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속 詩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 강정

자크라캉 2008. 5. 2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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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예쁜편지지>님의 카페에서

 

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 강정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한 얘기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다

비이거나 혹은 바람이거나

아직도 살 만큼 물이 충분한 내 몸에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았던 걸 보니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말이거나 비이거나 바람이거나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 촉수를 자극해 조금씩 부풀면서

존재를 확인하려 하면 사라지고 만다

만져지는 대신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무성생식한 우주의 굵은 탯줄만

낡은 가구들 틈에 끼여

목청껏 다른 말들을 웅얼거리는데

이 다른 말이라 하는 것도,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책에 쌓인 먼지라거나

같이 있다 방금 자리를 뜬 사람의 미진한 온기 따위인지도 모른다

내 체온이 닿았던 것들은 나 이후로는

사망의 신간 속에 스며들어가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로

내 체온이 발원하는 지점 깊숙이 파고든다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냉온이 빠르게 교차하는 과거와 미래 상이에서 나라고 하는 건

한 갓 누군가의 원망을 대신 실현하려

파리나 모기 따위에게로 쏠리는 식욕을 감춘 채 인간의 영역에 파견된

짐승과도 같다는 것

들려주려니 말이 자꾸 새끼를 치지만,

내가 들려주려는 말이 결국 내 체온을 액면 그대로 종이

위에 처바르는 일이듯

붓끝에서 뭉치거나 흩어진 물감들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저 나름의 괘도로 일렁이면서 시간의

어느 정점을 물들이면

나는 곡 나로부터 이탈되어 본래의 땅으로 돌아간다

들려주려니 땅이라 이름 붙였지만,

인간도 아니고 인간 아닌 것도 아닌 만물이 때 되면 허물

벗어 다른 생을 낳는 그곳을

허공이라 한들 어떠리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문학동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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