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자리 / 정끝별
어떤 손이 모과를 거두어 갔을까
내가 바라본 것은 모과뿐이었다
잠시 모과 이파리를 본 것도 같고
또 아주 잠시 모과 꽃을 보았던 것도 같은데
모과 이파리가 돋아나는 동안
모과 꽃이 피어나는 동안
그리고 모과 열매가 익어가는 내내
나는 모과만을 보았다
바라보면 볼수록 모과는 나의 것이었는데
어느 날 순식간에 모과가 사라졌다
내 눈맞춤이 모과 꼭지를 숨막히게 했을까
내 눈독(毒)이 모과 살을 멍들게 했을까
처음부터 모과는 없었던 게 아닐까 의심하는 동안
모과는 사라졌고 진눈깨비가 내렸다
젖은 가지 끝으로 신열이 올랐다
신음 소리가 났고 모과는 사라졌고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에 주먹만한 허공이 피었다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를 보고 있다
보면 볼수록 모과는 여전히 나의 것이건만
모과 즙에 닿은 눈시울이 아리다
모과가 떨어진 자리에서
미끄러지는 차연(次緣)의 슬픔
이 사랑의 배후
정끝별 시인
-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
-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삼천갑자 복사빛』,『와락』,
- 시론집 및 평론집『패러디 시학』,『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오룩의 노래』,
- 여행산문집『여운』,『그리운 건 언제나 문득 온다』, 시선 평론집『시가 말을 걸어요』등
- 소월시문학상 수상
- 현재 명지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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