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속 詩

사라진 입들 / 이영옥

자크라캉 2008. 1. 31. 18:53

 

 

사라진 입들 / 이영옥

 

 


잠실 방문을 열면 누에들의 뽕잎 갉아 먹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어두컴컴한 방안을 마구 두드리던 비,

눈 뜨지 못한 애벌레들은 언니가 썰어주는 뽕잎을 타고 너울너울 잠들었다가

세찬 빗소리를 몰고 일어났다

내 마음은 누가 갉아 먹었는지 바람이 숭숭 들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들이 통통하게 살이 오를 동안

언니는 생의 급물살을 타고 허우적거렸고

혼자 잠실 방을 나오면 눈을 찌를 듯한 환한 세상이 캄캄하게 나를 막아섰다

 

저녁이면 하루살이들이 봉창 거미줄에 목을 메러 왔다

섶 위의 누에처럼 얕은 잠에 빠진 언니의 숨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명주실 같았다

허락된 잠을 모두 잔 늙은 누에들은 입에서 실을 뽑아 제가 누울 관을 짰지만

고치를 팔아 등록금으로 쓴 나는 눈부신 비단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언니가 누에의 캄캄한 뱃속을 들여다보며 풀어낸 희망과

그 작고 많은 입들은 어디로 갔을까

마른고치를 흔들어 귀에 대면

누군가 가만가만 흐느끼고 있다

생계의 등고선을 와삭거리며

종종걸음 치던

그 아득한 적막에 기대

 

 

[이영옥 시집 <사라진 입들>, 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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