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작품들

[제11회 수주문학상 수상작] 한 권의 책 / 이 경 희

자크라캉 2009. 9. 13. 01:09

 

 

사진<달리는 기차 여행>님의 카페에서

 

[제11회 수주문학상 수상작]

 

-대상 作-

 

권의 책 / 이경희

 

                                                    

첫 페이지를 열면
당신의 중심이 일제히 긴장하는 게 보여요
단서들은 지우고 싶을 거예요
제 눈에 찔리는 것보다 무서운 가시란 없으니까요
문장은 자꾸 숨고 싶어요 그 때
짐짓 당신은 지워지는 척 흐릿하게 보일 거예요
힌트가 늘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지향으로만 찾아 내야 하는 숙제같은 거예요
그 순간에 조금은 캄캄해 질 여름 폭우같은 거 부디 잘 견뎌 주세요
지나고 나서야 개요는 보이는 법이니까요
마지막 장을 남겨둔 채 천둥 속으로
당신을 덮으면서 나는 숨이 차 올라요 그럴 때 잠시 멀리 있을 게요
빗속에 서서 잠시만 당신의 활자를 더 맞을 게요
거리란 적당한 시력을 위해 늘 필요한 일이니까요
각자의 행간에서 굳이 되돌아 오는 길을 물을 필요는 없어요
해답이 같이 있는 퀴즈는 조금 싱겁지 않을까요
그러니 각기 다른 열 개의 문장으로,
간절한 한 개의 이유를 풀고 싶을 때는,
한사코 끝까지 기대해 주세요, 당신과 나의 열렬한
오픈 북

 

 

 

 

-우수상-

 

 

늘 끝에서 피는 꽃 / 이사랑
                                
청석골의 단골 수선집 늙은 재봉틀 한 대
아마, 지구 한 바퀴쯤은 돌고도 남았지
네 식구 먹여 살리고 아들 딸 대학까지 보내고
세상의 상처란 상처는 모조리 꿰매는 만능 재봉틀
실직으로 떨어진 단추를 달아주고 이별로 찢어진 가슴과 술에 멱살 잡힌 셔츠를
감쪽같이 성형한다
장롱 깊숙이 개켜둔 좀먹은 내 관념도 새롭게 뜯어 고치는 재봉틀
작은 것들은 가슴을 덧대어 늘리고
막힌 곳은 물꼬 트듯 터주고 불어난 것들 돌려 막으며
무지개실로 한 땀 한 땀 땀구슬을 꿰어 서러움까지 깁고 있다
무더운 여름 낡은 그림자를 감싸 안고 찌르륵 찌르륵
희망은 촘촘 재생 시키고 구겨진 자존심은 반듯하게 세워 돌려준다
일감이 쌓일수록 신나는 재봉틀 오늘도 허밍허밍 즐겁다
별별 조각난 별들을 모아 퀼트 하는 밤
바늘 끝에서 노란 달맞이꽃들이 환하게 피어났다

 

 

 

-우수상-
화과 나무 / 강영숙

하늘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그 나무의 열매, 한 그루 세월을 붙들고 있다 내안에서 자라난 그 나무 붉은

피 흐르지 않는다

 

손바닥 마구 흔들던 잎들 하늘을 뒤덮는다 아이와 나는 막든 바람 홀연히 빠져나가고 가지마다 싱싱한 눈물 울멍울멍 꽉 채운 동그라미를 무화과꽃이라 부른다

 

혈색이 창백한 혈액 종양내과 복도, 웃음잃은 사람들 차례대로 호명을 기다린다 오래전, 소아병동에서 노란 위액을 토해내던 차트번호 1137440 어린아이가 스물 다섯 청년이 되었다 혈관 불뚝거리는 팔뚝엔 채혈 바늘 마음대로 들락거린다

 

매연에 질식된 공기와 소통하는 국채보상공원 길을 걷는다 달구벌 대종이 소리를 가둔 채, 제야의 종소리를 준비하고 있다 잎들 뜯긴 나무들 서로를 세차게 껴안는다 봄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나는 희디흰 핏방울 뚝뚝 떨구는 감옥, 무화과꽃이다

 

-우수상-
/ 강정숙
발굴자들은 그녀가
임산부였다는 사실에 더 집중했다
유난히 통통한 복부 때문이다
복부를 가르고
몇 겹 표피를 들추자
말라붙은 탯줄과 자궁, 외벽엔
암반같이 굳어버린 핏물이 보인다
가느다란 손으로 배를 감싸고
긴 머리카락 뒤틀린 입술이
반쯤 벌어져 있는 그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이를 낳을래요
머리카락으로 요람을 짜겠어요
사백년쯤 걸릴꺼에요
물기 없는 여자의 내부가
형광등 아래서 환하게 웃고있다
[주문학상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회부된 작품들을 꼼꼼하게 읽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무화과 나무'(강영숙), '미라'(강정숙), '바늘 끝에서 피는 꽃'(이사랑), '한 권의 책'(이경희)을 두고 대상과 우수작을 선정하기로 했다. 무화과 나무'는 산문시다. 다른 투고자들의 산문시들과는 달리 읽히는 장점이 있었다. 운율도 도드라졌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 긴장을 놓쳐버려 많이 흔들렸다. 앞으로의 가능성을 믿고 우수작으로 선정했다

미라'는 발굴된 미라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뛰어난 시였다. 미라라는 가볍지 않은 소재에 대한 사유 깊은 시 쓰기는 투고한 다른 작품들과 함께 신뢰를 가지게 하였다. 하지만 이 시 역시 시의 마무리에서 너무 쉽게 마침표를 찍어버렸다.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잃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100m 달리기와 같은 것에 유념해 주길 바란다.

바늘 끝에서 피는 꽃'은 대상작으로도 부족하지 않았다. 투고한 모든 작품에서 오랫동안 시를 써온 저력이 돋보였다. 시에서 익숙함은 힘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독을 다스리는 변화의 힘을 가진다면 앞으로 좋은 작품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한다

한 권의 책'은 책 읽기에 대한 뛰어난 시다. 시종일관 긴장을 잃지 않고 있다. 시를 끌고 가는 힘도 좋다. 변별성을 가진 자기 호흡을 가졌기에 더욱 신뢰가 갔다. 심사위원들은 이견 없이 대상작으로 선정했다. 앞으로 유행하는 시를 따라가는 시인이 아니라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를 가진 좋은 시인이 되길 바란다.

수주문학상에 투고된 작품들을 읽으며 2가지 흐름을 읽었다. 그 중 하나는 시를 지나치게 어렵게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다.

시를 쓴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작품들이 많았다. 오랫동안 시를 써온 심사위원을 이해시키지 못하는 시로 어떻게 독자들을 이해시킬 지 궁금했다.

또 하나는 시의 산문화 경향이다. 시와 산문은 다르다. 비록 산문의 옷을 입고 있어도 시는 시여야 한다. 시로 읽혀야 한다. 읽혀지지 않는 산문을 시라고 하기에는 억지스러운 점이 많았다.

심사위원들은 위의 2가지 흐름에서 벗어난 시적인 시에 높은 점수를 주었음을 밝힌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내일을 가진 예비시인들에게 수상의 영광이 돌아갔다.

 

수상자들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최문자 정일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