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가게
심은섭
근엄한 신사의 담배파이프처럼 연기를 뿜어내던 공장굴뚝이
나무들의 저항으로 개기월식 중입니다
에스컬레이터가 밤낮으로 거리의 인적을 쓸어 담아내자
풍선껌은 풍선을 기억하지 못하고,
북어는 늙은 말의 눈빛으로 기둥에 매달려있습니다
새벽마다 북치고 나팔 불며
상한가 매출을 다짐하던 대형마트도
정신이 시계태엽처럼 풀어져 시든 꽃의 표정으로 폐업을
선언했습니다 그때 창문의 귀를 굳게 닫고 살던 도시의
빌딩들도 일제히 경련을 일으키며 주의 기도문을 외워보지만,
50년의 오랜 세파에 시달리며 얼굴 곳곳에
저승꽃이 피어나도 그는 비문 같은 외상장부에 적혀 있는
이름들의 영혼을 닦아주려고,
폐업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신도 슬퍼할 만큼의
질긴 벽창호인 까닭에 그의 몸은 아홉 개의 피멍입니다
-출처 : 2022년 《상상인》 1월호(통권03호)
《심은섭 시인》
∙2004년 『심상』으로 등단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평론집 :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 『상상력과 로컬시학』 외
∙(현)가톨리관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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