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작품들

[2008년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작] 赤記 / 장석원

자크라캉 2008. 9. 29. 17:08

 

 

사진<미루의 섬앤섬>님의 블로그에서

 

[2008년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작]

 

/ 장석원

 
다스려지는 자의 눈빛으로
적들의 피를 바라보듯 햇빛 너머를 응시한다
죽은 그를 빨아올려 허공에 뱉어낸
나무의 적의를 나는 알 것 같다
젖어 있는 나무의 뿌리를
그를 휘감은 검은 핏줄의 악력을

아버지의 목덜미를 깨물듯 나무에 이를 박는다
단풍의 아가리에 머리를 쑤셔 박는다
그가 나를 사랑한 후에 쏟은 피
빨아 먹힌 후 그 몸은 빈 자루에 불과할 것이다

목 매달린 죄인처럼 바람결에 흔들리면서
확산되는 피의 영역에 갇혀 나는 처단되기를 기다린다

나의 눈구멍으로
모든 것이 빨려든다
거기 고요가 점화된다

붉은 고요에 감염되어 아버지를 기다리며
석양 속에서 나는 존다 빠르게 잊혀지기를 꿈꾼다
어둠이 이마를 만지자 나는 번지듯이 건너간다

가장 근원적인 혁명은 사랑하며 홀로 부패되는 것
그의 먹이가 되는 것 그를 먹이는 것

나를 흡수하여 점점 붉어지는 아버지
밖으로 허물어지면서 몸피를 키우는
소모되고 사라지려는 저 붉음이
사랑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형식

『문학선 』2008 봄호



牛岩목욕탕으로 갔어요 손가방 하나 들고 당신은 담배를 피우며
맛있게 입맛을 다시며 옷을 벗고 옷을 벗기고 장산곶 마루를 흥얼거리며
수증기 속으로 잠입했어요 시야에서 사라졌어요 거품으로
내 등을 가슴을 허벅지를 닦아주었어요 너무나 깨끗하고 상쾌하고
더욱 달아오르고 나는 쇳덩이가 무엇인지 폭발은 왜 일어나는지
알았어요 절정은 오래 가지 않았기에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당신은 안개였나요? 그렇게 멀리 떠나가 부나비처럼 부서지고 싶었나요?
내 엉덩이의 푸른 반점은 당신의 형해 그날의 나는 지워지지 않았어요
바가지로 물을 쏟아 붓는 당신과 물에 용해되는 나와 물 따라 흘러간 당신
촛농처럼 간지러운 물의 손가락이 나를 훑고 더듬고 맛봐요
사포 같은 수건이 샅을 지나요 젖니가 다시 돋아요 나는 쓸렸어요
당신과 나는 입냄새도 비슷해요 細毛의 구름이 지나가는데
물속에서 당신이 일어서요 물 때문에 당신이 길어져요
철근을 구부러뜨리듯 당신은 나를 휘어지게 해요 숨이 막혀요
너무 뜨거운 탕에는 넣지 마세요 자꾸 빨개지고 융모처럼 부드러워져요
당신은 옷을 입지 않았어요 목덜미에서 물이 흘러내려요
허리가 운천교의 상판 같아요 그날 나는 뚫린 양말처럼 불안했어요
나는 황소의 아들 下草가 단단해지고 뿔 하나 자라나요
나도 남자가 되었어요 서글픈 그물을 들고 돌아올 당신을 기다려요

전한 중립 상태

내리는 빗방울의 수효를 알고 싶다
빗방울이 나와 산과 나무와 하늘을 용해시킨다
빗방울이 바람에 휘말리자 소음이 넓어진다
흘러가는 물 속에 다른 물이 들어간다

뭉개진 나의 얼굴처럼 검은 반역처럼
탑이 서 있다 불룩한 고요 위로
새 형상의 소리가 날아오른다
물풍선이 터지듯 탁 풀어진다
어둠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낯선 나를 응시한다 내 눈은 고인 물
내가 바라보는 풍경 위에 내 얼굴이 떠 있다
나는 나를 만들었으나 더 이상 나를 이해할 수 없다
구름의 나의 배경 속으로 들어온다

날개짓 소리로 내는 궤적을 지운나 나는
새가 거기 있는 듯이 먼 곳을 응시한다
다시 눈동자 속에 새가 나타날 것이다
고요가 다시 새를 던져 버릴 것이다
빗방울이 푸슬푸슬하다

 <시와시학> 2007. 여름호


암동 수채

잘려나간 듯한 골목의 적막
철둑 뒤의 시장과 공장과 동사무소
청기와집 연탄보일러 부글거리고
화단의 돌배나무 꽃을 내밀고
엄마는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대문을 나선다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아들은 사춘기
근육을 키우고 수염을 만드느라 잠이 부족하다
어제 아들은 커브를 완성했다 버드나무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며 도랑이 흘러나간다
양탄자 같은 논이 개구리를 뱉어낸다
석탄 적치장으로 가는 선로는 하나이고
한 시간에 두 번 기차가 지나간다

구멍가게 영석이는 삐삐를 키우고 삐삐는 점박이 개
아버지는 자전거에 도시락을 붙들어 매고 기계공고로 출근하고
아들은 삼립 참깨 샌드위치를 먹는다 아버지는 종달새처럼
돌아가셨지만 안장 높은 자전거의 체인은 녹슬지 않는다
뒤꼍으로 가서 바지를 내린다 블록담이 젖는다
오래 참았다 손을 대자 벽에 주름이 생긴다

물의 벽, 물의 이마를 만지면, 젖꼭지를 물듯이, 나를 기다리는,
그가 부식되는 순간, 물의 벽, 물의 벽 너머로,
손을 뻗으면, 마른 입술 적시듯이, 서걱거리는 그날이,
꼬리처럼 달라붙는 순간, 물의 벽 속으로,

거기에 내가 보지 못한 것이 있다
부서져버릴 것 같은 기억의 피막 너머


탁과 아버지의 지구과학

빈 내장 같은 식당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양파가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화강암과 현무암 의자 중 한 곳에 앉으세요
어떤 압력에도 변성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균일한 표면에 흠집을 낸다면
이곳의 모든 것들은 종말을 맞을 것입니다
식탁 위에서 녹색이 붕괴됩니다
점판암 같은 잎사귀는 눅진해집니다
토마토 오이 바나나는 산화질소처럼
부글거리는데 소금은 붉어지고 붉어져요
내부와 외부를 이어주는 부드럽고 질긴 식도에서
베타카로틴과 라이코펜은 흡수되지 않습니다
다시 공복이 찾아들 때 침묵은 그갈그갈 긁혀요
암석에 뿌리를 내리고 암석을 해체하는
모든 식물들을 우리는 먹을 수 있어요
빠르게 분해되는 막내딸의 웃음처럼
식물들을 씹으며 씹으며 더 먼 곳으로
내려가는 중이에요 매일같이 충적됩니다
어둠을 배경으로 지직거리며 함몰되기도 합니다
아직 15분이나 남았습니다 곧 우리는
폭발하겠지요 비산되겠지요
냄비 속에서 분해와 융합이 랄랄라 부글거립니다
함께 모인 식구들은 관계와 같습니다
우리를 먹여 살리는 아버지의 식사
식탁의 조직의 시스템의…… 질서를
먼지와 먼지의 질서와 곧 파괴될 우리의…… 뒤를
지우는 검은 구름을 철과 니켈의 출렁임을
전부 먹어치웁니다 규칙과 체계와 균형 그리고
질서, 여러분의 질서, 세계의 심연을 떠다니는
먼지의 질서의 가족의
또한 백악기의 식욕 앞에서 아버지
켁켁, 마비된 것처럼 켁켁, 페퍼포그처럼
멀어집니다 축소됩니다 탄맥이 사라집니다
그러다 채굴될 것입니다 우리의 연료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