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작법14. 隨筆的 마음가짐
孔 德 龍
隨筆이라고 하는 형식을 두고, 글을 써온 글도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이렇다 할 작법을 미리 설정해놓고 붓을 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하기야 수필을 쓰기 시작한 동기부터가 애매한 것이었으니 무슨 작법 같은 것을 생각할 만한 마음의 준비도 없었던 것 갈다. 굳이 수필을 쓰기 시작한 동기를 찾자면, 남의 글을 읽고 자극을 받았다고나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필자가 우리 글과, 문학을 몸담아 읽기 시작한 것은 스무 살이 넘어서 부 터이었다. 시, 소설, 수필·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읽는 동안에, 이렇다 할 형식 조차 가리기 어려운 산문에 마음을 들리기 시작한 것은 몇몇 대가들의 그 매끈히 다듬어진 문장에 접하고 부 터 이었다. 이를테면 春園의<文章讀本>, 尙慮의<文學讀本>芝鎔 散文같은 것이다. 글에 끌려서 작품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 전에도 있었다. 일본의 많은 미문들이었다. 그리고 서구의 시문의 일본어 번역들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전기 대가들이 우리 글을 읽고 나서부터는 일종의 우리말로의 표현의 가능성 같은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훌륭한 예술은 그것을 읽고, 보고 듣고 하면 자신만의 독창성을 일깨워 준다고나 ,할까, 막연하나마 무엇인가 써보고 싶은 생각이 가끔 머리를 들고 일어나곤 하였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쓸까? 하는 문제에 당도하면 들었던 펜을 다시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어렴풋이 피어 오른 창작의 의욕은 구체적인 표현의 단계에 와서는 어쩔 수 없이 발을 멈추고 마는 것이다. 그 무렵 영한독본으로 선택한 워싱톤·어어빙의<스케치·북)을 읽게 되면서, 나도 이런 소채로 글을 쓰면 무엇인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은 것이다. (스케치 ·북>은 저자의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자기 자신을 알라는 아니지만,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것이 있다면, 그래도 자기자린이 아닐까. 자기 자신을 고백하는 글이라면, 재고 꾸미고 할 것 없이 곧 못을 들을 수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 마디로 자기라고 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자기이다. 파스칼 같은 철인은 자신의 사유로 온 우주를 덮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 자신 보잘 것 없는 문학도이긴 하지만, 나에게도 소우주는 있다. 그러면 나의 어느 부분에 초점을 대야 할 것인가? 즉 큰 소재에서 다시 작은 소재로 앵글을 맞추는 일이다. 나의 용모에 관해서는 어떨까? 그러나 나의 평범한 얼굴이 무슨 소재가 되랴 흔해빠진 것이 자화상이 아닌가. 수필의 소재는 신기할수록 좋다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신기한 이야깃거리가 뒹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소재라 할지라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는 있다. 새로운 해석을 내리면, 훌륭한 창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姓을 가지고 있다. 너무나 담연한 일이다. 그러나姓도 나 같은 稀姓은 혹 수필의 소재가 되지 않을까? 稀姓을 타고난 사람만의 애환을 그릴 수 있다면 창의적인 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머리에 번쩍 떠오른 제목이 바로<孔哥의 辨明>이다. 일찍이 <프라톤의 辨明>이 있으니, 별 신기한 제목도 못되지만, 이런 경우. 권위 있는 글의 제목을 본 따면 무명인의 글을 돋보이게 할망정, 마이너스는 되지 않으리라, 자위도 해 본 것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孔哥의 辨明>이 활자가 휘어 나온 지 얼마 안 가서 이번에는 (皮哥의 辨)이 나왔다. 물론 우연의 일치이고 네용은 다른지만, 稀姓을 갖는 남다른 감회를 피 교수가 피력 한 것이다.
소재는 가성이고. 제목이 정해졌으니 다음은 주제가 될 것이다. 이 한 조각의 글을 통해서 필자는 결국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소설에 주제가 있듯 수필에도 주제가 있다. 수필은 종류에 따라서 주제가 뚜렷할 수도 있고 희미할 수도 있다. 또 주제가 하나일 수도 있다. 두개 이상을 담을 수도 있다. 주제를 말을 바꾸어 중심사상이라 할 수 있다. <孔哥의 辨明)에는 뚜렷한 중심 사상이 하나가 아니고, 복수라 할 수 있다. 수필은 소설에 비해 산만한 성격을 가지므로 주제는 복수를 담을 수가 많다.
성명은 단순히 사람에 붙여진 부호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 사람의 인품을 풍기는 것인즉, 이름을 합부로 바꾸는 어리석음, 성명에 대한 숙명감 같은 것이 주제가 되겠다. 다음엔 이런 주제를 소재에 담아서 독자에게 전달하는 양식 -즉 구성이 문제가 되겠다. 문학적 수필의 특정은 논문이나 해설같이 일정한 형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제목이 새롭고 소재가 재미있고 주제가 脫通俗的이라 할지라도 구성이 서론-볼론-결론식의 논문양식이 되면 모처럼의 좋은 소재와 주제를 죽일 수도 있다. 수필의 종류나 소재에 따라서 형식은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가 있지만, 대체로 저회(低徊)하는듯한 구성(Rambling structure)이 바람직하다. 끝으로 표현이 되겠지만, 수필에서는 특히 매끈히 다듬어진 문채가 바람직하다. 수필은 소설과는 달리 서사적 요소가 적으므로 글 읽는 재미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 원고가 일단 내손을 떠나서 활자가 되어 나온 것을 처음 읽을 때 가벼운 설렘과 두려움이 앞서게 된다. 어색할 표현, 부자연스러운 구독법등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역시 첫 한 줄 쓰기가 어렵다. 첫 줄이 그럴듯하게 풀리면, 뒤는 저절로 미끄러져 나갈 수도 있다. 수필의 구성은 귀납법 보다는 연역법식 서술이 많이 쓰이므로 첫 줄부터 주제를 풍길 수가 있다. <孔哥의 辨明>의 첫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서 한자란 한자가 모조리 폐지되어도 내 이름 석 자 만은 한자로 쓰고 싶다. 내 이름은 孔 德龍'이지, 결코 공 덕룡이 되어서는 안 될 성싶어서다.
사람의 성명은 단순히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 기호에 그치지 않고 무엇인가 그 사람을 풍겨주는 것이 있어야 할 터인데, 한글이라고 하는 표음문자를 가지고는 도저히 바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자폐지 반대까지 곁들여서 성명과 인품의 볼가분의 관계를 첫 머리에 내 세운 것이다. 또 이글의 끝 대목에서도 같은 주제를 다른 예를 들어 마무리를 지었다.
성명이 사람의 부호 이상이라고 하면 작명은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둘째 놈이 뱃속에 들자, 남녀 두 개의 이름을 미리지어 놓았다. 투두개의 이름이 제각기 주인이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시계바늘이 오후 다섯 시를 지나자,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어서,
아들이에요......,
하는 조산원의 목소리가 꼬리를 물고 새어 나왔다. 나는 사내 이름을 '志陽아!'하고 입속에서 불러 보았다. 가난한 교수의 집에서 태어난 아들이여, 태양을 뜻하여라.‥‥‥‥ 이렇게 입속애서 중얼거리기도 한 것이다.
수필은 ego의 문학이라고 한다. 소설이 있었던 일, 혹은 있을 법한 일을 소재로 진실의 세계에까지 승화시키는 것이라면. 수필은 사사로운 일에서 출발하여, 공명의 세계에까지 확대하는 작업이다. 이 확대의 작업을 보편화(generalization)라고 한다. 孔哥의 辨明)의 경우, 미천한 내 자신의 성명을 소재로 삼아 만인의 성명에 공통되는 일반론을 펴나가는 작업이 되겠다. 어느 정도의 공명을 불러 일으켰는지는 의문이지만, 시초의 의도는 그러하였다던 것이다. 'generalization'의 방법은 해설적인 방법이 아니고 실례에 의한 시사적인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비애의 감정을 「슬프다」슬프다고 되풀이 해도 슬픈 감정이 전달되지 않지만, 슬픈 한 장면이나 사연을 제시하면 보다 전달이 잘되는 사실을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이 문학의 한 형식으로서 예술성을 지니게 되느냐의 여부는 주로 이 과정에 달렸다고 해도 과연은 아닐 것이다. 수필을 試圖的인 의미로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미완에서 그치는 것이 좋다는 풀이도 서사적인 수법의 효과를 뜻하는 것이다.
이상 서술한 바와 같이 한 편의 수필이 나오기 까지는 제목의 선정-소재의 수습정리 -주제의 설정 -구성의 과정을 밟게 되지만, 이 순서는 반드시 고정된 것은 아니다. 주제를 먼저 설정하고 그 주제를 부각시킬 소재를 선택 할 수도 있고, 소제, 주제 다음으로 제목을 생각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이런 과정을 미리 짜놓지 않고 이를 태면 붓 가는 대로 쓰는 법도 있겠지만, 무슨 상이 떠 올라서 '붓을 든 것이니. 想의 내용은 역시 소재와 주재가 될 것이다. 수필을 쓰는 작법이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할 것이다. 우선 붓을 들고 써 내려가면 생각지 않던 소재가 샘 솟듯 솟아 나올 수도 있고, 거기에 걸 맞는 주재를 풍길 수도 있을 것이다. 구성만 하더라도 쓰는 도중에 엮어나가는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즉석 적 구성을 수련을 쌓은 수필만이 가능할 것이다. 원례 수필은 「무형식의 형식」이라고 하였으니, 미리 마련된 틀에 맞추어서 글을 쓰기보다는 글에 맞추어서 틀을 짜는 것에 수필다운 구성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신문에나 일반잡지에 설리는 수필은 길이가 정해 있으므로 붓을 들기 전에 대충 구성을 짜놓는 것이 좋을 성 싶다. 초심자에게는 특히 그렇다. 또 서사적 내용을 수필에 담을 때는 시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몇 가지 사건을 서술 할 때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서 기술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순서를 바꾸어서 기술하면 효과를 거두는 수도 있다. 단편 소설에서는 흔히 하는 수법이다.
이상 수필의 작법을 약술 하였거니와, 작법에 앞서 알아 두어야 할일은 훌륭한 수필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항시 “수필적 마음가짐” (essay type of the mind)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다. 항용 원고청탁을 받고서, 제목을 같고, 구상을 하지만, 수필의 소재가 될만한 것을 일산 찾는 마음 가짐이 아쉽다. 대화 가운데, 혹은 홀로의 사념 속에서 수필이 될만한 것이 불시에 튀어 나올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장소를 가리지 말고 적어 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 수필 감은 책 있다가 찾아 내는 수도 있다. 모든 창작이 모방에서 시작 되는 수필을 읽는 과정에서 수필이 될만한 대상, 정서가 무엇인가 하는 인식이 서서히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일상의 생활에서 혹은 신변 잡사에서 수필적인 것을 부단히 관찰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수필적인 것은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과는 스스로 장르를 달리한다. 앞서 말한 수필적 마음가짐이란 (오·리어트)의 저서(에세이)에서 관찰하는(observant)이외에 “회상하는” “원칙적으로 비 혁신 적인” 마음가짐을 일컫는 것이다. 이런 마음 가짐으로 미루어 보아, 수필이 중년이후의 문학이라고 하는 것도 짐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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