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이상진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28]
파문 / 권 혁 웅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 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 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2001년>
[시평]
오래된 라디오 같은… 그 사람의 목소리
당신의 짝꿍은 어느 편에 서길 좋아하는지? 우리는 습관적으로 누군가의 왼편 혹은 오른편에서 걷거나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다. 비 오는 날이면 오른편이나 왼편 어깨가 살짝 젖으리라. 내 오른편이 젖을 때 나와 반대편 방향을 적시며 나와 함께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한없이 감사한 가을이다. '오래된 라디오 잡음처럼' 슬퍼지기 전에 지금 열심히 그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낙숫물이 떨어져 만드는 파문(波紋)과 파문 사이, 더 이상 파문이 생기지 않는 '부재'로부터 오래 전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슬픈 일이다. 부재와 부재 사이에 파문이 일고 파문과 파문 사이에 부재가 혼재하는 게 삶이라고, 본디 삶이 그렇게 생겨먹은 거라고 시는 말하는 듯도 하다. 현실의 우리는 외롭다. 시인도 외롭다. 비 오는 날 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 아무래도 부재보다 파문을 가진 삶이 조금은 더 견딜 만하리라. 조금은 덜 외로우리라.
이 시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혁웅(41)의 첫 시집에 첫 번째로 실려 있는 시다. 그는 작년에 권혁웅식 연애시집이라 할 만한 《그 입술에 얼굴을 대다》라는 세 번째 시집을 내놓았고, 그 시집을 읽으며 나는 첫 시집의 《파문》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라고 알아채는 몸의 감각은 연애의 감각과 상통하는 것이니! '파문'은 사랑의 감각으로, '부재'는 신화의 감각으로 진화해서 《그 입술에 얼굴을 대다》라는 연애시집이 꾸려졌으리라.
'이리저리 떠다니는 계란 노른자처럼 그 사람 쪽으로 중심이 조금 옮겨 가는 일'(〈먼 곳의 불빛〉 부분)인 연애의 풍경을 권혁웅은 해부학적인 미감을 가지고 구체화한다. 파문과 파문 사이의 부재를 마치 신경줄을 세는 듯한 감각으로 이야기하고 노래한다. 공부하기 좋아하는 영판 학자 같은 그가 다음과 같은 시를 선보일 때는 어떤가. '강물이 오래 흘러왔다고 말할까/ 흐르면서 제가 아는 빛이란 빛은 다 깨부수어/ 제 몸에 섞였다고 할까/ 젖꽃판 사이에 얼굴을 묻고 흘렀던 그의 눈물이/ 종지(終止)도 휴지(休止)도 없이 이어져/ 저렇게 복리로 불어났다고 말할까'(〈그래서 저렇게 글썽인다고〉 부분). 이 시의 부제는 '젖가슴'이다. 여기엔 값싸게 대상화되고 소비되는 육체의 섹시함이 아닌, 사금파리처럼 고독한 에로스의 진풍경이 있다. 그 때문에도 저렇게 글썽인다.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파문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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