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작시

능금의 조건 - 심은섭

자크라캉 2022. 1. 23. 19:26

능금의 조건

 

    심은섭

 

 

    청동시계가 멈춰도 지상으로 내려와서는 안 된다 최상의 꿈을 출시하려면 민낯에 구릿빛 화살촉도 무수히 꽂아야 한다 그럴수록 너는 산모가 산통을 잊은 것처럼 홀로 꽃을 피워내던 통점을 잊은 채 또 낙화를 서둘러야 한다

 

    어느 4, 군중을 향해 낭독한 하얀 선언문대로 온몸의 모서리를 허물어야 한다 그때 돌칼이 아니라 풍상風霜으로 지워야 한다 그것은 제법 무게가 나가는 선조의 유전자가 허무의 원을 그리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 까닭이다

 

    늦가을, 흰서리를 맞고 겨우 둥근 영토를 얻어낸 늙은호박이나, 숯불에 영혼을 태워야 정품이 되는 삼겹살의 운명을 떠올리며, 전신에 붉은 화인을 찍어야 한다 그래야만 눈이 큰 짐승들의 검은 입속을 점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2021년 《이어도문학》 제2호에 재발표

 

 

     심은섭 시인

 

2004 심상으로 등단

2006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평론집 :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 상상력과 로컬시학

()가톨리관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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