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다음 파이>에서
오는 저녁은 / 이문숙
휘휘 마른 가슴이다
[시인 관련기사]
2005년 8월 18일 (목) 19:42 한겨레 남루한 것들의 나지막한 목소리 허물어진 달처럼/가장()이 빠져 있는 식사, 저 찬으로 놓인/노각은 저 달 속에서도 아삭거리며/썩은 치아에 씹히고/구름의 그늘 속으로/천천히 들어갔다 나온다”(<여름밤>) “옛과 새,/구()와 신() 사이에는 철길이 있다/이 철길을 건너기 위해서는 건널목지기의 검문을 거쳐야만 한다/깃털 빠진 암탉, 병든 수캐/덜덜거리는 행상 트럭은 건너기도 전에 차단기가 내려진다”(<철길을 건너는 법>) 시인의 시선이 세상의 낮고 남루한 존재들에게로 가 닿는 것을 보라. 이문숙 시의 어조는 지극히 나지막하고 잔잔하여 좀체로 튀어오르는 법이 없다. 남들의 시선이 화려하고 떠들썩한 것들을 향하는 동안 그는 버려지고 잊혀진 것들을 안쓰러이 보듬는 것인데, 그의 좋은 시들은 그런 장면을 꾸밈없이 드러낼 때 생산된다.
“사윈 것들이 다 사윈 뒤에/다 된 저녁이 구부정 휜 허리로 그곳을 지난다/핏빛 노을의 끝이/저렇게 갑작스러워서 나는 거길 지날 때마다/마음이 긁힌다”(<소하천>) “작년에 신다 책상 아래 팽개쳐 뒀던 슬리퍼/먼지를 폭삭 뒤집어쓰고 까마득 버려져서도 슬리퍼는/여전히 슬리퍼다/기억이란 다 그런 것이다”(<슬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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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벌어지는 쌀집 괭이의 눈이다
초승달을 꺼내 집으로 가는 길을 덮는다
털퍽거리며 해진 신발을 끌고
오는 저녁은
버려진 빈 상자를 줍는 여자다
한 머리 가득 빈 상자를 이고 간다
그 여자의 검은 몸빼다
오는 저녁은
공사장에서 튀어오르는 불티다
초승달 곁에서 쪼그라든 별이다
축대 밑에 쌓여 웅성거리는 돌무데기다
침을 찌익 뱉으며
기름 배달을 가는 청년의 발밑으로
풀쩍 괭이가 뛰어오른다
이 놈의 괭이 이놈의 괭이 위협하며
초승달이 열어놓은
녹슨 철대문으로 사라지는
오는 저녁은
빈 상자를 가득 이고
가는 검은 몸빼다
경기도 금촌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천둥을 쪼개고 씨앗을 심다> 등
[한겨레] <천둥을 쪼개고 씨앗을 심다>(창비)는 시인 이문숙(47)씨가 등단 14년 만에 가까스로 펴낸 첫 시집이다. 여기서 ‘가까스로’란 말은 ‘어렵사리’로 바꿀 수도 있을 텐데, 어느 경우든 시인 쪽의 절차탁마와 심사숙고를 가리키는 말이지 혹시라도 무능과 태만의 증거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이런 주문은 사실 부질도 없는 것이, 시집을 읽어 보면 누구나 확인 가능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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