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 시인

너무 일찍 이 지구에 온 사나이… -20100112,조선일보

자크라캉 2010. 5. 10. 23:52

너무 일찍 이 지구에 온 사나이… -20100112,조선일보- 현대문학-작가 / 문학의 세계

2010/01/12 10:43

복사 http://blog.naver.com/bebright75/97549580

1933년 경성(京城), 늦여름 저녁 무렵. 예사롭지 않은 외모의 남자 넷이 황금정(지금의 을지로)을 거쳐 종로를 걷고 있었다. 백구두에 봉두난발, 갈색 나비넥타이, 얼굴의 반쯤을 덮은 구레나룻에 얼굴빛이 창백해서 양인(洋人)인가 싶은 사나이, 그 곁에 중산모를 눌러 쓴 키가 여느 사람의 반밖에 되지 않는 꼽추, 흐느적흐느적 걷는 폼이 마치 인조인간처럼 보이는 사나이,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갓빠'머리(머리 꼭대기를 일자로 깎은 머리) 스타일의 키가 훌쩍 큰 또 다른 사나이.

"어디 곡마단 패가 들어왔나 본데." "아냐. 활동사진 변사 일행이야."

사람들이 이 기묘한 일행을 힐끔거리며 한마디씩 던졌다. 스틱을 들어 공중에서 휘휘 돌려대던 백구두의 사나이가 돌연 "캬캬캬캬…" 하고 웃었다. "이 꼴들을 보게. 참, 정말 곡마단 일행이 왔다구 애들이 또 줄줄 따라오겠어."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끼어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의 웃음소리는 독특했다.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이 '일세의 귀재(鬼才)'로 불리게 될 이상(李箱·1910~1937)이었다. 그리고 꼽추 화가 구본웅(具本雄·1906~1953), 흐느적거리며 걷는 소설가 겸 번역가 양백화(梁白華·1889~1938), 소설가 구보 박태원(朴泰遠·1909~1986)이 그 일행이었다.

1931년에 개점한 경성 최초의 커피다방 낙랑파라에서 구인회(九人會) 모임을 마친 일행은 근처 골목길에 있는 우고당(友古堂)에 들러 구본웅을 대동하고 한 잔하러 나선 길이었다.

경성역 대합실의 끽다점(喫茶店)과 더불어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던 낙랑파라의 주인은 일본 동경미술학교 도안과 출신의 화가 이순석이었다. 이순석은 경성부청(府廳)과 마주 선 건물 이층에 화실을 꾸리고, 아래층에는 끽다점을 냈다. 입구는 파초 화분으로 장식하고, 내부 널마루 위에 톱밥을 펴서 사막에 온 듯한 정취를 자아냈다. 낙랑파라는 훗날 배우 김연실이 인수해 이름을 낙랑이라고 바꾸고 해방 후까지 운영했다.

이상의 절친한 벗이었던 화가 구본웅이〈친구의 초상〉 (1935년 작)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이상의 초상화.

구본웅이 1935년 3월경 우고당 2층에 마련한 화실에서 그린 〈우인(友人)의 초상〉이란 작품이 있다. 봉두난발에 상아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이상의 초상화다. 파이프 담배는 본디 이상의 것이 아니라 구본웅의 것이었다. '배고픈얼굴을본다./ 반드르르한머리카락밑에어째서배고픈얼굴은있느냐./ 저사내는어데서왔느냐./ 저사내는어데사왔느냐.'(이상의 시 〈얼굴〉)

이상은 거울을 보며 자주 "너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퇴폐와 패륜의 표상으로, 때로는 광인(狂人)으로 오해받으며 냉대와 수모를 당하고, 병고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내면에 은닉된 스캔들의 원소, 존재 그 자체로 시대의 개벽을 예고하는 천둥이며 번개였던 이상! 위트와 패러독스로 무장한 천재는 너무 일찍 이 지구에 온 것인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은 소설 〈날개〉의 첫 문장을 그렇게 시작했다. 물론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는 이상 자신이었다. 김기림은 이 최초의 모더니스트 시인에게서 해학과 야유와 독설로 '세속에 반항하는 악한 정령(精靈)'을 보았다.

이상은 조선중앙일보 1934년 7월 24일자에서 8월 8일까지 연작시 〈오감도〉를 발표했다. 이때 "이게 무슨 개수작이냐!" "당장 집어치워라!" "이상이라는 작자를 죽이고 말겠다!"는 야유가 쏟아졌다.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결국 연재는 15회로 중단됐다. 그는 항변했다.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년씩 떨어지고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2000점에서 30점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용대가리를 딱 꺼내어 놓고 다들 야단하는 바람에 배암 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 달고 그냥 두니 서운하다."

이상은 시대를 너무나 앞질러갔기에 이해받지 못했다. 세상을 뜬 뒤에야 당대의 냉대와 몰이해의 사슬에서 벗어났다. 그는 '박제'가 되어버릴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날개〉를 쓴 것은 아닐까. 이상의 삶은 '전통(친부·親父)'에서 내쳐져 '근대(양부·養父)'로 입양되었다가 그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아해'의 슬픈 종생기(終生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