 이 시를 읽고 나면 ‘섬쩍지근한’ 침묵 같은 것이 남는다. 배대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코드(CODE)’ 등은 언어의 활달성, 또는 뜨거움을 지니고 있었다. 순수한 원시적 생명력에 대한 천착도 돋보였다. 그러나 표현의 조밀함이 모자라 적잖이 설명으로 기운 흠이 있었다. 지니고 있는 정열의 운용에 따라서는 새로운 시를 열 가능성이 보인다. 출처 : 인터넷 2. 조선일보 시문 - 김승해의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소백산엔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 푸른 사과 한 알, 들어올리는 일은 절 한 채 세우는 일이라 사과 한 알 막 들어올린 산, 금세 품이 헐렁하다 나무는 한 알 사과마다 편종 하나 달려는 것인데 종마다 귀 밝은 소리 하나 달려는 것인데 가지 끝 편종 하나 또옥 따는 순간 가지 끝 작은 편종 소리는 종루에 쏟아지는 자잘한 햇살 실핏줄 팽팽한 뿌리로 모아 풍경 소리를 내고 운판 소리를 내고 급기야 안양루 대종 소리를 내고 만다 어쩌자고 소백산엔 사과가 저리 많아 귀 열어 산문(山門) 소식 엿듣게 하는가 당선소감 “삐딱이 부처님 본뒤 절을 꼭 올리고 싶었다” 화순 땅 운주사, 누운 부처를 처음 보던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곳엔 부처 아닌 돌이 없었다. 뭉툭하게 문드러진 돌들이 부처라니. 코가 닳은 못생긴 부처님, 귀가 떨어져 나간 삐딱이 부처님을 처음 본 그때, 내게 어떤 간절함이 있었기에 천하 귀신들도 탄복할 절을 꼭 한 번 올리고 싶었던 걸까? 내 마음 안에 돌탑 하나 세우고 돌아선 그날 이후 가끔 꿈속에서 운주사 가는 그 옛길을 타박타박 걷곤 했다. 그저 한 무더기 돌덩이를 만나도 그것이 탑이 되고 부처가 되게 하는 간절한 천불천탑의 땅. 이제 나는 떨리는 첫 마음 모아 새로 돌탑을 올린다. 그러나 이 간절함이 어디에 가 닿게 될지 지금은 모른다. 다만 나를 위해 불문 훨훨 열어놓고 뜨겁게 데워주는 내 고마운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염려와 기도 안에서 운주사 가는 옛길을 가듯 멀고 낯선 길을 간다. 늘 따뜻한 가르침을 주시는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선생님들, 마음놓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 주는 학형들, 부족한 시를 세상에 내놓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심사평 김승해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장성실 ‘소금쟁이 메모’, 이병일 ‘빈집에 핀 목련’, 이다연 ‘가설무대’를 최종심 대상작으로 좁혀가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이는 이들 네 작품이 최소한, 누가 읽어봐도 “이게 시야?” 하는 의문이 들지 않게끔, ‘스스로 시를 성립시키는’ 구성의 내구력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당선작을 고르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결정을 두 번이나 번복할 정도로 우리 두 심사자들을 꽤 괴롭혔다. 이들 네 작품이 두루 괜찮았다는 말도 되겠지만, 동시에 눈에 확 띄게 스스로를 구별시키는 작품이 없었다는 말도 된다. 결국 우리가 이번 심사에서 기대하고 예감하고자 한 것은 누가 보다 오랫동안 시를 쓸 수 있겠는가, 수압이 센 한국시의 해저에 누가 더 오랫동안 잠수하여 보물을 건져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김승해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를 당선작으로 최종 결정했다. 이 시가 그 자체로 잘 다듬어진 작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과 대등한 수준의 다른 응모작들을 고루 보여줌으로써 앞으로도 그가 계속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가 한 권의 시집을 가지고 나타나서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부릅뜨게 해 주길 바란다. 출처 : 인터넷 3. 한국일보 시부문 당선작 신기섭의 '무도마'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당선소감 얼마 전 안과에 갔었다. 왼쪽 눈의 각막이 좀 벗겨졌단다. “당신은 눈물이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에 따르면 눈물이 없?눈은 쉽게 상처가 난다. 안과의 처방전대로 약국에서 인공눈물을 샀다. 그걸 자주자주 눈 속에다 몇 방울씩 떨어뜨려야 했다. 당선을 알리는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인공눈물을 눈 속으로 떨어뜨렸다. 웃기고 슬펐다. 그것은 정말 꼭 한 편의 희극이었다. 플러그 빠진 냉장고 속의 고깃덩어리처럼, 두고 온 고향의 집이 머리 속에서 썩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할머니가 없는 빈집, 썩는 냄새가 후욱 풍긴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시가 당선되는 일이 9급 공무원시험 합격같은 것으로 생각하셨던, 할머니가 지금 곁에 계셨다면 많이 기뻐하셨을 것이다. 9급 공무원 감투를 쓴 나를 자랑스러워 하셨을 것이다. 우습지만 이제, 죄책감에서 아주 약간은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고마운 분들이 많이 계시다. 모교의 존경하는 은사님들, 김혜순 선생님과 신수정 선생님께 큰절을 드린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에게도 함께 드린다. 곁의 문우들, 우리들의 김점진 조교님, 후배이자 선배이자 친구인 김원, 그리운 시골의 친구들, 서울의 친구들,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이들,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정이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겨울이 다 가기 전에 함께 고향집에 다녀와야겠다. 가족처럼 심사평 / 존재론적인 고통 생동감있게 풀어 내 당선작을 선정하는 동안, 언어를 다루는 능력과 구성력이 뛰어난 시들이 많아 그 가치를 어디에다 두느냐에 대한 고심이 많았다. 결국 아름답거나 쓸쓸한 것들을 얘기하는 것만이 아닌, 뭔가 고통스러워도 육화되어 있어 속이 후련해지는 작품에 심사의 척도를 두는데 이견이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신기섭의 ‘나무도마’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뽑는다. 존재론적인 고통을 풀어냄에 있어서 고통의 근육을 느끼게 하는 생동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서로 오가는데 걸림 없어 자연스러웠다.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통찰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형상화하는 솜씨가 시를 오래 써온 장인의 결을 느낄 수 있었다. 당선을 축하하고, 시의 길을 가는데 있어 몸을 끝까지 싣기를 기대한다. 이번 응모작품들을 통해 한국 시의 현주소를 가늠해보았는데, 예술에 온 정신이 팔려 지극히 자아적인 것에 머물러 있거나 언어를 다루는 세련미에 몰두한 흔적들이 엿보여 보는 이의 마음을 아쉽게 했다. 함께 응모한 심은섭의 ‘북쪽 새떼들’과 ‘몸의 악보를 더듬어’의 박신규, ‘대마찌’의 조길성, 등도 최종까지 논의되었음을 밝힌다. 출처 : 인터넷 4.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박지웅의 ‘즐거운 제사’ 향이 반쯤 꺾이면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기리던 마음 모처럼 북쪽을 향해 서고 열린 시간 위에 우리들 一家는 선다 음력 구월 모일, 어느 땅 밑을 드나들던 바람 조금 열어둔 문으로 아버지 들어서신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이면 이리 고운 향이 날까 그 향에 술잔을 돌리며 나는 또 맑은 것만큼 시린 것이 있겠는가 생각한다 어머니, 메 곁에 저분 매만지다 밀린 듯 일어나 탕을 갈아 오신다 촛불이 휜다 툭, 툭 튀기 시작한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모은다 삼색나물처럼 붙어 다니는 아이들 말석에 세운다. 유리창에 코 박고 들어가자 있다가자 들리는 선친의 순한 이웃들 한쪽 무릎 세우고 편히 앉아 계시나 멀리 山도 편하다 향이 반쯤 꺾이면 우리들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엎드려 눈감으면 몸에 꼭 맞는 이 낮고 포근한, 곁 당선소감 ‘페르시아왕자’라는 게임이 있었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벼랑이 나타난다.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는, 그 벼랑을 건너는 길은 어이없게도 그냥 달리는 것이었다. 달리면 그 허방에 길이 생기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 때 비로소 길은 몸을 내어주는, 시 앞에는 이런 투명한 길이 있고 그 의심을 견디게 해준 것은 시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믿음이 월등히 강한 것만은 아니어서 나는 자주 추락하였다. 그때마다 나를 일으키고 부축해준 것은 노부모의 지성과 병고와 땅에 버려진 사람들이었다. 나를 일으킨 것은 위대하고 숭고한 것이 아니라 작고 초라한 사람들, 나는 병들고 지친 것을 먹고 일어났으니 우선 그들에게 백배사죄하고 그 발에 입맞추어야 한다. 아무리 나누어도 줄지 않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든 광주리를 받은 듯 든든한 한나절을 보내며 감사드려야할 선생님을 떠올리니 한두 분이 아니고 한두 군데가 아니다. 사방을 향해 절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다만, 마음 둘 곳 없던 내게 서슴없이 책상자리를 내주었던 은영, 재훈, 추계문우, 내게 언제나 기쁨인 황금펜시문학회원들은 따로 적는다. 끝으로, 자발적 수난자를 응원해주신 문화일보와 난사뿐인 내 시의 가능성에 이름을 걸어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심사평 예심을 통과한 열다섯 명의 작품이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예년과 비교해 볼 때 응모량이 크게 늘어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내용면에서는 전체적으로 삶의 궁핍과 고단함의 구체적 경험을 다룬 시가 의외로 많았다. 형식은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경향보다는 무난한 스타일이 대부분이었다. 신인다운 패기와 독특한 개성이 느껴지는 작품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아쉬운 일이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박지웅과 노양식씨의 작품이었다. 노양식씨의 ‘푸른, 복어의 집’ 외 2편은 시적 형상화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에서는 주목을 받았으나 의미의 귀결이 단조로운 것이 흠이었다. 한 편의 시에 담겨야 하는 것은 분명한 결론이 아니라 음미할 만한 어떤 것이다. 이미지와 리듬, 사유 혹은 심리의 전개 과정, 그리고 말을 넘어서는 침묵과 여백까지, 그 모든 것이 언어예술로서의 시에서는 음미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박지웅씨의 ‘즐거운 제사 ’외 6편은 섬세하면서도 격조있는 언어감각으로 눈길을 끌었다. ‘기리던 마음 모처럼 북쪽을 향해 서고/…/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이면 이리 고운 향이 날까/ 그 향에 술잔을 돌리며 나는 또/ 맑은 것만큼 시린 것이 있겠는가 생각한다/…/삼색나물처럼 붙어다니는 아이들’ (즐거운 제사)에서 보듯 감칠맛이 나는 문장, 마음이 스며 있는 언어, 한 편의 묘한 분위기를 빚어내는 솜씨는 보기 드문 것이다. 다른 시 ‘대관령옛길’도 언어에 대한 빼어난 감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제 짝 앞에 찰랑거리는 곤줄박이의 저 맑은, 흥분/…/명자나무의 몹시 아름다운 한때’. 이견 없이 박지웅씨의 ‘즐거운 제사’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당선을 축하한다. 시인 황동규·최승호 출처 : 인터넷 5. 세계일보 시부문 - 윤진화의 '母女의 저녁식사' 배추김치.... 파김치.... 상추겉절이.... 오이소박이.... 어머니..... .... 어머니.... 우리 집 식탁에는 온통 풀뿐이네요 우리의 저녁 식사는 말들이 좋아하겠어요 보세요? 하얀 접시 위에 그려진 말이 우리보다 먼저 우리의 저녁 식탁에 와 있잖아요. 그래요. 거기요. 가만히, 아이처럼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또 다른 말이 들길을 지나 마을 건너 가난한 우리 식탁으로 달려와요. 들리세요? 주인을 버리고 달려오는 말울음 소리요 저기 먼 곳에서는, 젖가슴 하나 달린 여자들이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드넓은 대지를 흔들며 산다던데... 히잉! 어머니 주홍빛 하늘이 몰려와 대지를 덮으면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여자들이 말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리 식탁을 향해 자신의 말들을 찾아 고단한 하루치 태양을 쉬게 하고 달려와요 ... 히잉! 어머니 당신이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처럼 하늘이 물들어갈 때, 그녀들이 달려와요 가슴 하나를 도려낸 그녀들이, 자꾸만 자꾸만 초대받은 손님처럼 달려와요 어머니, 유방암에 걸린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여 듣고 계신가요? 전사들이 우리의 밀림으로 몰려오는 소리, 그 침묵의 소리들이요 … 히잉! 어머니. 당선소감 올 한해 더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이번에 당선된 시는 제 시중에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시입니다. 그래서 본심 심사위원들께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할머니! 당신처럼 곱고 따뜻하고 깔끔한 분이 세상을 떠나려 하신다는 의사의 말이 믿기지 않습니다. 제발 부탁이니 지금은 가지 마세요. 전에 말씀하신 앙고라 스웨터, 이참에 좋은 걸로 사드릴 수 있다고요. 그리고 지금은 너무 춥다고요. 시계 속, 작은 톱니가 큰 톱니에게 머리를 지긋이 눌리며 내지르는 비명- 착각. 이 끔찍한 아비규환에 하루를 열고 닫고, 웃고 우는 아둔한 착각.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맘- 착각. 저 무수한 착각의 셔터를 누르는 거역할 수 없는 시선. Thanks to:서형순 여사, 테오 같은 동생들과 안나, 아득한 이국의 언어 아버지, 사랑하는 ZEUS, 우리는 시를 믿는다 詩川, 언제나 그 자리 선배 미영, 허방을 향한 농담 스스와타리, 너무 고마운 사람 승렬이 아재, 하늘 아래 효부 큰엄마 황숙자 여사, 삶을 연극처럼 연극을 삶처럼 연극마당, 획을 긋는 국립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따뜻한 명지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참삶 참문학 어의문학회·19기, 국정호, 이주영, 김주현, 박상남, 최혜선, 전지원, 경아언니, 안치윤·박수현 부부 그리고 기꺼이 시가 되어준 여러분의 삶. Special Thanks to: 아픔을 드러내는 법 닥터. 키팅, 한걸음에 달려와 안아주신 이사라 선생님, 죽기 직전에 만난 정신과 주치의 詩와 ‘아무도 몰래 묻어주고 싶었던’ 그들의 詩集에게, 예심 심사하신 선생님께 심사평 윤진화, 강호정, 이우경의 시들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윤진화의 ‘母女의 저녁 식사’는 발상이 아주 신선하다. 풀뿐인 식탁-말-아마존의 여왕 히포리테-유방암에 걸린 어머니의 연상도 재미있지만, 이미지가 청승맞거나 구질구질하지 않고 쌈박하고 날렵한 점도 호감을 갖게 한다. 많은 사람들의 시가 내용이나 형식에서 서로 닮아 있는 데 반하여 이 시는 다른 사람의 시와 전혀 같지가 않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리라. 역시 어머니의 잃음을 노래한 ‘두 개의 꿈’도 뛰어난 시다. 슬픔이니 아픔이니 하는 직접적인 표현 한마디 없이도 더 강하게 그것을 느끼게 하는 점, 시인의 만만치 않은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강호정의 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다. 시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문제며 진실을 찾아가는 자세도 돋보인다. ‘몸을 들여다보는 순간’이며 ‘선언에 대하여’는 시적 완성도나 안정감에 있어 결코 손색이 없지만, 다 죽음을 다룬 시여서 신춘시로서는 좀 무겁다. 당선 여부에 관계없이 좋은 시인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우경의 시 중에서는 소시민의 삶의 모습이 잘 드러난 ‘문패’가 가장 뛰어나다. 이미지도 선명하고 표현도 아주 매끄럽다. 그러면서도 억지가 없고 자연스럽다. 흠잡을 데 없이 날씬하게 빠진 시라는 칭찬이 조금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한데 다른 시들이 뒤를 받쳐주지 못한다. 너무 편차가 심한 점은 조금 안심이 되지 않는다. 이상 세 사람의 시 중에서 윤진화의 ‘母女의 저녁 식사’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 시가 가진 분방하고 건강한 상상력은 우리 시의 지평을 크게 확대할 것으로 기대되는바, 앞으로의 활동에 크게 기대를 건다. 출처 : 인터넷 6.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김미령의 ‘흔한풍경' 시청 앞 작은 연못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단잉어가 산다 몰락한 귀족처럼 느릿느릿 헤엄치면 양귀비꽃 수면에 비쳐온다 우리는 그걸 주홍빛 슬픔이라 부른다 허기진 햇빛이 정수리 위에 어른거린다 메마른 광장의 오후 2시가 아가미 속을 들락날락하는 지루한 염천(炎天)의 대낮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벽을 두드려보듯 지느러밀 움직여 물의 파동을 느껴본다 배에 와닿는 물의 감촉이 따스하다 눈앞이 침침해지고부터는 소리에 집착하게 된다 좁고 가늘어진 바 람소리 공중에 박음질하듯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 무수한 소문들이 물기를 머금고 부풀었다 사라진 벤치에 빈 종이컵이 실신할 듯 입벌리고 있다 새우깡을 무심히 던지던 손이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 무엇일까 生의 마지막 들숨을 쉬듯 물위로 솟구칠 때 무심코 돌아서던 누군가의 하얘진 귓불을 보았을 수도 그때 잠깐 흔들린 듯 눈을 깜빡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서로가 엿본 것은 아무 것도 들킨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그 동안에도 애초에 누구의 관심거리도 아니었다는 듯 개미들이 떨어진 여치 다리를 십자가처럼 옮기고 있었고 체인을 오래 매만지고 있던 자전거 옆으로 은색 승용차가 서류뭉치를 신생아처럼 안고 급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모두 외로움을 흙먼지처럼 껴입고 있지만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벤치 밑에 조금 구부러진 쇠뜨기풀이 다시 일어서는 동안 내 어슬렁거림은 어떤 사소함에 비유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보이지 않게 어긋나도록 돼있는 정교한 교차로 같은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에 열중하는 순간 누구나 제 몸에 딱 맞는 표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므로 모두 서로에게 그림 속 배경일 뿐이라는 듯 과자 부스러기들이 바람에 흩어진다 당선소감 막 외출하려던 참에 옷장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외투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깜빡 잊고 나가려던 참인데 간신히 받은 전화 속 상대방은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였다! 나는 실감을 도둑맞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무슨 일의 ‘기미’는 그렇게 희미하게 온다. 시가 내게 오는 방식도 그러하다. 시의 기미를 다행히 감지했을 때 나는 납작하게 엎드려 코를 벌름거리며 그 냄새의 방향과 거리와 크기를 탐색한다. 그리고 그것의 실체를 확실히 기억해둔 뒤에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유유히 사라진다. 며칠동안은 부단히 그 실체의 환영에 시달리다가 내림굿을 받듯 어느 날 정신없이 받아 적곤 한다. 그러나 날것의 실체를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해 좌절을 맛보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보편성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감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평범한 감정들을 아름다운 충격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부터 내 시 쓰기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아웃사이더 같던 내 말들과 행동이 조금씩 보편성을 찾아가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점점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가 나를 세상에서 구원해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시가 내 속에서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 확실히 믿고 있다. 오래된 일기장들이 꽂혀있는 책장을 보며 시 비슷한 것을 끄적거리기 시작한 10년 전 일이 생각난다. 그때 내 시를 처음 읽어봐 주시고 많은 조언을 해주신 남송우 교수님, 한동안 외면했던 시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시기에 훌륭한 스승이셨던 손진은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든든한 후원자인 남편과 철의 여인 엄마, 가족들, 또 함께 기뻐해 준 선화, 희경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심사평 얼핏 보아서 무더운 날의 나른한 도시 풍경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별 무리없이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흔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 현실의 단면에 대한 담담한 소묘가 돌연 삶의 무상함을 환기시키는 절실성을 획득하고 다가온다.“공중에 박음질하듯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나 “보이지 않게 어긋나도록 돼 있는 정교한 교차로 같은 일상”같은 표현도 대범하게 씌어진 듯하지만 응모자의 만만치 않은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도 다 일정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한층 믿음이 갔다. 앞으로 자기만의 개성적인 시세계의 구축에 보다 신경을 쓴다면 한 뛰어난 신인의 탄생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출처 : 인터넷 7.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윤석정의 ‘오페라 미용실’ 능선으로 몰려든 검은 구름이 귀밑머리처럼 삐죽삐죽 나온 지붕에 한발을 걸친다 그 사이, 좁다란 골목길이 계단을 오르며 헉헉 숨 내쉬는 곳에 할아범 측백나무와 오페라 미용실이 마주 서 있다 그는 매일 미용실 바깥의 오페라를 감상한다 미용실 눈썹처마에 모아둔 나뭇잎 음표들이 옹알거릴 때 가위를 갈다가 번뜩이는 악보의 밑동, 백지에 오선을 긋던 어머니는 병세를 자르지 못해 머리에 자란 음표를 모두 빼내 옮겨 적었고 연주가 서툰 아버지는 가파른 골목길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오페라를 관람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측백나무에서 음표를 떼어 내던 앙상한 어머니를 목격하였다 어머니를 마구 흔들고 지나간 바람이 옥타브를 높이며 구름 떼를 몰고 오기도 했다 미용실 문이 열리자 그는 내내 벌려 예리해진 가윗날을 접는다 머리숱이 적은 손님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마다 음치인 울음이 미용실에서 뛰쳐나간다 동네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에선 울음이 두근거리는 아리아로 변주해 울려 퍼지고 측백나무에서 마지막 남은 음표가 눈썹처마에 떨어질 때 낮은 지붕 위로 함박눈이 음계 없이 쏟아진다 나뭇가지 오선지 끝에 하얀 음표가 대롱대롱 매달리고 악보에 없는 동네 사람들이 돌림노래처럼 몰려나와 희희낙락 오페라를 구경한다 심사평 / “발랄한 상상과 비유 돋보여” <심사위원 / 신경림·김승희> 예심을 넘어온 시편들의 기교적 수준은 일반적으로 높았으나 개성과 다양성이 조금 부족한 듯한 느낌이었다. 한 편의 시란, 아무리 작은 규모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재현(현실)의 축과 표현(개성)의 축, 그리고 언어(기호)의 축을 가지고 있게 된다. 어느 한쪽이 너무 과부하를 받거나 결핍되면 진정한 시의 역동적인 생명감이 태어나지 않는다. 시 텍스트는 그러한 삼위일체 긴장의 아비투스 속에서 고유한 생명의 빛을 발하게 된다. 많은 응모작 중에서 심사위원은 최명희의 ‘비닐 하우스’와 이해존의 ‘이곳은 난청이다’, 윤석정의 ‘오페라 미용실’에 주목했다. ‘비닐하우스’는 현실감각과 현실의식은 뛰어난데 시속에 들어있는 이야기와 이미지의 전개에서 조금 상투성이 엿보였다. 누군가 한번 해본 소리 같다. 아니 누군가 한번 해본 소리라 하더라도 자기만의 상상력과 언어의 힘으로 표현해낼 때 새로운 자기 작품이 태어난다. ‘이곳은 난청이다’는 아주 단단한 작품이다. 그러나 상상력에 한계가 있는 것 같고 ‘나는 비참하다’라는 엄살기가 조금 엿보인다. 그러나 이미지의 전개에 밀도가 높고 단단해서 적지 않은 재능을 느낄 수 있다. 윤석정의 ‘오페라 미용실’을 당선작으로 선택하는데 두 심사위원은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오페라 미용실’은 ‘늙은 측백나무’와 ‘미용실’이 마주 보고 서있는,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 낯익은 마을 풍경을, 신선한 상상력과 생생한 비유로 하나의 생동감 있는 음악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현실 감각도 없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진부한 재현의 세계는 아니며, 아주 발랄하고 풍부한 상상력인데 그렇다고 낯설게 멀리 나아가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재현의 세계와 표현, 언어의 세계가 잘 어울려 아주 맛있게 배합된 시의 맛을 그득하게 한 상(床) 잘 차려 놓았다. 어디까지나 요약과 압축을 전제로 하는 한 편의 시는 잘 차려낸 ‘모국어의 한 상(床) 성찬이어야 한다’는 시의 매력을 잘 보여준 이 시인은 다른 응모작인 ‘마늘’에서도 그 섬세하고도 단단한 재능을 보여준다. “만삭인 나는 아랫배 쓸어본다./ 아기는 얼마나 여물었을까/ 어머닌 내가 태아였을 때도 씨 뿌려두고/ 탯줄이 잘 이어졌는지, 더듬이가 돋은 마음/ 자라는 것에 먼저 닿게 했으리라”와 같은 아름다운 섬세함과 상상력의 고요한 역동성은 살아 있다. 더욱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기대한다. 당선소감 / “겨울가뭄 극복할 큰 힘 생겨” <윤석정 ㅣ ▲72년 전북 장수 출생 ▲원광대 국문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문예창작과 재학중 > 거주민만큼 계단이 많은 동네, 흑석동에서 겨울을 두 번 맞는다. 시간은 어떤 맨홀에 빠져 허우적거렸을까. 되돌아보면 어둔 구멍에 빠져서 며칠 묵었다고 여기게 된다. 애벌레처럼 웅크린 잠에서 깨던 날이면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인지 녹슨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릴 때가 많았다. 그런 소리들은 적막을 밀어내는 음계 같은 거였다. 혹은 내 가슴속에서 총총히 계단을 만드는 시 같은 것. 나는 반지하방에서 꿈틀거리다가 다시 잠이 들곤 했다. 가끔 퇴고를 하는 꿈도 꾸면서. 고교시절, 나의 유일한 친구는 시였다.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소중한 존재로 어느새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시가 내 곁에 그냥 있는 게 아니라고 알았을 때부터 나는 절망을 알게 되었다. 줄곧 비가 내리던 날이 많았다. 겨울이 오면서 눈이 내리길 간절히 기다렸다. 내게 있어 희망이란 어디서나 공평하게 내리는 눈발 같은 거였기에. 눈 쌓인 거리를 이유 없이 걷고 싶었다. 꼭 그래야만 지금을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았으므로. 드디어 청천벽력처럼 전해진 당선소식은 눈발이 되어 쏟아졌다. 그 순간 나는 사유의 계단을 찬찬히 오르 내리게 해준 흑석동이 참 고마웠다. 나의 긴 겨울가뭄에 눈발을 내려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마운 분들이 꽤 많습니다. 존경하는 교수님들. 묵묵히 믿어주신 이승하 선생님, 나에게 내릴 눈발을 간절히 기다린 지우 경주. 친구들. 내 시의 고향 그루터기, 시동, 생각만 해도 치열해지는 원광문학회, 멋진 14기 동기들, 선·후배님들, 포에티카 선배님들. 식충이를 한없이 믿어준 사랑하는 부모님과 뚝섬 고모, 미순, 석완, 언제나 봄날 같은 누나 미선, 내 귀여운 동생 석민. 이제는 길이 가려진 눈길을 더 힘차게 가야겠습니다. 신춘문예에 대하여 한국 문필육성에 큰 공헌을 한 신춘문예는 1925년《동아일보》에서 처음 시작하였으며, 제1회 시 입선 작품은 박승만의 <신(神)의 주(酒)>, 임병규의 <가을>, 소 공의 <누나>, 조창선의 <후회>등 4편의 시입니다. 이어 1928년 《조선일보》에서도 실시하였습니다. 그후 1940년대 일제 말기와 8 ·15광복과 6 ·25전쟁으로 몇해 동안 중단되었다가 1955년 다시 실시되었는데 이때 1954년에 창간된 《한국일보》에서도 신춘문예 제도를 창설하였고, 나중에 《경향신문》과 《중앙일보》에서도 실시하였습니다. 문단의 등용문으로 가장 권위가 있는 이 제도는 현재 여러 지방신문에서도 채택하는 곳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며. 소설 ·시 ·희곡 ·동화 등 각 분야에서 많은 문인이 이 신춘문예를 통해등단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8. 200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혁필화(革筆畵)를 보며 /이민아 맞춤주문한 전각(篆刻)을 품고 도장집을 나서는 길, 인사동 돌확 옆 낡은 좌판 위로 어스름한 새벽을 펼쳐놓은 노인을 향해, 다채로운 구두코가 나이테처럼 둘러서서 푸른 중절모를 쓴 혁화쟁이의 거친 손이 그려내는 혁필화를 본다 어느새 기념족자 신청 순서에 놓인 아버지 이름 석자, 닳고 닳아 유통기한을 넘긴 듯한 넓죽한 가죽 붓에 곤궁한 물감을 묻혀 그려내는 획을 낮은 포복으로 따라가다 보면, 순식간에, 생면부지의 한 사내가 길어올린 필생의 알리바이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쉼 없는 영사기처럼 거침없이 풀어내는 혁화쟁이의 은밀한 내간체가 설화처럼 피어나고, 환하게 어룽거리는 혁필화 한 장으로 남은 아버지, 두 손 가득 펄럭이는데 네모난 비단천 속, 피뢰침같은 철심이 박힌 지문의 파원(波圓) 위로 바스락, 굴참나무 거친 수피가 뗏목처럼 흐르다 멎고 저만큼 달아난 행서체 굴곡 따라 범람하는 푸른 바다, 서늘한 그늘 겹겹 장마 속에 깃들어 계신 아버지 용오름을 하며 빈한의 그림자를 도려내던 모진 칼바람을 듣는다 정자체로 양각한 옥돌전각을 아버지의 혁화와 번갈아 보며, 온전히 다 타버린 참숯처럼 더 이상 사그라들 것도 없던 옥탑방 가득 고인 내 아버지 시린 청년을 읽는다 장난감 블럭을 쌓아 안으로만 숨어들던 내 나이 미운 일곱 살 문득 주머니 속 깊이 넣어둔 전각 틀이 비좁다, 여기 가난의 골목 끝에 펼쳐진 혁필 한 장은 비로소 마주 앉은 탁란(托卵)의 깊은 둥지, 수척한 아버지 긴꼬리태양새 되어 끝없는 비단길 위로 날아가는 에움길인지도 몰랐다 9.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 가작 입상작 항해 / 손 병 걸 비린내 그윽한 다대포 바닷가 꼼장어 구이집 방문 앞에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뒤엉켜 있다. 다른 구두에 밟힌 채 일그러진 놈 에라 모르겠다 벌러덩 드러누운 놈 물끄러미 정문만 바라보는 놈 날씬한 뾰족구두에 치근대는 놈 신발 코끝 시선들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어느새 젓가락 장단 끝이 나고 사람들 한 무더기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다대포 앞바다 썰물 빠지는 소리가 꼼장어 구이집 창 너머로 아득하다. 연방 뭐라고 중얼거리는 꼼장어 안주 삼아 슬며시 쓴 소주 몇 잔 들이켜고는 담배 한 개비 입에 문 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잠시 정박했던 배들이 저 푸른 바다로 떠난 것이었다. 그 순간, 꼼장어 구이집 안으로 환한 웃음 실은 만선(滿船)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10. 2005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할머니 말씀 / 김성화 할아버지는 새벽 일찍 사냥을 떠났단다 햇빛보다 먼저 일어나 말안장을 챙기고 어깨에 활을 매고는 바람처럼 달려갔단다 할아버지가 모는 말의 힘찬 말굽소리를 듣고 늦잠 자던 길가의 풀꽃들은 화들짝 깨어나고 말굽에 채인 돌멩이들이 이리저리 튀었단다 멧돼지 털빛 같은 안개가 깔린 들을 건넜단다 노루 등처럼 가파른 산도 훌쩍 넘었단다 달리고 달려 백두산 기슭에 닿기도 하였단다 사냥을 끝낸 할아버지는 강가에 말을 세우고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손으로 떠마셨단다 말한테도 물을 먹이고 갈기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단다 어둑해지는 저녁이면 어깨 위에 불타는 노을을 지고 할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단다 부엌의 아궁이 불빛이 따스한 집이었단다 할아버지의 등 뒤로 펼쳐진 들판은 끝이 없었단다 그 너른 만주 들판이 할아버지의 땅이었단다 옛날에는 아무도 할아버지의 땅을 넘보지 못했단다 11. 200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안개 / 최재영 길을 나서면 안개가 먼저 다가온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내력 지상의 열린 틈마다 안개가 스며들고 사람들은 한번쯤 기침을 호소한다 새들은 노래하지 않으며 길은 늘 젖어있다 세상의 새벽은 잠 못 이루는 곳에서 먼저 개어나 충혈된 소음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밤새 안개에 젖어 퉁퉁 불은 가로등이 불면의 문장처럼 침침하다 정오가 되기까지는 완전한 침묵이다 이곳의 시간은 안개의 흐름에 따라 정해진다 사물들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낼 때쯤이면 정오의 햇살이 길의 한복판까지 나와 있다 지루한 변명들이 길게 꼬리를 남기고 사라진다 내 안에 내가 관여할 수 없는 것들처럼 대부분의 안개는 길 위에서 소멸해 버리고 구부러진 생의 길목마다 어둠은 먼저 찾아드는 법 새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갔을까 12. 200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꽃 이름, 팔레스타인 / 경 종 호 올해도, 고향엔 칡꽃이 흐드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계집 아이 몇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놉니다. 고무줄이 튕튕 울릴 때마다. 호박이며, 박이며, 수세미 꽃이 핍니다. 어느 새 검정 고무줄에도 꽃이 피어, 달맞이꽃으로 피어, 계집 아이 몇은 노래를 부르며 툭툭 튀어 오릅니다. 미사일 날리듯 양지바른 골목길 벽돌 속에 아비와 오래비를 묻고 옵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예루살렘으 흐르는 계곡마다 넘쳐나는데 칡넝쿨 얽힌 이국의 틈으로 어김없이 달은 떠오릅니다. 어김없이 총알은 밀알처럼 떨어집니다. 폭격기가 지나간 바위 밑 두 눈만 깜박이다, 꿈벅거리다, 풀이 되고 나무가 되어 버린 못생긴 계집 아이는 어느 새 어미가 되고 전사가 되어 아이를 안고 모래 틈을 가로 지르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의 군화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바위를 덮고, 돌산 넘쳐나는 꽃이 피었습니다. 동방 외간 사내가 보내는 꽃, 생리를 하고, 배 란이 지나 생산을 하는 동안에도 그 꽃이 신화(神話)보다 더 질긴 꽃이었음을, 옆구리에 낀 아이가 그 꽃을 닮았다는 것을 몰랐어도 그녀는 좋았습니다. 13. 2005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항아리 / 최재영 처음 나는 겸손한 흙이었다 진흙 층층이 쌓인 어둠을 밀어내고 누군가와 끈끈하게 얽혀진 숨결 불룩한 옆구리를 뽐내며 어느 집의 연륜을 저장하는, 도대체 우화를 꿈꾸지 않았건만 나는 햇살을 움켜쥐고 내 안의 목록을 삭여내는 중이다 아주 오랫동안 해마다 비밀스런 내력을 보태며 맛과 맛, 그 아귀를 맞추는 시간들은 서로 맥박을 주고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때마다 번쩍이는 세월의 빗금하나 그어지고 그리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짜고 싱거움에 길들여진 것들 손꼽아 여닫히던 햇살들 점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러낸다 내게 저장된 세월을 프리스틱 통에 담아가는 사람들,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겸손한 덕담 하나씩 건네준다. 14. 2005년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가작 겨울 강가의 사시나무 / 정지웅 그래 아직은 행복하구나 네 그루터기에 부모 없는 잡풀 몇 키우고 있구나 호주머니에 숨어있는 한 가계의 벌레들 잎사귀에 재우고 나뭇가지에 앉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모두들 잘 보살펴 주었구나 작년부터 꽃 피우지 못하여 영양제 꽂고 긴 겨울을 나더니 올해도 꽃 한 송이 없이 낙엽만 태우고 지붕 없이 살아가는 새들의 엄마가 되었구나 산다는 것은 숨이 내려앉는 순간까지 제 것이 아닌 목숨들을 껴안고 사는 일 죽어서도 발끝을 모아 가까운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었구나 수면 위에 배 한 척 떠 있지 않아도 강물은 흐르고 갈대는 손을 흔든다 어름치는 네 머리 위를 지나 떨어진 가슴 뜨거운 별을 남몰래 주어 먹고 나는 떨어지는 낙엽들을 주어다 세상 슬퍼하는 사람들과 빵을 구워야겠다 잃어도 모든 것이 온전할 사시나무여 눈 내리는 캄캄한 밤이 오면 너의 가지마다 살찐 빵을 달아주어야겠다 15. 2005년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가작 달의 페달 / 이우규 지상에 새벽 달빛이 내려앉는다 삶의 모퉁이를 돌고 돌아가는 낡은 자전거 위 촉촉한 이슬이 스며들수록 삐걱거리는 생의 다리를 동동 구르며 어두운 길 밝혀줄 눈, 생기 있으라고 힘껏 페달을 밟는다 세상 어디든 달려나갈 듯 의지를 펄럭이는 깃발 아래 개미떼 같은 활자들 사이로 유럽풍의 고급 아파트 한 채, 바겐세일 명동 의류 한 벌씩 단단히 끼워 넣고 한층 두툼해진 신문들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신문이 비대해질수록 우리네 삶의 외투 한 벌 두툼해 질 수 있다면 뒤뚱거리는 생의 어깨를 움켜쥐고 어두운 세상 시원하게 밝혀주라고 힘껏 페달을 밟는다, 자꾸만 따라오는 새벽 하늘가의 초승달 누가 저 달에 페달을 달아놨을까 16. 2005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개미는 시동을 끄지 않는다 / 정경미 빵부스러기를 끌고 가는 개미 개미 가는 길을 신발로 가로막지 마라 끓어질 듯 가는 허리에 손가락을 얹지 마라 죽을 때까지 시동을 끄지 않는 개미 한 마리가 손등으로 오른다 언젠가 허리띠를 졸라매던 아버지 바짝 마른 허기가 만져질 것이다 아버지가 털털거리는 생선 트럭을 끌고 돌무지 비탈길을 누비고 다녔다 생선 상자 위로 쏟아지는 땡볕 신경질적으로 바퀴를 두드리는 돌덩이들 왕왕거리는 메가폰 소리를 뚫으며 식식거리며 아버지는 나아가고 있었다 거친 시동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괜찮아, 내 허리띠를 붙잡아라 그날도 아버지는 덜컹거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손등에 오른 개미를 가만히 내려놓는 당신 개미 앞길에 놓인 돌멩이를 치워준다 멀어져 가는 아버지, 당신의 눈 속으로 기어든 개미가 시동을 건다 여섯 개의 다리가 붕붕거린다 17. 200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오래된 집은 달밤에 알을 품는다 / 최종무 보름 달빛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부러진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여물 냄새를 풍기며 올랐다 봉당 무너져 내린 틈으로 구렁이 허물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오얏나무가 뒤울안에 새까만 알들을 수북이 낳아 놓았다 달빛이 알들을 품고 있었다 방에서 아버지 마른 기침소리가 났다 쪽문이 열렸다 이제 왔니 네 기둥은 비스듬히 개울을 향해 누워있었다 함석지붕에 베인 손바닥에서 붉은 녹물이 흘렀다 오래 전부터 나는 파상풍을 앓고 있었다 덧난 생채기에서 바람이 나고 있었다 바람은 집을 감싸고 휘 돌았다 마당귀 미륵 바위 그늘에서 질경이 씨가 여물고 있었다 달빛이 녹슨 괭이 날을 노랗게 벼렸다 오는 봄엔 굵은 물푸레 자루를 박고 비탈 밭을 팔 수 있을 거라고 널빤지 부엌문 앞에서 짤순이가 벌건 쇳물을 짜내고 있었다 보름 달빛 술렁이는 오래된 집에선 까만 알들이 부화되고 있었다 집이 일어나 나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뚫린 창호지 안에서 까만 눈의 아이가 마당을 보고 있었다 이제 왔니 18. 2005년 영남일보 문학상 시 당선작 라훌라 / 최해경 -길모퉁이에서 누군가를 부르며 부르트며 바람이 거리를 휘감는다 어둔 밤 얼룩처럼 드문드문 가로등이 번지고 막차를 기다리는 내 등뒤에서 멀어져라 뒤돌아보지 마라 바람은 쉰 목소리로 다그치듯 나를 자꾸 떠민다 그는 저 만치서 나를 향해 말없이 서 있을 것이다 자울대다 눈을 거푸 치켜 뜨는 길모퉁이 가게 불빛 사이로 밤은 더욱 자우룩해지고 여전히 그의 눈빛은 차게 떨리겠지 스무 살 적, 객지에 나를 처음 떨구고 곧 목놓아 울 듯 그렁그렁하던 그 눈빛이 내 가슴에 단단히 말뚝을 박고는 녹작지근한 해질녘이면 어지러이 발길질을 해대곤 했었다 어미 소의 말간 눈망울에 들이치던 석양빛처럼 빛의 눈물 자국 다 떠메고 차마 못다한 말 되새김질하듯 그리움도 순하게 견뎌야한다는 것 오랜 후에야 그 눈의 얼룩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한여름 소낙비가 얼룩져 시린 겨울 강 핥는 여울이 되고 사랑은 얼룩져 돌이킬 수 없는 그러나 돌이킬 밖에 없는 괴물같이 눈부신 추억을 매달 듯 얼룩이 마냥 뼈아픈 얼룩만은 아니지 이제서야 나는 나를 다독여준다 언제나 뒤돌아보면 나의 짓무른 가슴의 얼룩, 아버지가 끝내 저기 서 있다 세상 없어도. * 산스크리트명은 라훌라(Rahulla)이다. 장애로 의역되고 있다.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하고 출가를 결심하여 돌아오던 길에 아들이 태어나 '라훌라(장애)가 생겼구나!'라고 통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19. 200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중 심 / 심 수 향 11월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듯이 배추가 제 삶의 한창때를 건너고 있다 꽃을 피우고 싶어하는 푸른 이마에 금줄같은 머리띠 하나 묶어주려고 이참 저참 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배추는 중심이 설 무렵 묶어주어야 한다고 귀뜸을 한다 배추도 중심이 서야 배추가 되나보다 속잎이 노랗게 안으로 모이고 햇살 넓은 잎들도 중심을 향해 서기 시작한다 바람이 짙어지는 강물보다 더 서늘해졌다 띠를 묶어주기에는 적기인 것 같아 결 재운 볏짚을 들고 밭에 올랐더니 힘 넘치는 이파리가 툭 툭 내 종아리를 친다 널따란 잎을 그러모아 지그시 안고 배추의 이마에 짚 띠를 조심스레 둘렀더니 종 모양 부도처럼 금새 단아해졌다 부드러운 짚 몇 가닥의 힘이 참 놀랍다 이제 배추는 노란 제 속을 꽉꽉 채우며 꽃과 또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추수 끝난 들녘에 종대로 서 있는 배추들 늦가을의 중심으로 탄탄하게 들어서고 있다 20. 2005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신춘문예) 당선작 구두코에 걸린 달빛이 흐리다 / 하봉채 하룻밤이면 달이 차겠다 비우는 일만 남겠다 곁눈질 모르고 달렸어도 여전히 의문투성인 불혹의 세월 강가를 서성이다 구두를 벗는다 조심스럽게, 강물도 호흡을 멈춘다 온쉼표 하나 없던 일상으로 굽이 낮아지고 한쪽으로 기우는 구두 가죽이 닳고 헐거워져 모양 잃은 구두를 시멘트 둑에 가지런히 놓는다 풍덩, 몸을 던지면 꺾이던 순간마다 마디마디 스며든 악취를 씻어 낼 수 있을까 저리 잔잔하게 살아낸 날은 얼마였던가 양말을 벗으니 울퉁불퉁한 굳은 살 군데군데 각질이 일어나는 발이 놀란 듯 움츠린다. 양말은 구두에게 한 짝씩 나눠주고, 일상을 통째로 감아 쥔 넥타이와 채찍질만 일삼아 온 시계를 푼다, 디지털 포위망을 좁혀 오는 핸드폰도 내려놓는다 한여름인데 시멘트 강둑은 차갑다 한 쪽 발을 내 딛는다, 남은 발을 마저 들여 놓는다, 강물은 더 차갑다 한 걸음 두 걸음 흔들리는 횡보에 달빛이 흔들린다, 줄 선 빛고드름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풍덩! 강 가운데 떠 있던 바지선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먼저 뛰어든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을까 발목을 간질이는 파문은 짧다 이내 고요하다 구두코에 걸린 달빛이 흐리다 21. 2005년 전북도민신문 신춘문예 날아가는 방 / 유성찬 이삿짐을 다 싸두고도 아내는, 허공에 걸어둔 종이학하나 어쩌지 못하나보다 산동네 반 지하 단칸 방, 그 밤 내 이삿짐을 싸다가 방안 가득 걸어둔 종이학들은 거두지 못한 채 잠이 든 척 누운 아내, 허공에다 뭘 저리 걸어두었나 날아오른 종이학 무리들 그 밤 내 어디로든 떼 지어 날아갈 성 싶다 이 방마저 가져갈 수 있다면 좋으려만, 자꾸만 한숨소리에 침몰해 버릴 듯한 半地下의 방,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날 수 있다면, 내일 아침 자고일어나면 어디든 다른 곳에 살고 있다면 좋겠다는 아내 어디로 갈까 막막한 마음에 아무리 떠올려 보지만 좀처럼 갈 곳은 떠오르지 않고 문득, 고향땅 송도다리께를 떠올려본다 아내와 처음 만나 살았던 판잣집 함께 살았던 제비부부는 아직 잘 살고 있을까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아내 곁에 누워 잠을 청해보는 밤, 멀리, 담장 너머 누구네 집 天井을 이고 가는 중인지, 한 무리의 철새들 무리 지어 떠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부부 누워 잠든 방을 달고 부지런히 이동해 왔을 저 종이학 무리들, 그 밤 내 떠나가는 철새들 틈에 끼어 날아올랐다 날아가는 학들이 끌고 가는 저 작은 방 속 어쩌면 어느 九天을 횡단해 가고 있을지 모를 아내와 나 22. 2005 신춘문예 / 동시부문 당선작 붓꽃 / 최명란 하교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힘껏 뛰었다 게임방 입구에서 잠시 피했다가 다시 뛰었다 피자집 담벼락에 붓꽃 한 송이 우산도 안 쓰고 비를 맞고 있었다 빗줄기가 세차게 때리는데도 눈을 감고 꿋꿋이 이겨내고 있었다 나도 뛰던 걸음을 멈추고 붓꽃이 되어 서 있어 보았다 멀리 골목 어귀에서 엄마가 우산을 들고 붓꽃처럼 웃고 서 있었다 23. 2005 신춘문예/시조] 당선작 대설주의보 / 김영완 1 거친 숨결 허옇게 얼어붙는 역 광장 앞 어디론가 가야 하는 길손들이 서성이고 그 몇은 허방을 딛고 빙판 위로 넘어진다. 제 한 몸 세우기도 버거운 이웃들은 손잡아 일으켜 줄 온기마저 놓아버리고 저마다 제 그림자 옆을 흘깃 흘깃 지나친다. 몇 날 찌푸린 하늘, 끝내 싸락눈 흩날리고 둥지 잃고 날아든 난간 아래 저 굴뚝새들 한두 톨 옹색한 모이, 이 겨울이 너무 시리다. 2 대설주의보 내려진 오후의 늦은 귀가 매운 바람 얼얼하게 외투 깃을 후려치고 움츠린 어깨 너머로 희끗희끗 눈발 설 때 통 속의 군고구마 냄새 웅숭그린 담 모퉁이 추위도 조금씩은 익숙해진 모습들이 장작불 환한 눈빛을 봉지 속에 담아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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