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 시인

상투 자른 '아해들' 욕망의 질주를 시작하다

자크라캉 2010. 5. 10. 23:53

상투 자른 '아해들' 욕망의 질주를 시작하다 -20100105,조선일보- 현대문학-작가 / 문학의 세계

2010/01/0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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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한국 문단에 홀연 나타나 모더니즘 문학의 큰 성을 쌓은 천재 시인·소설가 이상(李箱·1910~1937)이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전위적 실험정신과 해체적인 서사를 앞세워 분열된 내면세계를 탐험했던 이상의 문학은 지금도 많은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창작의 샘물이다. 한국 문학의 영원한 '모던 보이' 이상의 짧은 삶과 문학,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예술가들의 풍경을 시인·문학평론가 장석주씨가 매주 연재한다.

― 편집자

여우털 목도리를 감은‘모던 걸’. 조선일보 1933년 10월 25일자에 실린 안석영의 만문(漫文).

1930년대는 '모던뽀이'와 '모던껄'들의 전성시대였다. 미적 혁신을 표방한 예술의 아방가르드들, 거리로 쏟아져나온 유행과 소비의 첨병들이 '모던'의 시대를 이끌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을 타고 조선반도까지 밀려온 '모던'은 낡고 오래된 것을 잘라내는 데서 시작됐다.

'모던(modern)'은 곧 '모단(毛斷)'이다. 상투를 자르는 것은 지난 시대와의 단절, 인습에서의 자유를 뜻한다. 새로운 미학적 규준에 몸을 맞추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문화적 단절에 따른 충격이었다. 수백 년 동안이나 머리에 이고 있던 상투를 자른 '아해들'이 시대의 '막다른 골목'을 향하여 질주를 시작했다(이상, 〈오감도〉시 제1호). 그 막다른 골목은 모더니즘의 도주로였다.

그런데 왜 1930년대일까?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유화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느슨해진 탓이 컸고, 아울러 카프(KAPF)나 민족주의 진영과는 다른 이념과 미적 규준을 가진 예술가들의 분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기진·박영희 등이 이끌던 카프에 반발한 일군(一群)의 문인들이 1933년에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했다. 그 초기 구성원들은 김기림·이효석·이종명·유치진·김유영·조용만·이태준·정지용·이무영 등이었다. 이 중에서 몇이 빠지고 그 자리를 박태원·이상·박팔양·김유정·김환태 등이 채웠다. '구인회'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시작점이다. 그 모더니즘 대열의 맨 앞자리에 선 인물이 이상이었다.

당시 경성의 상징은 도심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고급백화점들이었다. 백화점은 근대문명의 전시장이자 상품에 대한 소비욕망을 부추기는 카니발의 장소였다. 판탈롱 바지와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를 신고 한껏 멋을 부린 모던 걸과 양복을 걸쳐 입고 중절모를 쓰고 스틱을 든 모던 보이들은 욕망의 각축장인 백화점 옥상정원(屋上庭園)에서 '노골하게 해방된 연애'를 즐겼다.

1930년대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사교 공간이있던 미쓰코시(현 신세계)백화점의 옥상 카페./‘사진으로 보는 서울’중에서

1920년대 말부터 경성에는 동아부인상회·화신상회(뒤에 화신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꿨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하라다·조지야·미나카이·미쓰코시 같은 백화점들이 들어서며 경쟁을 했다. 특히 미쓰코시 백화점의 옥상정원은 경성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경성 최고의 연애 명소였다. 이곳은 항상 조선인과 일본인 신여성과 여학생들로 차고 넘쳤다.

1930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경성역에 도착한 박태원은 짐꾼을 시켜 짐은 집으로 보내고 자신은 곧바로 미쓰코시 백화점으로 가서 옥상정원 파라솔 아래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박태원은 도쿄 유학을 떠난 지 몇 달 만에 병이 재발하고 실연의 상처까지 겹쳐 견딜 재간이 없었다. 간다의 진보초 서점에서 구한 제임스 조이스와 아쿠타가와의 소설들을 끼고 하숙집에 틀어박혀 종일 읽다가 지치면 잠을 청하다가 짐을 쌌던 것이다.

1930년대 경성 인구는 40만에 가까웠고, 거리에는 전차와 자동차가 달렸다. 이상은 자동차 행렬을 보고 '발광어류(發光魚類)의 군집이동(群集移動)'(시 〈건축무한육면각체〉)이라고 썼다. 이상이 이태준의 소개로 박태원을 처음 만난 1933년 이후 그들의 우정은 급격하게 깊어졌다. 두 사람이 혼마치(충무로)와 황금정(을지로)을 나란히 걸어가는 걸 목격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소공동에 있던 끽다점 '낙랑파라'에 들러 가배차(茶·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이야기를 나누고, 레코드를 들었다. 그러다가 유학을 간다는 어느 화가의 '도구유별전(渡歐留別展)'이 열리는 화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이들 모던 보이들은 커피 대신 청량음료수 칼피스를 마시기도 했고, 상류층에서는 아지노모도를 넣어 조리한 음식을 먹었다. 신여성들은 미쓰코시나 화신에서 최신 양장을 사서 입거나, 종로2정목 한청빌딩 1층에 있는 수향상회에서 고급 양장을 맞춰 입었다. 금시계와 다이아몬드 반지는 당시 신여성의 첨단 패션에서 빠질 수 없는 품목이었다. 지금부터 이들 '모던 뽀이'들이 걸었던 경성 거리와 그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들여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