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 탈 쓰는 여자/ 심은섭
눈만 뜨면 거울 앞에서 탈 쓰는 여자
스무 살의 탈을 쓰고 밥 짓고 빨래를 하다가
식탁에 앉아 허공이 된다
손톱에 빨간 문양의 탈을 씌워도 허공 속에는
창과 방패가 들어 있다
간혹, 푸른 늑대들이 그 창에 찔리기도 하지만
사내가 흔드는 은방울소리에 가슴이 터지는 여자
점점 두꺼워진 탈을 쓰고 목마른
탈춤을 추기도 한다
빗방울 소리에 작은 섬이 되어
섬이 섬으로 외출을 하지만 돌아와야 할 시간을 안다
늑대들의 발자국이 무수히 찍힌 도시의 거리
그 길을 되돌아오는 오래된 종점에 서서
허물 한 겹 벗은 여자
뼈와 뼈 사이에 걸 터 앉아 있던 시간은 부패되고
목덜미에 잔주름 둥지 트는 소리가 들리는
은관銀冠 쓴 노파가
편자가 박힌 천마를 타고 탈 속을 걸어 나온다
-2007년<문학마을> 여름호-
[감상]
세상에서 자신을 꾸미지 않는 여성은 드물 겁니다. 그것을 시인은,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을 보고 본래 모습을 벗겨내고 오늘 연기해야 할 가면으로 위장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은관銀冠 쓴 노파가 / 편자가 박힌 천마를 타고 탈 속을 걸어 나온다>고 하네요. 이렇듯 이 시는 하루의 일상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여자의 일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여자 중년의 여자 노년의 여자 모두 그 나름대로 탈을 써야 할 이유가 있겠지요. 늑대를 유혹하기 위해 섬이 되어 또 다른 섬을 만나 수다를 떨다가도 제때 귀가하기 위해 어쩌면 가면이 필요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가면을 쓰고 욕구충족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한들 유한한 젊음을, 문득문득 찾아오는 공허를 다 해소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 시에서 허공이나 섬 그리고 종점이라는 시어의 배치가 그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허공에서 출발해서 섬을 거쳐 종점으로 오는 여자, 정신없이 가면을 썼다가 벗기를 반복하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결국 뼈와 뼈 사이에 있던 젊음은 빠져나가고 목덜미에 잔주름 트는 소리만 무성하게 된 여자, 그제야 진실이라는 가면 밖으로 탈출을 합니다.
또한 이 시에서 시인은 여자를 등장시켰으나 어쩌면 여자는 상징일 뿐 사실은 남자를 포함하는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봐도 될 듯합니다. 외모뿐만 아니라 속마음까지도 실제와 다르게 보여주는 사회의 단면을, 우리는 매스컴에서도 가끔 접하고 있지요. 오늘은 거래처와 담판을 짓는 날, 오늘은 뒷주머니 채우는 날, 오늘은 부적절이라는 단어를 연구하는 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두가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겠지요. 주름투성이인 몸뚱이로, 뼈마디가 오그라들고 머리털이 하얗게 된 그때서야 말입니다.
[글쓴이]
2008년 월간지「우리시」가 9월호에서 선정한 좋은 시 중에서
박승류 시인께서 쓰신 글 입니다
l
l `04년 시 전문지 월간「심상」신인상으로 등단
l `06년 「경인일보」신춘문예 詩부문 당선
l `06년 「5.18 기념재단」<문학상 작품 공모> 詩부문 당선 수상
l `06년 제1회 <정심문학상> 수상
l `08년 「시와세계」 겨울호로 <문학평론> 당선
l `09년 제7회 강원문학 작가상 수상
'나의 자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1년 올해의 좋은 시 [322] - 심은섭 (0) | 2010.11.13 |
---|---|
겨울산 / 심은섭 (0) | 2010.08.06 |
아줌마부대 / 심은섭 (0) | 2010.02.16 |
빗살무늬 아내 / 심은섭 (0) | 2009.09.18 |
분수 / 심은섭 (0) | 2009.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