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기론詐欺論에 대하여
金洙暎
필자가 1964년 5월부터 8월까지 『思想界』誌에 시월평을 게재했고 同誌 12월호에 「難解의 帳幕」이라는 제목의 64년도 시 연평을 썼는데, 그 중에서 일부의 시인의 난해한 詩와 난해한 詩論을 들어서 개략적인 비평을 시도해 보았다. 한정된 지면에 무딘 眼識으로 짧은 시간에 엮어낸 글이라 뜻하지 않은 오해를 사기도 했을 것이고, 그릇된 판단을 내린 일도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필자로서는 평소에 품고 있던 현대시에 대한 소신과 우리 詩壇에 대한 불만을 일관성 있게 반영시켜 보느라고 노력했고, 될 수 있는 대로 생리적인 편견을 배제한 타당성 있는 기준을 적용해 보려고 애를 썼다. 개개의 작품을 통한 간접적인 단편적 주장이기는 했지만, 우리 시단에 시다운 시가 지극히 희소하다는 것과, 날조된 작품이 많다는 것과, 현대성을 표방하는 작품에 특히 사이비성이 많다는 것을 4회의 월평을 통해서 강조했고, 연평에서는 이러한 옳지 않은 경향이 詩論에까지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어떠한 비평이든 비평의 본의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고, 그러한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는 평자가 얼마나 행복한 가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불행히도 우리의 시단은 그러한 행복을 누리기에는 너무도 시기상조인 것 같고, 그러한 행복을 누리기 전에, 또한 그러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도 오늘날의 우리의 시평은 惡貨를 구축하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라도 하지 않으면 아니될 단계에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菲才를 무릅쓰고 그러한 소신의 일단을 피력해 보려고 애를 써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호의 본지에 게재된 全鳳健군의 「詐欺論」을 읽어 보니 필자가 의도한 설명과 그가 받아들인 해석 사이에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필자가 쓴 ‘詐欺’라는 말에 격분한 탓인지 도처에 불필요한 야유와 욕설을 농하고 있지만 되도록 그러한 부분은 제외하고 논점의 줄거리만을 찾아 피차의 견해의 차이점을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점을 논하기 전에 우선 비평가의 태도에 관해서 밝혀두어야 할 몇가지 점이 있다. 필자는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詩評을 했지만, 필자 뿐이 아니라 詩와 비평을 겸한 사람은 우리 나라에만 해도 여러 사람이 있고, 소설의 경우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이러한 경우에 창작의 기능과 비평의 기능이 다르듯이 피차의 책임의 한계도 자연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비평을 할 때에도 그가 책임을 지는 것은 그의 평론의 부분만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하고 있는지 모르고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봉건군은 필자의 평론뿐이 아니라 필자의 시까지도 야비한 언사를 써 가면서 공격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그가 가한 필자의 시작품에 대한 공박의 부분은 되도록 문제삼지 않으려고 하며, 그러한 조목에는 답변할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
비평가의 태도로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독자에게 아부를 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독자를 납득시키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독자에게 아부를 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詐欺論」을 훑어 보면 말끝마다 존대를 써가면서―‘그렇지요? 그렇지 않읍니까?’ 식의 반문을 해 가면서―공감을 강요하는 아침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평문뿐이 아니라 모든 문장의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독자에게 존대를 써야 할 문장이 따로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논점의 줄거리를 찾아 들어가야 할 터인데, 그러려면 우선 봉건군이 어째서 필자에게 부치는 「詐欺論」을 쓰게 되었는가에 대한 간단한 경위의 설명이 있어야겠다. 앞에서 말한 졸평 「難解의 帳幕」속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즉―
……
『世代』誌의 「나의 新作發表」시리즈만 보더라도 그 ‘노우트’와 ‘批評’중에는 요령부득의 것이 너무나 많다. 詩를 쓰는 사람들의 評文이라는 사정을 고려에 넣고 보더라도 무슨 말인지 論理와 상식이 닿지 않는 말이 전부이니, 이래 가지고는 결코 ‘난해시’의 해설이 될 수 없다. 전형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현대까지의 모든 시론은 일반적인 상식이며 작품은 보다 오묘한 개성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충분할 것이다.
물론 창조와 지식을 分斷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느 정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詩人에 있어서나 學問에 있어서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면 문학사적으로 남는 작품과 작품자체의 가치로서 남는 작품이 있다는 걸 내가 요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自然과 現代性의 接木』 (『世代』誌 3)
이것은 「속의 바다」라는 詩에 대한 ‘批評’속의 구절인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독단은 ‘오묘한’ 시라면 또 몰라도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시론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이 필자는 초현실주의적인 시를 쓰는 시인이다……(中略)……이러한 시나 시평을 읽으면 정말 슬퍼진다. 『世代』誌 11월호의 「나의 新作發表」난의 「韓國語와 리리시즘」과 「幻想과 傷處」의 두 시론도 정도와 성질의 차이는 있지만 동류의 것이다. 「자연과 현대성의 접목」의 필자는 ‘모든 시론은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했지만 ‘환상과 상처’를 어떻게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렇게 소위 기성시인이란 사람들이 허술하게 책임없는 시론을 쓰고 또 그런 시를 쓰는 신진들의 산파역을 하는 한, 우리 시단의 장래는 암담하다. 나는 미숙한 것을 탓하지 않는다. 또한 환상시도 좋고 추상시도 좋고 환상적 시론도 좋고 技術시론도 좋다. 몇번이고 말하는 것이지만 기술의 우열이나 경향 여하가 문제가 아니라 시인의 양심이 문제다. 시의 기술은 양심을 통한 기술인데 작금의 시나 시론에는 양심은 보이지 않고 기술만이 보인다. 아니 그들은 양심이 없는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를 주지적이고 현대적인 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詐欺를 세련된 현대성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대목속에 인용된 「自然과 現代性의 接木」, 「韓國語와 리리시즘」, 「幻想과 傷處」, 「속의 바다」 등의 시론과 시작품의 작가의 이름을 ―독자들이 대체로 불편을 느낄 줄 알면서도―구태여 밝히지 않았는데, 그것은 ―鳳健군은 왜 투명하게 밝히지 않았느냐고 대들고 있지만―이 작자들이 모두 필자보다 젊은 사람들이어서 그런 경우에 신상공격이나 감정적 처사 같은 인상을 되도록이면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이들뿐만 아니라, 여기에서는 中略된 대목에 인용된 「어떤 내 친구에게」와 「시에 있어서의 언어」의 작가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봉건군은 무슨 속셈에서인지 구태여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될 남의 이름까지 밝히어 놓았다. 앞에서 열거한 작품 중에서 봉건군이 쓴 것은 「환상과 상처」(『世代』誌 11) 라는 신진시인 鄭某의 신작시에 부친 비평과 그의 연작시 「속의 바다」뿐이고, 이만하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詐欺論」을 쓰고 필자를 공박하게 된 경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詐欺論」의 ①항에서 장호의 시 「우리들의 얼굴은」과 金丘庸(前記 「自然과 現代性의 接木」의 필자)의 詩 「거울을 보면서」를 평한 필자의 논평을 공박하면서 무엇을 보고 章의 시가 金의 시보다 ‘일보 앞선 세계’라고 했느냐고 대들고 있다. 즉 그는,
김시인은 『文學春秋』7월호에 발표된 金丘庸의 작품 「거울을 보면서」보다도 여기에 적힌 章湖의 것이, 한 발자국 앞선 세계라고 하고 있읍니다. 과연 그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과연 이것이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겠읍니까. 그가 ‘일보 앞선 세계’를 지녔다고 내세운 이것이 시라면,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산문은 다 시가 될 수 있읍니다. 행(行)을 길고 짧게 떼어 적당히 시의 모양으로 늘어놓으면 말입니다.
라고 뇌까리고 있지만 백보를 양보해서 章湖의 시에 대한 필자의 평이 틀렸다고 치고, 章湖의 시도 산문이지 시가 아니라고 치자, 그리고 章湖의 시를 그의 말대로 산문형식으로 붙여 써 놓아 보자.
網巾이라도 좋다. 道袍자락을 펄렁여도 그만. 어떤 차림이면 어떠랴.
계면쩍어 하지말고 쳐다보게 서로 우리들의 얼굴을.
노새를 타거나, 새나라를 타거나, 어떤 걸 몰고서든 거리에 나서서
잠시 거울삼아 바라보게 낭패한 얼굴들을.
그리고 그의 산문과 章湖의 산문을 비교해 보자. 그가 산문으로 의도한 산문보다도 章湖의 뜻하지 않은 산문이 나의 눈에는 훨씬 어색하지 않다. 남의 시를 마구 산문이라고 나무랄 바에는 산문이 무엇인지나 알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과연 이것이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겠읍니까’ 라는 식의 어귀의 구사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비평가가 무엇이 산문이고 무엇이 시인지의 지난한 중에서도 지난한 문제를 어느정도 식별할 수 있겠는가. 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돌과 옥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고, 옥을 보지 못한 사람도 옥과 돌의 구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시와 산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항의 나머지 부분은 ‘거의 산문이나 다름없는 것(章湖의 작품)을 들고 나와서, (필자가)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다만 넌센스에 불과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는 필자에 대한 욕설을 그치고 있지만, 필자의 답변은 이것으로 족할 것 같다.
②항에서는 章湖의 같은 詩 「우리들의 얼굴은」을 인용하면서, 필자가 그의 시에 대해서 가한 다음과 같은 논평의 귀절을 인용하고, 즉―
이와같은 너무나도 멜로드라마틱한 얼굴을 설명함으로써 모처럼 싹트려는 발언의 희망을 무참하게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 작품은 끝까지 비참한 얼굴의 비속한 설명으로 그치고 말았다.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설명은 발언이 아니다
라고 한 귀절을 인용하고, 이것을 이용해서 다음과 같은 논점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즉 그는 ―
이것 역시 김시인의 章湖의 같은 작품의 아마 후반부를 두고서 한 얘기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설명으로 그쳐서 작품이 덜 됐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멜로드라마틱하고 비속하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면 다음의 경우 (拙詩 「강 가에서」와 비교해 보기로 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글속에 나타난 문장상의 미스는 너무나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지적할 필요도 없지만, 이 글의 전후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상한 논리의 비약이 있다. 즉, 그는 필자가 결론을 지은 ①項의 의문에 대한 해답,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의 얼굴은」의 시가 어떤 성질의 작품이냐는 바로 앞에 인용된 필자의 논평중에 나타난 해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따라서 ①項에서 그가 제기한 공박이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는 증명이 나타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슬그머니 말부리를 돌려서 이번에는 ‘비속’하다는 필자의 말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그에 대한 반증을 필자의 작품(즉 拙詩 「강 가에서」)에서 구하려고 든다. 너는 네 자신이 몇배나 더 비속한 작품을 쓰는 주제에 무슨 얼굴로 남의 작품을 비속하다고 나무라느냐? 또한 몇 배나 더 설명적인 작품을 쓰는 주제에 무슨 얼굴로 남의 작품을 설명적이라고 나무랄 수 있느냐? 그는 이렇게 대들면서 마구 욕설을 퍼붓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비평가의 본도에 위배되는 일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해 두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재설을 피한다. 또한 拙詩 「강 가에서」에 대한 변명도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가 ‘비평의 지극히 초보적인 기초지식’이라고 하면서 필자에게 계몽한 말이 과연 계몽을 받을 만한 가치있는 것인지 후일 전문적 비평가들의 심사를 바라는 의미에서도 일단 여기에 明記해 두는편이 좋을 것 같다.
여기서 김시인을 위해, 비평의 극히 초보적인 기초지식 한 가지를 제시해 둬야겠읍니다.
그것은 비난을 하기 위해서는, 혹은 비난을 할 때에는, 비난하는 측에 옹호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설명에 그쳤고 비속하다고 비난했읍니다. 그러면, 이때 그렇게 비난하는 자는 스스로 비설명적인 것을 그리고 비속치 아니한 것을 확실하게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굳게 옹호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옹호하는 것이 없이 비난이나 공격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을 때 누가 그의 말을 신용할 것입니까
③項에서는 역시 필자가 章湖의 「우리들의 얼굴은」을 논한 끝에 매듭을 진 다음과 같은 귀절을 인용하면서, 즉―
우리의 현대시가 겪어야 할 가장 큰 난관은 포오즈를 버리고 사상을 취해야 할 일이다. 포오즈는 시 이전이다. 사상도 시 이전이다. 그러나 포오즈는 시에 신념있는 일관성을 주지 않지만 사상은 그것을 준다. 우리의 시가 조석으로 동요하는 원인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시의 다양성이나 시의 변화나 시의 실험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영해야 할 일이다. 다만 그러한 실험이 동요나 방황으로 그쳐서는 아니되며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知性人으로서의 基底에 신념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이러한 누구나 다 아는 소리를 새삼스럽게 되풀이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도 사실은 우리 시단의 너무나도 많은 현대시의 실험이 방황에서 와서 방황에서 그치는 포오즈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 귀절을 인용해 놓고, 필자가 말하는 ‘사상’과 ‘신념’이 무엇이냐고 대들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봉건군의 오해를 풀기 위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시에 신념있는 일관성’이 무엇이냐고 반문하고 있지만, 필자는 ‘詩에 신념있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무데서도 한일이 없다. 그는 詩의 ‘실험이 동요나 방황으로 그쳐서는 아니되’기 위해서 ‘지성인으로서의 기저에 신념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필자의 말을 그렇게 오인하고 있는 것 같은데, ‘詩에 신념있는 일관성’이 있는 것하고 ‘지성인으로서의 기저에 신념이 살아있는’는 것하고는 시를 논하는 데 있어서 하늘과 땅 사이만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그가 말하는 ‘일정한 목적으로 일정한 연장에 의해서 찍어내는 부로크’같은 작품이 나오지만―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정당의 강령을 신봉하는 프로퍼갠더詩 같은 것이 나오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한국 같은 무질서한 시단의 모범이 될 만한 진정한 현대시가 나온다. 전자는 비참을 초래하지만, 후자의 경우의 신념은 아무리 혼란한 시대에도 굳건히 대지에 발을 붙이고 힘차게 일어설 수 있는 救援의 詩를 낳는다. 또 오해가 있을까 보아 미리 주석을 달아 두지만, 필자가 말하는 救援의 시는 단테나 글로델流의 종교시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오든의 시, 디킨슨의 시, 포오의 시에서부터 멀리 호머나 李太白의 시에 이르기까지의 진정한 시작품은 모두가 구원의 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誤讀이나 誤認은 시의 범위 안에서라면 몰라도 그밖의 경우에는 최악의 경우에 인명의 생사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진 것이니 각별히 조심해 둘 필요가 있다. ③항에 대한 답변은 더 이상 지루하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④항에서는 필자가 拙評 『모더니티의 問題』속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귀절, 즉―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현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시의 양심과 작업은 이 뒤떨어진 현실에 대한 자각의 모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르쳐준다. 이상한 역설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데 있다. 그가 앞섰다면 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확고하고 여유있게 의식하는 점에서 ‘앞섰다’. 세계의 詩市場에 출품된 우리의 현대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우선 우리들의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果斷과 결의가 필요하다.
의 귀절을 인용해 놓고, 拙詩 「巨大한 뿌리」를 비교해 가면서, 필자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빈정대고 있다. 그는 나의 시 「巨大한 뿌리」를 보면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은 포오즈이며 속임수에 불과하고, 따라서 독자를 우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나름의 폭력적 논법으로 필자의 ‘현실’의 ‘직시’를 ‘사회참여’로 轉位시키고, 졸시가 ‘사회참여’가 안되었다고 하더니, 또 별안간에 ‘사회참여’가 되었다고 하면서, 「巨大한 뿌리」 속에 나오는 ‘反動’이란 말이, 거기에는 ‘뒤떨어진 현실의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인 온갖 것으로 해서 짓눌려 허덕이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담겨져 있을 것’이라고 치켜 올린다. 그러더니 또 다시 ‘현실참여’를 단순한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전락을 시키고, 「巨大한 뿌리」속의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女史와 연애하고 있다’의 一行이 ‘그(필자)가 입으로 그 속에 끼어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층의 사람들의 이해를 거부하는 방법을 택하고’있다고 준엄한 어조로 힐난하고 있다. 그는 결국 필자의 옳지 않은 시적 태도를 ‘입으로는 현실직시를 말하고 그럼으로서 생기게 되는 시의 양심을 주장하면서도 마땅히 있어야 옳은 독자의 대상에의 생각을 포기한 데서 생긴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고 무시무시한 선언을 하면서, 결국 필자의 罪名이야말로 ‘반참여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모순’이라고 언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항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다. 봉건군은 필자가 ‘시인’의 ‘현실’이라고 한 이 ‘현실’의 뜻을 외적 현실만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③項에서 ‘신념’의 뜻을 誤讀하듯이 이 ‘현실’의 뜻도 오독하고 있다. 그는 뒤떨어진 사회의 실업자수가 많은 것만 알았지 뒤떨어진 사회에 서식하고 있는 시인들의 머리속의 팬터지나 이미지나 潛在意識이 뒤떨어지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의 시의 비평을 쓴 金시인의 잠재의식이 1930년 전의 앙드레 브르똥의 것인지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모더니티의 問題」에서 필자가 한 말은 쉽게 말하자면 퇴색한 앙드레 브르똥을 새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리를 하지 말고 솔직하게 분수에 맞는 환상을 하라는 말이다. 그처럼, 시인은 자기의 현실(이미지)에 충실하고 그것을 정직하게 작품 위에 살릴 줄 알 때 시인의 양심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좀 더 솔직하게 되란 말이다. 좀 더 극언을 하자면, 시인이 되기 전에 우선 인간공부부터 먼저하고, 시를 쓰기 전에 문맥이 틀리지 않는 문장공부부터 먼저 하라는 말이다. 우리말도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는 처지라면, 좀 더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신진 시인의 비평을 쓰는 따위의 싱거운 짓은 삼가하란 말이다.
⑤항과 ⑥항이 또 남아있지만 이 이상 답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정 모르겠다면 「幻想과 傷處」와 「韓國語와 리리시즘」의 문맥이 통하지 않는 귀절을 모조리 지적해 가면서 시인의 양심이 무엇인가를 더 상세하게 가르쳐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이 글의 의도는 「詐欺論」의 필자를 헐뜯기 위한 것도 아니며 그에게 반드시 이기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가 제시하고 내가 지금 답변을 중지한 ⑤항, ⑥항에 대한 검산을 그 자신이 스스로 경건하게 할 줄 알 때, 필자는 그에게 던진 ‘詐欺’의 극언을 자진해서 취소할 것이다.
『世代』, 65. 3
金洙暎
필자가 1964년 5월부터 8월까지 『思想界』誌에 시월평을 게재했고 同誌 12월호에 「難解의 帳幕」이라는 제목의 64년도 시 연평을 썼는데, 그 중에서 일부의 시인의 난해한 詩와 난해한 詩論을 들어서 개략적인 비평을 시도해 보았다. 한정된 지면에 무딘 眼識으로 짧은 시간에 엮어낸 글이라 뜻하지 않은 오해를 사기도 했을 것이고, 그릇된 판단을 내린 일도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필자로서는 평소에 품고 있던 현대시에 대한 소신과 우리 詩壇에 대한 불만을 일관성 있게 반영시켜 보느라고 노력했고, 될 수 있는 대로 생리적인 편견을 배제한 타당성 있는 기준을 적용해 보려고 애를 썼다. 개개의 작품을 통한 간접적인 단편적 주장이기는 했지만, 우리 시단에 시다운 시가 지극히 희소하다는 것과, 날조된 작품이 많다는 것과, 현대성을 표방하는 작품에 특히 사이비성이 많다는 것을 4회의 월평을 통해서 강조했고, 연평에서는 이러한 옳지 않은 경향이 詩論에까지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어떠한 비평이든 비평의 본의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고, 그러한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는 평자가 얼마나 행복한 가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불행히도 우리의 시단은 그러한 행복을 누리기에는 너무도 시기상조인 것 같고, 그러한 행복을 누리기 전에, 또한 그러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도 오늘날의 우리의 시평은 惡貨를 구축하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라도 하지 않으면 아니될 단계에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菲才를 무릅쓰고 그러한 소신의 일단을 피력해 보려고 애를 써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호의 본지에 게재된 全鳳健군의 「詐欺論」을 읽어 보니 필자가 의도한 설명과 그가 받아들인 해석 사이에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필자가 쓴 ‘詐欺’라는 말에 격분한 탓인지 도처에 불필요한 야유와 욕설을 농하고 있지만 되도록 그러한 부분은 제외하고 논점의 줄거리만을 찾아 피차의 견해의 차이점을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점을 논하기 전에 우선 비평가의 태도에 관해서 밝혀두어야 할 몇가지 점이 있다. 필자는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詩評을 했지만, 필자 뿐이 아니라 詩와 비평을 겸한 사람은 우리 나라에만 해도 여러 사람이 있고, 소설의 경우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이러한 경우에 창작의 기능과 비평의 기능이 다르듯이 피차의 책임의 한계도 자연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비평을 할 때에도 그가 책임을 지는 것은 그의 평론의 부분만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하고 있는지 모르고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봉건군은 필자의 평론뿐이 아니라 필자의 시까지도 야비한 언사를 써 가면서 공격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그가 가한 필자의 시작품에 대한 공박의 부분은 되도록 문제삼지 않으려고 하며, 그러한 조목에는 답변할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
비평가의 태도로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독자에게 아부를 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독자를 납득시키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독자에게 아부를 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詐欺論」을 훑어 보면 말끝마다 존대를 써가면서―‘그렇지요? 그렇지 않읍니까?’ 식의 반문을 해 가면서―공감을 강요하는 아침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평문뿐이 아니라 모든 문장의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독자에게 존대를 써야 할 문장이 따로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논점의 줄거리를 찾아 들어가야 할 터인데, 그러려면 우선 봉건군이 어째서 필자에게 부치는 「詐欺論」을 쓰게 되었는가에 대한 간단한 경위의 설명이 있어야겠다. 앞에서 말한 졸평 「難解의 帳幕」속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즉―
……
『世代』誌의 「나의 新作發表」시리즈만 보더라도 그 ‘노우트’와 ‘批評’중에는 요령부득의 것이 너무나 많다. 詩를 쓰는 사람들의 評文이라는 사정을 고려에 넣고 보더라도 무슨 말인지 論理와 상식이 닿지 않는 말이 전부이니, 이래 가지고는 결코 ‘난해시’의 해설이 될 수 없다. 전형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현대까지의 모든 시론은 일반적인 상식이며 작품은 보다 오묘한 개성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충분할 것이다.
물론 창조와 지식을 分斷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느 정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詩人에 있어서나 學問에 있어서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면 문학사적으로 남는 작품과 작품자체의 가치로서 남는 작품이 있다는 걸 내가 요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自然과 現代性의 接木』 (『世代』誌 3)
이것은 「속의 바다」라는 詩에 대한 ‘批評’속의 구절인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독단은 ‘오묘한’ 시라면 또 몰라도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시론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이 필자는 초현실주의적인 시를 쓰는 시인이다……(中略)……이러한 시나 시평을 읽으면 정말 슬퍼진다. 『世代』誌 11월호의 「나의 新作發表」난의 「韓國語와 리리시즘」과 「幻想과 傷處」의 두 시론도 정도와 성질의 차이는 있지만 동류의 것이다. 「자연과 현대성의 접목」의 필자는 ‘모든 시론은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했지만 ‘환상과 상처’를 어떻게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렇게 소위 기성시인이란 사람들이 허술하게 책임없는 시론을 쓰고 또 그런 시를 쓰는 신진들의 산파역을 하는 한, 우리 시단의 장래는 암담하다. 나는 미숙한 것을 탓하지 않는다. 또한 환상시도 좋고 추상시도 좋고 환상적 시론도 좋고 技術시론도 좋다. 몇번이고 말하는 것이지만 기술의 우열이나 경향 여하가 문제가 아니라 시인의 양심이 문제다. 시의 기술은 양심을 통한 기술인데 작금의 시나 시론에는 양심은 보이지 않고 기술만이 보인다. 아니 그들은 양심이 없는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를 주지적이고 현대적인 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詐欺를 세련된 현대성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대목속에 인용된 「自然과 現代性의 接木」, 「韓國語와 리리시즘」, 「幻想과 傷處」, 「속의 바다」 등의 시론과 시작품의 작가의 이름을 ―독자들이 대체로 불편을 느낄 줄 알면서도―구태여 밝히지 않았는데, 그것은 ―鳳健군은 왜 투명하게 밝히지 않았느냐고 대들고 있지만―이 작자들이 모두 필자보다 젊은 사람들이어서 그런 경우에 신상공격이나 감정적 처사 같은 인상을 되도록이면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이들뿐만 아니라, 여기에서는 中略된 대목에 인용된 「어떤 내 친구에게」와 「시에 있어서의 언어」의 작가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봉건군은 무슨 속셈에서인지 구태여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될 남의 이름까지 밝히어 놓았다. 앞에서 열거한 작품 중에서 봉건군이 쓴 것은 「환상과 상처」(『世代』誌 11) 라는 신진시인 鄭某의 신작시에 부친 비평과 그의 연작시 「속의 바다」뿐이고, 이만하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詐欺論」을 쓰고 필자를 공박하게 된 경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詐欺論」의 ①항에서 장호의 시 「우리들의 얼굴은」과 金丘庸(前記 「自然과 現代性의 接木」의 필자)의 詩 「거울을 보면서」를 평한 필자의 논평을 공박하면서 무엇을 보고 章의 시가 金의 시보다 ‘일보 앞선 세계’라고 했느냐고 대들고 있다. 즉 그는,
김시인은 『文學春秋』7월호에 발표된 金丘庸의 작품 「거울을 보면서」보다도 여기에 적힌 章湖의 것이, 한 발자국 앞선 세계라고 하고 있읍니다. 과연 그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과연 이것이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겠읍니까. 그가 ‘일보 앞선 세계’를 지녔다고 내세운 이것이 시라면,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산문은 다 시가 될 수 있읍니다. 행(行)을 길고 짧게 떼어 적당히 시의 모양으로 늘어놓으면 말입니다.
라고 뇌까리고 있지만 백보를 양보해서 章湖의 시에 대한 필자의 평이 틀렸다고 치고, 章湖의 시도 산문이지 시가 아니라고 치자, 그리고 章湖의 시를 그의 말대로 산문형식으로 붙여 써 놓아 보자.
網巾이라도 좋다. 道袍자락을 펄렁여도 그만. 어떤 차림이면 어떠랴.
계면쩍어 하지말고 쳐다보게 서로 우리들의 얼굴을.
노새를 타거나, 새나라를 타거나, 어떤 걸 몰고서든 거리에 나서서
잠시 거울삼아 바라보게 낭패한 얼굴들을.
그리고 그의 산문과 章湖의 산문을 비교해 보자. 그가 산문으로 의도한 산문보다도 章湖의 뜻하지 않은 산문이 나의 눈에는 훨씬 어색하지 않다. 남의 시를 마구 산문이라고 나무랄 바에는 산문이 무엇인지나 알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과연 이것이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겠읍니까’ 라는 식의 어귀의 구사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비평가가 무엇이 산문이고 무엇이 시인지의 지난한 중에서도 지난한 문제를 어느정도 식별할 수 있겠는가. 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돌과 옥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고, 옥을 보지 못한 사람도 옥과 돌의 구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시와 산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항의 나머지 부분은 ‘거의 산문이나 다름없는 것(章湖의 작품)을 들고 나와서, (필자가)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다만 넌센스에 불과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는 필자에 대한 욕설을 그치고 있지만, 필자의 답변은 이것으로 족할 것 같다.
②항에서는 章湖의 같은 詩 「우리들의 얼굴은」을 인용하면서, 필자가 그의 시에 대해서 가한 다음과 같은 논평의 귀절을 인용하고, 즉―
이와같은 너무나도 멜로드라마틱한 얼굴을 설명함으로써 모처럼 싹트려는 발언의 희망을 무참하게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 작품은 끝까지 비참한 얼굴의 비속한 설명으로 그치고 말았다.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설명은 발언이 아니다
라고 한 귀절을 인용하고, 이것을 이용해서 다음과 같은 논점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즉 그는 ―
이것 역시 김시인의 章湖의 같은 작품의 아마 후반부를 두고서 한 얘기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설명으로 그쳐서 작품이 덜 됐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멜로드라마틱하고 비속하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면 다음의 경우 (拙詩 「강 가에서」와 비교해 보기로 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글속에 나타난 문장상의 미스는 너무나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지적할 필요도 없지만, 이 글의 전후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상한 논리의 비약이 있다. 즉, 그는 필자가 결론을 지은 ①項의 의문에 대한 해답,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의 얼굴은」의 시가 어떤 성질의 작품이냐는 바로 앞에 인용된 필자의 논평중에 나타난 해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따라서 ①項에서 그가 제기한 공박이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는 증명이 나타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슬그머니 말부리를 돌려서 이번에는 ‘비속’하다는 필자의 말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그에 대한 반증을 필자의 작품(즉 拙詩 「강 가에서」)에서 구하려고 든다. 너는 네 자신이 몇배나 더 비속한 작품을 쓰는 주제에 무슨 얼굴로 남의 작품을 비속하다고 나무라느냐? 또한 몇 배나 더 설명적인 작품을 쓰는 주제에 무슨 얼굴로 남의 작품을 설명적이라고 나무랄 수 있느냐? 그는 이렇게 대들면서 마구 욕설을 퍼붓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비평가의 본도에 위배되는 일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해 두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재설을 피한다. 또한 拙詩 「강 가에서」에 대한 변명도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가 ‘비평의 지극히 초보적인 기초지식’이라고 하면서 필자에게 계몽한 말이 과연 계몽을 받을 만한 가치있는 것인지 후일 전문적 비평가들의 심사를 바라는 의미에서도 일단 여기에 明記해 두는편이 좋을 것 같다.
여기서 김시인을 위해, 비평의 극히 초보적인 기초지식 한 가지를 제시해 둬야겠읍니다.
그것은 비난을 하기 위해서는, 혹은 비난을 할 때에는, 비난하는 측에 옹호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설명에 그쳤고 비속하다고 비난했읍니다. 그러면, 이때 그렇게 비난하는 자는 스스로 비설명적인 것을 그리고 비속치 아니한 것을 확실하게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굳게 옹호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옹호하는 것이 없이 비난이나 공격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을 때 누가 그의 말을 신용할 것입니까
③項에서는 역시 필자가 章湖의 「우리들의 얼굴은」을 논한 끝에 매듭을 진 다음과 같은 귀절을 인용하면서, 즉―
우리의 현대시가 겪어야 할 가장 큰 난관은 포오즈를 버리고 사상을 취해야 할 일이다. 포오즈는 시 이전이다. 사상도 시 이전이다. 그러나 포오즈는 시에 신념있는 일관성을 주지 않지만 사상은 그것을 준다. 우리의 시가 조석으로 동요하는 원인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시의 다양성이나 시의 변화나 시의 실험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영해야 할 일이다. 다만 그러한 실험이 동요나 방황으로 그쳐서는 아니되며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知性人으로서의 基底에 신념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이러한 누구나 다 아는 소리를 새삼스럽게 되풀이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도 사실은 우리 시단의 너무나도 많은 현대시의 실험이 방황에서 와서 방황에서 그치는 포오즈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 귀절을 인용해 놓고, 필자가 말하는 ‘사상’과 ‘신념’이 무엇이냐고 대들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봉건군의 오해를 풀기 위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시에 신념있는 일관성’이 무엇이냐고 반문하고 있지만, 필자는 ‘詩에 신념있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무데서도 한일이 없다. 그는 詩의 ‘실험이 동요나 방황으로 그쳐서는 아니되’기 위해서 ‘지성인으로서의 기저에 신념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필자의 말을 그렇게 오인하고 있는 것 같은데, ‘詩에 신념있는 일관성’이 있는 것하고 ‘지성인으로서의 기저에 신념이 살아있는’는 것하고는 시를 논하는 데 있어서 하늘과 땅 사이만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그가 말하는 ‘일정한 목적으로 일정한 연장에 의해서 찍어내는 부로크’같은 작품이 나오지만―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정당의 강령을 신봉하는 프로퍼갠더詩 같은 것이 나오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한국 같은 무질서한 시단의 모범이 될 만한 진정한 현대시가 나온다. 전자는 비참을 초래하지만, 후자의 경우의 신념은 아무리 혼란한 시대에도 굳건히 대지에 발을 붙이고 힘차게 일어설 수 있는 救援의 詩를 낳는다. 또 오해가 있을까 보아 미리 주석을 달아 두지만, 필자가 말하는 救援의 시는 단테나 글로델流의 종교시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오든의 시, 디킨슨의 시, 포오의 시에서부터 멀리 호머나 李太白의 시에 이르기까지의 진정한 시작품은 모두가 구원의 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誤讀이나 誤認은 시의 범위 안에서라면 몰라도 그밖의 경우에는 최악의 경우에 인명의 생사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진 것이니 각별히 조심해 둘 필요가 있다. ③항에 대한 답변은 더 이상 지루하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④항에서는 필자가 拙評 『모더니티의 問題』속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귀절, 즉―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현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시의 양심과 작업은 이 뒤떨어진 현실에 대한 자각의 모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르쳐준다. 이상한 역설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데 있다. 그가 앞섰다면 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확고하고 여유있게 의식하는 점에서 ‘앞섰다’. 세계의 詩市場에 출품된 우리의 현대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우선 우리들의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果斷과 결의가 필요하다.
의 귀절을 인용해 놓고, 拙詩 「巨大한 뿌리」를 비교해 가면서, 필자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빈정대고 있다. 그는 나의 시 「巨大한 뿌리」를 보면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은 포오즈이며 속임수에 불과하고, 따라서 독자를 우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나름의 폭력적 논법으로 필자의 ‘현실’의 ‘직시’를 ‘사회참여’로 轉位시키고, 졸시가 ‘사회참여’가 안되었다고 하더니, 또 별안간에 ‘사회참여’가 되었다고 하면서, 「巨大한 뿌리」 속에 나오는 ‘反動’이란 말이, 거기에는 ‘뒤떨어진 현실의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인 온갖 것으로 해서 짓눌려 허덕이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담겨져 있을 것’이라고 치켜 올린다. 그러더니 또 다시 ‘현실참여’를 단순한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전락을 시키고, 「巨大한 뿌리」속의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女史와 연애하고 있다’의 一行이 ‘그(필자)가 입으로 그 속에 끼어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층의 사람들의 이해를 거부하는 방법을 택하고’있다고 준엄한 어조로 힐난하고 있다. 그는 결국 필자의 옳지 않은 시적 태도를 ‘입으로는 현실직시를 말하고 그럼으로서 생기게 되는 시의 양심을 주장하면서도 마땅히 있어야 옳은 독자의 대상에의 생각을 포기한 데서 생긴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고 무시무시한 선언을 하면서, 결국 필자의 罪名이야말로 ‘반참여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모순’이라고 언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항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다. 봉건군은 필자가 ‘시인’의 ‘현실’이라고 한 이 ‘현실’의 뜻을 외적 현실만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③項에서 ‘신념’의 뜻을 誤讀하듯이 이 ‘현실’의 뜻도 오독하고 있다. 그는 뒤떨어진 사회의 실업자수가 많은 것만 알았지 뒤떨어진 사회에 서식하고 있는 시인들의 머리속의 팬터지나 이미지나 潛在意識이 뒤떨어지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의 시의 비평을 쓴 金시인의 잠재의식이 1930년 전의 앙드레 브르똥의 것인지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모더니티의 問題」에서 필자가 한 말은 쉽게 말하자면 퇴색한 앙드레 브르똥을 새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리를 하지 말고 솔직하게 분수에 맞는 환상을 하라는 말이다. 그처럼, 시인은 자기의 현실(이미지)에 충실하고 그것을 정직하게 작품 위에 살릴 줄 알 때 시인의 양심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좀 더 솔직하게 되란 말이다. 좀 더 극언을 하자면, 시인이 되기 전에 우선 인간공부부터 먼저하고, 시를 쓰기 전에 문맥이 틀리지 않는 문장공부부터 먼저 하라는 말이다. 우리말도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는 처지라면, 좀 더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신진 시인의 비평을 쓰는 따위의 싱거운 짓은 삼가하란 말이다.
⑤항과 ⑥항이 또 남아있지만 이 이상 답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정 모르겠다면 「幻想과 傷處」와 「韓國語와 리리시즘」의 문맥이 통하지 않는 귀절을 모조리 지적해 가면서 시인의 양심이 무엇인가를 더 상세하게 가르쳐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이 글의 의도는 「詐欺論」의 필자를 헐뜯기 위한 것도 아니며 그에게 반드시 이기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가 제시하고 내가 지금 답변을 중지한 ⑤항, ⑥항에 대한 검산을 그 자신이 스스로 경건하게 할 줄 알 때, 필자는 그에게 던진 ‘詐欺’의 극언을 자진해서 취소할 것이다.
『世代』, 65. 3
출처 : 가을보리 시 사랑방
글쓴이 : 뮤즈의달 원글보기
메모 :
시외/문학 2005/09/19 14:11--
전체 , 오늘 , 어제 문맥을 모르는 시인들 /1368 전체 2 , 오늘 1 , 어제 1
― 사기론詐欺論에 대하여
金洙暎
필자가 1964년 5월부터 8월까지 『思想界』誌에 시월평을 게재했고 同誌 12월호에 「難解의 帳幕」이라는 제목의 64년도 시 연평을 썼는데, 그 중에서 일부의 시인의 난해한 詩와 난해한 詩論을 들어서 개략적인 비평을 시도해 보았다. 한정된 지면에 무딘 眼識으로 짧은 시간에 엮어낸 글이라 뜻하지 않은 오해를 사기도 했을 것이고, 그릇된 판단을 내린 일도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필자로서는 평소에 품고 있던 현대시에 대한 소신과 우리 詩壇에 대한 불만을 일관성 있게 반영시켜 보느라고 노력했고, 될 수 있는 대로 생리적인 편견을 배제한 타당성 있는 기준을 적용해 보려고 애를 썼다. 개개의 작품을 통한 간접적인 단편적 주장이기는 했지만, 우리 시단에 시다운 시가 지극히 희소하다는 것과, 날조된 작품이 많다는 것과, 현대성을 표방하는 작품에 특히 사이비성이 많다는 것을 4회의 월평을 통해서 강조했고, 연평에서는 이러한 옳지 않은 경향이 詩論에까지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어떠한 비평이든 비평의 본의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고, 그러한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는 평자가 얼마나 행복한 가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불행히도 우리의 시단은 그러한 행복을 누리기에는 너무도 시기상조인 것 같고, 그러한 행복을 누리기 전에, 또한 그러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도 오늘날의 우리의 시평은 惡貨를 구축하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라도 하지 않으면 아니될 단계에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菲才를 무릅쓰고 그러한 소신의 일단을 피력해 보려고 애를 써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호의 본지에 게재된 全鳳健군의 「詐欺論」을 읽어 보니 필자가 의도한 설명과 그가 받아들인 해석 사이에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필자가 쓴 ‘詐欺’라는 말에 격분한 탓인지 도처에 불필요한 야유와 욕설을 농하고 있지만 되도록 그러한 부분은 제외하고 논점의 줄거리만을 찾아 피차의 견해의 차이점을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점을 논하기 전에 우선 비평가의 태도에 관해서 밝혀두어야 할 몇가지 점이 있다. 필자는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詩評을 했지만, 필자 뿐이 아니라 詩와 비평을 겸한 사람은 우리 나라에만 해도 여러 사람이 있고, 소설의 경우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이러한 경우에 창작의 기능과 비평의 기능이 다르듯이 피차의 책임의 한계도 자연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비평을 할 때에도 그가 책임을 지는 것은 그의 평론의 부분만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하고 있는지 모르고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봉건군은 필자의 평론뿐이 아니라 필자의 시까지도 야비한 언사를 써 가면서 공격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그가 가한 필자의 시작품에 대한 공박의 부분은 되도록 문제삼지 않으려고 하며, 그러한 조목에는 답변할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
비평가의 태도로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독자에게 아부를 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독자를 납득시키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독자에게 아부를 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詐欺論」을 훑어 보면 말끝마다 존대를 써가면서―‘그렇지요? 그렇지 않읍니까?’ 식의 반문을 해 가면서―공감을 강요하는 아침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평문뿐이 아니라 모든 문장의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독자에게 존대를 써야 할 문장이 따로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논점의 줄거리를 찾아 들어가야 할 터인데, 그러려면 우선 봉건군이 어째서 필자에게 부치는 「詐欺論」을 쓰게 되었는가에 대한 간단한 경위의 설명이 있어야겠다. 앞에서 말한 졸평 「難解의 帳幕」속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즉―
……
『世代』誌의 「나의 新作發表」시리즈만 보더라도 그 ‘노우트’와 ‘批評’중에는 요령부득의 것이 너무나 많다. 詩를 쓰는 사람들의 評文이라는 사정을 고려에 넣고 보더라도 무슨 말인지 論理와 상식이 닿지 않는 말이 전부이니, 이래 가지고는 결코 ‘난해시’의 해설이 될 수 없다. 전형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현대까지의 모든 시론은 일반적인 상식이며 작품은 보다 오묘한 개성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충분할 것이다.
물론 창조와 지식을 分斷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느 정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詩人에 있어서나 學問에 있어서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면 문학사적으로 남는 작품과 작품자체의 가치로서 남는 작품이 있다는 걸 내가 요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自然과 現代性의 接木』 (『世代』誌 3)
이것은 「속의 바다」라는 詩에 대한 ‘批評’속의 구절인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독단은 ‘오묘한’ 시라면 또 몰라도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시론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이 필자는 초현실주의적인 시를 쓰는 시인이다……(中略)……이러한 시나 시평을 읽으면 정말 슬퍼진다. 『世代』誌 11월호의 「나의 新作發表」난의 「韓國語와 리리시즘」과 「幻想과 傷處」의 두 시론도 정도와 성질의 차이는 있지만 동류의 것이다. 「자연과 현대성의 접목」의 필자는 ‘모든 시론은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했지만 ‘환상과 상처’를 어떻게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렇게 소위 기성시인이란 사람들이 허술하게 책임없는 시론을 쓰고 또 그런 시를 쓰는 신진들의 산파역을 하는 한, 우리 시단의 장래는 암담하다. 나는 미숙한 것을 탓하지 않는다. 또한 환상시도 좋고 추상시도 좋고 환상적 시론도 좋고 技術시론도 좋다. 몇번이고 말하는 것이지만 기술의 우열이나 경향 여하가 문제가 아니라 시인의 양심이 문제다. 시의 기술은 양심을 통한 기술인데 작금의 시나 시론에는 양심은 보이지 않고 기술만이 보인다. 아니 그들은 양심이 없는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를 주지적이고 현대적인 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詐欺를 세련된 현대성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대목속에 인용된 「自然과 現代性의 接木」, 「韓國語와 리리시즘」, 「幻想과 傷處」, 「속의 바다」 등의 시론과 시작품의 작가의 이름을 ―독자들이 대체로 불편을 느낄 줄 알면서도―구태여 밝히지 않았는데, 그것은 ―鳳健군은 왜 투명하게 밝히지 않았느냐고 대들고 있지만―이 작자들이 모두 필자보다 젊은 사람들이어서 그런 경우에 신상공격이나 감정적 처사 같은 인상을 되도록이면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이들뿐만 아니라, 여기에서는 中略된 대목에 인용된 「어떤 내 친구에게」와 「시에 있어서의 언어」의 작가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봉건군은 무슨 속셈에서인지 구태여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될 남의 이름까지 밝히어 놓았다. 앞에서 열거한 작품 중에서 봉건군이 쓴 것은 「환상과 상처」(『世代』誌 11) 라는 신진시인 鄭某의 신작시에 부친 비평과 그의 연작시 「속의 바다」뿐이고, 이만하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詐欺論」을 쓰고 필자를 공박하게 된 경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詐欺論」의 ①항에서 장호의 시 「우리들의 얼굴은」과 金丘庸(前記 「自然과 現代性의 接木」의 필자)의 詩 「거울을 보면서」를 평한 필자의 논평을 공박하면서 무엇을 보고 章의 시가 金의 시보다 ‘일보 앞선 세계’라고 했느냐고 대들고 있다. 즉 그는,
김시인은 『文學春秋』7월호에 발표된 金丘庸의 작품 「거울을 보면서」보다도 여기에 적힌 章湖의 것이, 한 발자국 앞선 세계라고 하고 있읍니다. 과연 그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과연 이것이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겠읍니까. 그가 ‘일보 앞선 세계’를 지녔다고 내세운 이것이 시라면,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산문은 다 시가 될 수 있읍니다. 행(行)을 길고 짧게 떼어 적당히 시의 모양으로 늘어놓으면 말입니다.
라고 뇌까리고 있지만 백보를 양보해서 章湖의 시에 대한 필자의 평이 틀렸다고 치고, 章湖의 시도 산문이지 시가 아니라고 치자, 그리고 章湖의 시를 그의 말대로 산문형식으로 붙여 써 놓아 보자.
網巾이라도 좋다. 道袍자락을 펄렁여도 그만. 어떤 차림이면 어떠랴.
계면쩍어 하지말고 쳐다보게 서로 우리들의 얼굴을.
노새를 타거나, 새나라를 타거나, 어떤 걸 몰고서든 거리에 나서서
잠시 거울삼아 바라보게 낭패한 얼굴들을.
그리고 그의 산문과 章湖의 산문을 비교해 보자. 그가 산문으로 의도한 산문보다도 章湖의 뜻하지 않은 산문이 나의 눈에는 훨씬 어색하지 않다. 남의 시를 마구 산문이라고 나무랄 바에는 산문이 무엇인지나 알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과연 이것이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겠읍니까’ 라는 식의 어귀의 구사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비평가가 무엇이 산문이고 무엇이 시인지의 지난한 중에서도 지난한 문제를 어느정도 식별할 수 있겠는가. 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돌과 옥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고, 옥을 보지 못한 사람도 옥과 돌의 구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시와 산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항의 나머지 부분은 ‘거의 산문이나 다름없는 것(章湖의 작품)을 들고 나와서, (필자가)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다만 넌센스에 불과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는 필자에 대한 욕설을 그치고 있지만, 필자의 답변은 이것으로 족할 것 같다.
②항에서는 章湖의 같은 詩 「우리들의 얼굴은」을 인용하면서, 필자가 그의 시에 대해서 가한 다음과 같은 논평의 귀절을 인용하고, 즉―
이와같은 너무나도 멜로드라마틱한 얼굴을 설명함으로써 모처럼 싹트려는 발언의 희망을 무참하게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 작품은 끝까지 비참한 얼굴의 비속한 설명으로 그치고 말았다.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설명은 발언이 아니다
라고 한 귀절을 인용하고, 이것을 이용해서 다음과 같은 논점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즉 그는 ―
이것 역시 김시인의 章湖의 같은 작품의 아마 후반부를 두고서 한 얘기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설명으로 그쳐서 작품이 덜 됐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멜로드라마틱하고 비속하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면 다음의 경우 (拙詩 「강 가에서」와 비교해 보기로 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글속에 나타난 문장상의 미스는 너무나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지적할 필요도 없지만, 이 글의 전후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상한 논리의 비약이 있다. 즉, 그는 필자가 결론을 지은 ①項의 의문에 대한 해답,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의 얼굴은」의 시가 어떤 성질의 작품이냐는 바로 앞에 인용된 필자의 논평중에 나타난 해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따라서 ①項에서 그가 제기한 공박이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는 증명이 나타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슬그머니 말부리를 돌려서 이번에는 ‘비속’하다는 필자의 말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그에 대한 반증을 필자의 작품(즉 拙詩 「강 가에서」)에서 구하려고 든다. 너는 네 자신이 몇배나 더 비속한 작품을 쓰는 주제에 무슨 얼굴로 남의 작품을 비속하다고 나무라느냐? 또한 몇 배나 더 설명적인 작품을 쓰는 주제에 무슨 얼굴로 남의 작품을 설명적이라고 나무랄 수 있느냐? 그는 이렇게 대들면서 마구 욕설을 퍼붓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비평가의 본도에 위배되는 일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해 두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재설을 피한다. 또한 拙詩 「강 가에서」에 대한 변명도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가 ‘비평의 지극히 초보적인 기초지식’이라고 하면서 필자에게 계몽한 말이 과연 계몽을 받을 만한 가치있는 것인지 후일 전문적 비평가들의 심사를 바라는 의미에서도 일단 여기에 明記해 두는편이 좋을 것 같다.
여기서 김시인을 위해, 비평의 극히 초보적인 기초지식 한 가지를 제시해 둬야겠읍니다.
그것은 비난을 하기 위해서는, 혹은 비난을 할 때에는, 비난하는 측에 옹호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설명에 그쳤고 비속하다고 비난했읍니다. 그러면, 이때 그렇게 비난하는 자는 스스로 비설명적인 것을 그리고 비속치 아니한 것을 확실하게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굳게 옹호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옹호하는 것이 없이 비난이나 공격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을 때 누가 그의 말을 신용할 것입니까
③項에서는 역시 필자가 章湖의 「우리들의 얼굴은」을 논한 끝에 매듭을 진 다음과 같은 귀절을 인용하면서, 즉―
우리의 현대시가 겪어야 할 가장 큰 난관은 포오즈를 버리고 사상을 취해야 할 일이다. 포오즈는 시 이전이다. 사상도 시 이전이다. 그러나 포오즈는 시에 신념있는 일관성을 주지 않지만 사상은 그것을 준다. 우리의 시가 조석으로 동요하는 원인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시의 다양성이나 시의 변화나 시의 실험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영해야 할 일이다. 다만 그러한 실험이 동요나 방황으로 그쳐서는 아니되며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知性人으로서의 基底에 신념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이러한 누구나 다 아는 소리를 새삼스럽게 되풀이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도 사실은 우리 시단의 너무나도 많은 현대시의 실험이 방황에서 와서 방황에서 그치는 포오즈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 귀절을 인용해 놓고, 필자가 말하는 ‘사상’과 ‘신념’이 무엇이냐고 대들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봉건군의 오해를 풀기 위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시에 신념있는 일관성’이 무엇이냐고 반문하고 있지만, 필자는 ‘詩에 신념있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무데서도 한일이 없다. 그는 詩의 ‘실험이 동요나 방황으로 그쳐서는 아니되’기 위해서 ‘지성인으로서의 기저에 신념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필자의 말을 그렇게 오인하고 있는 것 같은데, ‘詩에 신념있는 일관성’이 있는 것하고 ‘지성인으로서의 기저에 신념이 살아있는’는 것하고는 시를 논하는 데 있어서 하늘과 땅 사이만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그가 말하는 ‘일정한 목적으로 일정한 연장에 의해서 찍어내는 부로크’같은 작품이 나오지만―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정당의 강령을 신봉하는 프로퍼갠더詩 같은 것이 나오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한국 같은 무질서한 시단의 모범이 될 만한 진정한 현대시가 나온다. 전자는 비참을 초래하지만, 후자의 경우의 신념은 아무리 혼란한 시대에도 굳건히 대지에 발을 붙이고 힘차게 일어설 수 있는 救援의 詩를 낳는다. 또 오해가 있을까 보아 미리 주석을 달아 두지만, 필자가 말하는 救援의 시는 단테나 글로델流의 종교시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오든의 시, 디킨슨의 시, 포오의 시에서부터 멀리 호머나 李太白의 시에 이르기까지의 진정한 시작품은 모두가 구원의 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誤讀이나 誤認은 시의 범위 안에서라면 몰라도 그밖의 경우에는 최악의 경우에 인명의 생사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진 것이니 각별히 조심해 둘 필요가 있다. ③항에 대한 답변은 더 이상 지루하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④항에서는 필자가 拙評 『모더니티의 問題』속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귀절, 즉―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현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시의 양심과 작업은 이 뒤떨어진 현실에 대한 자각의 모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르쳐준다. 이상한 역설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데 있다. 그가 앞섰다면 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확고하고 여유있게 의식하는 점에서 ‘앞섰다’. 세계의 詩市場에 출품된 우리의 현대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우선 우리들의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果斷과 결의가 필요하다.
의 귀절을 인용해 놓고, 拙詩 「巨大한 뿌리」를 비교해 가면서, 필자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빈정대고 있다. 그는 나의 시 「巨大한 뿌리」를 보면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은 포오즈이며 속임수에 불과하고, 따라서 독자를 우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나름의 폭력적 논법으로 필자의 ‘현실’의 ‘직시’를 ‘사회참여’로 轉位시키고, 졸시가 ‘사회참여’가 안되었다고 하더니, 또 별안간에 ‘사회참여’가 되었다고 하면서, 「巨大한 뿌리」 속에 나오는 ‘反動’이란 말이, 거기에는 ‘뒤떨어진 현실의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인 온갖 것으로 해서 짓눌려 허덕이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담겨져 있을 것’이라고 치켜 올린다. 그러더니 또 다시 ‘현실참여’를 단순한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전락을 시키고, 「巨大한 뿌리」속의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女史와 연애하고 있다’의 一行이 ‘그(필자)가 입으로 그 속에 끼어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층의 사람들의 이해를 거부하는 방법을 택하고’있다고 준엄한 어조로 힐난하고 있다. 그는 결국 필자의 옳지 않은 시적 태도를 ‘입으로는 현실직시를 말하고 그럼으로서 생기게 되는 시의 양심을 주장하면서도 마땅히 있어야 옳은 독자의 대상에의 생각을 포기한 데서 생긴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고 무시무시한 선언을 하면서, 결국 필자의 罪名이야말로 ‘반참여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모순’이라고 언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항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다. 봉건군은 필자가 ‘시인’의 ‘현실’이라고 한 이 ‘현실’의 뜻을 외적 현실만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③項에서 ‘신념’의 뜻을 誤讀하듯이 이 ‘현실’의 뜻도 오독하고 있다. 그는 뒤떨어진 사회의 실업자수가 많은 것만 알았지 뒤떨어진 사회에 서식하고 있는 시인들의 머리속의 팬터지나 이미지나 潛在意識이 뒤떨어지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의 시의 비평을 쓴 金시인의 잠재의식이 1930년 전의 앙드레 브르똥의 것인지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모더니티의 問題」에서 필자가 한 말은 쉽게 말하자면 퇴색한 앙드레 브르똥을 새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리를 하지 말고 솔직하게 분수에 맞는 환상을 하라는 말이다. 그처럼, 시인은 자기의 현실(이미지)에 충실하고 그것을 정직하게 작품 위에 살릴 줄 알 때 시인의 양심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좀 더 솔직하게 되란 말이다. 좀 더 극언을 하자면, 시인이 되기 전에 우선 인간공부부터 먼저하고, 시를 쓰기 전에 문맥이 틀리지 않는 문장공부부터 먼저 하라는 말이다. 우리말도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는 처지라면, 좀 더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신진 시인의 비평을 쓰는 따위의 싱거운 짓은 삼가하란 말이다.
⑤항과 ⑥항이 또 남아있지만 이 이상 답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정 모르겠다면 「幻想과 傷處」와 「韓國語와 리리시즘」의 문맥이 통하지 않는 귀절을 모조리 지적해 가면서 시인의 양심이 무엇인가를 더 상세하게 가르쳐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이 글의 의도는 「詐欺論」의 필자를 헐뜯기 위한 것도 아니며 그에게 반드시 이기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가 제시하고 내가 지금 답변을 중지한 ⑤항, ⑥항에 대한 검산을 그 자신이 스스로 경건하게 할 줄 알 때, 필자는 그에게 던진 ‘詐欺’의 극언을 자진해서 취소할 것이다.
『世代』, 65. 3
金洙暎
필자가 1964년 5월부터 8월까지 『思想界』誌에 시월평을 게재했고 同誌 12월호에 「難解의 帳幕」이라는 제목의 64년도 시 연평을 썼는데, 그 중에서 일부의 시인의 난해한 詩와 난해한 詩論을 들어서 개략적인 비평을 시도해 보았다. 한정된 지면에 무딘 眼識으로 짧은 시간에 엮어낸 글이라 뜻하지 않은 오해를 사기도 했을 것이고, 그릇된 판단을 내린 일도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필자로서는 평소에 품고 있던 현대시에 대한 소신과 우리 詩壇에 대한 불만을 일관성 있게 반영시켜 보느라고 노력했고, 될 수 있는 대로 생리적인 편견을 배제한 타당성 있는 기준을 적용해 보려고 애를 썼다. 개개의 작품을 통한 간접적인 단편적 주장이기는 했지만, 우리 시단에 시다운 시가 지극히 희소하다는 것과, 날조된 작품이 많다는 것과, 현대성을 표방하는 작품에 특히 사이비성이 많다는 것을 4회의 월평을 통해서 강조했고, 연평에서는 이러한 옳지 않은 경향이 詩論에까지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어떠한 비평이든 비평의 본의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고, 그러한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는 평자가 얼마나 행복한 가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불행히도 우리의 시단은 그러한 행복을 누리기에는 너무도 시기상조인 것 같고, 그러한 행복을 누리기 전에, 또한 그러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도 오늘날의 우리의 시평은 惡貨를 구축하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라도 하지 않으면 아니될 단계에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菲才를 무릅쓰고 그러한 소신의 일단을 피력해 보려고 애를 써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호의 본지에 게재된 全鳳健군의 「詐欺論」을 읽어 보니 필자가 의도한 설명과 그가 받아들인 해석 사이에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필자가 쓴 ‘詐欺’라는 말에 격분한 탓인지 도처에 불필요한 야유와 욕설을 농하고 있지만 되도록 그러한 부분은 제외하고 논점의 줄거리만을 찾아 피차의 견해의 차이점을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점을 논하기 전에 우선 비평가의 태도에 관해서 밝혀두어야 할 몇가지 점이 있다. 필자는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詩評을 했지만, 필자 뿐이 아니라 詩와 비평을 겸한 사람은 우리 나라에만 해도 여러 사람이 있고, 소설의 경우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이러한 경우에 창작의 기능과 비평의 기능이 다르듯이 피차의 책임의 한계도 자연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비평을 할 때에도 그가 책임을 지는 것은 그의 평론의 부분만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하고 있는지 모르고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봉건군은 필자의 평론뿐이 아니라 필자의 시까지도 야비한 언사를 써 가면서 공격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그가 가한 필자의 시작품에 대한 공박의 부분은 되도록 문제삼지 않으려고 하며, 그러한 조목에는 답변할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
비평가의 태도로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독자에게 아부를 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독자를 납득시키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독자에게 아부를 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詐欺論」을 훑어 보면 말끝마다 존대를 써가면서―‘그렇지요? 그렇지 않읍니까?’ 식의 반문을 해 가면서―공감을 강요하는 아침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평문뿐이 아니라 모든 문장의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독자에게 존대를 써야 할 문장이 따로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논점의 줄거리를 찾아 들어가야 할 터인데, 그러려면 우선 봉건군이 어째서 필자에게 부치는 「詐欺論」을 쓰게 되었는가에 대한 간단한 경위의 설명이 있어야겠다. 앞에서 말한 졸평 「難解의 帳幕」속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즉―
……
『世代』誌의 「나의 新作發表」시리즈만 보더라도 그 ‘노우트’와 ‘批評’중에는 요령부득의 것이 너무나 많다. 詩를 쓰는 사람들의 評文이라는 사정을 고려에 넣고 보더라도 무슨 말인지 論理와 상식이 닿지 않는 말이 전부이니, 이래 가지고는 결코 ‘난해시’의 해설이 될 수 없다. 전형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현대까지의 모든 시론은 일반적인 상식이며 작품은 보다 오묘한 개성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충분할 것이다.
물론 창조와 지식을 分斷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느 정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詩人에 있어서나 學問에 있어서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면 문학사적으로 남는 작품과 작품자체의 가치로서 남는 작품이 있다는 걸 내가 요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自然과 現代性의 接木』 (『世代』誌 3)
이것은 「속의 바다」라는 詩에 대한 ‘批評’속의 구절인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독단은 ‘오묘한’ 시라면 또 몰라도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시론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이 필자는 초현실주의적인 시를 쓰는 시인이다……(中略)……이러한 시나 시평을 읽으면 정말 슬퍼진다. 『世代』誌 11월호의 「나의 新作發表」난의 「韓國語와 리리시즘」과 「幻想과 傷處」의 두 시론도 정도와 성질의 차이는 있지만 동류의 것이다. 「자연과 현대성의 접목」의 필자는 ‘모든 시론은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했지만 ‘환상과 상처’를 어떻게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렇게 소위 기성시인이란 사람들이 허술하게 책임없는 시론을 쓰고 또 그런 시를 쓰는 신진들의 산파역을 하는 한, 우리 시단의 장래는 암담하다. 나는 미숙한 것을 탓하지 않는다. 또한 환상시도 좋고 추상시도 좋고 환상적 시론도 좋고 技術시론도 좋다. 몇번이고 말하는 것이지만 기술의 우열이나 경향 여하가 문제가 아니라 시인의 양심이 문제다. 시의 기술은 양심을 통한 기술인데 작금의 시나 시론에는 양심은 보이지 않고 기술만이 보인다. 아니 그들은 양심이 없는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를 주지적이고 현대적인 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詐欺를 세련된 현대성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대목속에 인용된 「自然과 現代性의 接木」, 「韓國語와 리리시즘」, 「幻想과 傷處」, 「속의 바다」 등의 시론과 시작품의 작가의 이름을 ―독자들이 대체로 불편을 느낄 줄 알면서도―구태여 밝히지 않았는데, 그것은 ―鳳健군은 왜 투명하게 밝히지 않았느냐고 대들고 있지만―이 작자들이 모두 필자보다 젊은 사람들이어서 그런 경우에 신상공격이나 감정적 처사 같은 인상을 되도록이면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이들뿐만 아니라, 여기에서는 中略된 대목에 인용된 「어떤 내 친구에게」와 「시에 있어서의 언어」의 작가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봉건군은 무슨 속셈에서인지 구태여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될 남의 이름까지 밝히어 놓았다. 앞에서 열거한 작품 중에서 봉건군이 쓴 것은 「환상과 상처」(『世代』誌 11) 라는 신진시인 鄭某의 신작시에 부친 비평과 그의 연작시 「속의 바다」뿐이고, 이만하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詐欺論」을 쓰고 필자를 공박하게 된 경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詐欺論」의 ①항에서 장호의 시 「우리들의 얼굴은」과 金丘庸(前記 「自然과 現代性의 接木」의 필자)의 詩 「거울을 보면서」를 평한 필자의 논평을 공박하면서 무엇을 보고 章의 시가 金의 시보다 ‘일보 앞선 세계’라고 했느냐고 대들고 있다. 즉 그는,
김시인은 『文學春秋』7월호에 발표된 金丘庸의 작품 「거울을 보면서」보다도 여기에 적힌 章湖의 것이, 한 발자국 앞선 세계라고 하고 있읍니다. 과연 그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과연 이것이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겠읍니까. 그가 ‘일보 앞선 세계’를 지녔다고 내세운 이것이 시라면,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산문은 다 시가 될 수 있읍니다. 행(行)을 길고 짧게 떼어 적당히 시의 모양으로 늘어놓으면 말입니다.
라고 뇌까리고 있지만 백보를 양보해서 章湖의 시에 대한 필자의 평이 틀렸다고 치고, 章湖의 시도 산문이지 시가 아니라고 치자, 그리고 章湖의 시를 그의 말대로 산문형식으로 붙여 써 놓아 보자.
網巾이라도 좋다. 道袍자락을 펄렁여도 그만. 어떤 차림이면 어떠랴.
계면쩍어 하지말고 쳐다보게 서로 우리들의 얼굴을.
노새를 타거나, 새나라를 타거나, 어떤 걸 몰고서든 거리에 나서서
잠시 거울삼아 바라보게 낭패한 얼굴들을.
그리고 그의 산문과 章湖의 산문을 비교해 보자. 그가 산문으로 의도한 산문보다도 章湖의 뜻하지 않은 산문이 나의 눈에는 훨씬 어색하지 않다. 남의 시를 마구 산문이라고 나무랄 바에는 산문이 무엇인지나 알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과연 이것이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겠읍니까’ 라는 식의 어귀의 구사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비평가가 무엇이 산문이고 무엇이 시인지의 지난한 중에서도 지난한 문제를 어느정도 식별할 수 있겠는가. 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돌과 옥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고, 옥을 보지 못한 사람도 옥과 돌의 구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시와 산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항의 나머지 부분은 ‘거의 산문이나 다름없는 것(章湖의 작품)을 들고 나와서, (필자가)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다만 넌센스에 불과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는 필자에 대한 욕설을 그치고 있지만, 필자의 답변은 이것으로 족할 것 같다.
②항에서는 章湖의 같은 詩 「우리들의 얼굴은」을 인용하면서, 필자가 그의 시에 대해서 가한 다음과 같은 논평의 귀절을 인용하고, 즉―
이와같은 너무나도 멜로드라마틱한 얼굴을 설명함으로써 모처럼 싹트려는 발언의 희망을 무참하게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 작품은 끝까지 비참한 얼굴의 비속한 설명으로 그치고 말았다.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설명은 발언이 아니다
라고 한 귀절을 인용하고, 이것을 이용해서 다음과 같은 논점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즉 그는 ―
이것 역시 김시인의 章湖의 같은 작품의 아마 후반부를 두고서 한 얘기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설명으로 그쳐서 작품이 덜 됐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멜로드라마틱하고 비속하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면 다음의 경우 (拙詩 「강 가에서」와 비교해 보기로 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글속에 나타난 문장상의 미스는 너무나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지적할 필요도 없지만, 이 글의 전후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상한 논리의 비약이 있다. 즉, 그는 필자가 결론을 지은 ①項의 의문에 대한 해답,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의 얼굴은」의 시가 어떤 성질의 작품이냐는 바로 앞에 인용된 필자의 논평중에 나타난 해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따라서 ①項에서 그가 제기한 공박이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는 증명이 나타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슬그머니 말부리를 돌려서 이번에는 ‘비속’하다는 필자의 말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그에 대한 반증을 필자의 작품(즉 拙詩 「강 가에서」)에서 구하려고 든다. 너는 네 자신이 몇배나 더 비속한 작품을 쓰는 주제에 무슨 얼굴로 남의 작품을 비속하다고 나무라느냐? 또한 몇 배나 더 설명적인 작품을 쓰는 주제에 무슨 얼굴로 남의 작품을 설명적이라고 나무랄 수 있느냐? 그는 이렇게 대들면서 마구 욕설을 퍼붓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비평가의 본도에 위배되는 일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해 두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재설을 피한다. 또한 拙詩 「강 가에서」에 대한 변명도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가 ‘비평의 지극히 초보적인 기초지식’이라고 하면서 필자에게 계몽한 말이 과연 계몽을 받을 만한 가치있는 것인지 후일 전문적 비평가들의 심사를 바라는 의미에서도 일단 여기에 明記해 두는편이 좋을 것 같다.
여기서 김시인을 위해, 비평의 극히 초보적인 기초지식 한 가지를 제시해 둬야겠읍니다.
그것은 비난을 하기 위해서는, 혹은 비난을 할 때에는, 비난하는 측에 옹호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설명에 그쳤고 비속하다고 비난했읍니다. 그러면, 이때 그렇게 비난하는 자는 스스로 비설명적인 것을 그리고 비속치 아니한 것을 확실하게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굳게 옹호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옹호하는 것이 없이 비난이나 공격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을 때 누가 그의 말을 신용할 것입니까
③項에서는 역시 필자가 章湖의 「우리들의 얼굴은」을 논한 끝에 매듭을 진 다음과 같은 귀절을 인용하면서, 즉―
우리의 현대시가 겪어야 할 가장 큰 난관은 포오즈를 버리고 사상을 취해야 할 일이다. 포오즈는 시 이전이다. 사상도 시 이전이다. 그러나 포오즈는 시에 신념있는 일관성을 주지 않지만 사상은 그것을 준다. 우리의 시가 조석으로 동요하는 원인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시의 다양성이나 시의 변화나 시의 실험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영해야 할 일이다. 다만 그러한 실험이 동요나 방황으로 그쳐서는 아니되며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知性人으로서의 基底에 신념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이러한 누구나 다 아는 소리를 새삼스럽게 되풀이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도 사실은 우리 시단의 너무나도 많은 현대시의 실험이 방황에서 와서 방황에서 그치는 포오즈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 귀절을 인용해 놓고, 필자가 말하는 ‘사상’과 ‘신념’이 무엇이냐고 대들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봉건군의 오해를 풀기 위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시에 신념있는 일관성’이 무엇이냐고 반문하고 있지만, 필자는 ‘詩에 신념있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무데서도 한일이 없다. 그는 詩의 ‘실험이 동요나 방황으로 그쳐서는 아니되’기 위해서 ‘지성인으로서의 기저에 신념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필자의 말을 그렇게 오인하고 있는 것 같은데, ‘詩에 신념있는 일관성’이 있는 것하고 ‘지성인으로서의 기저에 신념이 살아있는’는 것하고는 시를 논하는 데 있어서 하늘과 땅 사이만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그가 말하는 ‘일정한 목적으로 일정한 연장에 의해서 찍어내는 부로크’같은 작품이 나오지만―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정당의 강령을 신봉하는 프로퍼갠더詩 같은 것이 나오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한국 같은 무질서한 시단의 모범이 될 만한 진정한 현대시가 나온다. 전자는 비참을 초래하지만, 후자의 경우의 신념은 아무리 혼란한 시대에도 굳건히 대지에 발을 붙이고 힘차게 일어설 수 있는 救援의 詩를 낳는다. 또 오해가 있을까 보아 미리 주석을 달아 두지만, 필자가 말하는 救援의 시는 단테나 글로델流의 종교시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오든의 시, 디킨슨의 시, 포오의 시에서부터 멀리 호머나 李太白의 시에 이르기까지의 진정한 시작품은 모두가 구원의 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誤讀이나 誤認은 시의 범위 안에서라면 몰라도 그밖의 경우에는 최악의 경우에 인명의 생사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진 것이니 각별히 조심해 둘 필요가 있다. ③항에 대한 답변은 더 이상 지루하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④항에서는 필자가 拙評 『모더니티의 問題』속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귀절, 즉―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현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시의 양심과 작업은 이 뒤떨어진 현실에 대한 자각의 모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르쳐준다. 이상한 역설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데 있다. 그가 앞섰다면 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확고하고 여유있게 의식하는 점에서 ‘앞섰다’. 세계의 詩市場에 출품된 우리의 현대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우선 우리들의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果斷과 결의가 필요하다.
의 귀절을 인용해 놓고, 拙詩 「巨大한 뿌리」를 비교해 가면서, 필자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빈정대고 있다. 그는 나의 시 「巨大한 뿌리」를 보면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은 포오즈이며 속임수에 불과하고, 따라서 독자를 우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나름의 폭력적 논법으로 필자의 ‘현실’의 ‘직시’를 ‘사회참여’로 轉位시키고, 졸시가 ‘사회참여’가 안되었다고 하더니, 또 별안간에 ‘사회참여’가 되었다고 하면서, 「巨大한 뿌리」 속에 나오는 ‘反動’이란 말이, 거기에는 ‘뒤떨어진 현실의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인 온갖 것으로 해서 짓눌려 허덕이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담겨져 있을 것’이라고 치켜 올린다. 그러더니 또 다시 ‘현실참여’를 단순한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전락을 시키고, 「巨大한 뿌리」속의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女史와 연애하고 있다’의 一行이 ‘그(필자)가 입으로 그 속에 끼어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층의 사람들의 이해를 거부하는 방법을 택하고’있다고 준엄한 어조로 힐난하고 있다. 그는 결국 필자의 옳지 않은 시적 태도를 ‘입으로는 현실직시를 말하고 그럼으로서 생기게 되는 시의 양심을 주장하면서도 마땅히 있어야 옳은 독자의 대상에의 생각을 포기한 데서 생긴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고 무시무시한 선언을 하면서, 결국 필자의 罪名이야말로 ‘반참여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모순’이라고 언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항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다. 봉건군은 필자가 ‘시인’의 ‘현실’이라고 한 이 ‘현실’의 뜻을 외적 현실만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③項에서 ‘신념’의 뜻을 誤讀하듯이 이 ‘현실’의 뜻도 오독하고 있다. 그는 뒤떨어진 사회의 실업자수가 많은 것만 알았지 뒤떨어진 사회에 서식하고 있는 시인들의 머리속의 팬터지나 이미지나 潛在意識이 뒤떨어지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의 시의 비평을 쓴 金시인의 잠재의식이 1930년 전의 앙드레 브르똥의 것인지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모더니티의 問題」에서 필자가 한 말은 쉽게 말하자면 퇴색한 앙드레 브르똥을 새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리를 하지 말고 솔직하게 분수에 맞는 환상을 하라는 말이다. 그처럼, 시인은 자기의 현실(이미지)에 충실하고 그것을 정직하게 작품 위에 살릴 줄 알 때 시인의 양심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좀 더 솔직하게 되란 말이다. 좀 더 극언을 하자면, 시인이 되기 전에 우선 인간공부부터 먼저하고, 시를 쓰기 전에 문맥이 틀리지 않는 문장공부부터 먼저 하라는 말이다. 우리말도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는 처지라면, 좀 더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신진 시인의 비평을 쓰는 따위의 싱거운 짓은 삼가하란 말이다.
⑤항과 ⑥항이 또 남아있지만 이 이상 답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정 모르겠다면 「幻想과 傷處」와 「韓國語와 리리시즘」의 문맥이 통하지 않는 귀절을 모조리 지적해 가면서 시인의 양심이 무엇인가를 더 상세하게 가르쳐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이 글의 의도는 「詐欺論」의 필자를 헐뜯기 위한 것도 아니며 그에게 반드시 이기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가 제시하고 내가 지금 답변을 중지한 ⑤항, ⑥항에 대한 검산을 그 자신이 스스로 경건하게 할 줄 알 때, 필자는 그에게 던진 ‘詐欺’의 극언을 자진해서 취소할 것이다.
『世代』, 65. 3
시외/문학 2005/09/1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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