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속 詩

조개의 불, 싱싱한 / 강희안

자크라캉 2009. 2. 12. 19:04

 

사진<서해바다>님의 블로그에서

개의 불, 싱싱한 / 강희안

 

  죽어서야 입을 여는 게 어디 너뿐이랴. 물에 잠그기라도 하는 날이면, 슬몃 그의 비밀한 시간의 내력을 훔칠 수 있다. 짜디짠 어둠의 펄에서 앙당그리던 슬픈 가계가 보이고, 희디흰 각질에 방점을 찍은 강단의 길도 보인다. 파랑의 불길에 닫아거는 게 어디 문뿐이랴. 바람의 소실점에서 뿜어낸 물방울마저 구름의 속살에 닿아서야 몸을 얻었다.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그리움의 상한선을 엿보며 물무늬를 새기고 또 새겼다. 얼마나 더 험한 물길을 묵인할 수 있으랴. 누구라도 들여다본 적 없는 장엄한 어둠의 내부, 펄펄 끓는 냄비에 잠기자 반투명 갤 (gel)의 형상에서 일순 빛의 피가 솟구쳐 올랐다. 물빛 화염과 뒤엉켰다. 한 시절 수심 깊은 바닥을 구르다 닫혀버린 그의 문설주에 기대어 보라. 차디찬 구릉 저편으로 번지는 노을의 교향악, 시월의 나뭇잎들도 고요한 낙하를 준비했다. 격정에 이른 죽음만큼 환한 게 또 무에 있으랴. 구름의 등고선에 따라 예감의 손을 거두면, 차디찬 빛으로 끓어 넘치리라. 누군가 달구어 놓은 착란의 굽이에서 조개의 불, 돌의 언어를 건지리라. 죽어서야 활짝 문을 열어젖힌 저 싱싱한 시간의 편력 읽어 가리라

 

시집 「나탈리 망세의 첼로」2008. 천년의시작

 

 

 

[프로필]

 

강희안 시인

1965년 대전 출생

배재대 국문과 졸업 및 한남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지나간 슬픔이 강물이라면」「거미는 몸에 산다」나탈리 망세의 첼로」

저서「현대문학의 이해와 감상」「석정 시의 시간과 공간」「문학의 논리와 실제」등

‘시에’ 편집위원, 배재대에 출강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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