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물바다가된 대치동 사거리〉
[출처] 물바다가된 대치동 사거리|작성자 윤화순
은행나무골 사거리의 풍경
심은섭
1.
신용카드가 결제 되지 않는 대원미니슈퍼 철이 할머니, 철이가 루사*를 따라 간 뒤 우체통만 바라본다 아랫목에서 파닥거리는 철이 어리광에 할머니는 기둥에 걸려있는 황태를 닮아 간다 이른 새벽에도 그가 걸어온 길을 찾아보려는 듯 보도블록에 내려앉은 어둠을 쓸어 낸다
2.
그 시간, 밀린 가게 월세로 밤새 열병을 앓던 건너편 복권방 함씨, 무릎까지 차오른 어둠을 헛기침으로 풀어낸다 이층 옥상으로 올라가 「당신이 크게 웃는 그날까지」라고 쓰인 현수막의 눈발을 한 방울의 물이 되라고 아래층으로 밀어내며 “매화는 아무리 추워도 꽃을 피운다”며 중얼거린다
3.
동해방면 돌산반점의 자장면 냄새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다 쉰 살에 분양받은 15평 아파트 중도금 체납날짜가 밤마다 불면증으로 찾아와 두 눈 부릅뜨고 수타면을 뽑는 주방장 강씨 어깨 이두박근에 눈빛이 오래 머문다 팔뚝에 <一心>이라는 푸른 문신이 더 선명하다
4.
노모의 치료비로 그의 손끝에 압류 딱지가 붙은 뷰티머리방 올드미스박의 가위질이 한창이다 가위 날을 새파랗게 세우고 뱀눈으로 달려와도 그의 얼굴은 늘 회색빛이었지만 춘사월 초이렛날 면사포를 씌워준다는 키 큰 사주단자가 있어 가위질은 더 빠르고 가볍다
정지선에 서서 은행나무골 사거리 풍경을 보던 덤프트럭이 목이 길어진 슬픈 비늘을 털어버리고 푸른 신호등을 따라 직진 페달을 밟고 있다
*태풍
-2017년 <월간문학>,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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