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100년-애송시100편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30] 찔레 - 이 근 배

자크라캉 2008. 11. 6. 15:45

▲ 일러스트=이상진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30]

 

레 /  이 근 배

 

창호지 문에 달 비치듯
환히 비친다 네 속살꺼정
검은 머리칼 두 눈
꼭두서니 물든 두 뺨
지금도 보인다 낱낱이 보인다
사랑 눈 하나 못 뜨고 헛되이 흘려버린 불혹
거짓으로만 산 이 부끄러움
네게 던지마 피 걸레에 싸서
희디흰 입맞춤으로 주마
내 어찌 잊었겠느냐
가시덤불에 펼쳐진 알몸
사금파리에 찔리며 너를 꺾던
새순 돋는 가시 껍질 째 씹던
나의 달디단 전율을
스무 해전쯤의 헛구역질을


<2004년>


[시평]


어찌 잊으리, 첫사랑의 '달디단 전율'을

 

산딸기, 싱아, 까마중, 찔레…. 어린 날 집 근처 산길에서 많이 따먹던 식물들이다. 산딸기는 복분자라 불리며 요즘은 재배도 하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복분자보다 산딸기가 예쁘다. 복분자의 한자 어원 때문에 술도 복분자주라 흔히 부르지만, 나는 아무래도 산딸기술이 좋다. 까마중도 싱아도 참 맛있었다. 달콤한 군입거리에 길든 요즘 아이들의 입맛으로는 까마중 열매나 싱아 같은 풀이 맛있을 리 없겠지만. 그러고 보니 잊힌 풀이름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새롭게 기억되는 데 문학은 퍽 쓸모 있는 징검다리인 것 같다.

찔레는 시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나무다. 그 이름 '찔레'만으로도 영감을 주지만 그 존재 자체가 어딘지 시와 사랑의 비유처럼 연결되는 특별한 식물 중 하나다. 이근배(68) 시인의 '찔레'도 사랑을 노래한다. 아릿하게 아픈 첫사랑의 느낌. 시는 '찔레'라는 이름의 어감과 찔레순의 씁쓰레하면서도 복잡 미묘한 맛, 찔레꽃의 청신한 향기까지 절묘한 그 어떤 사랑의 그림자를 찔레덤불에 겹쳐놓는다. 청춘, 이루지 못한 사랑, 뭐 이런 것들이 그 이름 위로 지나간다. 시는 연하게 돋아난 가시껍질을 벗겨내고 먹어야 하는 찔레순의 아릿한 저항의 느낌과 떫은 듯 입 안 가득 번지는 향기 속에서 머뭇거린다. 시인은 "어찌 잊었겠느냐"며 '달디단 전율'을 떠올리지만, 찔레순의 달콤함은 어딘지 까칠하고 성마른 달콤함이다.

시인은, '찔려야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거기엔 스스로 알몸인 채 자신의 가시를 기르며 펼쳐진 찔레덤불이 있고, 너를 꺾으며 내가 꺾인 순간들의 찔레순 향기가 번져오기도 한다. 가끔은 '새순 돋는 가시 껍질째 씹던' 청춘의 캄캄함과 헛구역질이 있고, '사랑 눈 하나 못 뜨고 헛되이 흘려버린 불혹'이라는 고백을 '찔레'를 빌려서야 말하는 시인의 회한이 있다. 불혹이 되도록 사랑에 눈을 못 뜨면 인생에 이루어야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거짓으로만 산 이 부끄러움'이라고 시인이 노래할 때 찔레 덤불 가시가 통째 아프다.

이근배 시인의 또 다른 노래가 '찔레'에 겹쳐진다. '세상의 바람이 모두 몰려와/ 내 몸에 여덟 구멍 숭숭 뚫어 놓고/ 사랑소리를 내다가/ 슬픔소리를 내다가/(…)/ 잃어버린 여자의 머리카락이다가/ 달빛이다가/ 풀잎이다가/ 살아서는 만나지 못하는/ 눈먼 돌이다가/ 한 밤 새우고 나면/ 하늘 툭 터지는/ 그런 울음을 우는'(〈자진한 잎〉 부분) 시인이 찔레덤불에 겹쳐 우는 가을이다. 가을날 봄 꽃을 추억하는 아픈 날도 가끔은 있어라.

(김선우·시인)


 

 

[입력 :조선일보,  2008.10.27 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