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수필

수필작법/個性 의 表象 / 金 東 必

자크라캉 2007. 7. 2. 17:24
수필작법15 個性 의 表象  / 金 東 必


모든 예술이 닦을수록 심화되고 세련되어 나간다는데, 십 몇 년을 수필 속에 살아온 나는 지금도 한 편을 가지고 여러 날을 끙끙대는 경우가 허다하니 글은 쓸수록 어려운 것인가?

아니다, 文과 學이 함께 빈곤한 탓인 것 같다. 어떤 때는 붓을 잡으면 일사천리로 주욱 써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런 경우는 썩 드물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을 때 붓을 들면 몇 줄을 쓰다말고 다음 날에 또다시 들춰 보는 때가 더 많다.

나는 이삼 년 전만 해도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어떤 영감이나 소재들이 떠올라서 쓰기 시작하다가 내용이 시원치 않아 중도에 그만둔 원고들이 책상에 몇 편씩이나 뒹굴었다. 그 원고들은 보름도 가고 한달 두 달도 갔다. 나는 이런 습관이 좋지 않음을 알고 한번 쓰기 시작한 원고는 아무리 오래 걸리는 한이 있어도 다른 제재의 글을 머리 에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 후로 중간에 쓰다 말고 쉬는 원고는 거의 없어졌다. 급히 청탁 원고가 아니면 한 번 쓰기 시작한 원고는 고집으로 채우고 있다.

{나의 수필 작법}이란 제목은 나한테 큰 부담을 준다. 특별히 내놓을만한 방법이 없어 부끄러움이 왈칵 침범하기 때문이다.

나는 수필을 쓸 때 처음부터 원고지에 쓰질 않는다. 처음엔 하얀 백지 이에 적어 간다. 그 다음 필요한 원고 량을 감안하여 그친 다음 다소 문맥을 매끄럽게 손질한다. 그 작업이 끝나면 백지에 몇 장이고 써진 글을 여러 문단으로 죽죽 줄을 그어 나눈다. 그 글은 산산이 부서진다. 부서진 글에 번호를 매긴다. 왜냐하면 글의 앞뒤 순서를 다시 한 번 바로 잡기 위해서다.

그 뒤 문단 별로 다듬는다. 몇 번이고 퇴고로 글을 번호 순서대로 원고지에 옮기면 한 편의 수필은 완성된다.

나는 글을 쓸 때 방안에 아무도 없어야 좋다. 한적하고 여유 있는 분위기가 아니면 아예 붓을 들지 못한다. 시간으로 말하면 오전이나 초저녁에 홀로 앉아 쓰는 때가 능률적이었다.

수필은 가치와 생명이 있어야 하고, 철학적인 觀照도 있어야 되고, 작자의 인품과 향기와 채취가 담백하게 풍겨야 한다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또 어떤 사람은 수필은 靑瓷硯滴같아야 하고 蘭같고 鶴같아야 한다는데 서 놓고 보면 어림도 없으니 한심스럽다.

그럼 내 수필은 어떤 것인가?

허물없는 수필가 한 분이 네게 속삭여 주었다 {당신의 글은 꽃으로 말하면 꼭 코스모스야} 그 말이 맞다. 고고하고 맑은 난이나 학은 될 수 없고 인적이 드문 길섶에 다망다망 핀 초가을의 코스모스다. 코스모스라면 특별히 가치도 생명도 캐내기 가냘픈 코스 모스인줄 내가 알고 있다.
코스모스에서 더 아름답고, 고상하고, 청조하고, 고고하고, 낭만이 질질 흐르고, 또 정서적인 것을 탐색해 내려 해도 한번 코스모스인지라 탐색해 낼 게 없다. 큰 맘 먹고 써 보아도 써 놓고 보면 또 코스모스에 불과한 것을 낸들 어떠하겠는가?

차라리 나는 코스모스니까 나의 졸작 <수필과 함께> 라는 글 중에서 한 부분을 이 자리에 옮겨 나는 왜 수필을 쓰는가나 확인하련다.
{수필을 쓰면서 마음의 그릇에 내 인생을 주워 담는다. 화려한 동심과 상상으로 태워졌던 먼 날의 추억도 담아 가고 자책과 원망으로 점철된 세월을 미련 속에 담기도 한다. 물욕으로 범람한 자신을 나무라고 인고의 이랑 속에서 구겨진 자화상을 담백하게 토해 놓고 왜 소홀해 지는 인간에 안타까운 절규를 푸념해 놓기도 한다......,(중략). 글을 쓰는 순간은 가장 고결한 순수성의 정체를 다시 여과하는 지순의 순간인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이 땐 혼자 생각 혼자 겨워 그리움이 물든 호수처럼 깊고 조용해 진다. 억겁의 함묵이 자꾸 쌓이고 생명의 문을 열어 주는 참과 믿음과 따스한 것의 귀의가 있다.

글 쓰는 작업은 자아 실현이다.

이 세상엔 적응하기 어려운 세상살이에서 스스로의 내면에 침잠한 여 불후의 예술을 창조한 사람들이 오죽 많았던가? 그 사람들은 외로웠다. 번민했다. 무엇인가를 이뤄 놓고 말겠다는 혼자만의 강직한 집념이 그들에겐 있었다......,(중략). 내가 쓰는 글이 역사의 기록에 너무 못 미치고 나의 숨결이 탈속된 仙風神雲은 어림없고 사람의 卑名까지는 못되어도 한 줄의 문구, 한 편의 수필 감으로 그 말미에 더러는 설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읽는 사람은 멋진 난초를 읽고 싶은데 쓰는 사람은 코스모스를 써놓았으니 글은 개성의 표상이던가? "나는 난초가 되련다. 혹은 모란이 되련다. 코스모스가 되련다."를 마음 가운데 두고 이 중에 우선 하나만 닮아 가려고 노력하며 수필을 쓰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수필 작법은 개성대로 이뤄진다고 믿는다. 나는 지금까지 蘭만 좇아 나섰지만 번번이 코스모스였다. 난이나 학을 더 좀 자세히 넘겨다 볼 일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