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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그의 감정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야망, 동성연애, 베를렌느에게 기대어 산 삶 -
이 모든 것이 둘이 살면서 느끼고 또 빼앗긴 그의 삶이란 걸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을 때는 거기에 그 자신이 이미 포로로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뿐 아니라, 그것들은 자신의 {영혼과 육체}속에 머물고 있는 그를 지배하는 주인으로 둔갑했음을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고백하듯이
밝히고 있다. |
꿈의
세계에서 평범한 농부의 세계로 진입한 19세의 나이에 [아디유]을 끝으로 붓을 놓게 된다. 이 이별은 시인 랭보와 꿈의 세계와의 이별이자, 물질
세계로 또 다른 환상의 신기루를 쫓아가는 전환점이었다.
지금껏
물질 세계, 부르주아와 관료주의의 부패를 누구보다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저주하던 그가 베를렌느와 별거를 선언한 그 해 말 파리 서클 쥬디크에서
만난 제르맹 누보와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1874년 3월 영국에 같이 가게 되며 곧 그와 헤어진 랭보는 그 때부터 새로운 방랑 길을
시작한다; 작품에 대한 방랑이 아닌 삶과의 전쟁,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그의 천성적인 방랑벽이 그를 독일-스위스-밀라노 등으로 이끌었고,
아프리카에 가보고 싶은 욕망으로 1876년 5월에 19일 네덜란드 해군에 지원 6월 10일에 배를 탔으나 몇 주일 후 탈영, 영국 상선을 타고
유럽 땅에 다시 돌아와 그해 12월 고향 샤를르빌에 도착하기도 한다. 고향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그의 방랑벽은 정체된 과거의 꿈과 새로운 물질
세계를 추구하는 현실적 자아 사이에 갈등과 번민을 오가는 것이었다.
"모든
기쁨과 영화보다 더 높은, 오 종려나무여 ! 다이아몬드여 !- 사랑, 힘이여 !- 어쨌든, 어디에나,- 악마, 신은 있고, - 이런 존재의
젊음이; 나다 !(...) 바다와 싫증나는 공기를 가로질러 상처투성이로; 살인적인 공기와 잔잔한 물결을 가로지르는 형벌로; 그들의 고요한 엄청난
파고 속에서 고문을 비웃으며, 떠돌아다니련다." ( 시 번뇌 중에서 )
불과
17세의 나이로 오토데스트뤽시옹(Autodestruction: 자기 파괴 작업)을 시작한 랭보.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은 부류에 속해 있었다고
생각한 랭보, 그러면서도 그 뿌리를 져 버리지 못하고 물을 떠난 물고기가 며칠을 살지 못하는 것처럼 항상 방랑 끝엔 고향인 샤를르빌이나 어머니의
고향인 로쉬에 되돌아와야 했던 랭보. 파괴와 타락으로 이어지는 자아와의 이별을 무수히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현하지 못한 채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란 베를렌느의 말처럼, 바람을 벗삼아 19세에 붓을 꺾고 37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방랑의 포로로 진흙길을 걸어야
했다.
무기상인이
된 랭보, 세상과 절교하다
브뤼셀,
로테르담, 지브롤터, 나폴리, 아덴(아라비아 남단), 키프러스, 이집트, 그리고 하라에서 바르디란 무역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하라와 아덴을 자주
왕래하던 랭보, 1885년부터는 본격적인 무기 밀매상으로 변신 퇴폐와 방탕으로 물질 세계에 흠뻑 젖어 들어가게 된다. 그러던 1891년 아덴까지
들것으로 실려 온 랭보는 오래 전부터 앓아 오던 매독 증세가 오른쪽 무릎에 종양 암으로 나타나면서 죽음에 적신호를 스스로 깨닫게 되고 그의
가족에게: "난 뼈만 남았다: 날 보면 놀라게 될 것이다 " 라고 3월 15일 편지를 쓴다. 5월 9일 배를 타고 아덴을 떠나 13일 만인
22일 마르세이유에 도착, 25일 오른쪽 다리 절단 수술을 받게 되고 절망과 슬픔에 잠긴 랭보는 절규를 하게 된다. "우리 인생은 불행이다,
끝없는 불행의 연속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존재하는 것일까?" 라고 6월 23일 피력한다.
그가
죽기 전까지 병원과 샤를르빌을 왕래하던 탕아, 신동, 저항 시인 혹은 방랑아라 불리던 시인 랭보는 11월 10일 원점으로 돌아와 카톨릭의
성체배령과 함께 37세란 극히 짧은 나이에 그의 신화를 뒤로한 채 숨을 거두었다고 독실한 신자이며 가끔은 거짓말을 잘하던 그의 여동생 이자벨은
주장했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 성채배령을 받았다는 이자벨의 주장이나 파리 이슬람 사원의 교구장, 체이크 시 함자 부바쾨르의 주장처럼 랭보는 임종 당시 회교도로
개종했다는 억측이나 혹은 루이 아라공이 주장한 랭보의 공산주의는 모두가 랭보의 단면만을 스케치해 논 오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죽기 전
성채배령을 받을 수 없었다 "많은 욕설을 퍼부었고", 그뿐만 아니라 "간호원이나 그의 여동생들에게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욕설을 했다." 주장이
어쨌든 그의 작품과 그가 이끈 그의 삶은 모든 종교에 대해 혐오감뿐만 아니라 반발감의 시위였다; 1865년 그의 첫 성채배령 이후 카톨릭을
경멸했고 베를렌느는 그의 " 저주스런 언어들 때문에...," 몇몇 시를 그의 시집에서 제거하기도 했다.
랭보에게
있어 크리스트는 "영원한 에너지 도둑"에 불과 했고 그의 회교도 개종설은 아프리카 남단에서 장사할 때 사용하던 가명 아브도 랭보(Abdoh
Rinbo), 즉 이슬람교에서 신을 섬기는 사람 아브달라 (Abdallah)의 추종자란 말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예수도, 알라도
마르크스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든 신화의 벽을 부수고 "브알라 ! 쎄 르 시에클 당페르!"(자! 지옥의 세기여!) 라고 외친 그에게서 어떤
신앙심을 찾는다는 것보다는 랭보가 끝없이 돌출구를 찾기 위해 신비 세계를 추종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비참한 죽음은 예견된
그의 탕아적 기질에서 비롯되었다고 베를렌느의 친구였던 에드몽 르펠르티에는 그의 삶을 이렇게 회상했다.
"랭보의
인생은 그의 리듬과 같이 격동적이었고, 기분 나쁜 날의 그의 생각처럼 부조리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현대인의 형상이었다. 난 그런 그를 알고
있었다. 그는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을 뿐만 아니라, 식탁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도 몰랐다. 그는 오랜 시간을 경멸스런 침묵으로 지내다가, 역설과
욕설을 퍼부어 댔다. 유머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인간이었다. 소심한 사람들은 그의 면전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시골
마을의 어린 셰익스피어 보다는 트로프만(그 당시에 악명 높던 죄수.)을 상기했다. 우리들은 그에 대한 점성술 결과를 바탕으로 그가 이십년 전에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진 않지만; 그러나 우리들은 그의 머리가 치욕의 바구니 속에 후광으로 장식된 영광과 함께 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1891년 11월 17일자 <레코 드 파리>에 기고한 에드몽 르펠르티에의 기사 내용 )
그러면
치욕과 영화의 후광을 한고 삶을 등진 랭보, 격동적 리듬과 부조리한 사고를 아무데서나 토해 내던 랭보,죽기 전 적어도 15년 전에 이미 붓을
팽개친 랭보, "오만이 잃어버린 자비보다 낫다" 라고 그의 시 {천재}에서 밝힌 랭보, 그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한 1871년에서의
1874년까지 약 3년간 지닌 그의 지고한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도덕관념은 그의 야망을 채우기엔 거추장스런 사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의
선생 이잠바르에게 보낸 서신에서 17세때 "모든 감각의 타락을 통해서 절대자에게 도달하겠다" 라고 이미 선포했던 랭보;- 탕아적이고 반항적인
천재의 기질, 예술인이 가진 끼를 누구보다도 밀도 있게 갖춘 시인이란 점을 감안 한다면 그가 지닌 천재적 오만은 보이는 세계,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통념적인 오만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인 세계에서 도덕과는 무관하게 누릴 수 있는 자유인으로서 오만일 것이다.
마지막으론 그의 뮤티즘(함구무언)에 있다; 17세에 자신의 운명을 결정 지은 랭보. 불과 3년여의 짧은 시간 속에 모든 것을 쏟아 버리고
침묵으로 답한 그의 행동은 그의 신화의 절정이 아닐 수 없다.
불과
37년의 삶을 악동, 천재 시인, 선지자, 탕아 그리고 무기 밀매자로서 수많은 상징을 낳은 랭보. 스스로를 "난 타인이다" 라고 외친 랭보,
거센 방랑벽, 베를렌느와의 사랑과 갈등, 알코올과 마약에 몰입, 감옥 그리고 그의 삶을 앗아간 매독(최근에는 그의 병이 매독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
"그녀를
다시 찾았다. 무얼 ?- 불멸. 그것은 태양과 함께 떠나 버린 바다다.
........................................... 수호 혼이여, 보잘것없는 밤, 그리고 불 바다를
이룬 대낮의, 고백 아래 사라집시다." ( 시 [불멸] 중에서 )
랭보는
불과 몇 년의 짧은 기간에 섬광 같은 문학을 완성한다. 그 후 아프리카와 중동의 여러 나라를 방랑하면서 상인으로 10년을 보낸다. 1891년에
37세의 나이로 병을 얻어 마르세유에서 사망한다. <취한 배>로 상징주의의 하늘에 혜성처럼 나타나 20세가 되기 전 문학과 완전히
절연한 천재 시인 랭보. 그가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랭보의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랭보 이후의 거의 모든 시인이 그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파블로 네루다, 뽈 엘뤼아르를 비롯해서 많은 시인들이 그의 자장권 내에 있는 시인들들이기
때문이다 |