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 시인

스캔들, 여성을 이중적으로 보다 /동아일보 2010.5.5일자

자크라캉 2010. 5. 10. 23:21

[21세기, 다시 읽는 이상]<끝>스캔들, 여성을 이중적으로 보다 -20100505,동아일보- 현대문학-작가 / 문학의 세계

2010/05/0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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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건축기사 시절의 이상(가운데). 그는 근대를 지향하면서도 전근대적인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자유연애를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답습했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소명출판

 

기생 금홍과의 동거, 권순옥 등 카페 여급과의 사랑이 보여주는 20세기적 자유연애의 넘치는 방종이 있는가 하면 정조관념에 입각하여 신여성 소녀, 아내에게 자유연애를 단죄하는 너무도 19세기적인 엄숙주의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는 결국 정조관념을 초월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19세기식’이라고 불렀다. 이상 문학의 여성들은 두 계열로 그려진다. ‘봉별기’ ‘날개’에 나타난 금홍 계열의 여성들과 ‘동해()’ ‘종생기’ 등에 나타난 신부 임()이 계열의 단발한 신여성들이다. 그는 금홍 계열의 여성에게는 순종적이며 피학적 쾌감을, 자의식 강한 신여성들에게는 가학적 불쾌를 보여준다.
먼저 금홍 계열의 여성들이 있다. 이상의 삶의 가장 충격적 스캔들은 금홍과의 만남에서 연유한다. 요즈음 말로 ‘팜 파탈’이다. “스물세 살이오-3월이오-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날로 다듬어 코 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약 한 제 지어들고 B라는 신개지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그 유명한 ‘봉별기’의 첫 부분이다. 결핵을 치료하기 위하여 한약 탕제를 지어들고 배천온천으로 갔으나 사흘을 못 참고 장구 소리 나는 집으로 찾아갔다. 게서 만난 것이 금홍()이다. “체대가 비록 풋고추만하나 깡그라진 계집이 제법 맛이 맵다”고 묘사된 금홍은 스물 하나, 이미 아이까지 낳은 경산부였다. 그는 금홍과의 아기자기한 사랑에 병을 잊었으며 사랑의 힘으로 각혈이 멈출 정도였다고 자랑한다. 정신의학자는 결핵환자가 치료를 하지 않고 성에 탐닉하는 것을 만성자살경향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친구 C, 우씨 등에게 금홍과의 연애를 권하고 간음의 무대 앞을 서성이는 것을 관음증, 성 콤플렉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몇 달 후 이상이 백부의 유산을 정리하여 ‘제비’를 개업할 때 금홍을 경성에 불러들여 카페 마담으로 들어앉힌다. 이상은 금홍에게서 두들겨 맞거나 심리적 학대를 당하면서도 원망하지 않는다. 금홍은 다른 남자들의 머릿기름 냄새가 배어 있는 2인용 베개 하나를 선물로 주고 가출한 후에도 ‘아파서 누워 있으니 얼른 오라’는 그의 전보를 받고 돌아와 두 팔을 걷고 그를 먹여 살린다고 야단이었다고 한다. 금홍은 그런 여인이다. 먹여 살린다고 두 팔을 걷어붙이는 여인. 몸 하나를 자본으로 하여 식민지 시대의 생활전선을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금홍에게서 식민지 최고 엘리트 출신이자 룸펜 남편인 이상은 그토록 갈구하던 따뜻한 생명력, 무조건적 모성을 느낀 듯하다.
이와 달리 이상은 신여성 계열의 여성들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비밀을 추궁하고 19세기식 단죄를 가차 없이 내린다. 그는 신여성들이 갖고 있는 근대적 개인으로서의 각성, 가부장제적 관습적 사고를 부인하는 여성의 자의식에 물러서지 않고 반발하며 ‘철면피’, ‘눈 가리고 아웅의 천재’, ‘석녀’, ‘한 개 요물’ 등으로 매도한다. 이렇듯 이상은 여성에 대하여 자기모순과 이중적 태도를 드러낸다. 유교적 가부장제가 부여하는 젠더 의식에 반발하면서도 그는 자의식이 강한 여성이 관습적 젠더 의식에 반발할 때는 뜨거운 거부와 공격성을 드러낸다. 그는 스스로 젠더적 우울을 강하게 느끼지만 신여성이 젠더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할 때는 증오를 느꼈다.
김수영처럼 젠더에 갇힌 남성-자유인의 한계다. 성의식에 대한 이런 갈등과 고뇌는 21세기 지금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금홍 계열과 임이 계열, 두 계열의 여성들과 그는 완전한 만남을, 인격적 행복을 누릴 수는 없었다. 불우의 천재 이상은 1937년 4월 17일 도쿄제국대 부속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허허벌판에 쓰러져 까마귀밥이 될지언정 이상()에 살고 싶구나”라고 했던 마음과 “고추장이 먹고 싶다.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고 썼던 마음이 서로 다투고 있던 중 일제 경찰에 의해 ‘불령선인()’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니시간다(西)경찰서에 한 달여 구속됐던 그는 폐결핵으로 스러졌다. 도쿄에 간 지 일곱 달 만이었다.



향년 만 26세 7개월. 아내 변동림이 화장한 유해를 갖고 귀국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 어디에 매장하였으나 지금 그 위치를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