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당선작

연혁 /황지우

자크라캉 2006. 3. 17. 22:36

연혁(沿革)

                          황지우


섣달 스무 아흐레 어머니는 시루떡을 던져 앞바다의 흩어진 물결들을 달
래었습니다. 이튿날내내 청태(靑苔)밭 가득히 찬비가 몰려왔습니다. 저희
는 우기(雨期)의 처마 밑을 바라볼 뿐 가난은 저희의 어떤 관례와도 같았
습니다. 만조(滿潮)를 이룬 저의 가슴이 무장무장 숨가빠하면서 무명옷이
젖은 저희 일가(一家)의 심한 살냄새를 맡았습니다. 빠른 물살들이 토방
문(土房門)을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저희는 낮은 연안(沿岸)에 남아
있었습니다.
모든 근경(近景)에서 이름 없이 섬들이 멀어지고 늦게 떠난 목선(木船)들
이 그 사이에 오락가락했습니다. 저는 바다로 가는 대신 뒤안 장독의 작
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빈 항아리마다 저의 아버님이 떠나
신 솔섬 새울음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물 건너 어느 계곡이 깊어가는지
차라리 귀를 막으면 남만(南灣)의 멀어져가는 섬들이 세차게 울고울고 하
였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붙들었고 내지(內地)에는 다시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그
럴수록 근시(近視)의 겨울 바다는 눈부신 저의 눈시울에서 여위어갔습니
다. 아버님이 끌려가신 날도 나루터 물결이 저렇듯 잠잠했습니다. 물가에
서면 가끔 지친 물새떼가 저의 어지러운 무릎까지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느 외딴 물나라에서 흘러들어온 흰 상여꽃을 보는 듯했습니다. 꽃
속이너무나 환하여 저는 빨리 잠들고 싶었습니다. 언뜻언뜻 어머니가 잠
든 태몽(胎夢)중에 아버님이드나드시는 것이 보였고 저는 석화(石花)밭
을 넘어가 인광(燐光)의 밤바다에 몰래 그물을 넣었습니다. 아버님을 태
운 상여꽃이 끝없이 끝없이 새벽물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삭망(朔望)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나 바람 속은 저의 사후(死後)처럼
더 이상 바람 소리가나지 않고 목선(木船)들이 빈 채로 돌아왔습니다. 해
초 냄새를 피하여 새들이 저의 무릎에서 뭍으로 날아갔습니다. 물가 사람
들은 머리띠의 흰 천을 따라 내지(內地)로 가고 여인들은 환생(還生)을
위해 저 우기(雨期)의 청태(靑苔)밭 넘어 재배삼배(再拜三拜) 흰떡을 던
졌습니다. 저는 괴로워하는 바다의 내심(內心)으로 내려가 땅에 붙어 괴로
워하는 모든 물풀들을 뜯어 올렸습니다.
내륙(內陸)에 어느 나라가 망하고 그 대신 자욱한 앞바다에 때아닌 배추
꽃들이 떠올랐습니다.먼 훗날 제가 그물을 내린 자궁(子宮)에서 인광(燐
光)의 항아리를 건져올 사람은 누구일까요.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 프로필

 

시인 황지우 []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서울대 인문대 미학과 졸업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으로 입선,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문학과지성>에 발표
1995년 학고재 화랑에서 조각전을 여는 등 전방의 예술가로 활동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국 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